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민의 우려 속에 치러진 제1회 장항 맥문동 꽃 축제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며 대한민국 대표 축제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마련됐다. 군은 지난 29일 폐막식을 끝으로 지난 25일부터 시작된 5일간의 축제 일정을 마무리했다. 군은 ‘보랏빛 물결, 기쁨의 연속’이란 주제로 열린 맥문동 꽃 축제 기간에 20여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특히 주말 휴일이 시작된 지난 26일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맥문동 군락지’인 송림산림욕장에 마련된 축제장에 수만 명에 인파가 몰려 말 그대로 축제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때문에 축제장에 입주한 대다수 판매업체가 기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는 등 대박을 냈다. 이날 일부 업체는 준비한 재료가 소진돼 판매를 중단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을 내는가 하면 일부 입주 업체들은 이원화된 축제장으로 다소 아쉬운 판매 결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서천지역 예술인들과 지역 출신 가수들이 ‘서천’ 알리기에 앞장을 서는 등 축제 흥행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25일 지역 출신 배우 김응수를 시작으로 가수 우연이 등이 출연해 고향인 서천의 자랑거리를 방문객들에게 홍보하면서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주말에는 지역 출신 가수 나태양과 성철이 MC를 자처해 각종 공연의 출연진 소개와 함께 지역 특산물 홍보에 나섰으며 나예원, 강유진 등도 온 힘을 다해 흥을 돋우기도 했다. 또한, 지난 26일에는 한국예총 서천지회가 주관하는 ‘유(YOU) 문화애(愛)유’의 세 번째 무대인 ‘맥문동 꽃밭에서’가 선보여 관객들의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 서천예총 산하 및 지역 예술동호회들이 다수 출연해 축제장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즐거운 주말 휴일 흥겨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축제 개막 앞둔 10일 전만 해도 가설 주차장 및 주변 정리가 미흡해 축제의 성공을 우려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이에 군은 기존 주차장 4곳을 비롯해 축제장 인근에 가설 주차장 3곳을 마련해 대형버스 등 차량 약 2,300대를 수용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이동식 화장실을 각 주차장에 설치하는 등 방문객 맞이에 나섰다. 또한, 주차장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경호경비 전문인력을 투입해 송림 마을 도로, 해양생물자원관 앞 4차선 도로 등 중점 교통구역을 통제하고 주차장 만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차량통제에도 나섰다. 이밖에 농촌 체험교육 농장, 농·특산품 홍보 판매전, 맥문동을 활용한 먹거리와 체험 부스 등 풍성한 체험 거리를 제공해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추억을 선사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했다. 특히, 장항 송림산림욕장 사이로 펼쳐진 맥문동 꽃밭은 발길 닿는 모든 곳에 자연 포토존으로 활용하고 곳곳에 맥문동 포토존을 설치하는 등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유도했다. 김기웅 군수는 “처음 열리는 맥문동꽃 축제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 주셔서 감사드린다”라며, “장항 송림산림욕장이 전국적인 명소로 발돋움하고 군민과 함께하는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키워나가겠다”라고 밝혔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김건희 여사가 충남 서천군 한산모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 여사가 김기웅 서천군수에게 한산모시문화제의 성공적 개최에 따른 감사함을 표하는 서한문을 보내는가 하면 광복절을 맞아 생존해 계신 애국지사에게 한산모시 적삼을 선물하는 등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군에 따르면 김 여사는 지난 23일 김기웅 군수에게 보낸 서한문에서 제33회 한산모시문화제가 국민적 감동과 성원 속에서 성황리에 마칠 수 있도록 노력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다. 김 여사는 서한문을 통해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 서천에서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라며 “한산모시문화제가 국민적 감동과 성원 속에서 성황리에 마칠 수 있도록 애쓰신 김기웅 군수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라고 전했다. 이어 “5만 서천군민과 서천군을 찾아 주신 관광객들과 함께 1500년 역사와 특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산모시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어서 뜻깊고 소중한 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산모시문화제가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나고 서천이 세계 인류 무형유산을 품은 도시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저도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잠자리 날개보다 아름다운 모시천을 엮어 내는 전승자 여러분들의 열정이 세계인의 가슴에 닿을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김 여사는 “한국방문의 해 명예위원장으로 한산모시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노력하겠다”라며 “김기웅 서천군수님과 5만 서천군민 여러분, 자랑스러운 전승자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앞서 김 여사는 지난 15일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과 생존 애국지사인 오성규 지사에게 앞으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무궁화 자수 한산모시 적삼’을 선물하기도 했다. 제공된 한산모시 적삼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인 방연옥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김기웅 군수는 “지난 6월 방문 이후에도 한산모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내 준 김 여사님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라며 “한산모시가 서천군민의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서천군 또한 전통 섬유 엑스포 개최 및 가공산업 연구를 통한 현대 모시 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인 상태로 모시 산업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보랏빛 물결, 기쁨의 연속’이라는 주제로 5일간 충남 서천군 장항 송림산림욕장 일원에서 열린 제1회 장항 맥문동꽃 축제가 주최 측 추산 20여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등 기대 이상의 호응 속에 막을 내렸다. 기대 반 우려 반속에 개최된 이번 축제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힐링 꽃축제로의 발전 가능성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매년 이맘때면 보랏빛 향연이 펼쳐져 수많은 관광객이 몰렸던 전국 최대 맥문동 군락지인 장항 송림 삼림욕장은 바다와 해송 그리고 맥문동꽃이 어울리는 자연 친화적 힐링 관광지라는 천혜의 관광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이번 제1회 장항 맥문동 꽃축제를 준비하면서 서천군은 기존 주차장 4곳을 비롯해 축제장 인근에 임시주차장 3곳을 더 마련해 대형버스 등 약 2,300여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 공간을 확보하여 축제장 주차 공간 부족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특히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장항산단로와 장항신항 도로는 향후 2,000여 대의 가용 주차 여력을 보였다. 유튜브 및 개인 SNS 등 새로운 관광 정보 채널이 장항 송림 맥문동꽃 축제의 홍보에 일조했다. 축제장을 찾은 대부분 관광객은 외지에서 찾아온 가족 단위 관광객들로 다양한 연령대였다. 외국인들의 방문도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이번 축제는 수제 맥주와 재즈(JAZZ) 음악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많은 초청 가수들의 흥겨운 공연이 관광객들에게 여름밤의 추억을 선사했다. 더더욱 맥문동을 이용한 지역의 특색 있고 다양한 먹거리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다양한 먹는 즐거움까지 제공함으로써 관광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동안 사회적 논란이 있었던 축제장 바가지요금을 근절하기 위하여 이번 축제는 주최 측에서 철저한 음식 가격 표시제를 시행한 것도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처음 개최되는 축제이다 보니 물론 여러 가지 미숙한 부분들도 지적되었다. 