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서면에 있는 한국중부발전 신서천화력발전소 본관 5층 보일러실 배관에서 밸브가 폭발해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화상 등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게다가 장항국가산업단지 내 있는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 공사 현장에서도 2명이 도장작업 중 쓰러져 병원 후송 후 치료받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해 기업의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과 소방 당국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39분경 일상점검 중 보일러실 배관 밸브가 터지면서 1명이 사망했으며, 3명은 중상을 입는 등 총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경찰과 소방 및 고용노동부 보령지청 근로감독관 등이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한편 보일러 밸브의 압력을 낮추고 수증기를 빼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에 나섰다. 경찰·소방 당국·노동 당국은 발전소를 대상으로 자세한 사고 경위와 안전 조처 위반 여부,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각각 조사할 예정이다. 또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한 즉시 현장에 도착한 근로감독관은 사고 내용 확인 후 근로자 안전 확보를 위해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또는 공사금액 50억 원 이상인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 사고가 발생할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한 경우 ▲동일한 유해 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한 경우 등이 적용된다. 또한, 이날 오전 9시 24분경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도 도장 작업 중이던 2명의 근로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소방 당국은 사고 현장인 선진뷰티사이언스 신축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에폭시 도장 작업을 하던 중 질식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다. 이번 사고는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에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역의 한 시민단체는 “준공 2년밖에 안 된 신서천화력발전소의 설비에서 발생한 만큼 안전사고에 대한 대처가 부실했던 것 아니냐”라며 “뷰티사이언스 공장 역시 지난해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중 오작동으로 근로자 1명이 오른팔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입주 이래 잦은 사고 발생은 안전불감증에서 나온 결과”라고 지적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지금 우리 사회에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충남 서처군 화양면에 거주하는 정규호(74) 씨가 sbn뉴스와 인터뷰 자리에서 첫 번째로 전한 이야기다. 서천군청 홈페이지 ‘칭찬합시다’에 지난 5년간 총 27회의 글을 올린 그는 남을 칭찬해야 나 자신 역시 칭찬받을 수 있는 등 서로 칭찬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난 2018년 1월 ‘컴퓨터 기초 제대로 배워 실력 다지기 윈도우7 강사님을 칭찬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첫 ‘칭찬합시다’의 글을 올린 그는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칭찬했다. 현재 그의 ‘칭찬합시다’ 글의 조회 수는 무려 4,000여 개 넘었고 이와 비슷한 조회 수를 기록한 글은 같은 해 2월에 올린 ‘서천교육청 소속 기관 서천도서관의 컴퓨터 교육 강사를 칭찬합니다’의 글이다. 부인과의 결혼이 펜팔로 이뤄졌다고 하는 그는 문헌서원에서 시를 쓰며 남은 삶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겠다고 전했다. ‘칭찬합시다’에 올린 글 중 가장 기억이 남는 글에 대해 그는 지난해 6월 ‘서천소방서 전종원 소방관 칭찬합니다’라는 글이라며 지방 일간지에도 보도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글을 통해 ‘제32회 한산모시문화제 행사장 서천소방서에서 어린이 화재 예방 캠페인 차 안에 설치된 동영상 보고 싶어 소방관에게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라고 전했다. 이날 그는 아파트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되고 반드시 계단을 통해 피신하는 방법과 심폐소생술, 소화기를 직접 분사 등의 체험 학습으로 용기를 갖고 자신 있게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그의 신념은 고스란히 아들 정강진 박사(건양대학교 의과대학원)에게 전달돼 암세포 기전을 규명하는 논문 발표로 제10차 대한암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우수논문상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서천군청 홍보지에 예전에 있었던 ‘칭찬합시다’라는 보도 창을 만들어 지역 내 많은 군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면 더욱 아름다운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건의했다. 또 착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멸시하고 짓밟는 대신 그들을 격려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5년 대통령 훈장을 받고 퇴직한 공무원으로 현재 배움터지킴이를 하는 그는 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소개했다. 그는 미국의 소설가 마거릿 미첼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를 소개하며 이 책은 우리가 결코 잊지 못하는 것 중 하나라고 꼭 읽어 보기를 권했다.
충남 서천지역 내 산업현장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 최근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입주기업인 선진뷰티 사이언스 공사 현장 지하에서 에폭시 도장작업 중 작업 인부 2명이 가스에 질식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이 회사에서는 지난해에도 공장 2층 분쇄 작업실에서 분쇄·혼합기 청소작업 도중 갑작스러운 혼합기 오작동으로 생산직원 1명의 오른팔이 절단되는 인사사고가 발생했었다. 이 회사는 화장품 원료 제조회사로 2019년 6월 장항국가산업단지에 스마트팩토리 제조시설을 갖춘 신공장을 준공하여 입주한 이래 매년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발생해 지역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같은 날 서면 마량리 소재 신서천화력 발전본부 5층 보일러실에서는 배관 파손으로 누출된 증기로 인해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산업재해 발생 때 산업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에 따라 책임자를 처벌해 왔다. 하지만, 산업과 건설 현장에서 지속해서 안전사고에 따른 사망사고가 잇따르면서 정부는 2022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여, 1명 이상의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중대 재해의 경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강력한 법 규정을 마련했다. 이 법이 시행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산업현장에서의 재해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명 이상의 사망사고 발생 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영주 등 책임자를 형사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산업현장에서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하다. 법률 시행 후 이 법 위반 제1호는 2022년 5월 연세 나을 암 요양병원 증축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관련하여 대표이사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현장소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제2호는 2023년 3월 한국제강 방열판 보수작업 중에 발생한 사망사고로 대표이사가 징역 1년의 실형을, 하청 업체 대표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번 신서천화력 발전본부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사고도 근로자 사망사고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엄정한 수사와 함께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의 혐의 사실이 입증되면 대표이사를 포함한 경영주와 관리책임자 모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산업안전 예방조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중해도 항상 모자란다. 또한, 산업현장에서 사업장의 특성에 따른 유해·위험 요인을 확인하여 개선하고, 안전보건관리책임자, 관리감독자, 안전보건 총괄책임자 등을 선임하여 산업현장에 상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책임은 전적으로 경영주에게 있다. 선진 뷰티 사이언스 공장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도, 비록 근로자가 사망에는 이르지 않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매년 지속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주의 대오각성이 촉구된다. 