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국립생태원 당연직 비상임이사에 지난 6월 19일 자로 임명된 강신두 전 충남 서천군의회 부의장은 중책을 맡아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이 앞선다고 전했다. 강 신임이사는 지난 6일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군민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 온 생태원의 비상임이사라는 중책을 맡게 돼 영광스러운 한편 책임감 역시 무겁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명감으로 생태원과 함께 지역사회와 상생 발전을 도모하는 등 군민이 신뢰하는 1등 공신의 생태원이 될 수 있는 직분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강 신임이사는 생태원의 이사회, 임원추천위원회, 자문위원회 등 주요 의결기구에 참여한다. 또 생태원의 경영 목표, 연도별 사업계획, 규정 제·개정, 예산·결산 등 경영 및 사업에 관련된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생태원이 군민 삶의 질 향상과 연결된 만큼 그 무엇보다도 군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군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생태원으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상생 발전사업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또 “생태원의 경영 목표에 따라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강화와 서천군민 중심의 지역경제 활성화 및 지역 예술인과의 문화교류 등이 정착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실천해 나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청렴, 윤리, 혁신 등 세 가지 키워드를 항상 마음에 품고 생태원 직원들은 물론 지역의 다양한 이해 관계자 모두가 공정하고 투명한 업무가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임명된 강 이사가 김기웅 군수의 추천으로 임명된 만큼 생태원도 서천군과 지역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지역 상생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생태원은 지역의 상생 발전과 경제 활성화 등에 대한 공동 협력방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해 나가면서 지역사회에 활력과 긍정적인 변화에 함께 노력할 방침이다. 조도순 국립생태원장은 “생태원과 지역사회가 함께 발맞춰 성장해야 미래에 상호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새로 임명된 비상임이사에 역할이 기대된다”라며 “생태원 임직원과 함께 고민하여 군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사업을 함께 추진해 보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강신두 비상임이사는 6월 19일부터 2년간 신임 비상임이사로 임기에 들어간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코로나 정국에도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 가게 앞과 옆의 점포들이 비어가고 있고요. 사거리 점포도 비고 있어요. 참으로 큰일이에요. 이러다 불 꺼진 도시가 되겠어요” 이는 최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시가지에서 식당업에 종사하는 한 근로자가 서천읍 내수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다. 전국적으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 저마다 소비를 아끼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 서천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서천지역에서 최상의 상권을 이루고 있는 서천읍 시가지의 점포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비어가고 있는 등 이달 들어 총 8개의 점포에 임대 또는 매매의 안내판이 붙었다. 서천읍 상인회 한 관계자는 이제 서천지역의 내수 경제도 바닥을 친 것 같다며 볼멘 목소리를 냈다. 이런 사정인데도 서천군청 해당 부서는 이러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며 지난주에 열린 군민과의 대화를 통해 한 시민단체가 이 같은 내용을 알리자 김기웅 군수가 긴급히 상황을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해당 부서인 경제진흥과는 내수 경제 사정에 대한 통계조차 없어 말 그대로 경제진흥에 대한 사업 추진을 어떻게 할지 답답함을 보이는 등 김기웅 군수가 과연 경제 군수인지 의심케 하고 있다. 하지만, 서천군과 달리 강원도 양구군의 사정은 다르다. 양구군의 경우 일찍이 스포츠마케팅을 도입해 현재 1년간 치러지는 전국 규모 대회 약 80여 개가 열려 양구읍 시가지에 차 없는 거리가 조성되는 등 시가지 점포마다 대회 참가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특히 양구군에 개최되는 대회에 참가한 체육인이라면 ‘양구달러’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양구군은 지역 상품권 활용도를 높여 내수 경제 활성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여기에 양구군은 내수 경제 흐름 통계를 위해 상품권 환전 취급 은행을 통해 분기별로 지역 내 각 업체의 환전량을 파악해 업종별로 매출 동향을 파악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 추진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런 통계는 지역 경제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아 타 지자체들이 앞다퉈 이를 벤치마킹(benchmarking)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서천군도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표를 만드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역의 한 원로 정치인은 “경제를 잘 안다는 김기웅 군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물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라며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 마련에 앞서 기본적인 지역 경제 흐름의 통계조차 없다면 과연 김 군수가 외치는 ‘잘사는 서천’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의문스럽다”라고 꼬집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에 불교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Templestay) 사업 추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템플스테이는 일반인들에게 사찰을 개방해 한국불교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서천군에 따르면 기산면 영모리에 있는 사적 60호 봉서사는 창건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 전국 각 절에 관한 내력 등을 수록하여 1799년(정조 23) 간행한 ‘범우고(梵宇攷)’에 이 지역에 봉서암(鳳棲菴)이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월남 이상재 선생이 소년 시절 공부하던 곳으로 극락전·삼성각·심검당·요사채 등으로 이뤄졌으며 1999년 중건된 극락전에는 보물 제1751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봉안돼 있다. 이에 봉서사를 활용해 타 지자체처럼 템플스테이 운영으로 방문객 유치에 나서는 등의 전략적인 관광마케팅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당진시는 이달부터 관내 유일한 템플스테이 사찰인 영랑사를 중심으로 ‘2023 템플스테이 플러스 원 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또한, 사찰에서 산사 및 전통문화 체험과 당진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연계하는 1박 2일 투어로 단순히 사찰에서의 체험만을 하는 기존 템플스테이와는 차별화 전략으로 방문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템플스테이는 일반적으로 체험형, 휴식형, 당일형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체험형은 불교문화와 한국불교 수행자의 수행 일상에 대해 알아보기 좋은 프로그램으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예불, 스님과의 차담, 108염주 꿰기 등 불교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휴식형은 최소한의 활동(공양, 예불)에만 참가하고 사찰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하기 때문에 속세를 떠나 쉬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일형은 일부 사찰에서만 운영되고 있는데, 2~3시간 정도 사찰에서 준비한 특별 프로그램(사찰음식 만들기, 염주 만들기, 차담 등) 체험을 진행한다. 