광활한 송림과 맥문동 단지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다 보니, 벤치 등 휴게시설과 포토존 등 사진 촬영 공간이 부족했던 점이 지적되었다. 전기, 수도, 가스 등 축제장의 기본 인프라가 미비했던 점도 지적되었다. 특히 공용 와이파이 서비스 등 첨단 서비스의 미비가 지적된 것은 옥에 티였다. 인접한 바다를 관광코스에 포함 시켜 다양한 갯벌 체험을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지적이 되었다. 대부분 관광객이 가족 단위이다 보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천갯벌에서 다양한 갯벌 체험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면 하는 관광객 바람이 있었다. 내년에 다시 열릴 제2회 맥문동꽃 축제는 이를 보완하여 축제의 규모를 넓히고, 바다와 송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더욱 개발하여 전국적인 축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장항 송림 맥문동 단지는 바다와 갯벌, 송림과 맥문동꽃 그리고 힐링이라는 독특한 관광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이들 관광인프라를 제대로 접목해 축제프로그램을 다양화한다면 세계적인 관광 축제로 장항 송림 맥문동꽃 축제가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번 축제가 충분히 보여주었다. 숙박시설의 부재와 전문식당의 부족이라는 부담감이 이번 축제에서도 여실히 지적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개선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맥문동꽃 축제가 전국 최대의 꽃축제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이다. 이제 축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축제는 준비되고 시작되어야 한다. 이번 제1회 축제에서 지적된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송림 맥문동꽃 축제가 전국 최대의 지역축제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장항 송림 일원은 이미 전국 최대의 맥문동 군락지로 8월이면 보랏빛 몽롱한 향연이 펼쳐진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충분히 알려져 있다. 축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마음을 힐링하고 추억을 새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축제는 없다. 장항 송림 맥문동꽃 축제는 바다와 갯벌, 송림과 맥문동꽃이 산책로로 연결되어 천혜의 축제장으로서의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제 장항 송림 맥문동꽃 축제를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키워나가야 하는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번 축제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충남 서천군 서천읍 소재 서천초등학교 어린이보호구역 내 다사랑치킨 서천점 앞에 지난 6월부터 운영 중인 신호등에 대한 실효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그간 신호등 체계의 문제점을 수차례에 걸쳐 수정을 거듭해 오다 운영되고 있지만, 교차로의 기형적 구조로 기존 점멸등으로 운영할 때보다 교통사고 위험에 더 노출되고 있다는 여론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서천읍 군사리 이장단은 지난 29일 좁은 시가지 도로의 폭을 넓히지도 않은 곳에 신호등이 설치하는 한편 좌회전과 직진 등을 동시에 신호하게 하는 등으로 운전자들의 불편을 가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평일과 휴일을 포함한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의 운영으로 차량이 정체됨은 물론 보행자와 신호등이 신호가 맞지 않아 사고 발생 위험성에 더욱 노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신호등 체계를 설치, 운영하기 전 주민공청회나 설명회 등은 사전에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신호등에 설치된 인근 상인들 역시 예전 점멸등으로 운영할 때보다 오히려 보행자와 통행 차량과의 접촉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출퇴근 차량이 줄지은 대기 신호에 마치 병목현상마저 연상케 하는 차량정체와 혼잡함이 지속되고 있어 어린이를 포함한 주변 상인들 은 물론, 차량 운행자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군사리 이장단은 현재 운영 중인 신호등 체계를 이전 점멸등으로 되돌리고, 다사랑치킨 서천점 앞 건널목을 다른 곳(새빛 안경컨텍트 앞)으로 이전해 원활한 차량 운행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청원서를 서천초등학교와 학교운영위원회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9월 5일 공청회를 열고 지난 6월부터 운영 중인 신호등에 대한 실효성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해 그 결과를 군청 해당 부서와 서천경찰서에 전달할 계획이라고도 전했다.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25일 같은 당 김상희 의원의 라임펀드 환매 중단 전 특혜성 환급수수 의혹에 대해 강력 반발했다. 금감원이 1조 5,000억 원대 펀드 환매 사태를 부른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자산운용 등 3개 사 재검사 결과와 김 의원의 연루설에 선을 긋기 위해서다. 그는 브리핑에서 “야당 중진 의원에 대한 악의적 흠집 내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이 투자한 라임마티니 4호 펀드는 자유로운 환매가 가능한 개방형 펀드로, 환매 중단 펀드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그는 “특수부 출신 검사가 금감원 자산운용검사국장으로 파견됐다더니, 겨우 한다는 게 야당에 대한 공작질인가”라고 맹비난했다. 금감원의 발표 결과 대로라면 매우 충격적이다. 내용을 보면 국회의원 상장사 등 특정 수익자를 위한 특혜성 환매, 수천억원대 횡령과 배임, 임직원의 사적이익 취득 등이다. 이는 금융. 자본시장 신뢰를 뿌리째 흔드는 중대한 범죄다.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라임사태와 관련한 특혜성 환매와 대규모 횡령, 그리고 정·관계 로비 정황이다. 라임펀드가 투자한 5개 사에서 발생한 2,000억 원대 횡령은 로비 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니 개탄스럽다. 더구나 그 대상이 정치권 등이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금감원은 횡령 자금의 상당액이 비정상적인 곳으로 흘러간 정황을 발견해 검찰에 통보했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그 용처를 밝히는 일이 남았다. 라임뿐 아니라 옵티머스와 디스커버리 펀드에서도 횡령, 펀드 돌려막기, 관련자들의 부정거래 등 범죄 혐의가 속속 드러났다. 그중에도 라임자산운용은 지난 2019년 10월 대규모 환매 중단 선언 직전에 다른 펀드 자금과 운용사 고유 자금으로 일부 유력 인사들에게 환매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특정인들에게 투자금의 손실이 없게 되돌려줬다는 점이다. A중앙회는 여기서 200억 원을 비슷한 방식으로 돌려받았다. 이에 반해 선량한 투자자들만 막대한 피해를 떠안게 됐으니, ‘이게 제정신인 나라인가’ 싶다. 아다시피 1조 5,000억 원대 환매 중단을 일으킨 라임·옵티머스·디스커버리 펀드 사태는 수많은 피해자만 생겼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 당시 정권 및 일부 여권 인사들의 연루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권 당시 금감원 검사와 검찰 수사에선 어떤 이유인지 의혹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지켜보는 피해자나 국민은 윤석열 정부의 검찰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에 눈이 쏠리는 이유다. 온갖 루머와 유언비어가 떠돌고 의혹들이 제기되는 만큼 철저한 수사로 범죄자들을 엄벌해야 옳다. 그것이 곧 한탕주의나 돈에 눈이 멀어 온갖 추태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또 불신의 바다가 된 자본시장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기회인 것이다. 온갖 횡행하는 다단계 사기, 자본투기, 보이스피싱 등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자본시장의 허술함도 이 기회에 바로 잡아야 한다. 여하간 김상희 의원 연루설도 명쾌하게 가려야 할뿐더러, 자본시장의 신뢰만큼은 분명히 세워야 한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예술인들과 지역 출신 가수들이 ‘서천’ 알리기에 앞장을 서는 등 제1회 장항 맥문동꽃 축제의 흥행에 힘을 보태는 열정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25일 지역 출신 배우 김응수를 시작으로 가수 우연이 등이 출연해 고향인 서천의 자랑거리를 방문객들에게 홍보하면서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주말에는 지역 출신 가수 나태양과 성철이 MC를 자처해 각종 공연의 출연진 소개와 함께 지역 특산물 홍보에 나섰으며 나예원, 강유진 등도 온 힘을 다해 흥을 돋우면서 서천 알리기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지난 26일에는 한국예총 서천지회가 주관하는 ‘유(YOU) 문화애(愛)유’의 세 번째 무대인 ‘맥문동 꽃밭에서’가 선보였다. 