특히 공사 현장에서 불법 하도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경우, 안전 관리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원천적으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우리 서천의 수산업 분야 노동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계절근로자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안전 관리 감독에도 철저히 해야 한다. 지리적 특성으로 대륙 국가인 몽골 출신 계절근로자를 낯선 바다로 내보내 김 양식장 등에서 노동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안전사고 예방 교육 및 안전관리자 상근 등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지방정부의 노력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안전불감증은 늘 예기치 못한 재해를 불러온다고 하지만, 안전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은 산업재해를 불러오는 신호수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안전사고는 사고 발생 후 살펴보면 예견되어 있었고, 안전불감증은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우리도 산업현장에서 안전보건과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주의를 우선시해야 한다. 순간의 방심이 대형 사고를 유발한다. 우선 산업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안전관리를 위하여 방심은 금물이라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경영주 또한 안전보건을 위한 사전점검과 산업환경 개선 및 관리·감독을 강화하여 산업안전 재해로부터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경영철학에 담아야 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내 부족한 인력공급을 위해 투입된 외국 근로자들의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 해결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몽골 근로자들의 4대 사회보험 가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병으로 인한 병원 치료가 무방비 상태로 놓이는 등 외국 근로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군에 따르면 몽골 옥탈채담군에서 1차 입국한 계절근로자 122명이 지난 7월 29일 서천군에 도착,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지역 내 19개 멸치 가공공장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일부 멸치 가공공장에 마련된 몽골 근로자의 근로 고충 등 인권 문제가 발생하고 숙식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지난 9일 한 멸치 가공공장에서 식사 중이던 한 몽골 계절근로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져 원광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뇌출혈’ 증세로 치료 중이다. 평소 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이 근로자의 치료비는 약 5~600만 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다. 이는 이 근로자가 4대 사회보험에서 산업재해보험만이 가입돼 국민건강보험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수백만 원에 달하는 진료비는 현재 치료받는 몽골 근로자가 부담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에 몽골 근로자에 대한 인권 존중과 고용주의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거기에 몽골 계절근로자의 숙식 등 근로환경이 열악하다는 지적이 나와 김 양식장에 투입될 200여 명의 계절근로자 입국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 군민은 “그동안 김기웅 군수의 몽골 방문과 협약 등의 업적 홍보에만 열을 올렸던 민간관계자들도 이들 계절근로자의 근로환경과 인권에는 무관심해 왔다”라며 “근로 현장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1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고충을 해소할 통역사가 1명이라 점도 문제다. 서면 지역 한 군민은 “한국어에 능통한 몽골 유학생 출신 통역사 1명이 몽골 근로자 122명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느냐”라며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관한 서천군의 행정이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현재 치료 중인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치료비는 지역의 복지단체를 통해 해결 책을 마련하고 있다”라며 “몽골 계절근로자에 대한 근로환경 및 인권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모색해 서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관리 감독에 나서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는 10월 김 양식 어가에 투입될 200여 명의 몽골 근로자의 숙소 환경 및 음식 문제 해결, 인권유린 등을 위한 방안 등을 마련하는 서천군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잃기 전에는 가지고 있던 게 뭔지 모른다.’ 즉, 우리의 옛말 중에도 구관이 명관(名官)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정치지도자 클레망소도 이를 이처럼 말했다. ‘나쁜 정치인 X을 바꾸려고, 새로 뽑았더니 그보다 더 나쁜 정치인 X이 뽑히더라’ 지난 20대 국회에 진저리가 나, 이를 바꾸자며 치른 게 지난 2020년 4.15 제21대 총선이다. 무려 55% 이상의 초선, 새 얼굴로 바뀌어 정치 문화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초선의 구태정치 청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21대 국회 개회부터 초선의원들이 싸움닭이 되어 분탕질과 온갖 편 가르기에 떼쓰기, 보이콧으로 얼룩지게 했다. 터지는 사건마다 들춰보면 국회의원이 개입되지 않은 곳이 없고, 이권과 유착된 금배지들이 수두룩하게 연루되어있다. 상임위원회 회의장에서 코인 투자를 하지 않나, 자신의 사무실 여성 보좌관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나, 지방 선거때 공천헌금을 받지 않나, 특정사안에 후원을 가장해 금품을 받고 검찰 수사를 받지 않나, 거짓 루머를 제보로 포장해 해당 장관에게 의혹을 제기하지 않나. 이는 이전 20대 국회보다도 더 저질이다. 심지어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공수가 교대되면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곳곳에 벌어진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사업을 밀어붙이던 의원들이, 야당이 된 날부터는 안된다고 싹 돌아섰다. 또 안 된다고 하던 국민의힘 역시, 여당이 되고 보니 더불어민주당이 외치던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자신이 검사일 때 검사 수사권 강화가 먼저라고 외쳐대던 국회의원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총대를 멘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금배지들이 ‘카메라 앞에 힘을 주는’ 말장난의 모습들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런 21대의 정치혐오와 정치증오를 거둬낼 내년 4.10 제22대 총선이 오는 9일이면 7개월 앞으로 다가와정치인들은 분주해졌다. 책을 내고, 조직을 갖추고. 총선 출마 예상자는 지인들에게 후원금을 약속하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다. 특정 광역단체장의 이름을 팔고 다니면서, ‘광역단체장이 자신을 밀고 있다’라는 소문이 파다해 선관위가 내사 중인 곳도 있다. 내년 총선 자료를 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지역 28개 선거구에 예상되는 인물은 100여 명 안팎이지만, 국회의원 감이 없다. 지금의 제21대 현역 국회의원보다 인물이 출중하거나 자질이 빼어난 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진보를 자처하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또 시대가 바뀌니 보수집회에 나선 이도 여럿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10 총선에 적용할 선거제 개정과 관련,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만지작거린다. 사표 방지와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쉬워지라는 기존의 준연동형제를 병립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그들은 지난 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준연동형제 취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 놓고 기득권 사수를 위해 정치적 퇴행의 길을 가려는 모습이 불쌍해 보인다. 그들은 최근 물밑 협상에서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았다. 권역은 크게 수도권과 중부권, 남부권으로 나누기로 했다. 충청권은 중부권이다. 그러나 비례제 의석수 배분 방식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2020년 총선에서 여야는 정당 득표율과 지역구 의석을 연동하는 대신 초과 의석 문제를 방지하는 준연동형제로 공직선거법을 바꿨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기 때문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이 쉬워진다. 양당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보다 최소한의 제도적 보완 장치였다. 그렇지만 양당은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로 애초의 취지를 퇴색시켰다. 양당을 그래 놓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별도로 계산하는 병립형으로 검토 중인 것이다. 이는 야합이다. 내 손으로 우리를 대변할 금배지를 뽑는 지금의 제도적 장치가 먼저다. 여야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밀어붙이는 것은 꼼수다. 꼼수정치에는 감이 안되는 금배지들이 나와 기대되는 정치개혁은 물 건너간다.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 오래인 국회, 7개월 남은 총선은 서글픈 현실이다.