이와 관련 지역 관광업계 한 관계자는 “봉서사는 관내 유일한 템플스테이 사찰로 운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라며 “서천만이 가지는 차별화된 템플스테이 사업 운영을 통해 사찰의 아름다움은 물론 서천 관광의 매력을 더욱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서천경찰서가 김경제 의장의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를 종결하고 충남경찰청에 사건을 돌려보냈다. 서천경찰서와 지역 A시민단체에 따르면 최근 충남경찰청에 김경제 의장을 상대로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신고가 접수돼 이를 서천경찰서에 이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에 서천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필요한 신고인의 혐의 의혹에 대한 진술을 받으려 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를 착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고인을 총 3회 거쳐 소환해 조사하려고 했으나 신고인이 출석하지 않아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 사건을 종결하고 충남경찰청으로 돌려보냈다. 한편 김 의장은 2021년 12월경, 자신의 소유 건물을 서천군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A 단체를 상대로 임대차계약을 하고 매월 50만 원의 임대료를 받은 의혹을 지역의 한 시민단체가 제기한 바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도 내 수산인이 한 자리에 모여 화합을 다지는 ‘제3회 충남수산인 한마음대회’가 오는 13일 서천군 국민체육센터에서 개최된다. 이번 대회는 수산업·어촌의 소중함을 알리고 수산인의 긍지와 자부심 고취와 수산인 간 정보공유 및 상호 협력하는 화합의 장으로 마련됐다. 대회는 서천군수산업협동조합(조합장 박정진)의 주관으로 ‘건강한 바다, 풍요로운 미래, 행복한 수산인’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충남도, 서천군이 후원하고 한국중부발전 신서천화력본부 협찬으로 열린다. 대회 기념식에는 김태흠 도지사, 조길연 도의회 의장, 장동혁 국회의원, 김기웅 군수, 김경제 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수산인 가족, 기관 단체장 등 약 1,5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한, 대회는 1부 충남수산인 한마음대회 기념식과 2부 초청 가수 공연, 노래자랑 및 경품 추첨 등으로 도내 수산인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식전 공연으로는 서천지역 전문예술인이 참여하는 사물놀이를 비롯해 보컬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선보이며 수산인 대표자의 수산자원 결의문을 낭독하는 시간도 갖는다. 또한, 수산 발전에 이바지한 유공자를 대상으로 충남도지사 7명, 충남도의회 의장 표창 6명, 서천군수 표창 5명 등 총 18명에 대한 표창 시상식이 거행된다. 부대행사로는 대산지방해양수산청의 어업경영체 등록, 수협중앙회 충청공제보험지부의 수협보험, 친환경 인증 부표, 어선 기자재, 서천 수산물·특산물 등의 홍보 부스가 운영된다. 박정진 서천군수산업협동조합장은 “‘한산모시’, ‘서천갯벌’ 등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도시 서천군에서 수산인 한마음대회가 열려 기쁘게 생각한다”라며 “이 대회가 수산자원 회복 및 보호에 대한 결의와 수산인들의 고충이 위로받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한편 충남수산인 한마음대회는 도내 수산인들의 자긍심 고취와 권익 신장을 위해 지난 2018년 태안 만리포공영주차장에서 열린 1회 대회를 시작으로 2019년 2회 대회가 보령시에서 개최됐다.
방송통신위원회가 텔레비전 방송수신료(KBS·E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 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TV 수신료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가 방통위 전체 회의에서 의결되면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빠르면 7월 중 공포될 전망이다. 물론 TV 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는 비단 최근에 촉발된 문제는 아니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이 문제가 대두되어 정치적 쟁점이 된 적이 있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는 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의 공정보다도 시비가 나오면서 여의도의 단골 메뉴로 떠올랐던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1963년 TV 시청료로 TV 1대당 월 100원을 내기 시작했다. KBS 운영자금 마련 명목이었다. 이 시청료는 1974년 500원, 1980년 800원으로 올랐다가 1980년 우리나라에서 컬러TV가 시작되면서 이듬해인 1981년 4월 1일부터 흑백 TV와 구분해 컬러TV의 경우 월 2,500원 시청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1981년 당시 신문구독료가 월 2,500원이었으므로 일간신문 구독료에 맞추어 TV 시청료를 책정했다. 이후 1989년 방송법이 제정되면서 TV 시청료라는 이름은 TV 수신료로 바뀌었다. 수신료는 시청의 대가가 아니라, 공공요금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현재와 같이 한국전력이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합산해 통합 징수하는 제도는 1994년 10월 도입했다. 그전까지는 KBS 징수원이 직접 수신료를 받으러 다녔는바, 수신료 징수율이 매우 낮았다. 납부 회피가 많았기 때문이다. 1994년 도입된 TV 수신료 통합징수 효과는 뚜렷했다. 1995년 수신료 징수율은 53%에서 95%로 전년 대비 급상승했다. 정부는 수신료 통합징수를 도입하면서 KBS 1TV 상업광고를 폐지했다. 공영방송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의 TV 수신료는 1995년부터 약 30여 년간 2,500원으로 동결되어 있다. 이는 2000년 방송법이 바뀌면서 TV 수신료 인상이 국회의 승인사항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KBS 이사회가 여러 차례 수신료 조정안을 의결했으나 한 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2021년 6월 30일 월 3,800원 인상안을 의결했다. 현재 수신료 2,500원 중 한전이 징수 위탁 수수료 명목으로 169원, EBS가 70원을 가져가고 KBS는 2,261원을 가져가고 있다. EBS는 제대로 된 공영방송 책무를 위해 월 700원은 받아야 한다는 태도다. 하지만 이 역시 국민의 반감을 우려한 국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지난해 KBS 총수입은 1조 5,305억 원으로 이 중 수신료는 6,934억 원이다. 분리 징수가 이뤄지면 최대 4,000억 원의 수신료가 증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분리 징수가 이뤄질 시 별개의 통지서를 받아든 TV 미보유 시청자들이 더 적극적인 ‘해지’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1인 가정이 늘고 전기료에 수신료가 ‘준조세’처럼 기본 사항으로 들어 있다 보니 KBS 수신료는 늘어나는 추세다. TV 미보유 1인 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이들이 수신료 납부를 거부할 때 KBS로서는 수입 감소가 불가피해진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가 현실화할 때 연간 7,000억 원에 육박하는 한국방송(KBS) 수신료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재정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수신료 분리 징수가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상업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지만, 지금껏 국민이 낸 수신료를 기반으로 방만하게 경영하면서도 자구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KBS에 대한 비판 여론도 높다. KBS는 매번 정권 교체 시마다 경영진 교체와 편파 보도 논란을 겪었다. 2021년 말 기준 KBS의 1억 원 이상 고연봉자 비율은 51.3%에 달했다. 특히 2020년 말 기준 1억 원 이상 연봉자 중 무보직자가 1,500여 명에 이른다. 분리 징수가 현실화하는 현시점에서도 자구 노력보다 ‘수신료 현실화’를 주장하며 오히려 인상을 주장하고 있는데 대해 비판 여론도 거세다. 공영방송이라는 핑계로 준조세 격인 안정적인 TV 수신료를 바탕으로 방만하게 경영해왔다는 사회적 비판을 KBS는 겸허히 받아들여,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하여 경영합리화를 도모해야 한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 95% 이상이 분리 징수에 찬성한 이유는 분리 징수 여부를 떠나 수신료 납부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어떤 방법으로든 현재와 같은 준조세 성격의 한전 전기료 통합징수 제도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다만 TV 수신료 분리 징수로 인하여 공영방송인 KBS가 자칫 경영부실로 정상적인 콘텐츠 제작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KBS가 재난방송 등 공영방송으로서의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대응책 마련도 절실해 보인다.
