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한반도 정세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해가 바뀌어 해방 2년차가 됐다. 1946년 신년, 김구선생을 중심으로 한 7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구체적인 반탁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하루 전까지 반탁에 동조했던 좌익들이 배반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1월2일 오후 2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아리송한 성명을 낸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들은 ‘신탁통치반대는 민족통일에 있지 무계획한 흥분적 투쟁으로서는 해결될 수없다’는 말로 시작하더니 끝내 속셈을 드러냈다. 이어 ‘조선을 싸고도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 분석해야한다“라면서 ”을사조약과 같다고 하여 철시파업은 시민의 생활을 질식시키는 행동이니 삼가고, 민주주의적 민족통일전선을
035. 서천 중고제의 맥脈을 짚으며- 중고제의 명창 김창룡- 충남 서천군 장항읍 성주새길 145 김창룡과 함께 종천 도만리 출신의 이동백도 한때 김정근으로부터 판소리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나란히 근대 5명창의 반열에 들어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 후배를 양성하였으며, 자가 가내의 법제인 중고제를 계승하여 온다. 그 중심지에는 언제나 서천이 위치한다. 중고제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서천은 경지지역과 전북지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온다. 따라서 서천에서 판소리의 명창이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 여길 수 없다. 그에 따른 왕성한 전파력에 편승하여 중고제가 충청권과 경기권을 영역으로 발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전승되는 판소리 소리제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서천의 중고제 판소리는 고제 판소리를 한 단계 위로 성장시킨 판소리라 할 수 있다. 2020년 2월 20일 목요일 오후. 중고제 판소리의 명창 김창룡이 출생하였다는 장항 황산을 향하여 달린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모아본다. 우리 전통 음악 중에서 왜 판소리만이 ‘소리’라고 불렀을까? 우리의 전통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해방된 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24일. 조선일보. 동아일보등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톱기사가 실렸다. 당시 미 국무성 극동국장인 빈 센트(John C. Vincent)가 앞서 10월20일 미국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빈 센트의 발언 요지는 ‘조선에는 우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외신을 타고 나온 뉴스를 국내 신문들이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이에 대해 국민당 중앙위원인 안재홍이 제일먼저 신탁통치반대의견을 냈다. ‘전 국민이 합심해서 우리 민족의 자주적으로 해결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외국인에게 보여줘야 한다. 해방의 은인이라해도 비우호적인 조치나 정치적 과오를 범할 때는 우리는 용감히 그것을 시정하도록 투쟁해야한다’ 이어 조선공산당에서도 10월25일 김삼룡(金三龍)명의로 성명이 나왔다. ‘신탁의 규정
034. 서천군 내의 석탑石塔을 찾아서 - 서천군내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석탑 탑은 본래 서 있던 자리 그대로를 지키며 폭풍을 이겨내고 눈보라를 굳건하게 서 있으나 잔혹한 일제는 그대로 두지 않은 흔적을 지금까지도 남겨두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 거래되는 골동품의 30퍼센트는 한국 유물이요,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는 6만6천여 점이나 된단다. 이는 곧 우리 민족문화재가 외침 세력에게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는 것이요, 또한 민족의 영광과 긍지와 정신이 약탈되고 파괴되고 유린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력이 피폐하다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잃게 되었던 통분스런 시기에 일제 범행자들에게 우리의 온갖 역사 문화재들이 당한 치욕의 사실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확인하고 정리하여 부끄러운 역사에 교훈을 담는 일을 절대적으로 감행해야 할 일이다. 2020년 4월 24일 금요일. 마서면 봉남리의 3층석탑을 찾아가다가 문득 서천군에는 석탑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서천군에는 5기(基)의 탑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에 비인면의 성북리 오층석탑은 보물 224호로 석탑 중 유일한 보물이요 군내 유일한 5층석탑이다. 나머지 4기는 모두 하나같이
[sbn뉴스=세종] 신수용 대기자 = 해방후 정치권은 어땠을까? 1945년 8월14일 라디오에서는 다음날(8월15일) 정오에 중대발표를 예고하고 있었다. 방송예고가 아니어도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말이 항간에 나돌았다.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도 나돌았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독립이 결정적임을 예견된 것이다. 역사적인 8월15일, 전국적으로 일제에게 수감되었던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일제히 옥문을 열고 나왔다. 갖은 학대와 수난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이 쇠사슬에 풀려났다. 민족해방을 예견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과 민세(民世)안재홍(安在鴻)은 건국동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여운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활동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1944년 8월 10일 서울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지방 조직에 이어 10월에는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 동맹, 1945년 3월에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북경과 연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해외 혁명단체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이어 1945년 8월14일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했다. 일본이 패망해 물러난 뒤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에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흰 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얼마나 그렸던 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 가 태극기깃발을....몇번을 울었던 가 타국(他國)살이를, 몇 번을 불렀던 가 고향노래를..’.하는 노래가 국민의 애환을 대변해줬다. ◇…손로원선생의 귀국선, 가슴벅찬 당시 풍경. 그 당시 손로원 선생이 노랫말을