[sbn뉴스=서천] 이석규 기자 = 충남 서천지역 시가지 주요 도로변에 흉물로 변한 ‘생활정보지 배부함’에 대한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부 군민이 배부함에 생활 쓰레기 등을 버리고 있는 데다가 일부 정보지 배부업체 역시 이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고 도로변에 방치하는 등으로 군민의 불만을 사고 있다.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서천·장항읍 시가지 도로변의 40여 개의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곳곳이 녹이 슬어 흉물로 변한 지 오래인 데다 인도에 버젓이 설치돼 보행자들의 통행 불편을 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일부 ‘생활정보지 배부함’ 속에는 각종 쓰레기와 오물들로 가득 차 있고 일부 노후 배부함은 이리저리로 나뒹굴고 있어 도시미관까지 해치고 있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생활정보지가 생겨나면서 시가지 도로변 거리 곳곳에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마련됐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군에 따르면 거리나 도로 곳곳에 제멋대로 놓여 있는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도로법 제38조에 따라 무단 도로점용에 해당하는 불법 설치물이다. 이에 인도를 점거해 보행자 통행에 불편을 주는 ‘생활정보지 배부함’ 등에 대한 단속 및 정비작업을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천읍에 거주하는 한 제보자는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도로점용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도로변 등에 설치된 일부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버려진 음식물쓰레기 등으로 파리 등 해충이 들끓고 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무질서한 도시로 오인하게 만든다”라고 비판했다. 또 한 제보자는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곳곳이 녹이 슬고 찌그러지는 등 흉물로 변한 지 오래고 정보지 넣는 곳까지 서로 뒤엉켜 있어 흉물로 취급받고 있다”라며 “일부 배부함은 오랜 시간 먼지가 쌓여 있는 등으로 산뜻한 거리환경을 해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렇듯 수년간 사용이나 관리도 하지 않은 채 흉물스럽게 시가지 주요 인도상에 방치돼 통행에 방해가 되고, 쓰레기 수거함으로 전락한 ‘생활정보지 배부함’에 대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지역 내 설치된 ‘생활정보지 배부함’은 지역 내 몇 개가 설치되어 있는지 실태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사유재산이라 행정기관에서 마음대로 처리하기도 곤란하다”라면서 “하지만, 지속적인 민원 제기를 해소하기 위해 행정대집행을 통해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도시경관을 해치고 있는 배부함을 조속히 정비하는 등 쾌적한 주거환경 조성에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도로변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趙貞喆)의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자 세운 비석이다. 조정철의 거사비가 세워진 내력과 그는 어떠한 인물이며, 조정철은 정조 암살미수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기간 조정철을 위해 목숨과 바꾼 홍윤애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 서천읍 신송리(장마루) 버스 정류장 옆에 충청도관찰사 조정철 거사비(忠淸道觀察使 趙貞喆 去思碑)가 서 있다. 순조 15년(1815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우리 고장 서천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세웠다. 거사비를 세우게 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 순조 13년(1813년)에 조정철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던 해로 전국적으로 대기근으로 백성이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 호서지방에 1만 석으로 진휼한 것을 보면 구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관찰사 조정철(趙貞喆:1751-1831)은 본관은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서천읍 구암리에 안장된 우의정을 지내고 영조를 왕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조태채(1660-1722 :二憂堂 趙泰采)의 증손자다. 정조 1년(1777)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남인을 등용하여 개혁을 내세우자 노론의 세력은 불안을 느끼고 정조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조정철도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 생활하게 된다. 유배지에서 홍윤애를 만나 사랑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한 홍윤애는 죽음으로 조정철를 지켰다. 유배하는 동안 조정철(趙貞喆)이 역모의 대역죄를 짓고 제주도에 유배 생활 하는 동안 제주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조 암살미수 사건의 배경 제주도는 절해고도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고려, 조선시대에는 대역죄인의 정치적 수용소인 유배지였다. 제주도에 유배당하면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많은 유배자 중에 조정철만큼 오랜 기간 고초를 겪으면서 유배 생활을 한 사람 없다. 무려 27년간의 유배였다. 정조 1년(1777)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었다. 조정철은 그때 27세의 장래가 촉망되던 준수한 청년 선비로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영순(趙榮順),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조겸빈(趙謙彬), 증조할아버지는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으로 유명한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였으니, 당시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장인(丈人)은 노론 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洪趾海)였다. 온갖 행운은 그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길은 그를 향하여 뻗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모 사건이 들통나고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목숨을 노리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모반의 죄는 어떤 왕조에서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2. 역모 사건의 대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단행 조선왕조는 역적에게는 부계(父系)는 물론 모계(母系)인 외가(外家)와 처계(妻系)까지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있었다. 중죄 중의 중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죄가 반역죄였다. 달리 일컬어 대역죄라 했다. 조정철(趙貞喆)은 장인 홍지해(洪趾海)의 정조 시해 미수 사건으로 연루되어 반역자로서 죽음을 면치 못하였지만, 조정철은 증조부 조태채(趙泰采)는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공신을 참작해 생명을 부지한 채 제주도 유배 생활에 처했고, 그 후 조정철의 부인 홍씨는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3. 제주도 유배지에서 홍윤애의 만남 명문의 거족 27세인 조정철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심성이 좋은 김윤재(金潤才)의 집에 거처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죄인이 유배 생활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洪允愛)를 만나게 된다. 제주의 돌담은 낮다. 목만 돌리면 집 마당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은 까닭에 이웃 간에는 숨길 것도 없고 서로의 사정도 저절로 알게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가장인 집에서 언니와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살아가는 홍윤애(洪允愛)에게 서울에서 귀양 온 유배객 조정철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변소를 출입하기 위해 마당에 나온 그의 파리한 얼굴과 마주치거나 여윈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 한편이 저미도록 동정심이 갔다. 