이날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전통예술단 혼’의 수준 높은 공연에 이어 생태학박사들이 함께하는 가족체험프로그램 ‘에코히어로즈’ 운영하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영화배우 겸 국악인 오정혜와 협연을 통해 ‘아리랑’을 불러 방문객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했으며 ‘전통예술단 혼’과의 콜라보 공연을 펼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울러 사진작가지부와 미술지부의 ‘꽃길 전시회’를 비롯해서 캘리그라피, 서양화, 맥문동 사진찍기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도 가족 단위 방문객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또 두레풍물연구회, 다섯손가락 기타동아리, 서면 색소폰동아리, 고고장구 서천지점 썬크루팀, 생활음악협회, 뷰티파워, 서천통기타, 서천 색소폰봉사단, 여정태악단 등이 멋진 공연을 선보였다. 이어 서천 아코디언동호회, 난타깡, 금빛소리 색소폰동호회, 아름다운선무용단, 밴드 동백, 서천 통기타&하모니카 봉사단 등이 출연해 공연하는 등 지역 알리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공연을 관람하던 한 관광객은 “서천지역 예술인과 지역 출신 연예인들이 보여준 남다른 지역 사랑을 보니 당연히 축제가 흥행한 것 아니냐”라며 “맥문동꽃 축제, 계속해서 대박 나세요”라고 덕담을 건넸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 제1회 장항 맥문동꽃 축제장에 입주한 대다수 판매업체가 기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는 등 대박을 냈다. 특히 일부 업체는 주말 휴일에 준비한 재료가 소진돼 판매를 중단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을 내는가 하면 일부 입주 업체들은 이원화된 축제장으로 다소 아쉬운 판매 결과를 올리기도 했다. 군에 따르면 맥문동꽃 축제장 지역 먹거리 판매장에는 11개 업체가 참여했으며 수제 맥주 판매장은 4개 업체, 농·특산물 판매장은 16개 업체, 체험장은 10개 업체 등이 참여했다. 지난 26일 주말 휴일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축제장에 몰리면서 지역 먹거리 판매장은 문전성시를 이뤘으며 한때 일부 업체는 먹거리를 구매하려는 관광객들의 긴 줄이 이어지는 진풍경도 연출되기도 했다. 이 업체 운영자는 sbn서해신문 취재진의 판매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한산모시문화제보다 몇 배 더 나은 판매량을 보인다”라며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 한 업체 운영자는 “대박이에요. 대박”이라면서 “업체들 모두 이번 축제 기간에 대박 났어요”라며 “저는 준비한 재료가 소진돼 판매를 중단해야 해 아쉽다”라며 마냥 행복한 표정을 보였다. 이는 주 무대에 마련된 탁자를 겸비한 의자 배치가 한몫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날 가족 단위로 축제장에 방문한 관광객들은 주 무대에 준비된 탁자가 있는 의자에 앉아 펼쳐지는 공연을 보며 저마다 먹거리 판매장에서 구매한 음식을 시식했다. 또 한쪽 탁자에서는 지인들과 함께 서천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제 맥주를 구매해 맥문동 치킨과 더불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방문했다는 일부 관광객들은 옛 생각이 나는 맥문동 막걸리에다 맥문동 파전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업체들은 축제장의 이원화로 주 무대 인근에서 운영하는 업체들보다 다소 아쉬운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축제장 입구에서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한 업체 운영자는 “한산모시문화제와 별반 차이가 없다”라며 “맥문동꽃을 보고 관광객들의 약 40%만 이곳을 찾아 판매량이 기대 이상은 아니라”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올 축제장 동선이 이원화돼 일부 업체들의 판매량이 크게 상승하지 못한 점에 대해 송구스러울 따름”이라며 “내년 축제에는 판매장에 입주한 모든 업체가 높은 판매량을 보일 수 있도록 동선을 일원화하는 등 입주 업체의 판매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 8 문장가 중 시인 진택 신광하와 그 형제들이 살았다. 당대에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관계의 진출이 너무 늦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갔다 숭문동 시인 진택 신광하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숭문동(崇文洞)은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의 옛 마을이름의 별칭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가계는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활동리(은골, 어은동)에 정착 세거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장남 신담(申湛-호 어성-1519∽1595)은 충청도관찰사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역임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1687∽1767)의 첫째부인 성산이씨는 석북신광수(申光洙1712-1775)와 기록 신광연(신광연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 낳으셨다. 석북 신광수는 아들5명을 두었으나, 동생 신광연과 신광하는 후사가 없어 신광수 아둘 중 4째 신석상(申奭相1737-1816)은 신광연(申光淵)에게, 5째 신보상(申甫相1743-1806)은 신광하(申光河)에게 각각 출계하여 후사를 이었다. 진택 신광하(申光河)는 영조5년(1729년)7월4일 한산군 남하면 활동리(숭문동)에서 태어났다. 그 후 석북 신광수(申光洙)와 3명의 동생 아들과 함께 숭문북동(현 대등리)에 새로운 집터를 마련 신축 세거하면서 숭문동 8문장가를 배출하였다. 1, 숭문북동에 새집 마련 1749년도2월15일자 숭문동에 신광수의 새집을 짓는 토지축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집의 위치와 방향 주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때는 1749년2월15일에 고령 신광하(申光河)는 감히 토지의 신령께 고하나이다. 집터는 뒤로 큰 산이 등지고 동북방향입니다. 집터의 자리는 신비스럽게 빛나며, 드높고 충만합니다, 좌우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하고 그 원기는 극에 달았습니다. 실로 이러함에 나의집터로 열고자하나니 새로 짓는 집이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석북 신광수)의 집이라 하게 하소서”--이하생략--【維太歲己巳二月己卯朔十五日癸巳。高靈申光河。敢昭告于土地之神。維嶽艮位。赫靈磅礴。爲虎爲龍。元氣所極。實開我基。先祖是宅--】집의 방향은 뒷산 어성산(漁城山)의 높은 산을 동북방향을 등지고 남서쪽을 향하고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을 갖춘 명당임을 밝히고 있다. 토지신축문은 석북 신광수가 짓고 동생 광하가 고하였다. 토지축문을 볼 때 진택 신광수의 형님들과 조카들이 함께 이웃 숭문북동(대등리)로 새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 시 창작에 몰두하며 산천 유람 진택 신광하는 시인으로 주목받던 1756년 사마시(司馬試-생원지사 과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진택 신광하의 집안은 남인으로 노론이 집권하던 정치 상황에서 형님 석북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후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진택 신광하는 과거시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시(詩)창작에 몰두하며 시인으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자연히 과거장(科擧場)나가는 것은 일종의 요식행위로 여기고 과거로 출세하는 것을 접었다. 보령 청라 외사촌 이우경(1724∽1813)와 과거장에서 보여준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1778년 음력8월20일 과거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진택 신광하는 과시장을 뒤로하고 56일간 2천여리의 금강산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날 조카 신위상, 신석상과 이별의 시를 지었다. “동쪽 성문 시냇물 우는 다리 지나/남녁 나그네가 이제 막 성문을 나서네/ 맑은 새벽, 안개와 서리는 축축하고/가을하늘, 나뭇잎과 풀은 성글어졌네./창공은 막힌 데 없어 전신이 홀로 활개치고/들판이 펼쳐지니 마음이 점차 가뿐해지네./떠나자!, 내가 좋아하는 것 쫒아서/아련하구나! 내 가고 싶은 데로 가리라./” 이렇듯 진택 신광하는 산수를 유람하며 즐겼다. 시인 진택 신광하는 세상과 천지가 가두지 못한 진정한 유랑자였다. 백두산 대택(大澤, 곧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호를 가진 진택(震澤)은 몸과 영혼의 거리가 끝이 없는 긴 사람이다. 진택 자신도 기꺼이 청광(淸狂:마음은 깨끗하지만, 상식과 맞지 않음)을 주체할 수 없어 진정한 노님을 꿈꾸는 사람이라 자처했다. 18세기 조선이 허락한 국토의 끝과 끝인 남쪽 강진과 해남으로부터 북쪽 백두산 절정까지 평생을 걸어 다닌 사람인 진택 신광하의 새로운 인간 탄생을 알림이 아닌가? “동방에 기이한 선비가 있어, 스스로를 진택(震澤)이라 불렀네(東方有奇士, 自號曰震澤)/세상 바깥에서 노닐었으나 마음은 담박(淡泊:욕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한 데 두었네/필마로 삼천리를 돌아다니고,/ 바람처럼 백두산에 올랐네/천지(天池)에서 갓끈을 씻고/대각봉(大角峰)에 기대 휘파람을 불었네/세상을 굽어보며 개미굴로 여겼고/하늘의 별들을 손으로 만졌네/ 바람에 맞서 호쾌하게 노래 부르니/ 그 소리가 산과 골짝을 진동시켰네/ --대제학 홍량호(洪良浩)는 만사(輓詞)로 진택 신광하를 애도하였다. 