서천군의 최대저수지는 봉선저수지와 흥림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도부터 현재까지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고 있는 2곳 저수지의 조합설립과 그 추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00년 전 조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의 농수원의 최대 저수지는 동부저수지(봉선저수지)와 서부 저수지(흥림 저수지)이다. 1926년부터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여 오고 있는 2곳의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설립하여 100여 년을 걸쳐 사용하는 서천군의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농업용수의 확보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보고이다.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1923년 4월 2일 자로 조합원 2,179명, 3,500정보(10,500만평) 면적의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서천 수리조합 설치를 허가하였다. 1. 수리조합 설치 참여 인물 조합설치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은 일본인 가타끼리, 미야지마, 兼平虎一(겸평호일:초대 조합장) 등이며, 서천지역 조선인은 서천 두왕리 김영두, 장항 솔리 추교영 등이었다. 1922년 10월 1일자로 조합설치인가 신청서에 조합창립자는 대표적 인물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장 坂木宮次(판목궁차)외 일본인 5명, 조선인은 화양면 봉명리 이상구(李庠求), 화양면 창외리 이승휴(李承休)가 신청하였다. 이승휴는 당시 화양면장, 1924년에 충남도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이상구는 서천보통학교 훈도와 서천군청 직원을 거쳐 1927년 총독부 군수를 역임하였다. 2. 추진과정의 난관 설치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설치의 조건에 조합원 1/2 이상과 조합원 토지 면적의 2/3 이상의 소유주가 찬성해야 하는데, 조합원 54%, 토지소유자 70.6%의 동의를 얻고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일본인의 대지주와 조선인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법총회를 자행하는 등 물의를 빚자 일부 반대자들은 읍면별 2명씩의 대표자를 선정하여 대표 회의를 열고 총독부에 설립인가를 취소하도록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천지역 126개 마을 2.230명이 연명 날인 한 탄원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하였는데, 대표의원으로 나석주(羅錫周), 조남천(趙南天), 고광규(高光圭) 등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답변은 허가에 대하여는 철회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3. 공사 규모와 수몰 지역 마을 2곳의 저수지 총공사비는 1,810.000원(당시 쌀 1석 22원), 저수 면적은 동부(봉선)저수지는 211정보(633,000평), 서부(흥림) 저수지는 118정보(354,000평)이다. 동부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옛 마을인 내설월리(內雪月里), 외설월리(外雪月里), 반월리(半月里), 신월리(新月里)를, 삼월리(三月里)로 변경하였다. 또한 봉암리(鳳岩里), 선돌리(仙乭里), 지장리(支壯里)를, 봉선리(鳳仙里)로 변경하였다. 봉선리 부엉 바위산은 옛날 부엉이 서식지였기에 붱 바위산으로 불리고 있다. 1923년 동부(봉선)저수지 조성공사로 인하여 내설월, 외설월, 반월과 소야리(所也里)일부, 벽오리(碧梧里) 일부, 봉선리(鳳仙里) 마을 내 선돌(仙乭) 일부, 봉암(鳳岩) 일부와 신봉리(新鳳里) 일부의 마을이 수몰되었다. 수몰된 마을 가구는 약 30여 가구(1가구당 평균 6명) 180여 명이 이주하였다. 마산면 벽오리는 백제시대에 한산군(韓山郡)의 옛 고을 마읍(馬邑)으로 고을을 다스리던 치소(治所)였다.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자주 이곳으로 사냥을 나오기도 한곳이다. 동성왕 23년(501년) 11월 한산 건지산성(당시 牛頭山城)에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도읍지 공주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 즉 지금의 마산면 벽오리(碧梧里)에서 유숙하다가 부여 임천, 당시 가림성(현 성흥산성) 성주인 제자백가는 인사 불만을 품고 마포촌에서 유숙하던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였다. 그다음 해(502년)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 우두산성(지금의 건지산성)에 진을 치고 장수 해명(解明)을 보내 백가를 잡아 오도록 하여 건지산성에서 목을 베어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錦江)에 버린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 : 대동지지-1865년 사례편) 또한, 서부(흥림) 저수지 조성으로 매몰된 마을은 종천면 지석리(支石里-괸돌) 일부, 석촌리(席村里-봇밑) 일부, 흥림리(興林里) 일부, 판교면 등고리(登古里) 일부, 발계리(發桂里) 일부, 동지리(冬至리) 일부가 수몰되었다. 4. 조선총독부 청사 등 폭파용 폭약 빼돌린 사건 발생 흥림저수지 공사 기간에 창의단(倡義團) 김응선(金應善) 등이 조선총독부청사 등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사건 발생하였다. 흥림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던 정원득은 종천면 지석리 소사조수리조합 공사장(현 종천 흥림저수지)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의 발파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창의 단원(倡義團員)이었던 김응선(46세)은 9월 초순쯤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으로 폭약인 다이너마이트를 구하고자 흥림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 사는 매제 정원득(鄭元得·29세)을 찾아갔다. 김응선은 한 달 가까이 매제 집에 머물면서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몰래 빼돌린 다이너마이트 10개, 뇌관 10개, 도화선 1장 5척을 입수하고 매제에게 수고비로 30원을 주었다. 김응선은 귀향길에 이리역에서부터 동승한 계의산(桂義山)이란 창의단 소속의 새동지와 만나게 되었다. 계의산은 이리역에서 대전까지 합석하여 오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자기 경력을 대화하던 중 우연히 상대방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쉽게 친교를 이루어 구국의 동지로 함께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전좌한과 김응선 동지는 곧바로 창의단에 가입함과 동시에 창의단의 일원으로서 이제 폭탄 제조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준비되었다. 전좌한은 자기가 직접 고안한 도안을 가지고 비밀리에 옥천읍 삼양리에서 유기그릇을 만들어 파는 배석규를 찾아가 도면을 근거로 놋쇠제 용기 6개를 주문했다. 거금 46원 70전을 주기로 하고 철저히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 놋쇠제 용기는 사제 폭탄의 표피로 10월 말 경 전좌한에게 인도되었다. 