밥값을 한 푼도 못 낸 지 이미 오래고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자기가 그분을 돌보아드리겠다고 자청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홍윤애가 조정철을 위하여 마련하는 밥상은 소박하고도 조촐했다. 또한 그의 의복, 의복이래야 죄인에게 허락된 것은 흰 무명저고리바지가 고작이었으나 정성껏 지어 입혔다. 4. 집필묵과 도서 구입의 경제적 도움 조정철은 시인(詩人)이었다. 서책(書冊)은 그에게 스승이며 벗이며 정신의 버팀목이기도 하였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짓는 일은 그에겐 육신의 양식인 밥보다도 더 소중한 영혼의 양식이었다.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 기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글에 대한 갈증이었다. 어느 날, 조정철이 손가락에 물을 찍어가며 벽에 시를 쓰는 것을 목격한 홍윤애는 그만 왈칵 눈물이 솟구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날로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마련해 주고 간, 시집갈 때 쓰라는 비단 옷감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 돈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섬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인 먹이며 붓, 종이는 물론 서책도 육지를 오가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구하였다. 행복의 절정에서 느닷없이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진 신세였으나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조정철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의 손길이 고요히 다가와 그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홍윤애의 마음씨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조정철에게 따스하게 흘러들어 희망의 빛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홍윤애는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채워져 있는 가혹한 운명의 족쇄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5. 공포가 드리워지는 조정철의 유배 생활 지금의 정조임금님이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놓여날 수 없다고들 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 사약(賜藥)을 가진 금부도사가 내려올지 모른다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짙게 드리워진 조정철의 절망,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피비린내를 몰고 광풍(狂風)은 발자국을 죽이며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金蓍耈1724∽1795)가 정조 5년(1781)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주목사에게는 다른 곳의 수령들에게는 없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선참후계권(先斬後啓權), 모반을 획책한 대역죄인인 경우 먼저 베고, 나중에 상황을 적은 장계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권한이었다. 제주는 육지와의 사이에 거친 바다를 두고 있어 일기가 고르지 못할 경우 상황을 보고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우선 죄인부터 처단하고 수습한다는 것이었다. 정적 제거에 있어 이러한 권한이야말로 하늘이 김시구에게 준 절호의 찬스였다. 고로(古老)의 말로는 5월에 제주목사 앞으로 감사(監司)로부터 밀사(密使)가 와서 조정철을 적당한 죄명아래 장살(杖殺)하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 끌려 나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시체가 되어 법정 밖으로 운반되어 나갔다. 6. 제주목 관아의 형벌로 죽어가는 조정철 목숨을 살린 홍윤애 이때 홍윤애(洪允愛)가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입에 오줌을 부어 놔 소생시켰다. 당시의 법은 장사(杖死)했다고 해서 버려진 죄인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으면 또다시 죽이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조정철을 죽을 만큼 몽둥이질해서 내쳐놓고 목숨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던 김시구 목사는 그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명한 것이 누구인가를 탐문, 당장 잡아들이라 설쳤다. “조정철은 상감께 대역을 저지른 죄인이다. 앞으로 이 자를 비호하거나, 이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이라도 주는 자가 있다면 내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자를 길거리에 내다 버려 백성들에게 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끝내는 까마귀밥이 되게 하라!” 하고 곤장을 칠 때 분명히 여러 사람이 알아듣도록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자신 말이 먹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해괴하고 괘씸하였다. 7. 조정철을 살리기 위해 죽음 선택한 홍윤애의 진정한 사랑 홍윤애(洪允愛)는 정식으로 혼인을 맺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딸(1781년 2월 30일∼1863년 11월 24일)이 태어나기도 했다. 홍윤애는 관가로 끌려가기 전, 낳아서 두 달밖에 안 된 어린 딸을 언니 품에 안겨 한라산 속의 절로 떠나보냈다. 김시구 목사는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홍윤애를 보자마자 증오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얼굴이 검붉게 변하여 두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백을 요구했다. -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자신을 귀양 보낸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 다른 유배인들과 서찰교환도 하고 몰래 접촉도 하더라는 자백 - 홍윤애와의 관계 홍윤애는 이러한 죄목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다. 그녀는 잡혀 오기 전 조정철에게 “그대를 살리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義女曰公之生在我一死 : 조정철이 쓴 洪義女 碑文)”라고 자신의 의지를 밝힌 터였다. 내가 죽되, 어떻게 죽어야 님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몽둥이가 50대가 부러지고 60대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홍윤애의 몸은 살이 찢어져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까무러쳤다. 찬물이 끼얹어져 의식을 되찾기를 몇 번, 그때마다 목사는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한결 답은 “그런 바 없다!” 하였다. 몽둥이 재질(材質)이 너무 약해서 잘 부러진다며 목사는 잘 부러지지 않고 매 자국이 지독하게 아픈 윤노리나무 몽둥이를 특별히 깎게 하여 쳤다. 윤노리나무 몽둥이까지 70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녀의 처절한 비명은 관아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 제주성 내로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귀란 귀는 모두 관아를 향하여 열어놓고 이 사건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몇 대 맞으면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어내리라 생각하였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8. 죄 없는 홍윤애의 죽음으로 큰 파장 일어 홍윤애의 죽음으로 인한 파장도 컸다. 김시구 목사는 이렇다 할 물증도 없이 가혹한 고문으로 홍윤애를 죽이고 나서 이 죽음을 은폐(隱蔽)호도(糊塗)하는 장계를 올린다. 제주에 유배와 있는 죄인들끼리 서로 통하며 역적모의한 낌새가 있어 그들을 징치(懲治)하였다고.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은 곧 조정에 알려지고 큰 파장으로 일으켰다.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으로 안핵어사(按覈御使) 박천형이 파견되어 진상조사 결과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를 명령받는다. 육지의 친구나 친척으로부터 연락이나 원조 물품을 받을 가망성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는, 선박(船舶)의 왕래가 없는 첩첩산골 성읍리(城邑里)에서의 20년의 세월,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제주 유배지에서의 작성한 조정철의 시문집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 ‘큰 바다 건너 구덩이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기록’이라고나 해석할까. 그 문집에 실린 시의 행간을 살펴보면 이때 그는 짚신을 삼고 댕댕이 덩굴로 모자를 짜서 먹을 것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읍에서도 다시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9. 27년간 한 맺힌 유배해제와 복권 후 제주목사 부임 정조 12년(1788) 신대년(申大年) 정의현감이 부임하면서 유배인들, 특히 조정철을 심하게 핍박, 기찰하였다. 