3. 생애 시 작품 2천수 남김 진택 신광하는 진택집(震澤集)에 2,000여수의 시를 남겼다. 진택집의 구성은시(詩)ㆍ서(書)ㆍ제문(祭文)ㆍ묘지(墓誌)ㆍ묘지명(墓誌銘)ㆍ잡저(雜著)ㆍ부록(附綠) 등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시는 저자가 옮겨 다닌 고장을 중심(中心)으로 엮어져 있는데, 남유록(南遊錄)ㆍ월중록(越中錄)ㆍ동해록(東海錄)ㆍ사군록(四郡錄)ㆍ동유록(東遊錄)ㆍ북유록(北遊錄)ㆍ백두록(白頭錄)ㆍ풍악록(楓岳錄)ㆍ서유록(西遊錄) 등의 편명(篇名)이 붙어 있다. 진택집(震澤集)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진택 큰형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원에서 1906년 석북 신광수 후손 신관휴(申觀休1838〜1908)가 간행한 활자본 창사본(滄蓑本)과 자료를 보충하여 신광수, 신광연, 신광하, 신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을 1975년도 간행하게 됨에 따라 알려졌다.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1917∽2000) 선생께서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진택 신광하는 영조32년(1756)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남쪽으로 지방을 유람하며 남긴 시가 진택집(震澤集) 남유록(南遊錄)에 잘 나타나 있다. 남유록에 대한 설명을 보면, “【公得司馬 南遊威鳳金山 仍爲踰嶺 轉至康海而歸】” 진택공께서 진사과시에 합격하고 남쪽으로 유람하셨는데 남쪽지방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威鳳마을)과 김제시 금산사(金山寺)을 유람하고 이어서 노령(蘆嶺)고개를 넘고 전남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을 돌아서 집에 도착하였다고 설명하였다. 4. 고향을 떠나며 빈곤한 생활의 연속 신광하의 형제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빈곤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반란 사건에 관련하여 충청도 청주에 사는 먼 친족 신천영(申天永)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까닭(석북17세 때)에 한때 고령신씨 전체가 정거(停擧-과거시험 금지)처분으로 과거응시 자체가 정지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한산지역 고령신씨들은 격쟁과 상소를 통해 한산지역 고령신씨 가문에 한하여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도 하였다. 1752년 신광하는 궁핍한 생활을 해소하기 위해 외가댁 남포 청라(도화동)를 찾아가 의탁하기도 하였다. 큰형 석북 신광수는당시 24세 신광하에게 써준 시를 보면 당시의 궁핍한 생활의 내면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내 아우가 어머님을 따라/보령외가에 가서 나그네 되는 일이 많구나/흰 구름은 외로이 제 절로 떠나가는데/꽃다운 봄풀이 시들면 또 어찌 하랴!/헤어지자니 시 쓰려는 마음이 문득 줄어들고/병든 탓에 봄철이 지나가는 것도 안타깝구나/너도 또한 나를 그리워할 줄 알겠으니/꿈속에서 쑥 자라는 언덕으로 나를 찾아오겠지/” 신광수 나이 41세 때 신광하 외삼촌인 이제암(李齊嵒1690∽1778)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1724∽1813)의 근거지로 신광수 가족이 자주 찾아 의탁하기도 하였다. 5. 다시 찾은 고향의 삶 그 뒤 7년 후인 1759년 신광하는 보령 외가에서 돌아와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계산-당뫼) 송강(松江-현 솔리천)으로 이사 해 해안가 방풍(防風) 약초를 캐어 생활하였다. 석북 신광수 큰 형이 그 소식을 듣고, “한 세상 살아가기 어렵고 어렵나니, 동생의 그런 삶은 실로 곤궁하기 때문이다”라고 탄식하며 아우 진택 신광하가 살고 있는 바닷가에 찾아가 심정을 시 남겼다. “온 산에 눈바람이 몰아치는 밤/형제가 등잔불 앞에 앉았네/옷과 음식은 추운 세밑이 걱정스럽고/공명을 이루기에는 흐르는 세월이 서글퍼지네/좋은 세상에 감히 바닷가에서 떠돌랴만/궁벽한 곳에서 밭가는 땅이나 얻고 싶네./살아가는 일일랑 우리 서로 힘써 보자/문장이란 것이 동전 한 푼 되질 못하니./” 바닷가에 동생 신광연(申光淵)과 신광하(申光河)가 방풍의 약초를 캐고 또한 바닷물을 길어다 소금을 굽는 자염(煮鹽)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신광하의 진택집 채방풍(採防風)의 시(詩)에 “약초 캐서 생활하며 나의 오두막집 바닷가에 있다—중략—영험스런 방풍뿌리는 오래된 것은 속이 비어있다. 옛 의약서적에 꽃은 약제로 쓰지 않고 뿌리만 약제로 쓰니 둘째 형(申光淵)께 채취해 약으로 드려야 하였지 하며 형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생애(生涯)라는 시(詩)에도 송강(松江)의 강위에 삼간집에 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해교잡영(海僑雜咏) 시 에도 ---장항 송강(松江-솔리천)의 계산(鷄山-당뫼)에 바닷물 끓여 자염하는 12개의 솥이 있다. 내일 해가 뜨면 하얀 소금 꽃이 피어나겠지 내일 아침에는 강경에 올라가 소금시장의 가격을 문의해봐야겠다”.---이하 생략— 라며 한때 광연 형님과 함께 방풍의 약초를 깨고 소금을 만드는 자염업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신광수는 20세부터 20여 년 동안 출입하던 과거 시험장은 씁씁한 낙방과 낭패감을 안겨주었으니 생활의 궁핍함을 말이 아니었다. 과거를 단념하고 1757년에 고향 숭문동으로 돌아온 후의 생활 모습이다. 1757년 19세 나이로 해남 석북 신광수의 장인 윤두서(尹斗緖)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간 여동생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온 여동생이 1759년 보령 외가의 농토를 얻어 떠나가는 뒷모습을 시로 담아두었다. “5월 신성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 하구나/ 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 /병중이라 만사가 쉬 서글퍼지는 구나/가난하면 골육도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군가?/어미 없이 줄줄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 일세/” 이렇듯 석북 형제들이 생활의 궁핍 때문에 헤어져 살아갔다. 6. 채제공의 천거로 늦은 관직 생활 시작 신광하는 번암 채제공의 도움으로 1786년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고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정조14년(1790)에 강원도 인제현감(麟蹄縣監)·우승지·공조참의를 거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좌승지로 승차 되었다. 1791년 63세에 대과 어제(御題) 어고(御考)에 급제한 후 재시험 어고에서도 급제 장원했으며 이듬해 정조 16년(1792년) 4월 24일 형조좌랑 때 정조가 시제를 낸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도 장원의 영예를 얻었다. 정조의 고과 평을 보면 1등은 병조정랑 진택 신광하(申光河), 2등은 검서관 박제가, 3등은 검교직각 이만수이며, 승지 윤필병, 겸검서관 이덕무·유득공은 삼상(三上)으로 공동 4등을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1등에서 4등까지 6편의 시에 대해서는 직접 평을 하였는데 1등을 한 신광하(申光河)의 시권에 대해서는 ‘소리가 있는 그림 같다 유성화(有聲畵), 2등 박제가의 시권은 ‘말을 알아듣는 그림 같다 해어화(解語畵). 3등 이만수 시권에 대해서는 ’시권이 좋다 시권가(試券哿), 4등 윤필병의 시권에 대해서는 ‘넉넉하다 담(贍)’, 이덕무의 시권에 대해서는 ‘아취가 있다 아(雅)’, 유득공의 시권에 대해서는 ‘모두가 그림 같다 도시화(都是畵)’라고 평가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휴직을 청하고 호서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질손 헌동(憲東)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산에 갔다가 6월 16일 나라의 경사를 맞아 하례하는 대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고된 일정으로 병이 났고 6월 30일에 성 서쪽 구교(臼橋)의 우거하던 집에서 향년68세로 세상을 떴다. 묘지는 파주시 검산동98-1 월롱산 남록 선영에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매년 이맘때면 보랏빛 향연이 펼쳐져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전국 최대 맥문동 군락지 충남 서천군 장항 송림산림욕장 일원에서 25일 ‘제1회 장항 맥문동꽃 축제’의 화려한 막이 오른다. ‘보랏빛 물결, 기쁨의 연속’이라는 주제로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열리는 이번 축제는 전국적 명소인 맥문동꽃을 비롯한 자연환경과 풍부한 먹거리 등의 제공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마련됐다. 이를 위해 군은 기존 주차장 4곳을 비롯해 축제장 인근에 가설 주차장 3곳을 마련해 대형버스 등 차량 약 2,300대를 수용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이동식 화장실을 각 주차장에 설치하는 등 방문객 맞이에 나섰다. 또한, 주차장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경호경비 전문인력을 투입해 송림 마을 도로, 해양생물자원관 앞 4차선 도로 등 중점 교통구역을 통제하고 주차장 만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차량통제에도 나선다. 