033. 한낮의 월하성 달빛 - 충남 서천군 서면 월호리 월하성 마을 서서히 시장기를 느끼게 한다. 쌍도를 바라보며 이무기로부터 쫓겨나오다가 어깨 밑의 날개를 들켜 죽임을 당한 어린 장수의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 월하성에서는 월하성이 가지는 이름과 그에 어울리는 마음의 움직임 때문에 각박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이지적이고 이성적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웰빙을 위한 정서함양을 위하여 월하성 포구로부터 헤드랜드를 따라 띠섬과 연결하면서 옥녀봉을 최고의 전망을 겸한 관광지로 개발되는 꿈을 꾸어 본다. 태어날 때의 자연 그대로처럼 크게 외치면서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는 한낮의 월하성 달빛에 마음의 충동질을 만난다. 2020년 4월 24일 토요일 아침부터 바람이 분다. 거친 바람이다. 아무리 봄이라고는 하지만 왜 이리도 바람이 부는 것일까? 괜히 걱정이 된다. 들녘은 아직 텅 비어있으니 가을의 들녘이라면 더욱 크게 걱정스러웠으리라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바로 그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바람이 세게 불어 혹시라도 산애재(蒜艾齋)의 나무에 피해가 입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고마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겨레. 그러나 야속하게 완전한 독립의 길, 민족통일의 길은 멀었다. 그게 바로 이른바 3.8선이다. 지구의 북위를 따져 한반도 3.8선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었다. 그것이 민족의 아품이었고, 시련이었다. 3.8선이 생기리라고 예상을 한 당시 지도자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쪽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적극 반대했다. 한반도 허리를 두동강 낸 3.8선.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말못할 눈물과 헤아리지 못할 동족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의 선이었다. ◇ 8.15 직전 크리미아 반도 얄타에서 미.영.소 모여 회담. 3.8선이 그어지자 당시 언론들은 '3.8선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국산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곧 우리 민족이 자의
032. 금강하굿둑 관광단지를 찾아서 - 충남 서천군 마서면 장산로 855번길 56-2 어느덧 발걸음은 두 눈앞에 하늘 높이 치솟은 전망대 앞에 이른다. 4층으로 이루어진 전망대에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점점 넓어지는 시야 속에서 경탄을 쏟아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금강하굿둑의 완공으로 새롭게 탄생한 하굿둑관광단지가 그대로 펼쳐져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눈을 돌리면 금강하굿둑의 우람한 규모와 으리으리한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흘러나온다. 동쪽으로는 저 멀리 봄 햇살 반짝이는 금강의 물너울과 함께 어우러져 끝없이 펼쳐져 있는 서천의 들녘, 서쪽으로는 우리나라 근대산업화의 상징으로 표상된 장항 제련소의 굴뚝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서서 선뜻 눈앞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 하굿둑이 최초로 건설된 것은 1981년에 건설된 영산강 하굿둑이며, 두 번째로는 1987년 낙동강 하굿둑, 그리고 세 번째로는 바로 1990년 10월에 준공된 금강하굿둑이다. 이 금강하굿둑은 총 1천10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 연인원 40만 명과 12만 대의 중장비가 동원돼 지난 1983년 11월 첫 삽을 뜬 이래 8년의 공정을 거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총 길이 1,841m
4.15 총선과 함께 우리의 정치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 가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 일제의 사슬에 풀려나기까지 나라와 겨레의 명운은 풍전등화였다. 경술국치로 시자된 일본의 주권 찬탈과 온갖 압박의 역사였다. 항일독립운동이 1919년 3.1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상해를 비롯 미국,유럽등지에서 활발히 펼쳐졌고, 임시정부도 수립됐다. 하지만 폭력과 무도한 36년간의 만행앞에 민족의 시련은 상처와 고통이됐다. 하지만 조국을 찾기위한 항일독립운동의 선각자들,그리고 애국 선열들의 애국.애민의 헌신과 희생으로 민족혼을 불살랐던 시대였다. ◇카이로,포츠담선언에서 열강의 對日경고...조선독립으로 점화 1945년5월7일. 연합국의 총공세에 나치독일이 깃발을 내렸다. 이튿날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맞서 항전의 뜻을 표하자 미국은 5월15일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031. 서천 읍성(舒川邑城)을 찾다 - 충남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일원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조차 스치듯 지나버리면 캐고 따지고 밝히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오래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쉽사리 규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역사적 진실을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역사의 진실은 오늘날에까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 어디쯤에 은은하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이유로든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오늘의 시선으로 바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에게 미래를 제시받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만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여 문화의 근원을 이루어준다. 그러므로 문화는 역사가 맺어준 견실한 열매가 되는 것이요, 역사는 문화의 견고한 뿌리가 된다. 봄맞이가 한창인 요즈음에는 온 누리가 모두 꽃이다. 고개를 숙여 지상의 봄을 눈여겨보면 온통 별꽃 천지다. 아침이 지난밤의 어둠을 내몰 듯 별꽃은 지상에 남아 있는 추위부터 몰아내는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따뜻한 기운이 가득해지는구나 싶다 보면