우선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시나 글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철은 유배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30여 년의 귀양살이에서도 살아남은 뒤 환갑의 나이 복권되어 1811년에 한 맺힌 유배지였던 제주에 35년 만에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홍윤애가 조정철 때문에 장살 된 지 31년만인 셈인데 이때가 조정철이 61세 환갑 나던 해이다. 그는 오자마자 홍윤애의 묘비명을 짓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으며 그 애도시(哀悼詩)는 그의 제주에서의 유배집인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의 마지막에 실렸다.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제주에 유배되어 27년을 한라산을 바라보며 힘든 유배 생활을 하다 61세 노인이 되어 제주목사로 왔을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홍윤애가 죽고 17일 후인 6월 2일 새벽, 자기 때문에 아까운 일생을 무참히 마치고 장지로 떠나는 홍윤애의 상여 소리를 들으면서 조정철은 어떻게 이 원혼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를 몇 번이고 되씹었다. 이처럼 가슴 맺혀 떠났던 그가 다시 한번 제주도에 와보고 싶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0. 버려진 홍윤애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사랑의 시를 새겨주다. 그는 제주에 목사로 도임하자 곧 홍랑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손수 글을 지어 비를 만들어 세웠다. /옥같은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 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자매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겨져 있구나/ 라고 하며, 죽은 후에나마 비통하게 간 홍윤애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조정철이 제주에 왔을 때 그녀의 딸은 이미 죽고 사위 박수영(朴秀榮)도 그가 제주에 부임하던 해에 죽었다 제주에서의 목사 재임 중에 받는 봉급 전부를 시댁(媤宅)이 있는 애월읍 곽지리에 삼 칸짜리 초가도 지어주고 농토도 네 번에 걸쳐서 사주어 기본생계 걱정을 덜어주는 등 아비로서의 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또한 사위를 족보에 올려 제주에 딸이 있음을 천명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요,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報恩)이며, 사랑하는 님에 대한 단심(丹心)의 표시였다. 조정철이 목사 재임 중 제주성(濟州城)을 개축하고 왜구(倭寇) 등 국방의 대비에 힘쓰고 성 주변 12과원(果園)을 설치, 감귤재배를 권장하고 흉년 때 육지에서 들어와 노비가 된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부당한 세비를 빙자한 재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부역(賦役)으로 과중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이동래부사로 떠난 후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을 거친 후 1831년 5월19일 지중추부사를 마지막으로 곡절 많았던 세상을 하직했다. 조정철은 이렇듯 말년을 영화롭게 장수하며 생애를 마감했다. 홍윤애의 무덤은 광양도리공동묘지에 있었는데 1937년 제주농업학교가 이설되면서 현재 유수암리에 홍윤애의 외손자인 朴奎八(1803-1822)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고 없도록 힘썼다. 한편으로는 귀양 살 때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은 집주인과 이웃들을 만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옛날의 신세에 대한 보답도 하였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 조정철이 세운 비도 옮겨 놓았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나라사랑 애국연대,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 서천군의회 정의 바로세우기 시민연대 등 3개 시민단체가 서천군의회 앞 광장에서 김경제 의장과 이강선 의원 규탄결의대회를 가졌다. 이들 시민단체는 지난 4일 서천군의회 개청식에 맞춰 도로변에 김경제 의장과 이강선 의원의 규탄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 부스를 설치하는 등 규탄결의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날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수사가 진행 중인 김경제 의장의 구속수사 촉구와 이강선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개청식에 참석한 외부 인사들을 향해 호소했다. 또한, 이희 서면의용소방대장은 이강선 의원의 ‘싸가지 없다’라는 발언과 관련해 당시 상황 증언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싸가지 없다고 말한 이강선 의원의 말을 들었고 3명 이상의 증인이 있다”라면서 당시 현장에서 욕설을 들은 사람들의 직함과 실명을 모두 공개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도 이강선 의원이 고소, 고발을 좋아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 화해까지 했다가 갑자기 허위사실 등으로 주민과 언론인들을 고발한 행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의원 신분임에도 욕설 파문과 주민들까지 무차별 고발한 것은 물론 본인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탄압까지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수작을 부리고 있다”라 지적했다. 이강선 의원은 지난달 8일 sbn서해신문과의 서면질의를 통해 “바나나보트 사업장 근무자와 안전요원을 상대로 일절 언쟁은 없었다”라고 반박한 바 있다. 또 “‘이강선 의원’의 신분을 밝혔고 특정 안전요원에게 ‘싸가지 없다’고 말한 그런 일은 없었다”라며 “다만 ‘예의가 없다’라고 한 적은 있고 다른 안전요원에게 업무적으로 지시나 지적을 한 것도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정태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 상임대표는 “이강선 의원은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 무엇이 가짜뉴스이고 언론이 어떤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인지 상세히 사실관계를 확인해 주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김경제 의장의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등 건물을 임대주고 예산으로 임대료를 챙긴 점을 비판했다. 한편 이강선 군의원으로부터 고발당한 피고소인 9명은 변호사를 공동 선임해 무고 및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과 모욕죄에 대해 맞고소 등 강경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보령·서천 지역구) 의원은 지방공무원이 국가공무원으로 비다수인 대상 채용되는 경우 일반직공무원으로는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국가공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고 12일 밝혔다. 현행법은 공무원을 공개경쟁 채용시험을 통하여 채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력경쟁 채용시험 또는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시험을 통해서도 공무원을 채용할 수 있도록 하고, 비다수인 대상의 경우 공고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차장의 자녀가 공고 없이 진행된 비다수인 대상 채용에서 면접위원 3명으로부터 모두 만점을 받아 충청북도 선거관리위원회에 최종 합격한 사실이 드러나 채용 비리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촉발되었다. 실제로 국가권익위원회에서 지난 7년간의 선거관리위원회 경력채용을 전수조사한 결과 353건의 채용 비리가 적발되었고, 이 중 부정 합격으로 의심되는 채용자만 58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장 의원은 “비다수인 대상 채용 제도는 모든 국민의 공무담임권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논란이 되는 지방공무원이 국가공무원으로 비다수인 대상 채용되는 경우 일반직공무원으로는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해 공무원 인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문화가 있는 날 ‘모시 꽃 피다’ 공연이 지난 5일 충남 서천군 문예의 전당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번 공연은 전통예술단 혼,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몽골국립예술단 등이 참여했으며 문화가 있는 날 지역특화프로그램인 서천별곡, 서천갯벌, 맥문동 꽃밭에서 등에 이어 네 번째로 펼쳐졌다. 공연은 몽골 국립예술단이 하닥(하늘색 긴 천)을 이용한 ‘인사 춤’으로 화려한 시작을 알리면서 대강당의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어 2008년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몽골 민요 ‘오르팅 도(Urtiin Duu)’가 선보여 음악적으로 저음역 대와 고음역 대를 오가는 진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끊임없이 호흡이 이어지게 연주하는 호흡법인 ‘비투 호흡(닫힌 호흡/몽골 무형문화유산)’을 이용해 몽골 전통악기인 ‘림베’와 ‘여칭’으로 ‘사계절’이라는 연주가 펼쳐졌다. 서천군립무용단인 전통예술단 혼이 ‘서천의 삶, 서천의 한, 서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서천 아리랑’을 몽골 국립예술단과 콜라보 공연을 선보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할흐 민족과 부랴티야 민족의 민요로 짧은 노래(버기니 도)를 연결해 부르는 몽골 민요 메들리가 선보였으며 몽골 여성의 아름다움과 몽골인들의 환대를 표현한 ‘컵 춤’도 펼쳐졌다. 