축제는 개·폐막식, 축하공연, 예술단체공연 등과 함께 비주얼포토존, 힐링테라피, 맥문동꽃 팝업스토어, 꽃길 야행 등 체험행사가 펼쳐진다. 또 국립생태원·국립해양생물자원관 등 기관홍보 부스가 운영되며 농·수·특산물 판매전, 수제 맥주 시음&체험 등이 선보인다. 일자별로 살펴보면 축제 개막 당일인 25일에는 주 무대에서 ‘김차동의 FM모닝쇼’ DJ 김차동이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개막식이 오후 7시에 개최된다. 개막 공식행사 기념사·축사·퍼포먼스 등이 끝난 후 축하공연에는 서천지역 출신 김응수 배우와 우연이 가수의 축하공연과 함께 부활 등 초청 가수들의 특색있는 공연이 펼쳐진다. 토요일인 26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서천군·한국예총 서천지회가 주관하고 서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 각종 문화예술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맥문동 꽃밭에서’ 음악회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열린다. 27~28일에는 서천지역 출신 강유진, 나예원 등을 비롯해 초청 가수들의 7080 밴드공연과 지역 예술인, 청소년, 지역단체 동아리 등이 참여하는 공연이 선보인다. 아울러 맥문동을 활용한 농촌체험교육농장 등 체험행사와 먹거리 등을 선보이는 향토 업체의 다양한 프로그램 등도 운영된다. 김기웅 맥문동꽃 축제추진위원장은 “이번 축제를 통해 장항 송림산림욕장이 전국적인 명소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라며,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서천군의 대표 축제로 운영돼 장항읍이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분이 찾아 주시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한편, 축제가 열리는 장항 송림산림욕장에는 약 18만㎡ 소나무 숲에 600만 본인 전국 최대 규모의 맥문동 꽃밭이 조성돼 있어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스마트 축산단지 조성 추진에 따른 부지 선정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되고 있다. 충남도는 지난 18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보령·서천 부사간척지에 스마트 축산단지 조성 추진에 따른 ‘축산단지 조성을 통한 산업 융복합 방안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 설명회는 충남형 정보통신기술(ICT) 융복합 스마트 축산 시범단지 조성 계획의 올바른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축산단지 조성 대상지는 도내 보령·서천 부사간척지와 당진 석문간척지다. 설명회에는 김태흠 지사와 도·시군 및 농식품부 관계자, 한돈협회, 기업, 용역사 등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스마트 축사와 분뇨에너지화 시설, 도축장, 가공장 등을 구축하는 등의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 하지만, 보령·서천 부사간척지에 축산단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한 각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벌써 ‘웅천이냐’, ‘서면이냐’ 등의 부지 선정을 놓고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이는 서천군이 지난 2019년 가축분뇨와 음식 잔재물 등으로 발생한 가스로 전기를 생산하고, 처리된 액비와 퇴비가 비료로 재활용되는 사업인 ‘가축분뇨 공동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다 서면 지역주민들의 찬성과 반대의 견해로 인한 주민 간 갈등을 일으키는 등 논쟁으로 현재까지 사업 자체가 표류 중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서면 지역 한 주민은 “관광지에 분뇨 차량이 들락거리는 자체가 환경 오염이 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라며 “현재까지도 기업형 축사에서 발생한 악취가 인근 마을은 물론 춘장대 해수욕장까지 풍기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축산단지 조성지 선정을 두고 웅천지역 주민들도 반대 뜻을 표하며 반발하는 등 지역 간 갈등이 우려되고 있어 지역별 주민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세밀한 설명이 요구되고 있다. 이에 충남도는 충남형 정보통신기술(ICT) 융복합 스마트 축산 시범단지 조성은 지역별 산재한 양돈농가를 스마트 축산단지로 이동시켜 축산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축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지난 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전북대·공주대·세민환경기술 컨소시엄을 통해 ‘간척지를 활용한 스마트 축산 복합단지 조성 연구용역’으로 간척지 활용 사업계획을 수립한 것이며 현재 축산단지 조성 대상지에 관한 결정은 내린 바가 없다고 전했다. 아울러 지역 간 주민들이 도출한 의견과 자문 내용을 검토해 현재 추진 중인 용역에 반영하고 내년 상반기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축산단지 조성을 위한 설명회·공청회 등을 거쳐 다시 한번 의견을 수렴한 뒤 절차를 이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태흠 지사는 “산업단지처럼 소규모 농가들을 모아 규모를 키우고 그 안에서 도축-육가공-브랜드화-분뇨처리-방역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하는 게 미래 축산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라면서 “도는 스마트 축산단지를 바탕으로 축산농가의 생존권과 국민의 환경권을 모두 보장해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법에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라고 지방의원 의무를 명문화했다. 우선 지방의원의 본령을 되돌아보자. 선출직 지방의원은 벼슬이 아니다. 자신을 뽑아 준 군민들을 대신해 군정이 잘 운영되도록 견제와 감시를 하는 군민의 대리인이다. 따라서 선출된 군의원들은 조례를 제·개정과 함께 예산을 심의·결정해야 하고 공무원과 집행부의 예산집행에 따른 업무를 감시할 수 있도록 도덕성과 전문성의 역량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서천군의회가 변하지 않았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회의감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자질 부족 탓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강도 높은 쇄신으로 군의회 역할과 위상을 강화할 방도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비판에 대해 억울해할 의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원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을 반성하고 이제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 군민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친다는 이율배반적인 사안은 이제 접어두고 군의원들의 의정활동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자숙을 통한 결정과 역량 제고에 노력해야 한다. 선거 기간은 물론 평소 지역구 활동 시 붙임성 좋고 깨끗한 인물임을 내세웠던 그 얼굴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선거 때만 군민을 위한다고 허언한다면 정치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명심하기를 바란다. 군의원 그대들은 군민을 위한 의정활동을 되새기며 군의원이 벼슬이 아닌 군민의 대리인이라는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서천군의회를 보자. 마구잡이식 집행부 정책의 질타와 행정 집행에 대한 간섭은 기본이다. 게다가 군민은 지역 상권이 몰락하는 위기 상황에 놓여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 군민의 안위는 뒷전에 둔 채 잿밥에 눈이 멀어 제 역할을 못 하는 군의원들의 활동에 답답함을 보태고 있다. 일부 군의원의 경우 화합과 협치는 오간 데 없고 오직 정쟁에만 눈이 어두워 중앙정치의 꼭두각시 역할과 특정 정치인 줄서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지적도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정치가 깨어나야 한다. 정치인들 스스로가 정치의 격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군의회나 내년 총선을 겨냥한 특정 정치인 띄우기라는 양면의 칼날을 겨냥한 정치놀음보다는 민생현장에서 군민의 소리를 수렴하여 의정에 반영해야 한다. 앞으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군민이 정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치인 스스로가 정치의 품격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모름지기 정치란 군민을 걱정해 주는 것이라 했거늘 도리어 군민이 정치를 걱정해 주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군의회에 대한 자성 촉구의 목소리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기초의회마저 중앙정치의 줄서기 정치에 혈안이 되어 특정 정당 출신 의원들은 지역 유력정치인의 ‘병풍’ 노릇을 하기에 바쁜 모양새를 보여 안타깝다. 지역 현안에 대한 협치나 화합은 오간 데 없이 따로국밥 군의회로 변질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군의원들은 애써 귀를 닫고 있는 듯하다. 최근 한 군의원이 직접 민주주의 실현을 대신해 뽑아 준 군민에게 막말하는 사실로 결국 사과하는 추태를 보였다. 게다가 군민의 대의기관인 군의회의 수장인 의장은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의혹이 제기되어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피소되는 사태까지 다다랐다. 이로 인해 이것이 무슨 대의정치의 장인 군의회냐는 푸념 섞인 조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기초의회 무용론과 기초의회 폐지론까지 주장이 나오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선거 기간 군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목이 터지라 외친지 1년여 만에 숙였던 허리는 뻣뻣해진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군정 발전보다는 개인의 자존심과 권위를 앞세우려 한다는 군민의 지적을 군의원 모두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까지 군민이 군의원을 걱정해줘야 하는가.