김응선은 전좌한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11월 초순경 제작 완료하고, 곧바로 인적이 드믄 옥천군 이원면과 충남 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진위산 속에서 폭발을 실험하게 되었는데 그 위력이 예상외로 훌륭하였다. 이들은 두 손을 맞잡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전좌한과 김응선은 이 성공 사실을 창의단에 보고하는 한편 폭파장소를 물색하였다. 거사 일행은 폭파장소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 다섯 곳을 선정하고 창의단에서 경비를 송금해오는 즉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5. 일제 헌병대에 사전에 탐지되어 폭파 계획 불발 그러나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로부터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김응선 동지가 국내에서 뜻을 같이할 동지를 확보하기로 하고,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선정 등을 전좌한과 김응선 동지는 치밀하게 숙의하였다. 1926년 1월 27일 창의단으로부터 전의사에게 거사 자금이 송금되어오자 김응선 동지에게 이를 인도하고, 창의단의 지시를 받기 위해 전좌한은 먼저 상경하여 계의산 동지와 거사 계획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한편 김응선 동지는 같은 마을 강청리에 사는 송암우 청년과 이원리에 사는 정명옥과 김운용을 경성 구경시켜준다고 포섭하여, 1월 28일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그날 밤 용산역에 도착하여 계의산의 마중을 받았다. 다음날 1월 29일에는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폭파장소로 선정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진일여관에 일행은 투숙하였다. 1월 30일 또다시 폭파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통 중국 요리집 광흥원에서 최후의 기념 회식을 마친 후 계의산 동지는 창의단의 거사 계획을 일동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거사일은 1926년 1월 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인 진일여관으로 돌아왔다. 계의산과 김응선 동지가 전좌한을 만나러 간 직후였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사전에 탐지되어 급습을 받았다. 이에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의 봉천으로 도주하였다. 전좌한은 거사 계획이 탄로 났음을 알고, 매제 신화수집 골방으로 피신하였다. 창의단의 폭파 계획이 불행히도 거사 직전에 일제 헌병대의 치밀한 수사망에 의해 다수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가자 전좌한은 경성의 매제 신화수집 골방 등에서 4개월을 은신하였다. 다행히 매제 신화수는 당시 북만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명망을 떨치고 있는 양기탁 선생과 비밀리에 통래 해오던 사이였던 것이다. 1926년 4월 7일 의사는 북만주 길림성에 망명해 있는 양기탁 선생을 찾아가기 위해 매제 신화수의 소개장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자기 뜻을 펼 중원의 만주로 교묘히 망명하였다. 정원득·김응선 등은 3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의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중국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북경(北京) 쪽과 연락하면서 창의단 조직을 재건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26년 7월경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에 붙잡혔다.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및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으로 정원득은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김응선은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정원득은 건국포장을, 1991년 김응선은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 저수지 공사 3년 만에 준공 2곳의 저수지 조성공사는 공사 기간에 큰 사건 등이 발생하였고 몇 차례의 설계변경하면서 당초에는 1926년 4월 29일에 준공식을 갖고자 준비하던 중 창덕궁전하(순종:李拓-이척)가 4월 25에 서거하여 부득이 연기를 하여 1926년 6월 24일 서부(흥림) 저수지 현지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가졌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장동혁(보령·서천/국민의힘) 의원이 충남 보령시와 서천군의 주요 현안 사업 추진을 위한 행정안전부 특별교부세 50억 원을 확보했다. 장동혁 의원실에 따르면 보령시는 ▲보령 가족센터 건립 15억 원 ▲미산 배수지 설치 5억 원 ▲LED 도로표지판 설치 공사 5억 원을 포함하여 25억 원을 확보했다. 또 서천군은 ▲서천생활체육관 건립공사 10억 원 ▲옥남 소하천 정비 사업 10억 원 ▲종합운동장 제2종 육상경기장 공인 5억 원을 포함하여 25억 원을 확보했다. 이는 보령시와 서천군이 확보한 특별교부세 50억 원은 역대 최대 규모로 지난 하반기에 확보한 46억 원보다 4억 원 가량 증가한 규모이다. 서천군의 경우 전년 대비 14억 원이나 증가했다. 이와 관련 장동혁 의원은 “이번 특별교부세 확보로 안전과 재난을 더욱 두텁게 대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지역의 주요 현안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라면서 “올해에도 예결위에서 활동하게 된 만큼 지역 숙원사업들이 해결되고 진행 중인 사업들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라고 밝혔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강신설 <서천신문사> 사장이 지난 26일 입원 중이던 군산 누가병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 12일 삼성의료원의 의료진으로부터 암 진단 후 15일 동안의 암 투병 끝에 생을 마감한 그의 나이는 향년 70세이다. 고 강신설 사장은 지난 1954년 서면에서 태어나 났으며 1989년 <서천신문사> 창간 당시 창간 구성원으로 언론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 이후 충청매일, 중도일보 등의 기자로 활동한 그는 지난 2003년 <서천신문사>를 창간한 박영조 전 사장으로부터 신문사를 인수해 20년 동안 일선에서 언론인의 책무를 이어왔다. 고 강 사장은 깔끔한 성격으로 꼼꼼한 자기 관리가 철저해 ‘베스트 드레서’로도 유명했다. 이는 평소 군민과의 민원 제기로 면담이 자주 이뤄진다는 점과 신문사 사장이라는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인의 재치 있는 입담과 특유의 ‘고집’을 살린 폭넓은 대인관계 활용은 <서천신문사>를 전국적인 지역 언론사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특히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한불매향’을 좌우명으로 기자들의 청렴과 혁신 경영을 강조하는 등 언론인으로서 괄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고 강 사장은 전국 지역신문사 사상 유례없는 최우수신문사 선정 2회를 비롯해 ABC협회가 인증한 유료 구독자 비율 전국 TOP3 등의 성과를 남겼다. 충남지역신문협회장으로 취임한 고인은 충남도 내 풀뿌리자치대상 행사, 일본 <오사키타임즈사> 자매교류를 통한 국제화, 출향 인사와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명사 초청 서천사람들의 밤 등을 개최했다. 또 <서천신문사> 신사옥 시대 개막, 지역별 향우회 출범 지원, 인터넷 방송국 개국, 서천사람들 월간 잡지 발간, 동백 사생·백일장·서예대회, 지역계몽 캠페인 전개, 지역기업과 연계한 불우이웃 돕기 등을 펼쳤다. 고 강신설 사장은 다양한 강연과 글을 통해서도 지역사회 갈등 해결과 지역 정신 계몽 활동에도 나섰다. 특히 고인은 ‘긍정의 힘으로 지역을 밝게’라는 캠페인을 서천군발전협의회 등과 함께 전개하는 등 변화된 지역 활성화에 남다른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고 강 사장은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을 불러 먹이를 나누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를 녹명(鹿鳴)이라 하는데 수많은 동물 중에서 오직 사슴만이 먹이를 함께 먹이고자 동료를 부른다”라며 평소 강연과 회의 등을 통해 지역 상생 발전을 강조했다. 