또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한 사람의 목소리에서 두 가지 음이 한꺼번에 나오는 몽골의 독특한 창법인 ‘후미’의 공연이 이어졌다. 사냥, 전쟁의 승리, 황제에게 충성하는 행동과 감정, 유목 생활 등 삶의 모습을 자연과 동물에 빗대어 유목민족의 특이한 춤으로 표현한 ‘잘람 하르’ 공연으로 지쳐있는 관객들의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했다. 몽골이라는 나라와 몽골인의 사고방식을 예술로 가장 정확하게 잘 표현됐고 말 떼의 달리는 발소리로 깨어난 초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세르셍 탈’을 선보여 관객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서천 자연의 특징인 금강과 바다의 만남을 서양악기와 국악기의 만남을 그려 부드럽지만 경쾌하고 차분한지만 역동적인 ‘서천별곡’을 연주해 이번 무대의 대미를 장식했다. 김기웅 군수는 “오늘은 충남과 서천의 춤과 음악을 바탕으로 몽골을 대표하는 국립예술단과 우리 서천의 문화예술단체가 ‘서천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공동 초연 창작하게 된 뜻깊은 날”이라면서 “이 공연 무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주신 양국 예술 단체, 예술가들의 노력이 국내외 문화교류에 모범이 되길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이에 쩌크게렐 껀찍(Tsoggerel-Gonchig) 몽골국립예술단장은 “오늘 무대에서 몽골 국립예술단과 서천의 문화예술 단체 간의 공동 창작작품으로 선보인 협연을 통해 양국의 우호를 더욱 증진 시키고 확대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 믿는다”라면서 “몽골의 예술이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의 가슴에 깊은 감명으로 남길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고요한 바다에서는 유능한 선장이 나오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배를 삼킬 듯한 산더미 같은 검은 파도가 들이닥치는 비바람 속에서야 능력 있는 선장이 나온다. 나라도 위기에 빠졌을 때, 진정한 리더가 나오는 법이다. 옛말대로 난세에서 영웅이 나온다. 하지만 난세에는 비단 영웅만 나오는 게 아니라, 간신도 나온다. 영웅들이 무용담이 눈부셨기에 간신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 고사에 이런 얘기가 있다. 송나라 때 간신의 무리를 대표하는 가사도(賈似道)란 인물이 있었다. 그에게는 배다른 누이가 황제 이종(理宗)의 후궁이 됐다. 그 누이는 미모가 빼어나고, 영민해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의 총애를 얻어 귀비로 봉해졌다. 그녀는 현명하고 덕이 깊어 황제의 총애를 얻자 그에게 과장하여 말한다. 가사도의 재능이 출중하고, 지혜롭다고 고하여 기용해 줄 것을 청했다. 사랑에 빠진 이종은 시비를 가리지도 않고 곧 가사도를 중용했다. 감히 누구도 ‘안 된다’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가사도는 누이 덕에 출세 가도를 달려 마침내는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더니 그는 이종에 이어 도종(度宗), 공제(恭帝)의 3대에 걸쳐 황제 곁에서 권력을 누린다. 이를 소개한 중국 리정이 쓴 ‘권력의 숨은 법칙’에는 가사도가 무덕(無德), 무공(無功), 무재(無才)한 빈 그릇이었다고 소개한다. 심신이 편해진 그는 큰 건달의 습성이 살아나 도박과 여색만 즐겼다. 유람선은 서호(西湖)에서 규모가 가장 컸으며, 그가 거느린 가희의 수만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가 권력을 쥔 뒤, 조정에는 부패 탐욕 뇌물수수, 매관매직 등 온갖 비리가 성행했다. 그의 집에는 관리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무렵 징기스칸의 손자 몽케가 세 갈래의 길로 남송을 침공했다. 가사도는 우승상 겸 추밀사의 자격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불량배 출신인 그에게 전술이나 지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을 치를 용기가 있으리 만무했다. 그는 몽골군이란 이름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었다. 쿠빌라이(황제 몽케의 동생으로 후에 5대 황제)가 양주를 공격해오자 급히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협상을 거부하고 양주로 진격했다. 결국 가사도의 빈 그릇 같은 능력과 허세에 송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중국의 장개석, 모택동, 장쩌민, 시진핑 등 근래의 국가주석들은 모두 이 고사를 담을 책을 즐겨 읽었다. 최고 통치자가 인재를 고르고 골라 등용하고 아낀 이유는 자신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서기 290년쯤 있었으니, 1,700여 년이 지난 얘기다. 지난해 6월 우리 지역주민들은 남다른 기대를 안고 지방선거를 통해 군민의 대변자를 새로 뽑아 군의회로 보냈다. 무엇보다 가사도 같은 무뢰배에다, 무덕(無德), 무공(無功), 무재(無才)한 인물은 절대 안 된다는 마음으로 정당이나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아닌 인물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서천군의회 의원들은 어떤가? 대변자가 아닌 보스를 뽑은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그 어느 때보다 앞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군민을 위해 머슴처럼 일하겠다는 의원들은 보스인 양 청사 지하 주차장에 ‘의회 주차’라는 안내판을 붙여 영역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일부 의원은 자신을 뽑아 준 지역주민에게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해 결국, 서로 사과를 통해 이해 당사자와 화해를 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구실로 경찰서에 고소했다. 게다가 언론의 재갈을 물리려 언론사 대표 포함해 언론인까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하는 정치 보스인 양 처세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의회의 수장인 의장은 한 지역 시민단체로부터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의혹으로 고발당해 현재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군의원들의 행태를 지켜본 지역주민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군의회 의원은 군민의 대신해 군 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는 등 지역사회의 어려움을 솔선해 푸는 대변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치 보스는 그 반대다. 탐욕, 막말, 오만, 독선, 탈법, 무례, 무능, 무책임이 정치 보스의 상징이다. 정치 보스는 우선 사리사욕, 이해타산이 먼저다. 현안이 있는 지역사회는 강 건너 불구경하며 남의 탓만 한다. 이것은 상대의 잘못이며, 그 잘못의 책임은 상대에게 있다고 우긴다. 서천군의회 의원들이여! 지역주민의 대변자인지 정치 보스인지 숙고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서천군의회 일부 의원들이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서 군민을 향해 ‘지껄였다’, ‘그 XX’ 등의 막말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군의회가 가진 공식적인 회식 자리는 군의회 개청식 후 마련된 것으로 보인 가운데 일부 의원들이 개방된 공간에서 식사 중인 일반 군민에게 들릴 수 있게 막말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파문이 예고된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5일 시민단체 카페 게시판을 통해 ‘이것이 서천군의회의 민낯입니다’라는 제목 아래 군의회 일부 의원들이 군민을 향해 ‘지껄였다’·‘그 XX’ 등의 막말한 제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시민단체는 군의회 개청식과 지역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김경제 의장과 이강선 의원 규탄결의대회가 열린 지난 4일 군의회 의원들이 개청식을 마치고 가진 회식 자리에서 이 같은 막말이 오갔다고 주장했다. 또 이 단체는 서천읍에 있는 한 식당에서 가진 회식 자리는 개청식 후 가진 의원들의 회식 자리이므로 의장의 업무추진비로 마련한 자리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 회식 자리는 사적 모임이 아닌 공식적인 공무 모임 자리였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이 자리에서 일부 의원이 집회에 참석했던 군민의 발언을 두고 ‘지껄였다’라고 표현하고, 또 다른 의원은 집회에서 발언한 한 군민에 대해 ‘그 XX는 앞으로 지역사회에서 일하면 안 돼’라는 욕설을 섞어 비난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단체는 이들의 회식 자리 옆에서 식사하던 한 군민이 이 같은 막말을 듣고 ‘어이없다! 이런 사람들이 무슨 의원이냐?’라며 녹취한 파일을 시민단체에 보내왔다고 전했다. 또한, 이 단체는 이 음식점이 밀폐된 공간이 아닌 개방된 곳으로서 의원들이 식사 중 나누는 대화가 식당을 찾은 손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 구조로 주변의 시끄러운 식당 잡음이 그대로 녹취돼 당시 다른 손님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단체는 군의회 일부 의원이 군민의 쓴소리를 ‘지껄인다’라고 서슴없이 표현하고, 또 다른 의원은 선량한 군민을 ‘그 XX’라고 비하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 단체는 그것도 사석이 아닌 공석에서, 다른 주민들이 모두 듣고 있는 개방형 음식점에서 서슴없이 군민을 ‘이 XX, 저 XX’로 표현하고, 집회에 참석한 주민의 목소리를 ‘지껄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선량(選良)들의 태도인지 묻고 싶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법률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법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일부 의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린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지방자치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기초의회의 경우 무용론(無用論)과 폐지론(廢止論)이 기초의회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22년 7월 개원한 제9대 서천군의회의 경우, 역대 어느 의회보다 바람 잘 날 없는 사건·사고로 군민 눈 밖에 나 있다. 