[sbn뉴스=서천] 나종학 기자 = 진정 국면에 들어섰던 충남 서천군의회 이강선 의원의 갑질 의혹과 막말 파문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또한,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의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의혹에 대한 경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등 이 의원으로부터 시작된 불이 김 의장까지 옮겨붙었다. 나라 사랑 애국연대 시민단체는 지난 23일 서천군청 신청사 앞 집회를 통해 ‘이강선 의원의 공개 사과’와 ‘김경제 의장의 부정부패 의혹에 대해 철저한 수사’ 등을 촉구했다. 이 시민단체는 이날 ‘내가 하면 의정활동, 남이 하면 갑질?’ 등의 현수막을 내걸고 민간 영업장을 무단으로 사진 촬영한 것과 과도한 자료 요구한 의혹을 제기하는 등 이 의원의 의정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김경제 의장의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등 건물을 임대주고 예산으로 임대료를 챙긴 점을 비판했다. 성철 나라 사랑 애국연대 대표는 이날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강선 의원이 주민에게 ‘싸가지 없다’고 막말한 것에 대해 이해 당사자에게 사과했듯이 군민에게 공개로 사과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이는 ‘그런 일 없다’라고 했던 이 의원이 지난 15일 이해 당사자인 이희 서면의용소방대장에게 사과한 것은 결국, 이 의원이 ‘싸가지 없다’라고 막말한 것을 인정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성 대표는 “그동안 공무원·시민 단체장·동료 의원 등을 향한 갑질한 행위도 의심되는 만큼 군민을 대신하는 자로서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진상을 밝혀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는 “김 의장의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챙긴 의혹이 있다”라며 “김 의장의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성역 없는 경찰의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군민을 대신해 군 집행부를 감시·견제하라고 했더니 군청 예산으로 본인 건물의 임대료를 챙겼다”라며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 아니면 무엇이겠냐”라고 토로했다. 이는 최근 지역의 한 시민단체가 김 의장이 2022년도 예산심의 과정에서 알게 된 비공개정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한 의혹이 있다며 부정부패 방지법 위반에 따른 고발장을 경찰에 접수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성철 대표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워 주민을 대신해 감시·견제하라는 뽑아 줬더니 막중한 책무는 고사하고 군민을 무시하고 배신한 이들 모습을 보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라고 일갈했다.
올봄 한일 관계가 개선 조짐을 보일 때였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일본 여행을 다시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전에 일본에서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한 경험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수십 년간 운전하던 습관을 반대로 해야 일본에서 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일본에서는 왼쪽으로 회전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합니다. 저는 우선 왜 어느 나라는 운전대가 우리나라처럼 왼쪽에 있고 일본이나 영국은 오른쪽에 있는지 궁금하여 Chat GPT에 물어보았습니다. 영국은 자동차 운전대가 일본처럼 오른쪽에 있고 좌측 통행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기사들의 기마 전투 풍습에서 기인하였다는 설입니다. 기사의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이므로 길의 왼쪽을 타면 기사의 오른팔이 반대 방향에서 오는 적과 자유롭게 전투를 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전통으로 영국에서는 자동차가 나오기 이전부터 말과 마차는 좌측통행이 관습으로 자리 잡았고 자동차가 출현한 이후 자연스럽게 법제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자동차 운전하는 것이 모두 오른쪽에 있습니다. 영연방국가들과 일본이 그렇습니다. 반면 프랑스의 우측 통행 전통은 프랑스 혁명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혁명 이전에는 말이나 마차가 좌측 통행, 우측 통행 구분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영국처럼 기사들이 오른쪽 손을 편하게 쓰기 위해 좌측 통행을 하는 경향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옛 귀족 전통과의 차별화를 위한 방안으로 우측 통행을 규칙화하고 나폴레옹이 이를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킵니다. 혁명의 한 징표가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많은 나라에서 우측 통행을 법제화하였습니다.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 전통의 반대를 취하게 되어 우측 통행하게 되었고, 마차 시대가 자동차 시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측 통행으로 법제화되었습니다. 아무튼 전 세계는 오른쪽 운전석(Right-hand drive/RHD)과 왼쪽 운전석(Left-hand drive/LHD)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영국과 같은 RHD가 30~35%이고, 프랑스 같은 LHD가 65~70%입니다. 영국과 같은 나라 중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과 인도, 인도네시아가 있고, 프랑스와 같은 나라는 미국과 중국, 브라질 같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을 받아 오른쪽 운전석이다가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왼쪽 운전석으로 바뀐 경우입니다. 이처럼 통행 방향이 바뀐 나라들이 더러 있습니다. 1967년 스웨덴, 1968년 아이슬란드가 영국처럼 좌측 통행하다가 우측 통행으로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저는 일본에서 렌터카 운전에 도전하였습니다. 처음 핸들을 잡고 주차장에서 길로 나설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작은 길에서 T자형 큰길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좌회전하여야 하는데 신호를 기다리느라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냥 가도 된다고 해서 그제야 좌회전하였습니다. 30분을 운전하니 금방 적응이 되었습니다. 오른쪽 운전석 운전이 어렵다고 한 것은 대부분 시도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상상에 따른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 어색한 점도 있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도 있지만 아예 너무 어려워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내도 도전했는데 저보다 쉽게 적응하였습니다. 며칠을 운전하고도 여전히 적응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일본 자동차는 방향 조정 레버가 운전대 오른쪽에 있고 윈도 브러시 조정 레버가 운전대 왼쪽에 있어 우리나라와 정반대입니다. 우회전 깜빡이를 넣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왼쪽 레버를 올리던 습관대로 왼쪽 레버를 올려 윈도 브러시가 작동한 것이 수십 차례입니다. 둘째, 일본의 차선은 차량이 작아서 그런지 매우 좁습니다. 편도 1차선 시골길은 교행하다가 부딪힐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차량을 왼쪽으로 치우쳐 운전하게 되고 번번이 아내가 ‘차가 너무 왼쪽으로 붙었어요’라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셋째, 고속도로에서 추월차선은 맨 오른쪽에 있는 차선입니다. 오른쪽 운전석 운전이 서툴러 천천히 주행하겠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처럼 오른쪽으로 달리면 금방 추월하려는 차량이 따라붙습니다. 