또한, “현시대는 내 이익을 위해 상대를 잡아먹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 상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이타심’을 가져야 한다”라면서 “내가 잘살기 위해 남을 도와야 행복할 수 있다”라며 언론인의 활동에 열정을 쏟아왔다. 이날 갑작스러운 고 강신설 사장의 비보를 접한 김기웅 군수는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으며 수많은 정·재계의 각계각층 인사들도 고인을 명복을 빌었다. 한편 29일 판교 영명각에 안치된 고 강실설 사장과 송양점 여사 슬하에는 강태유와 강석민 2남을 뒀으며 형제로는 강신훈 서천군의회 의장, 강신두 부의장과 강영숙, 강인숙, 강경숙 씨 등이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공덕산 토석 채취 저지 대책위원회(위원장 전영수/이하 대책위)가 지난 27일 신청사 앞에서 마서면 소재 공덕산 토석 채취 인허가 반대를 위한 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책위은 “공덕산의 토석 채취 인허가는 아무런 명문도 없다”라며 “주민 갈등만 조장하는 토석 채취 인허가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자연훼손과 주민 생활 및 환경 파괴를 불러올 토석 채취를 결사반대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덕마을 최용혁 이장의 사회로 진행된 집회에는 나소열 전 군수를 비롯해 전익현 도의원, 김아진·홍성희·이강선 군의원들이 참석해 공덕산 토석 채취 저지에 대해 지지했다. 박병문 서천군동학농민계승회장은 “이번에 토사 채취 인허가를 막지 못하면 마을에 큰 피해를 볼 것이다”라며 “서천에도 동학농민군이 있었듯이 동학혁명군들의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꼭 지켜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공덕산에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가 서식하는 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대책위는 신청사 앞에 먹고 자면서 트랙터·콤바인 등 농기계를 대동하더라도 토사 채취 인허가를 막을 것이며 1인 시위를 포함해 반대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한편 대책위가 이날 김기웅 군수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일정상 관계로 참석하지 못해 집회에 나선 주민들의 아쉬움을 남겼다.
서천 언론의 큰 별이 졌다. 평생을 지역 언론발전에 헌신해 오던 <서천신문사> 강신설 발행인이 지난 27일 오후 7:35경, 향년 70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급서(急逝)한 것이다. 심야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로 지역 언론인들은 물론 서천군민 모두가 비통함에 잠겼다. <서천신문사> 강신설 사장은 서천군 비인면에서 태어나 평생을 지역 선도언론인 <서천신문사>에 몸담았으며 열악한 풍토와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역 언론발전에 혼신을 기울였다. 고인은 평소 ‘주민이 주인이 되는 언론, 소통하는 언론’을 강조했으며, 특히 고향을 떠난 출향 인사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고향 소식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 이민자들에게도 고향 소식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고인은 21세기 지방자치 시대의 참된 언론사 인식을 강조했으며,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을 경영철학으로 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고고한 지조를 후배 언론인들에게 몸소 실천했다. 특히 고 강신설 사장은 1998년 일본 <오사끼 타임즈>와 <서천신문사> 간 자매 결연을 맺고 매년 교차 방문을 통하여 한일 우호 관계 증진에도 이바지했으며 서래야 쌀, 한산소곡주 등 지역특산품 홍보에도 평생 심혈을 기울이셨던 서천지역 언론의 큰 별이었다. 고인은 사단법인 세종·충남 지역신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지방자치 시대에 부합하는 지역 언론의 역할과 지역 언론의 당위성을 주창하셨고 풀뿌리 언론의 선봉장으로 지역 언론인들의 귀감이 됐다. 특히 고인께서 지역 향토 문화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지대하다. 매년 동백 사생 백일장 서예대회를 개최해 어린이 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했고 지역인재 육성과 장학재단 사업에 쏟으신 열정은 후학들에게 높이 평가받을 발자취를 남겼다. 고인은 지난 2019년 <서천신문사> 30주년 기념식에서 “제시간에 맞춰 신문을 발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서천군민이 있어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데드라인을 지키지 않으면 신문을 발간할 수 없다는 압박감이 때로는 좌절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서천군민과 출향인사 그리고 애독자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뜻깊은 30주년을 맞는 일이 가능했다”라며 과거 원고지를 들고 충무로로 신문 편집과 인쇄를 위해 뛰어다녀야 했던 어려웠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감회를 밝힌 바 있다. 고인은 평생을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제 어디서든 언론인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후배 언론인들에게도 항상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정론·직필의 바른길을 인도해 주시며 후배 언론인들을 격려했다. 칠십 평생을 오로지 한 길 지역 언론에만 매진하며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판 적 없이 외길을 걸어오신 고인의 언론 철학은 남달랐다. 고인은 언론의 비판 기능 이면에는 긍정적인 대안 제시를 강조했고 언론은 권력기관과 힘 있는 사람들의 불편부당함과 부조리를 감시하고 비판, 견제하여 지역사회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생을 오로지 지역 언론발전에 헌신했던 서천 언론의 큰 별이 온 서천군민과 후배 지역 언론인들의 오열과 추모 속에 이제 영면에 들어갔다. 고인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 크지만, 이제 후배 언론인들이 그 큰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삐를 조여야 한다. 고인이 앞서가신 발자취는 너무나 크지만, 누군가는 따라가야 할 길이기에 후배 언론인들이 고인이 못다 이룬 지역 언론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고인이 뿌려 두신 씨앗을 키워 나가야 한다. 정보의 홍수라 일컫는 인터넷의 시대에서도 종이신문이 가진 사명은 있다. 활자가 가지는 의미는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이 다르다. 순간의 정보전달에 불과한 인터넷 정보와 비교하여 종이신문이 가진 언론의 사명은 사뭇 다르다. 고인이 평생 강조했던 것처럼 언론은 시대의 반영상이고 시대의 발자취를 활자에 담는 예술이며 역사의 단편이다. 오늘도 많은 언론인이 활자에 매료되어 원고지에 펜을 들어 기사를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밤을 새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비록 고인은 갔지만 고인이 남긴 고귀한 언론 혼(魂)은 후배 언론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찬란히 빛날 것이다. 고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발길이 무겁다. 하지만 고인이 후배 언론인들에게 남겨 준 사명감은 고인을 애써 떠나보내야 하는 사명감보다 더욱 무겁다. 고인의 영정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며, 고인과 영원한 이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동안 함께해서 행복했었노라고, 그리고 사랑했다는 말을 애써 다하지 못한 여운으로 남기고 싶다. 안녕히 가시옵소서.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한국중부발전 신서천발전본부이 지난 14일 충남 서천군 서면 소재 본부 강당 동백홀에서 ‘지역 학생들의 꿈과 희망을 응원하는 초여름힐링음악회’를 개최했다. (사)한국예총 서천지회와 협업을 통해 진행된 이번 음악회는 지역의 학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악기를 통해 꿈과 끼를 펼칠 수 있는 기회 제공과 전문예술단체에는 일자리 창출과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마련됐다. 이에 앞서 신서천반전본부는 지난 4월부터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문 강사를 통해 악기연주 교습을 진행했다. 이들은 이날 음악회를 통해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고 저마다 그동안 닦은 기량을 맘껏 펼쳤다. 