군민 삶 속에서 보고 듣고 실천하는 의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힘차게 개원한 제9대 서천군의회는 의원 갑질 파동으로 군민들의 우려를 자아내더니 급기야 의원징계와 관련하여 법정 소송전에 돌입해 있다. 집행부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 대화와 타협, 조율은 간데없고 오직 극렬한 대치와 상호비방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유난히 초선의원이 많다 보니 매끄럽지 못한 의회 운영으로 번번이 의회가 파행을 겪었고, 행정사무 감사 중에는 피감기관인 집행부로부터 항의까지 받는 사태를 빚었다. 의회 사무과는 행정사무 감사에서조차 제외되면서 의회 사무과의 행정은 감시와 견제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무소불위를 기관화했다. 그 사이에도 일부 군의원의 갑질과 독단적인 행동은 끊임없이 지방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하면서 군민들의 눈총을 받았고, 급기야 군의회 의장의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어 겸직 신고 위반 등 범법 사실이 밝혀졌지만, 서천군의회 윤리특위는 징계 대상이 아니라며 자신들 스스로가 제정한 조례 규정을 부정하고 나서고 있다. 군의원이 검·경찰이나 되는 양, 사적영역까지 침범하여 불법 논란을 초래하며 주민들과 마찰을 일삼고, 급기야는 모 군의원이 사적인 영역에서 지역 사회단체장과 지역 언론사 사주와 기자들을 집단 고소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군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새로 신축한 서천군의회 의회 동은 지방자치단체 청사 규정에서 제외된다는 이유로 초호화판 청사로 둔갑했고, 군의회 의장실은 대통령실이냐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까지 들려오고 있다. 신청사 지하 주차장은 의회 주차라는 팻말을 붙여 군의원 전용 주차장 화하고도 민원인 타령만 늘어놓고 있다. 주민을 섬기고 주민을 우선하겠다는 구호는 정치적 술사(述辭)로 변한 지 오래다. 군의회 의장의 리더십은 간데없고 군의원 7명이 오죽하면 ‘일곱 색깔 무지개’라는 군민들의 조롱 섞인 별명까지 얻게 되었으랴? 지방의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집행부 감시 권한을 악용하여 권위를 앞세우려는 성향을 내보이며 도대체 서천군은 군수가 몇 명인지 모르겠다는 공직자들의 탄식 목소리만 높아 간다. 지방의원은 선출직 공직자이다. 국민의 혈세로 세비를 받는 공무원이다. 지방의회가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비판의 기능이 있듯이 지방의회는 주민들의 견제와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주민들의 견제 목소리는 ‘지껄인다’라는 표현으로 일갈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지역 사회단체장을 비속어로 지칭하는 태도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군수가 욕하는 것은 공개로 사과해야 하고, 군의회 의장이 군민의 목소리를 ‘지껄인다’라고 표현해도 되는지도 묻고 싶다. 주민을 대표하는 지방의원이 전과자투성이라는 비난 속에 지방의원 자질론이 끊임없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좀 더 자숙하고 신중히 처리하려는 태도는 어디에도 없다. 뭐 묻은 사람이 뭐 묻은 사람을 나무란다고 자신은 온갖 불법을 달고 살아가면서 남들에게는 이래라저래라 호통치는 지방의원을 바라보는 주민이나 집행부 공직자들 입에서 기초의회 폐지론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서천군의회는 자숙하고 반성해야 한다. 원 구성 후 1년밖에 안 된 지방의회가 너무나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의원 징계 문제로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서 애꿎은 혈세로 변호사비만 축내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날만 새면 군의원 갑질이니 욕설 파동이니, 했느니 하지 않았느니 군민들 귀에 짜증 나는 소리만 들리는 의회가 과연 존재의 의미가 있는가? 군민을 걱정해 주라고 존재하는 군의회가 군민의 걱정거리만 되는 현실이 아닌가? 이제라도 서천군의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 배지의 권력에 눌린 초라한 모습을 버리고, 진정 군민을 위하는 봉사자의 길로 들어서라.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지 비난이라고 반항해서는 안 된다. 군민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주의를 벋어 버리고 진정한 군민의 대변자로 거듭나기를 충고해 본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서천군 서천신문이 지난 1일 문예의전당에서 제3대 장현기 대표이사와 윤상규 이사를 새로운 경영진으로 맞이하는 대표이사 취임식을 개최했다. 이날 취임식에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해 김경제 군의회 의장과 의원들, 전익현 도의회 의원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했다. ‘전통예술단 혼’의 식전 공연으로 시작된 취임식은 내빈소개, 경과보고, 취임사, 축사로 진행됐으며 서천신문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비전 선포식도 이뤄졌다. 이날 장현기 신임 대표는 취임사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고난의 길과 천산건설을 일으켜 세우기까지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담았으며 앞으로 지역을 서천신문의 운영방침에 대한 경영철학을 밝혔다. 그는 “어릴 적 가난하다는 이유로 다 배우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오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잘살겠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왔고 이제와 그 꿈을 이루고 잠시 쉬려 했지만, 또다시 서천신문 대표라는 중책으로 큰 짐을 지게 됐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처음 서천신문 인수와 관련해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언론까지 장악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 극구 사양했지만, 반대로 건전하고 올바른 신문사의 운영을 위해서는 든든한 버팀목의 필요한 만큼 그 힘이 되어 주고자 이를 수락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신문사를 통한 이득이나 언론 개입으로 인해 불편을 끼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지역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뿐이다”라며 “서천신문이 건강한 지역 언론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든든한 버팀목 역할만 담당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김기웅 군수는 축사를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서천신문의 장현기 대표이사와 윤상규 이사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라며 “장현기 대표께서는 그간 성공적으로 건설사를 운영해 왔고 기업인협의회와 서천사랑장학회 등에서 다양한 활동과 지속적인 봉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신 만큼 신문사의 운영 또한 큰 모범이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 서천신문이 군민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서천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또한, 서천신문이 앞으로 나갈 방향도 비전도 제시됐다. 윤상규 신임이사는 “서천신문은 장현기 신임 대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조직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새로운 100년의 도약을 위한 힘찬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라며 “새로운 출발을 온 군민들에게 알리고 모든 임직원이 새로운 각오로 새롭게 출발할 것을 약속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전했다. 이어 ‘아름다운 생각들로 다시 일어서는 서천’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서천군민들의 화합과 서천군 발전을 위해 앞장서는 서천신문 ▲평범한 서천군민들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듣는 서천신문 ▲창간 34년, 새로운 100년을 꿈꾸는 서천신문 ▲언제나 냉철한 자세로 서천의 내일을 먼저 생각하는 서천신문 ▲정의롭고 다정한 서천사람들의 새로운 정신을 이끄는 서천신문 등이 될 것을 약속했다.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는 8문장가 중 시인 기록 신광연과 그의 형제들은 대문장가로 세상에 명성을 날렸고 늦게나마 관계에도 진출하였다. 그 뒤에는 고향을 떠나 전국을 유랑하며 지낸 큰형 석북 신광수와 동생 진택 신광하의 생활과는 반대로 부모님과 고향을 지키며 살았다. 