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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서천군 내의 석탑石塔을 찾아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34편


034. 서천군 내의 석탑石塔을 찾아서 - 서천군내 소재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석탑

탑은 본래 서 있던 자리 그대로를 지키며 폭풍을 이겨내고 눈보라를 굳건하게 서 있으나 잔혹한 일제는 그대로 두지 않은 흔적을 지금까지도 남겨두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 거래되는 골동품의 30퍼센트는 한국 유물이요,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는 6만6천여 점이나 된단다.

이는 곧 우리 민족문화재가 외침 세력에게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는 것이요, 또한 민족의 영광과 긍지와 정신이 약탈되고 파괴되고 유린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력이 피폐하다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잃게 되었던 통분스런 시기에 일제 범행자들에게 우리의 온갖 역사 문화재들이 당한 치욕의 사실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확인하고 정리하여 부끄러운 역사에 교훈을 담는 일을 절대적으로 감행해야 할 일이다.


2020년 4월 24일 금요일.

마서면 봉남리의 3층석탑을 찾아가다가 문득 서천군에는 석탑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서천군에는 5기(基)의 탑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에 비인면의 성북리 오층석탑은 보물 224호로 석탑 중 유일한 보물이요 군내 유일한 5층석탑이다.

나머지 4기는 모두 하나같이 3층석탑으로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이다. 지정된 날짜 또한 1984년 5월 17일로 모두 같으며, 인정 번호가 128호부터 131호로 일련번호로 매겨져 있다.

그렇다면 탑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가?

탑은 범어 ⓢstūpa(스투파)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 한자로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스투파는 본디 부처의 ‘유골(舍利)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라는 뜻이므로 방분(方墳) · 원총(圓塚) · 고현처(高顯處)라고 번역한다.

원래는 유골을 안치한 것을 탑이라 하고,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支提, ⓢcaitya)라고 했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 한다. 이 탑은 붓다의 입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는 부처의 유골이 들어 있지 않아도 특별한 장소를 나타내거나 또는 부처의 덕을 추모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도 탑이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탑은 일반적으로 부처 승려의 시신의 일부 또는 유품 등을 묻어두는 돌로 만든 무덤이기도 하지만, 돌로 여러 층을 쌓아 기념적 의의를 나타내는 집 모양의 건축물로 세워지기도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탑처럼 높게 세운 건조물도 아울러 탑이라 부르고 있지 아니한가. 이를테면 기념탑 · 시계탑 · 전파탑 · 광고탑 등이 그것이다.

서양의 유명한 탑으로는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영국 국회 의사당의 시계탑, 쌍탑 가운데로 배가 지나갈 수 있게 만든 영국의 타워 브리지, 프랑스의 에펠탑 등을 들 수 있다.


불교에서 붓다는 한자로는 ‘불타佛陀’ 또는 줄여서 ‘불佛’이라고 한다.

부처는 BC 6세기경 인도의 카필라국에서 태어나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뒤 6년의 수행을 거쳐 일체의 번뇌를 끊고 무상無上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교화했던 석가모니를 존경하여 부르는 말이다.

이 붓다가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아래서 입멸한다. 시신은 다비(茶毘:화장)했고,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된다.

이 부족들은 인도 전역에 각각 탑(塔)을 만들어 그곳에 유골을 안치했는데, 이를 근본8탑(根本八塔)이라 한다.

유골을 분배 받지 못한 부족은 유골을 담았던 병을 가지고 가서 병탑(甁塔)을 세웠고, 어떤 부족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灰塔)을 세운다.

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돌로 만든 석탑(石塔)으로 분류하는데, 중국은 주로 전탑을 많이 건립했고, 한반도에서는 석탑, 일본은 목탑을 많이 건립되어 온다.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약 2백 년간 목탑이 건립되어 오다가 백제 말에 이르러 처음으로 석탑이 건립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한반도 최초의 석탑인데, 모양은 목탑 양식이다.