이날 음악회는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Frühlingsstimmen, Op. 410 봄의 소리 왈츠’ 연주로 아름다운 무대의 첫 시작을 알렸다. 이어 이희정 국악인이 보컬로 나서 새타령, 꽃 타령 등 민요가 선보였으며 별주부전의 ‘난감하네’, 희망아리랑 등의 흥겨운 우리 가락으로 음악회장의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또 빅맨 싱어즈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투우사의 노래’, ‘바람의 노래’ 등과 서천청소년오케스트라의 ‘어벤져스’, ‘각설탕’ OST, ‘캐리비안의 해적’ OST 등의 영화음악 연주로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붉은 노을’ 연주를 통해 직장인들과 지역 학부모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정서적 편안함과 마음을 정화하는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서남석 신서천발전본부장은 행사 말미에 “일터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마음과 정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라며 참여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또 “앞으로 신서천발전본부는 지역 주민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천군민이 행복한 시간과 풍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ESG 경영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충청권 4개 시도지사와 국민의힘 원내지도부가 지난 26일 국회에서 만났다. 그들이 저마다 약속한 충청권 주요 현안 사업 해결방안 논의를 위한 이른바 ‘충청권 지역 민생 예산정책협의회’란 이름으로 말이다. 국민의힘 소속 이장우 대전시장과 최민호 세종시장, 김태흠 충남지사,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그리고 당에서는 윤재옥 원내대표, 박대출 정책위의장, 송언석 예결위 간사가 나왔다. 협의회는 시도지사들이 취임한 지 꼭 1년으로 이제 2년 차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시도지사들은 임기 4년 중 꿀맛 같은 1년이 어느새, 지나고 앞으로 주어진 임기 3년간 본격적으로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고난의 행군으로 접어든다. 더구나 오는 2026년 6월 지방선거와 2027년 3월 3일 치를 차기 대선을 앞두고, 이들은 그간 글(書)로, 말(言) 약속한 정책과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선 분주할 수밖에 없는 터다. 이장우 시장은 15년간 착공하지 못했던 2호선 트램 착공 현실화, 나노 반도체 국가산단 160만 평 지정, 우주 클러스터 3각 체제 구축, 방위사업청 이전 및 2027년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유치, 대기업 유치 등 많은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들 사업과 지역 현안, 국비 사업이 원활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될 수 있게 각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했다. 충청의 미래라는 김태흠 지사 역시 국민의힘 원내지도부의 충남도에 관심을 요청했다. 그는 서산 군 비행장 민항 설치, 충남혁신도시 복합혁신센터 건립, 충남혁신도시 칩·모빌리티(Chip&Mobility) 영재학교 설립, 2027 유니버시아드대회 경기장 신설·확충, 국방 AI·로봇·군용전지 등 5개 국방 연구시설 건립 지원을 요구했다. 최민호 세종시장과 김영환 충북지사도 각각 지역 현안과 내년도 국비 사업지원 등을 언급하며, 중앙당의 성원과 지원을 촉구했다. 이들이 각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나선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런 노력은 당연하기에 큰 감동을 얻기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도 지사중 일부 시도지사의 노력이 빛난 곳도 있지만, 1년간 대체 광역단체장으로 제대로 한 것이 없는 이도 있었다. 까놓고 말하면, 일부 현 시도지사가 1년간 제대로 역량과 미래희망을 보이지 못한 곳도 적지 않았다. 수년째 전임 4개 지역 시도지사가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사들이 맡아왔던 터라, 분위기와 정책 방향을 바꾸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은 간다. 또한 취임한 지 1년간 광역 지자체장이 무엇을 했느냐고 평가받기는 어폐가 있다는 항변도 있다. 그러나 이제 내달 취임 2년 차로 접어드는 만큼 전임 시도지사 정책의 미흡만 홍보하는 것도, 전임 시도지사 때 시·도청 조직이 말을 안 듣는다고 뒷말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왔던 충청 4곳의 시도지사를 지난해 6.1 지방선거에서 교체하지 않았나. 지금의 충청 시도지사는 지난해 6.1 지방선거 때 뭐라고 외쳐왔나. 현 시도지사는 당시 시도지사를 겨냥해 해당 시·도정 심판과 함께 자신이 시·도정을 맡아 충청인의 여망을 실현해줄 것처럼 외쳐온 사실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일부 지역에서는 현 지자체장이 이렇게 엉터리일 것이라면, 전임 지자체장을 잘 못 바꿨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측근들, 심지어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일부 인사들이 특정인을 내세워 금품수수행위나, 이권에 개입하고 다닌다는 제보도 여러 건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도지사 중에는 순수하고 지향점이 건실한 시민단체들도 멀리하고 있다. 선거 때 상대 후보와 가까웠다고 스스로 낙인을 찍어 거리를 두는 바람에 불협화음만 낳고 있다. 일부 시도지사의 행패를 대다수 언론뿐만 아니라, 지방의회, 시민단체가 24시간 주시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이제 취임 1년을 맞은 지자체장들은 겸허하게 시민들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지자체장들은, 선거 때만 머슴을 외치고, 당선 후엔 왕(王) 노릇을 한 바람에 ‘다시는 안 찍겠다’라는 유권자의 호된 꾸지람을 듣는 일부 국회의원의 모습을 답습해선 안 된다. 먼저 시도 행정조직에서 내 편, 네 편을 갈라 인사 불이익을 행사하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 그 공무원은 시도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도지사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취임 1년을 맡은 단체장들은 다시 한번 위민(爲民)의 뜻을 새겨, 진실하게 일해야 옳다. 시도지사라는 권력에 취하고, 즐비한 아부꾼들의 달콤한 말에 빠져 그 자리를 즐기기보다 애정 있는 쓴소리를 들어야 한다. 탐욕에 취한 그 주변 아부꾼을 당장 멀리해야, 선량한 주민들이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제대로 실력을 주민에게 보여달라.
우리고장 옛 한산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조상들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역사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책무이다.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한산 건지산은 서천군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한산군의 고을의 상징인 진산이다. 옛사람들은 고을의 진산은 삶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고 수호신으로 믿으며 삶의 풍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곳으로 여겼다. 이러한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옛 선조들이 살아온 한산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다가 남겨 놓은 것 들은 무엇이 있나 살펴보자. 1. 한산지역의 역사 한산지역은 고대 원삼국인 마한시대에는 54개국 중 소국으로 치리국국(致利鞠國)으로 오늘날 한산면, 마산면, 기산면, 화양면의 지역으로 한 부족국가 시대였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 마산현(馬山縣), 또는 마읍(馬邑)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건지산(乾止山)은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렀다.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산성을 쌓고 우두산성(牛頭山城)이라 하였고, 동성왕은 이곳으로 자주 사냥을 나오기도 하였다. 