서행 차선은 왼쪽 차선인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적응하였습니다. 이제 일본에서 렌터카를 빌려 전국 어디나 여행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동경 시내에서도 운전하였으니까요.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경찰서가 최근 잇따라 발생한 흉기 난동 등 이상 동기 범죄예방에 대한 발 빠른 대처로 군민의 안전을 지키는 등 군민을 위한 치안 서비스가 빛을 발했다. 언론매체 등에 따르면 최근 서울시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에 이어 경기 성남시 분당 서현역 사건, 서울시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까지 흉악범죄가 잇달아 터졌다. 이로 인해 경찰청은 지난 7일 국민의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비상한 각오로 흉기 난동과 그에 대한 모방범죄 등 흉악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특별치안 활동을 선포했다. 이에 서천경찰서는 흉기 난동 등 이상 동기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전 경찰관의 비상근무에 돌입하고 다중 밀집 장소를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순찰을 강화하는 등 특별치안 활동에 들어갔다. 또한, 학교 주변 등 범죄 발생 위험지역을 대상으로 경찰관을 추가로 배치하고 서천군 CCTV 통합 관제센터에도 다중 밀집 장소에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행위에 대한 CCTV 화상 순찰 강화를 요청했다. 군과 경찰서에 따르면 CCTV 통합 관제센터는 지역 내 중요 범인 검거·청소년 비위·주취자·교통사고 현장 등 지난해 72건, 올 7월까지 27건 등을 112에 신고하는 등 주민 안전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관제센터 A 직원은 지난 9일 오후 2시 56분경 서천초등학교 인근 도로변 인근에 있는 주민 B씨가 비틀거리고 배회하며 주민·학생들에게 다가가 불안감을 조성하는 모습을 목격, 112에 신고했다. 신고받은 경찰은 신속히 현장에 출동해 학교 주변에 있는 B씨를 발견, 우선 안정을 취하게 한 후 귀가 조처했다. 경찰서에 따르면 B씨는 미미한 심신 미약 증세가 있어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었고 당시 복용하던 약이 모두 소진된 상태로 약 효능이 떨어져 비틀거리고 배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복용하던 약이 없었던 것은 B씨가 먹는 약이 처방전 없이 지역 약국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경찰은 설명했다. 이에 서천경찰서는 지난 21일 관제센터를 방문, 혹시 일어났을지 모르는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고, 안전한 지역사회 분위기 조성에 이바지한 A 직원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구슬환 경찰서장은 “세심한 관찰로 최근 사회적 이슈인 흉기 난동 등 이상 동기 범죄로 연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고해준 것에 감사하다”라고 전했다. 이어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작은 신고일지라도 안정적인 치안을 만드는 밑거름이라며 안전한 서천을 위해 24시간 밤낮없이 CCTV 모니터링으로 경찰의 눈이 되어준 근무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서천군 CCTV 통합 관제센터는 지역 내 490개소에 설치된 1,015대의 CCTV로 취약 지점 등을 화상 순찰을 꾸준히 하고 있다.
우리 고장 건암서원에 풍옥헌 조수륜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이 배향되어 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고 있다. 풍옥헌과 창강 선생의 서원배향과정과 광해군의 폭정으로 희생된 풍옥헌 선생에 대한 훗날 인조반정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서원창건과 사액 우리 고장 문산면 지원리(鳴谷-명곡)에 명곡서원(鳴谷書院)이 있었다. 건암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사액되지 못한 명곡서원은 현종 3년(1662년)에 사당의 형태로 창건되어 명곡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을 배향면서 1709년에 풍옥헌 조수륜과 창강 조속 부자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1713년 10월 24일 사액서원(賜額書院-조정의 인가서원)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이 되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2. 풍옥헌의 낙향의 생활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은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태어났고 서천 문조향(文照鄕-서지골 현 문장교회 옆 서쪽 마을) 즉 문장리(화리) 마을에 낙향하여 5~6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창강 조속(趙涑)을 낳았다. 풍옥헌 사후에 옛집에 후학을 강학하였던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산면 은곡리(한실)에서 대곡서당(大谷서당 훗날 雲圃堂)에서 강학하였던 평해구씨 구암(龜巖) 구병대(丘秉大1858~1916) 선생께서 일찍이 순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선생께서 우리 고장 풍옥헌 조수륜 선생께 사시던 구택(舊宅)에서 뵙고 가르침을 청하여 송병선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찬(撰)한 구병대(丘秉大)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풍옥헌 구택(舊宅)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문산면 건암리에 있던 건암서원이 훼철된 후 이곳으로 강학의 장소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3. 풍옥헌 구택은 홍주의병의 숙영지 홍주의병실록을 보면, 1906년 4월 19일 의병이 문산면 구변동(九邊洞)과 문장리(文章里)에서 숙영하면서 구변동에서 300여 명, 문장리(文章里)에서 300명을 더하여 다음날 1,000여 명의 의병이 서천읍성(舒川邑城)을 함락하고 서천군수 이종석(李種奭)을 감금하고 인장과 관청의 돈, 모슬포총, 탄환 등 무기를 탈취하고 여세를 몰아 비인, 판교, 남포를 거처 홍주성을 함락한 사실을 홍주의병록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풍옥헌 구택(舊宅)은 강학(講學)과 홍주의병의 숙영지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둔덕리(용학동) 풍옥헌 별장의 은거와 관직 생활 풍옥헌은 서쪽으로 서천읍 둔덕리(용학동)에 풍옥헌(風玉軒) 별장(別莊)을 짓고 3년간을 거처하였다. 조수륜은 선조 38년(1605년) 50세에 대흥 현감(大興 縣監)으로 제수되었다가 2년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광해 3년(1611년) 56세에 평택 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1612년 김직재(金直哉 1554~1612) 옥사(獄事)의 무고로 형신(刑訊-죄를 심문하며 고문의 형벌)을 받다가 감옥에서 57세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622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여 복권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또한 아들 창강 조속(趙涑)은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인조반정 참여 공신)에 올랐으나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원한을 갚기 위해 참여하였기에 공신등록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병조참판(兵曹參判) 추증되었다. 5.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사건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의 억울한 죽음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던 소북파(小北派)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獄事)로 광해군 4년(1612년) 2월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申慄)이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경립(金景立, 일명 濟世)을 체포한 뒤, 유팽석(柳彭錫)을 시켜 무옥(誣獄-무고한 죄목)을 꾸미게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신율(申慄)은 체포된 김경립의 동생 김익진(金翼辰)에게는 8도(八道)에 각각 대장(大將), 별장(別將)을 정해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며, 김경립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김경립의 동생 김익진(金翼辰)에게는 8도도대장(八道都大將)이 김백함(金白緘)이며,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金直哉)의 실직(失職-직업을 잃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모역하였다고 진술하게 하였다. 봉산군수 신률(申慄1572∽1613))은 김직재와 그의 아들 김백함을 역모의 주모자로 몰았다. 황해병사 유공량(柳公亮)과 감사 윤훤(尹暄)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고 김직재를 체포하여 조정으로 보냈다. 