구조물의 표현을 간소화시키면서 석탑의 양식, 즉 기단부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주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이 정림사지 5층석탑을 본받아 건립된 석탑이 서천 성북리5층석탑(본보 2019.10.17.일자 6,7면 참고)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천에 세워진 4기의 탑 중 2기는 불교적인 의미에서 사찰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며. 다른 2기는 지방의 호족이 나라와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전해온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제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발 닿는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가는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만 떨구면 세상은 아무 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 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 전문

10원짜리 동전에는 다보탑이 새겨져 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흔히 있을 수 있지만 아무나 허리를 굽혀 가볍게 주우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10원짜리 동전은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탑을 줍는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을 떠올리고, 영취산 거룩한 성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든다. 진리와 득도의 순간을 얻는다. 내 안에서 얻는다.

그렇게 깨달음이란 어떤 성지라든가 사찰이라든가 들을 수 있는 설법이 아니라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생각에 따라 발견될 수가 있다.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10원짜리 동전을 줍는 순간 득도의 길에 들어선 부처가 된다. 탑은 그렇게 일상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우리에게 영혼의 정화(淨化)와 함께 새로운 삶의 길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 기원의 힘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산면 지현리 산2-1에 있는 지현리3층석탑(芝峴里三層石塔)은 고려시대 탑으로 충청남도문화재자료 128호이다. 2019년  6월 19일과 2020년 2월 23일 두 차례 걸쳐 살핀다.

그때마다 안내문에서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면에 새긴 기록에 고려 성종 10년(991) 한산지방의 호족(豪族)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는데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부처나 승려의 시신 일부 또는 유품 등을 묻어두는 탑이 아닌 것이다.

중국 남쪽에 사는 털이 곧고 질 좋은 짐승을 뜻하는 호(豪)와 친족 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로, 지방에 있는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 집단을 가리키는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을 말한다.

통일 신라 말에는 지배층의 권력 다툼과 농민들의 봉기 등으로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각 지방에서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바탕을 둔 호족이 등장한다.


신라가 약해짐으로써 호족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어지자 각 지방의 호족들은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였거니와 자신만의 군대를 키우는데 노력하여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바로 이때의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탑이 세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현리 삼층 석탑은 지붕돌인 옥개석 3매와 탑신석 4매로 구성된 석탑으로 탑신석의 수로 보아 원래 5층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남이 있는 석탑의 높이는 205cm이며, 지대석 위에 탑신석과 옥개석이 있는데, 탑의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게 만들어져 있다.

옥개석의 모서리에는 풍탁(風鐸. 風磬)을 달았던 풍탁공(風鐸孔)이 뚫려있다. 1층 탑신에 새겨진 총 8행 66자 명문에는 고려 성종 10년(991) 한산 지방의 호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고 적혀있다는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2020년 4월 3일 문산면 수암리 23에 있는 수암리3층석탑(水岩里三層石塔)을 찾는다. 문화재자료 129호로 조선시대 작품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 전체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몸돌(塔身)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치켜 올라갔고, 밑면에는 3단의 층을 둔 받침을 두고 있으며 둘레에 빗물이 흐르는 홈이 둘려져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연꽃무늬를 두른 복발(覆鉢:엎어 놓은 그릇 모양)을 올린 머리장식이 보이는 등 완전하게 갖추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신 1층에는 조각이 되어 있다고 하나 알아볼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후기 이 지방을 관할하던 한 좌수(座首)가 매년 풍년을 기원하고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하니, 본래 탑이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하기 위해 세운 건조물로 고려시대까지는 예배의 대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후에 예배의 대상이 금당(金堂)으로 옮겨가면서는 절의 상징적인 시설물이 되었음을 잘 증명해해주고 있다 하겠다.

2020년 4월 24일에 찾은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 산58-3 소재의 봉남리3층석탑(峰南里三層石塔)은 문화재자료 130호이다.

충남도청 홈페이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라 짐작된다고 하였으나 안내판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基壇)과 탑신(塔身)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에는 문 모양과 문고리를 조각해 두었다고 하나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지붕돌(屋蓋石) 역시 3매가 남아 있으며, 4단의 받침이 표현되어 있다. 1층 탑신에는 사리 장치를 모셨다는 표시로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나 이것마저도 어둔한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전해오는 말에는 탑의 뒤편에 사찰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단다. 탑 속에서 발견된 귀금속은 일제시대 때 왜군이 훔쳐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니 식민지 시대의 문화재 유출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듯하다.