동성왕 23년(501년) 11월 이곳 건지산성에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도읍지 공주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당시의 치소) 즉 지금의 마산면 벽오리에서 유숙하다가 부여 임천, 당시 가림성(현 성흥산성) 성주인 제자백가는 인사의 불만을 품고 마포촌에서 유숙하던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다음 해(502년)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 우두산성(지금의 건지산성)에 진을 치고 장수 해명(解明)을 보내 백가를 잡아 오도록 하여 건지산성에서 목을 베어 白江(백강), 지금의 금강(錦江)에 버린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대동지지-1865년 사례 편] 건지산의 옛 지명은 또 한 차례 바뀌었다, 백제 무왕 30년(629년)에 고쳐서 마산성(馬山城)이라고 하였으며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 15년(655년)까지도 마산성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지산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나 이곳 건지산성(즉 마산성), 고려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류성이라고 하였고 3년간의 백제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를 걸쳐 고려시대에는 한산현(韓山縣), 또는 아성(鵝城)이라고도 하였다. 한산군의 읍성은 지금도 문화유적으로 남아있다. 2. 한산이 낳은 인물 고을의 진산인 건지산을 배경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인재가 태어나 명성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산 이씨(韓山 李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고령 신씨(高靈 申氏) 등이 있다. 한산이씨 시조(始祖)는 고려 숙종 때 호족으로서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건지산맥을 따라 안장된 시조 이윤경의 묘지는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 문장가이며, 우탁 역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상신(相臣)이 4명, 대제학(大提學)이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 개국 후 141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다.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간신들에 의해 배안에서 운명하였다. 건지산 자락인 한산면 고촌리 이곡과 이색의 옛 집터에 1610년 문헌서원을 창건하고 1611년에 사액을 받고 많은 인재를 양성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도에 훼철되었다가 1969년도에 이색의 묘역 옛 효정사 경내에 서원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한산팔경을 노래하다. 한산의 진산인 건지산을 중심으로 한산팔경을 낳기도 하였다. 숭정사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숭정산에 있던 사찰이였다. 이곳 崇井山(숭정산)은 옛 고려시대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폐사된 사찰지만, 확인이 가능하다. 그 당시 사찰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숭정사 불리오다가 폐찰 되었다. 팔영시의 기록을 보면 사찰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 선생은 1335년 8세 때 이곳 사찰에서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출처:독서처가서(讀書處歌序)> 목은 이색이 지은 한산팔경을 읊은 팔영(八詠)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숭정암송(崇井巖松) “8.9세 때를 생각하니/ 학당에서 놀았는데/ 환하게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나/ 쉬지 않고 이치를 찾아 외우기만 하였네.” 이곳 숭정산 정상에는 흰색의 차돌 바위가 솟아 있고 틈사에 분재 같은 소나무가 자랐음 50년 전 산림이 욱어지지 않았을 때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소풍장소로 즐기던 곳이다. 2) 일광석벽(日光石壁) 이곳 일광산(日光山)은 동·서로 두 봉우리로 자리하고 동쪽 봉오리는 중턱에는 일광사란 사찰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먼 곳에서 보면 벼슬아치의 관모 같아 일명. 관두봉(감투봉)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곳 관두봉 서쪽 편에는 이색 선생이 독서하던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 독서처가서 3) 고석심동(孤石深洞) 마산면 마명리 마을 안쪽으로 일명 고석굴(골)이라 하였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자연석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보호각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당시는 고석사(孤石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아마도 사찰에서 모셨던 미륵불로 폐찰 된 후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화로는 일제강점기 때 술 취한 공사 인부가 곡괭이로 미륵을 내려찍은 뒤 급사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영험이 있는 미륵불로 여기고 있다. 4) 회사고봉(回寺高峰) 마산면 안민리 마을 뒷산으로 회사(回寺)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곳의 의미를 팔영에서 설명하듯이 한산군의 사적으로 앞산 건지산은 국방의 중요시설인 건지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백제 동성왕 8년(486년)에 쌓은 고대 우두산성(牛頭山城)으로 백제 의자왕 때 마산성(馬山城)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5) 원산수고(圓山戍鼓) 화양면사무소 뒷산 금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작고 둥근 산이 원산(圓山)이다. 고려 때부터 봉화를 올리던 곳. 산 아래 강변포구에는 군사 주둔지인 수자리 있었다. 이곳 원산은 조선시대 한산군지(韓山郡誌)의 기록을 보면 기이(奇異)한 산으로 신령스러운 조짐이 있어 나무꾼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진포귀범(鎭浦歸帆) 진포(鎭浦)는 오늘날 금강으로 백제 때는 기벌포(伎伐浦) 또는 백강(白江), 고려시대에는 진강(鎭江). 진포(鎭浦), 장암포(長巖浦), 이곳 금강은 백제 의자왕 때 충신 성충, 흥수가 유배지에서 백제를 지키려면 백제의 관문인 금강 입구 즉 기벌포를 막아야 한다고 간언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인 백강전투, 백제부흥군, 왜의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 장소로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부흥운동이 실패하였다.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나세(羅世) 장군이 왜구 500척의 선단을 수장시킨 진포대첩(鎭浦大捷)의 장소는 장암진성(長巖鎭城)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천포(舒川浦), 금강(錦江)이라 하여오고 있다. 옛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채우고 포구로 돌아오는 모습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7) 압야권농(鴨野勸農) 이곳은 한산 건지산에서 동쪽 들판을 지칭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고지도에 나타는 지명으로 한산면 동산리, 단상리, 송곡리. 성외리(오라리 들) 앞 들판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백성의 생활 터전을 정립한 곳이다. 건지산 정상에 주변을 바라보면 서해와 남쪽으로 금강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멀리 부여 임천(林川-가림)의 성흥산성(옛 가림성)이 보인다. 8) 웅진관조(熊津觀釣) 지금 신성리 갈대밭인 금강변에 자리한 옛 나루터로, 전북 익산시 웅포면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와 왕래하던 중요교통로인 나루터로 활용하였던 곳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한양 도성으로 가려면 이곳 나루터를 이용하고 한산-마산-홍산-외산-청양-공주-유구-천안삼거리로 이어지는 중요교통로 활용하였다. 