김직재를 국문하였고, 아들 김백함, 김직재의 사위 황보신(皇甫信) 등이 모진 고문을 받고, 김백함은 자기가 역모의 주모자이며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진릉군(晉陵君)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이들은 고문에 못 이겨 황혁(黃赫 1551~1612)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왕의 형인 순화군(順和君-선조의 6남)의 양자인 진릉군(晉陵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라고 진술했다. 황혁(黃赫-순화군의 장인)은 곤장을 맞고 옥사하였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과 조카인 진릉군(晉陵君)도 역모죄를 가하여 죽였다. 황혁(黃赫)은 당시 신천(信川-황해도)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진릉군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의심했다. 풍옥헌 조수륜은 황혁(黃赫)의 처남이기도 하다. 6. 궁류시와 권필의 죽음 권필(權韠-지족당 權讓의 종조부)은 광해군의 비 유씨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남겼다. “宮柳靑靑 花亂飛 /궁궐의 버들푸릇푸릇하고 꾀꼬리는 요란하게 나는구나/滿城冠蓋 媚春暉/성에 가득찬 벼슬아치들은 봄볕에 상긋기리네/朝家共賀 昇平樂/조정에서는 함께 태평의 즐거움을 하례하는 차에/誰遣危言 出布衣/누가 시켜 위태한 말이 선비의 입에서 나오게 하였나.”라고 지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가 지었음이 발각되어 친국 받을 때 백사 이항복(李恒福)은 울며 임금 광해에게 말했다. “경솔한 선비의 한 때 망년된 시로서 어찌 형장(刑杖)질 하는데 이를 것이며, 이 일이 역옥(逆獄)과 관계가 없는데, 만약 중한 형을 시행하여 죽음에 이르면, 어찌 성상의 덕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개 이 시(詩)가 무심하게 지은 것은 아니고 비록 지적한 뜻이 있으나 또한 어찌 중형을 할 정도에 이르겠습니까?”하고 재삼 울면서 간청하였으나 광해가 듣지 않았다. 뒤 해남으로 유배되는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다다랐을 때 행인들이 주는 동정의 술을 폭음한 다음 날 장독으로 죽었다. 그 뒤 이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져서 최유해, 정호선, 정경세, 등 26명은 석방되었다. 권필(權韠)은 1623년 인조반정 뒤, 복권되어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7. 김직재의 옥사(獄事)의 배경 조수륜의 매형인 황혁(黃赫)은 봉산군수 신률(申慄)과의 과거 집안 간에 다툼으로 원한을 갖고 있었다. 광해군 일기를 보면, 광해 4년(1612) 신률의 집안과 황혁의 집안 간의 원한을 논한 기사가 보인다. “살펴보건대 신률의 조부 신점(申點)이 황혁의 부친 황정욱(黃廷彧)과 집이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기축년 여름 황정욱(黃廷彧)이 퇴근하는 길에 화살이 그의 수레에 맞았다. 도졸(導卒-하인)이 달려 따라가서 화살을 쏜 사람과 따지다가 그와 싸움하여 상처를 입었다. 화살을 쏜 사람은 신률(申慄)의 형 신열(申悅)이었다. 그 소행을 형조에 보고하여 잡아다 다스리려 했으나 숨어버려 잡지 못하였다. 그 뒤 황정욱(黃廷彧)의 집에서 고용 노비 한 사람을 얻어 집에서 일을 시켰는데 그 노비가 몰래 황정욱의 침실에다 뼈를 묻어놓고 저주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신문하니, 노비가 말하길 본래 신열(申悅)의 부친의 노비인데 형 신순일(申純一)이 전의 일로 원망을 품고 저로 하여금 거짓 고용 노비 노릇을 하면서 흉측한 짓을 행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정욱은 그 노비를 형조에 송치하였는데, 옥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풀어주었다. 이와 같은 집안의 원한으로 인하여 황혁(黃赫)을 역모를 가담하였다는 무옥을 논하고 있다. 8. 권필의 형 권도 귀양 권필의 형 권도(權導)도 죄를 입고 해남(海南)으로 귀양 갔는데 떠날 때에 시를 짓기를, “신의 죄 산 같으니 죽음도 달게 받겠는데/ 임금의 은혜 너그럽게 용사하여 강남으로 귀양가오/갈림길 이르러 특별히 무궁한 한(恨)이 있음은/ 자애로운 부모님의 연세가 여든셋이기 때문이라네.”라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듣고 슬퍼하였다는 <속잡록>에 실려 있다. <공사문건>의 기록에 권필이 일찍이 족인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누웠을 때 광해군(임금)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이 마침 왔다. 주인이 권필을 발로 차면서 말하기를, “문창(文昌)대감이 왔소” 하니, 권필이 눈을 부릅뜨고 한참 보다가, “네가 유희분인가? 네가 부귀를 누리면서 국사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냐? 나라가 망하면 네 집도 망할 것이니 도끼가 네 목에는 이르지 않겠느냐.?” 하였다. 유희분은 말을 못하고 기가 막혀서 가벼렸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권필(權韠)의 화는 순전히 궁류 시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9. 풍옥헌 사위 이덕수(李德洙) 연좌죄에서 구해 주다. 조수륜의 사위 이덕수(李德洙 1577〜1645)도 역모로 형신을 하려 하자, 이덕형(李德泂-어성 신담 사위), 이항복(李恒福), 최유원 등이 적극 변호하여 사위 이덕수를 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수륜은 신원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하여 조수륜을 좌승지에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임금이 죽은 신하에 대한 제사)하였다. 또 귀양 가 있었던 사위 이덕수(李德洙)가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덕형(李德泂)의 장인 어성 신담(申湛) 선생은 고향이 화양면 활동리(은골)이다 10. 창강 조속(趙涑)의 인조반정 참여와 공신녹권 사양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에 인조는 권필, 조수륜, 황혁(黃赫 : 조수륜의 매형)등에게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관직에 임용)하도록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수륜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조수륜은 풍양인으로 응교 조정기(趙廷機)의 아들인데, 기묘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 성혼(成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힘쓰고 절조를 굳게 지켰으며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을 낙으로 삼다)하였으며 후생을 가르쳤다. 일찍이 대신의 천거를 받아 늦게야 음관(蔭官)으로 벼슬에 나아가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그가 떠난 뒤에까지 고을 백성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그러다가 임자년 김직재 옥사 때 서찰 문제로 체포되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조수륜의 셋째 아들 창강 조속(趙涑)이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올랐으나 극구 사양하여 제외되었다. 조수륜의 첫째 아들 조척(趙滌)은 부친이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자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고 호소하였는데, 열 손가락 손톱이 모두 빠졌다. 조수륜이 죽자 3년을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탈상 뒤에도 묘 옆에 기거하면서 애통해 하다가 사망하였다. 이에 인조반정으로 조척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였다. 11. 인조반정 후 고향에서 청빈하게 삶을 마감 창강 조속(趙涑)은 장령과 김제군수, 임피현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이 이루어진 뒤 즉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 서울에 발길을 끊었다. 만년에는 눈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는데도 운명에 편안하여서 애당초 병을 앓지 않았던 사람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병을 칭탁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조속이 74세로 사망하자 왕조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장령 조속(趙涑)이 죽었다. 아비는 현감 조수륜(趙守倫)인데, 광해군 때에 억울하게 죽었다. 조속이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인조반정할 때 참여한 공이 많았는데, 일이 이루어진 뒤에 단연코 공훈록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그의 뜻을 고결하게 여겼다. 효종 때에 사헌부 사간원에 발탁되었는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는데도 태연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솜씨가 있어 필법이 세상에 전해진다.”하였다. 조수륜의 동생 조수익(趙守翼)의 7대 후손 영의정을 지낸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익종(翼宗)의 대왕대비(신정왕후) 조대비(헌종 모친)로 한때 수령첨정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