기록 신광연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고령신씨가 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 씨의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이곳 활동리(숭문동)에 정착 세거하면서 번창하였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 1687∽1767)의 첫째 부인 성산이씨는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와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와 부용당 신 씨(申氏 1732∽1791)를 낳았다. 1. 가족과 고향을 지켜며 살았다. 형님 석북 신광수와 아우 신광하의 삶에 비교하면, 기록 신광연(申光淵)의 삶은 참으로 측은하기만 하였다. 자신이 신선처럼 사슴을 타고 마음껏 세상 바깥 기이한 곳을 찾아다니던 기록(기록-사슴타고)의 꿈을 그는 이루지 못했다. 잠시 고향 숭문동을 떠나 우리 고장 장항읍 송림리(鷄山-당뫼) 송강(松江-솔리천)에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자염업(煮鹽業)으로 생계를 꾸림을 제외하고는 끝내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며 작은 농토를 지으며 살았다. 기록 신광연은 7번이나 초시(생원)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57세에 진사시험(사마시)에 급제해 8문장가의 전통을 이었다. 역사책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또한 못마땅한 세상과 사람들의 비판을 서슴치 않아 교제를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2. 첫 아들을 잃고 3딸만 남아 기록 신광연(申光淵)은 두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취민(尹就敏)의 따님과 결혼을 하여 첫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이 요절하여 아들을 잃었다. 그 후 두 번째 부인으로 강릉김씨(江陵金氏) 김최경(金最慶)의 따님과 결혼하여 3명의 딸만 낳았다. 기록 신광연은 후사가 없어 형님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4째 아들 신석상(申奭相1737-1816)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신광연의 첫째 딸은 파평윤씨 장인 윤취민(尹就敏)의 손자 윤승환(尹昇煥)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재상(李載常)에게, 셋째 딸은 목현중(睦玄中)에게 시집갔다. 첫째 딸이 장인 윤취민(尹就敏)의 손자와 결혼을 하게 됨은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딸이기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신광연의 서모 전주이씨가 낳은 부용당신씨 동생이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장인 윤두서(尹斗緖)의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을 보내는 경우와 같은 결혼풍습이었다. 3.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기록 신광연에 대하여는 요즘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름 없는 문인에 가깝다. ‘숭문연방집’에 전하는 신광연의 문집 기록초음(騎鹿樵吟)이 아니었다면, 신광연의 고민과 궁핍한 삶을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문집의 제목도 참으로 초라하기만 하다. “기록(騎麓-신광하)이 땔나무 하며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땔나무꾼 시인 정도의 시집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대에 여춘영(呂春永1734∼1812)의 노비로 명성을 날렸던 시인 정초부(鄭樵夫.일명 丁樵夫1714∼1789)가 그랬던 것처럼 기록 신광연(申光淵)도 비추어 ‘기록초음’이라 하지 않았나 싶다. 아우 진택 신광하(申光河)가 쓴 묘지명에, 큰형님이 이곳저곳으로 나가 돌아다니자 둘째 형님께서는 집에 머물면서 부모님을 봉양하였으니 여러 아우와 조카들이 모두 둘째 형님이신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큰형님이 일찍이 나와 더불어 고금의 시인들을 논하다가 둘째 형님(申光淵)의 시는 어떠한지 물었다. 내가 “신기하고 빼어나며 굳세고 호쾌한 것은 둘째 형님이 큰형님(申光洙)을 따를 수 없습니다만 침울(沈鬱)하고 고고(高古-예스럽고 고상함)한 것은 큰형님이 양보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탁월한 식견이라고 인정해주셨다. 묘비명에 밝힌 바와 같이 기록 신광연은 부모님을 모시며 고향을 지키며 침울하고 고고한 시를 쓰면서 곤궁한 살림을 하면서 가족들의 버팀목 역할을 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4. 궁핍한 생활의 연속 기록 신광연은 말 그대로 굶기를 밥 먹는 듯하며 살았다. 병든 아내는 곡식을 못 빌릴까 걱정하고, 어린 딸들은 발버둥 치며 울어대는 생활고의 현장이 인근 부여(扶餘)를 지나면서 그가 남긴 시 久寒<구한-오랜 추위>에서 알 수 있다. “들판에는 시든 풀이 아득히 널려있고/ 황패한 밭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질 무렵 떠도는 행인들/ 북풍한설에 떠나는 섣달의 말/ 언덕에 기대어 부부는 우는데/ 세금 독촉에 관리는 야단법석/ 어느 곳에 낙토(樂土 : 편안한곳)가 있단 말인가/ 올해는 끔찍이 어렵고도 힘드네/가림도중<嘉林道中>이라는 시에서도 어느 곳에 가야 편안한 곳이 있단 말인가?/” “아이는 어미 등에서 보채는데/ 가야 할 길은 정말로 아마득/ 떠도는 삶에 정처를 찾기 어렵고/ 가슴 속의 정회(情懷:애틋한 감정)는 가눌 수 없네./ 옷가지 허름한데 눈은 내리고/ 눈앞에는 다시 해가 떨어지네/ 친척이 아니어서라고 말한다 해도/푸대접에 공연히 마음 상하네/” 기록 신광연이 가장으로써 헐벗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정처 없이 걸었던 가장의 심정을 시로써 잘 나타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잠시 고향을 떠나 바닷가 서천 송강(松江 : 현재 장항읍 송림리 솔리천) 계산(鷄山 : 당뫼)에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하는 자염업(煮鹽業)과 방풍을 캐어 약제로 팔며 궁핍한 생활을 진택 신광하(申光河) 둘째 형님과도 함께 하기도 하였다. 5. 애틋한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 기록 신광연은 첫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요절하였기에 말년에 딸 셋만 두었다. 그에게도 대를 이을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기에 딸에게 푸대접을 하였던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의 시 유녀<幼女 : 어린 딸 아이>에 딸에 관한 솔직함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어린 딸 총명하기 그지없어/ 아끼는 아비 마음을 모를 리 없네/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 행하고/ 네,네 대답하며 제때에 척척 맞추네/ 늘그막에야 사랑스러운 줄을 알겠으니/ 아들 아니라고 오래도록 무시해 미안 하구나/ 죽은 뒤의 일을 따져서 무엇 하랴/ 눈앞에 흡족하면 그것이 기쁨인 걸/” 이렇듯 노년의 아버지가 딸에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6. 신행 온 아들 같은 사위에 대한 정 깊은 12곡 기록 신광연의 첫딸을 해남 동강(東江) 백제(白濟)마을에 시집을 보냈다 시집간 큰딸이 15세인 신랑과 함께 신행을 왔다. 큰 딸도 신랑과 비슷한 나이였다. 신행 온 사위를 장인과 장모가 맞이하는 모습을 12곡을 노래한 시를 지었다 옛날이나 오늘날의 신행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보인다. <1곡> : 신랑은 열다섯 살, 신부도 그 또래/ 양가에서 귀하게 자라,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2곡> : 왼쪽 신랑은 문만큼 늠늠하고,/ 오른쪽 신부는 신랑 어깨만큼/ 늙은 장인은 너무 좋아서, 장모 사랑보다 훨씬 더하지/ <3곡> : 푸른 도포에 녹색 허리띠, 가늘게 짠 노란 삿갓 쓴 신랑/ 문밖으로 들랑들랑 정신 없이, 장모는 좋아서 죽는가 보네/ <4곡> : 서쪽 밭에 묻어둔 동치미, 서해 바다에서 가져온 청어/ 가난한 집 늙은 장모는, “접대가 소홀하다”며 미안을 연발 하네/ <5곡> : 장인은 매사에 물정을 몰라, 자잘한 일은 아랑곳 않지/ 밥상 놓고 부끄럼 없이, 시 지어 사위에게 써보라 하지/ ---이하 생략-- 1〜5곡에서 사위를 맞이하는 모습이 정겹다. 듬직한 신랑의 어깨만큼 자란 딸의 모습이다. 장모는 분주하게 오가며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대접할 음식 장만이 분주하고 푸짐하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딹 잡아 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고작 밭에 묻어준 동침이와 생선 몇 마리이다. 그러나 장인과 장모의 마음은 풍족하게 보인다. 6〜12곡은 사위가 살고 있는 해남을 모습을 그리고 사위가 살고 있는 그곳 해남 동강(東江) 백제(白濟)마을로 사위 집 찾기는 식은 죽 먹기라며 그 대 마당 앞 작다란 복사꽃도 사위를 기다려 피어날 테지, 집에 가서 그 꽃이 피었거든 한 가지 꺾어 내게 보내 달라 하고 있다. 기록 신광연의 고향 <숭문북동>집 주변에도 복사꽃을 심었다 석북 형의 시인<詩人>란 시(詩)에 집주변에 복사꽃 피어난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위집과 자신의 집을 연상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전에 내 젊은 날, 그대 조부(윤치민)의 사위였고, 그리고 그대가 이제 우리 집 사위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7. 기록 신광연은 4남매를 묶어주는 중심인물 기록 신광연은 문학사에 명성을 날린 인물은 아니지만, 그러나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을 지키면서 형제들과 애틋한 정을 나누며, 조카들을 가르치며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아간 시인 이였다. 기록 신광연은 고령신씨 숭문동8문장가를 배출할 수 있도록 무대 뒤에서 조연을 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1778년 향년64세로 생을 마감했다. 전북 군산시 임피에 장사 지냈다가 화양면 활동리 남쪽 산에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