1894년 전북 지역동학군이 이곳 신성포 나루를 건너서 한산군청과 서천군청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용하던 교통로 금강하구둑이 막히기 전에 바닷물의 조수가 들어오던 시기에는 이곳 나루터 주변에서 일명 황색 조기잡이 배들이 많은 조업하던 곳으로 젓갈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였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자 들판에 새로운 마을이 들어섬 따라서 마을 이름이 새로 생겼다 하여 신성리(新城里)라 부른다. 4, 효자 맹사성이의 고향 축동리 한산면 축동리 마을의 옛 지명은 축산리(杻山里)였는데. 일제가 행정지명을 바꿔 축동리로 하였다. 축동리에는 고불 맹사성(孟思誠)의 옛 고향이다 맹씨 3대가 이곳에서 살았으나 묘지는 실전되고 단을 설치하였다. 축동리는 맹씨가 살았다 하여 맹동(孟洞)이라 부른다. 맹사성이 10살 때 모친이 돌아가시니 묘역을 매일 살펴보고 주변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멧돼지가 나무를 훼손한 것으로 보고 슬피 울었다. 그 후 그 멧돼지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 그는 효심이 지극하였고 하였다. 그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최고의 효자로 칭송하고 효자정려가 내려지고 마을 입구에 효자리(孝子里)라는 표석을 세워주었다. 또한 그의 부친도 효성이 지극하여 함께 효자리(孝子里) 표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한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三綱行實圖)에 실려 있다. 모친을 따라 아산 신창으로 이사 갔다. 그러나 축동리는 맹사성이를 낳은 고향이기도 하다. 5. 학자를 낳은 어성산(漁城山)과 일광산(日光山) 건지산의 자락이 흘러 남쪽으로 내려오면 한산모시관 앞산이 높이 솟아있다. 이산은 화양면 활동리 마을의 터를 잡은 어성산(漁城山)이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가 세거하고 있다. 신담(申湛)의 부친 신영원(申永源)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이기에 숭문동(崇文洞)이라고도 한다. 신담을 비롯하여 석북 신광수와 그의 아우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숭문8문장이 배출되었다. 이곳 어성산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신담의 호(號)가 어성(漁城)이기에 관련된 것으로 본다. 어성 신담의 외손자는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년(姜鶴年)으로 한산지역의 4군자의 한사람으로 칭송하였다. 또한 한산이씨 죽창한화(竹窓閑話)의 저자인 이덕형(李德泂)을 사위로 삼았다. 이와 같이 이곳 어성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고령신씨들은 한산지역의 쟁쟁한 가문들과 인맥, 혼맥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어성산의 맥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들었다. 즉 주산인 일광산이다. 일광산은 관두봉(官頭峰)을 두고 있다. 관두봉은 고려 때 일광사(日光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광사 아래에는 목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지금도 그 사찰 터와 독서당의 자리가 있다. 이곳 일광산은 한산8경인 일광석벽(日光石壁) 하나이다. 또한 일광산 관두봉 아래 구동리에는 1908년 기독교 구동교회(基督敎 九洞敎會) 교인들이 신학문의 도장인 사립숭광의숙(私立崇光義塾)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일광산을 주산으로 바로 아래 마을은 안동 권씨(安東 權氏)가 세거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다. 일광산 관두봉 아래에는 수초당 권변(權忭)과 아우 제월재 권성을 배향하였던 향현사(鄕賢祠)가 있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그 자리만 남아있다. 권변은 기산면 화산리의 화산사(華山祠)에 복설 배향된 우리 고장 인물로 효종 2년(1651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서 태어났다. 숙종 15년(1689년) 4월 증광전시에 급제하였으나 그 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후궁인 장소의(張昭儀-장희빈)를 중전으로 봉하면서 이를 축하하는 과거였음을 알고 수차례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국모(國母-중전)를 폐출하는 날에 과거를 응시하였음을 부끄러워하여 절의를 지키고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권성(1653∼17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제월재(霽月齋). 아버지는 양(讓)이며, 어머니는 한극겸(韓克謙)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지평·장령·집의·헌납·사간 등을 지냈다. 그 후 평안·황해·강원·함경·경상·충청도 등의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다. 1721년(경종1) 한성부판윤으로 신임사화를 맞아 사직 되었다가, 1725년(영조1) 노론이 집권하자 부총관·판윤·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물러났다가 형조판서·참찬 등에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한산지역은 인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한산모시와 한산소곡주로 그 명성을 낳고 있다. 한산지역은 신교육의 발상지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에 남다른 고장으로 일찍이 교육으로 인재를 배출하였다. 구한말 우리 고장 화양면 와초리에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선생이 가르치던 한영학교가 1906년 설립(1909년 인가)해 운영되었고 그곳 출신들이 마산 3.1운동을 주도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한산지역은 면 단위로서 초·중·고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김기웅 서천군수가 57년 만에 현청사의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 19일부터 서천읍 서림로 19 신청사에서 본격적인 ‘잘사는 군민, 살고 싶은 서천’의 시대를 알리는 첫 공식 업무에 들어갔다. 김 군수는 “신청사 시대의 개막은, 웅비하는 서천의 미래 100년을 견인할 원동력”이라며, “더 나은 행정서비스 제공함은 물론, 군민들과 더 가까이에서 소통하는 군정을 펼치겠다”라고 새 출발의 각오를 다졌다. 총사업비 475억 원을 투입, 지난 3월 준공된 신청사는 지난 13일부터 행정업무 공백과 방문 민원인의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일주일간 단계적으로 부서별 이전을 진행했다. 따라서 신청사에는 3개 국·2개 담당관·17개 과에 5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게 된다. 옛 서천역 주변에 연면적 1만 5,670㎡,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를 갖춘 신청사는 민원, 문화, 교육 등의 열린 복합 공간을 갖추고 있다. 지하 1층에는 지하주차장, 기록관, 지적서고, 재해구호물자보관창고 등이 자리 잡고 있다. 1층에는 인구정책과, 복지증진과, 민원지적과, NH농협출장소, 특산물 홍보/판매장, 꿈앤카페, 식당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시설정보과, 드림스타트, 체력단련실, 열린도서관, 북카페, 문화강좌실 1~4곳, 대회의실, 정보화 교육장 등으로 이뤄졌다. 3층에는 경제산업국장, 재무과, 투자활력과, 경제진흥과, 해양산업과, 수산자원과, 주민소통실 등이 있으며 4층에는 군수실, 부군수실, 행정복지국장실, 기획예산담당관, 홍보감사담당관, 자치행정과, 상황실, 주민소통실 등이 들어섰다. 5층에는 문화체육과, 관광진흥과, 건설과, 도시건축과, 환경보호과, 발간실 등이 있으며 6층에는 안전건설국장실, 안전관리과, 산림공원과, 전산통신실, 재난안전상황실, CCTV관제센터, 산불상황실 등이 입실했다. 특히 군은 군민이 자주 이용할 수 있는 민원실, 문화 강좌실, 열린 도서관, 북카페 등을 저층부에 배치했으며, 엘리베이터·완만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마련해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용 편의를 고려했다. 아울러, 사회복지실, 문화예술과, 관광축제과 등 사무공간이 부족해 외부로 분산됐던 부서를 신청사로 입주시켜 업무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엘리베이터, 완만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마련해 노약자와 장애인의 이용 편의를 고려했다. 한편, 군은 추후 각계각층의 군민들을 초청한 가운데 신청사 개청의 취지와 민선8기 서천군의 미래 비전을 알리는 개청식을 가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