030. 천방산千房山에서 서해를 부르다 - 서천군 시초면, 문산면, 판교면에 걸쳐 있는 산 아, 천방산! 서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 서천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 서천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천방산을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만큼 서천사람은 천방산을 꿈꾸고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한다. 멀리에서 바라보면 인자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의 모습, 품에 안기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가슴 같은 천방산은 언제 어디서나 서천사람들과 마음을 함께 한다. 비록 백제의 슬픈 패망의 전설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슬픔을 내면 깊숙이 감추어둔 삶으로 에너지화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거칠지 않는 푸근함에 누구든지 삶의 슬픔까지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로움을 터득한다. 천방산千房山은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에 걸쳐 산자락이 넓게 퍼진 큰 산으로 해발 324m 산이다. 그다지 높지 않고 산세도 험하지 않아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에 좋다. 천방산 바로 서쪽으로는 봉림산이 위치해 있으며, 그와 잇대어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를 병풍같이 둘러치고 서북과 동북쪽 방향으로 시원한 풍광을 펼쳐놓는다. 천방산은 산애재蒜艾齋 문밖으로 나서면 가슴 가득 안겨온다. 초등학교
029. 장항 옛 도선장을 찾아서 -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산로 여객선은 언제나 추억을 만들어 주곤 한다. 여객선 통학생은 물론이려니와 선남선녀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결실을 여객선이 또한 엮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장항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선남선녀가, 군산으로 건너가서 월명산 공원을 오르내리다가 은파호수공원(유원지)에도 산책하고, 극장에서 좋은 영화도 보고, 좋은 찻집에서 차 한 잔도 마시는 등 슬슬 시간을 끌면서 이곳저곳을 다닌다. 그러다가 그만 막배를 놓쳐버린 안타까운 행운(?)을 만난다. 끝내 막배를 놓쳐버린 그날 이후 사랑에 더욱 무르익어버린 남녀는 결국 한 가정을 이루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배를 놓쳐라―, “항구에서는 오늘도 푸른 파도가 이랑이랑 넘실거리고 있고, 푸른 파도 위에서는 흰 갈매기가 너훌너훌 날개를 치고 있고, 또 그 위에는 남빛 하늘이 훤칠하니 개어 있어 하늘과 바다 사이의 청청한 공간을 어선들은 아득한 수평선을 향하여 바다로 바다로 기운차게 달려 나가고 있다.” ― 정비석의 「항구풍경港口風景」의 한 구절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새롭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28. 득음(得音)길, 대바람 솔바람 소리 - 충남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 이동백의 소리길을 따라 시나대 숲은 한적하리만치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이따금 작은 바람이 스쳐 지날 때마다 추임새가 질펀하게 내려깔릴 듯하다. 지난 가을 내내 떨어진 낙엽이 푹신 쌓여있어 발걸음이 한결 부드럽다. 너름새가 분명하다. 강하고 맑은 계면조의 소리가 확실하다. 소리의 고저가 분명하고 명확히 구분하여 들려준다.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다가 끝을 다소 낮추어 끊어버린다. 판소리 중고제의 기교가 시나대숲에 살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소리가 시나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인가 했더니 그것이 아니요, 저만큼의 소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가 했더니 그 소리는 더욱 아니다. 소나무와 왕대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나대숲에서 갈무리되다가 절로 우려내지듯 들린다. 2020년 2월 20일 목요일 오후. 아직 벽면에 매달린 달력 위에는 겨울이 머물고 있지만 지상 위에는 완연한 봄맛이다. 입춘을 지나 이미 우수를 맞기는 맞았지만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경칩을 보름가량이나 남긴 터라 포근한 봄 날씨를 보인다는 것은 그다지 탐탁치만은 않다. 하기사 ‘우수(雨水)’라는 말이 ‘눈이 녹아서 비나 물
027. 한산(韓山) 건지산성(乾芝山城)에 오르다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곧바로 몇 계단에 이어서 성벽을 타고 앞으로 천천히 오른다. 성벽은 지금 한창 지표조사 중이다. 석성(石城)의 모습을 엿보여준다. 성벽 주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한편 꺾이고 토막 난 채로 썩어 뒹굴고 있다. 노송 몇몇은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의연한 부답(不答)으로 묵상 중일뿐 아무런 몸짓을 드러내지 않는다. 흘러간 세월 동안 보고 듣고 느껴온 바를 아무리 몸을 흔들어 보여준다 하더라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각은 곧 무념무상(無念無想) 함 일 뿐이다. 역사는 그렇게 유유한 흐름 속에서 성벽으로 견고하게 쌓여있는 거대한 돌처럼, 돌 틈에 파고들어 있는 듯 없는 듯 바짝 스며든 흙 한 줌처럼 무언(無言)으로 기록된 자취만으로 남겨진다. 2020년 2월 23일 일요일, 한산 건지산성(乾芝山)을 찾기로 한다. 이미 품속에 안겨있는 듯한 봄기운은 화창하기 이를 데 없어 온몸은 철철 온기로 넘친다. 천천히 봄을 만끽하면서 시초로를 벗어나 시초남로에 이어 화산로를 거쳐 삼일로에 든다. 부엉바위를 곁에 끼고 부드러운 바람에 출렁이는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