당시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얼마나 약탈해가고, 그 치욕적인 일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일제가 훔쳐 일본 쓰시마섬(對馬島)도요타마무라오츠나(豊玉村小網)의 관음사에 소장되었다가 되돌아온(일본 쓰시마에서 도난당한 뒤 국내에 밀반입되었다고 말하는) 높이 50.5㎝인 고려불상 ‘금동보살좌상’을 보더라도 고려시대(1330년) 충남 서선 부석사에서 조성된 ‘불교성보’로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임이 밝혀져 절대 반환할 수 없음에도 계속하여 반환하라는 일본의 간악한 속셈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복장품 조사를 통해 1330년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부석사에서 현세에 재난을 없애고 복을 누리며 내세에 아미타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30여 명의 발원에 의해 주존불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진 이  소중한 문화재는 우리의 손으로 보존되어야 마땅한 일이며, 다른 약탈 문화재도 반드시 반환받아야 할 것이다.

2019년 12월 19일, 종천면 지석리 26에 있는 지석리3층석탑(支石里三層石塔)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문화재 자료 131호이다.

이 탑에도 일제의 만행이 그대로 깃들어 있어 문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준다. 이 탑은 마을 뒷산인 희리산(希夷山) 절터에 있었던 탑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가져가려고 이곳 지석리 마을에까지 운반했다가 마을 사람들의 완강한 저지로 지금의 자리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탑의 모양을 살펴보니 바닥돌 위에 1층 기단(基壇)을 세우고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3개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고,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둔 모습이 보인다.

탑신의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어 지붕돌보다도 높이가 낮아진 모습이다. 특히 지붕돌의 모서리에는 풍경을 매달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음이 눈에 띈다.

기단에 새긴 3개의 안상조각이나 간략해진 탑의 구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로 보여준다.


A.단테는 그의 《신곡神曲》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견고한 탑처럼 우뚝 서라”고 말한다.

탑은 본래 서 있던 자리 그대로를 지키며 폭풍을 이겨내고 눈보라를 굳건하게 서 있으나 잔혹한 일제는 그대로 두지 않은 흔적을 지금까지도 남겨두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 거래되는 골동품의 30퍼센트는 한국 유물이요,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는 6만6천여 점이나 된단다.

이는 곧 우리 민족문화재가 외침 세력에게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는 것이요, 또한 민족의 영광과 긍지와 정신이 약탈되고 파괴되고 유린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력이 피폐하다가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잃게 되었던 통분스런 시기에 일제 범행자들에게 우리의 온갖 역사 문화재들이 당한 치욕의 사실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확인하고 정리하여 부끄러운 역사에 교훈을 담는 일을 절대적으로 감행해야 할 일이다.

- 이 글은 SNS와 충청남도와 서천군의 홈페이지, 그리고 각 탑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탑 앞에서
         구재기

당신 앞에 서면
눈보라에 흔들리지 않고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당신 앞에 서면
난 어떻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돌부처가 되고 맙니다
전혀 움직일 줄 모르는, 그래서  
무심히 지켜보기만 한다는 
길 아래 돌부처처럼 말입니다
어쩌다 돌아서기도 하지만
그저 돌아선 것도 아닙니다
바라보는 것도 아닌, 대숲에 대바람일 듯
슈아아슈아 목매어 흐느끼다가 
눈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것도 
죄다 잃어버린 채
내 본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란
지성이라든가 현명함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한 곳에 오래오래 서서
눈보라를 견디어온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때때로 꿈꾸다가
꿈속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 
온 힘을 다해 발버둥하다 깨어보면
깨어나고 보면, 따뜻한 이불 속
비로소 극락의 문 앞에 서서 
으스스 떨려오는 환희에 취하곤 하였지요
꿈속의 것이 현실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경우였지요
당신 앞에 서면, 
당신 앞에서 돌아서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지금, 살아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연습을 
다시 한 번이래도 해보는 것입니다 

*길 아래 돌부처: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아는 척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심히 지켜보기만 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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