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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서천수리조합설립과 봉선·흥림저수지 조성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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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의 최대저수지는 봉선저수지와 흥림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도부터 현재까지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고 있는 2곳 저수지의 조합설립과 그 추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00년 전 조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의 농수원의 최대 저수지는 동부저수지(봉선저수지)와 서부 저수지(흥림 저수지)이다.

 

1926년부터 서천군 농업용수를 전담하여 오고 있는 2곳의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설립하여 100여 년을 걸쳐 사용하는 서천군의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농업용수의 확보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보고이다.

 

일제는 산미증식 계획의 일환으로 1923년 4월 2일 자로 조합원 2,179명, 3,500정보(10,500만평) 면적의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서천 수리조합 설치를 허가하였다.

 

 

1. 수리조합 설치 참여 인물

 

조합설치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은 일본인 가타끼리, 미야지마, 兼平虎一(겸평호일:초대 조합장) 등이며, 서천지역 조선인은 서천 두왕리 김영두, 장항 솔리 추교영 등이었다.

 

1922년 10월 1일자로 조합설치인가 신청서에 조합창립자는 대표적 인물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장 坂木宮次(판목궁차)외 일본인 5명, 조선인은 화양면 봉명리 이상구(李庠求), 화양면 창외리 이승휴(李承休)가 신청하였다.

 

이승휴는 당시 화양면장, 1924년에 충남도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이상구는 서천보통학교 훈도와 서천군청 직원을 거쳐 1927년 총독부 군수를 역임하였다.

 

 

2. 추진과정의 난관

 

설치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설치의 조건에 조합원 1/2 이상과 조합원 토지 면적의 2/3 이상의 소유주가 찬성해야 하는데, 조합원 54%, 토지소유자 70.6%의 동의를 얻고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일본인의 대지주와 조선인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편법총회를 자행하는 등 물의를 빚자 일부 반대자들은 읍면별 2명씩의 대표자를 선정하여 대표 회의를 열고 총독부에 설립인가를 취소하도록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서천지역 126개 마을 2.230명이 연명 날인 한 탄원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하였는데, 대표의원으로 나석주(羅錫周), 조남천(趙南天), 고광규(高光圭) 등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답변은 허가에 대하여는 철회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3. 공사 규모와 수몰 지역 마을

 

2곳의 저수지 총공사비는 1,810.000원(당시 쌀 1석 22원), 저수 면적은 동부(봉선)저수지는 211정보(633,000평), 서부(흥림) 저수지는 118정보(354,000평)이다.

 

동부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옛 마을인 내설월리(內雪月里), 외설월리(外雪月里), 반월리(半月里), 신월리(新月里)를, 삼월리(三月里)로 변경하였다.

 

또한 봉암리(鳳岩里), 선돌리(仙乭里), 지장리(支壯里)를, 봉선리(鳳仙里)로 변경하였다.

 

봉선리 부엉 바위산은 옛날 부엉이 서식지였기에 붱 바위산으로 불리고 있다.

 

1923년 동부(봉선)저수지 조성공사로 인하여 내설월, 외설월, 반월과 소야리(所也里)일부, 벽오리(碧梧里) 일부, 봉선리(鳳仙里) 마을 내 선돌(仙乭) 일부, 봉암(鳳岩) 일부와 신봉리(新鳳里) 일부의 마을이 수몰되었다.

 

 

수몰된 마을 가구는 약 30여 가구(1가구당 평균 6명) 180여 명이 이주하였다.

 

마산면 벽오리는 백제시대에 한산군(韓山郡)의 옛 고을 마읍(馬邑)으로 고을을 다스리던 치소(治所)였다.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자주 이곳으로 사냥을 나오기도 한곳이다.

 

동성왕 23년(501년) 11월 한산 건지산성(당시 牛頭山城)에 사냥을 나왔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혀 도읍지 공주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포촌(馬浦村) 즉 지금의 마산면 벽오리(碧梧里)에서 유숙하다가 부여 임천, 당시 가림성(현 성흥산성) 성주인 제자백가는 인사 불만을 품고 마포촌에서 유숙하던 동성왕을 자객을 보내 살해하였다.

 

그다음 해(502년)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군사를 이끌고 우두산성(지금의 건지산성)에 진을 치고 장수 해명(解明)을 보내 백가를 잡아 오도록 하여 건지산성에서 목을 베어 백강(白江), 지금의 금강(錦江)에 버린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출처 : 대동지지-1865년 사례편)

 

 

또한, 서부(흥림) 저수지 조성으로 매몰된 마을은 종천면 지석리(支石里-괸돌) 일부, 석촌리(席村里-봇밑) 일부, 흥림리(興林里) 일부, 판교면 등고리(登古里) 일부, 발계리(發桂里) 일부, 동지리(冬至리) 일부가 수몰되었다.

 

4. 조선총독부 청사 등 폭파용 폭약 빼돌린 사건 발생

 

흥림저수지 공사 기간에 창의단(倡義團) 김응선(金應善) 등이 조선총독부청사 등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사건 발생하였다.

 

흥림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던 정원득은 종천면 지석리 소사조수리조합 공사장(현 종천 흥림저수지)에서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의 발파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창의 단원(倡義團員)이었던 김응선(46세)은 9월 초순쯤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으로 폭약인 다이너마이트를 구하고자 흥림저수지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지석리에 사는 매제 정원득(鄭元得·29세)을 찾아갔다.

 

김응선은 한 달 가까이 매제 집에 머물면서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몰래 빼돌린 다이너마이트 10개, 뇌관 10개, 도화선 1장 5척을 입수하고 매제에게 수고비로 30원을 주었다.

 

김응선은 귀향길에 이리역에서부터 동승한 계의산(桂義山)이란 창의단 소속의 새동지와 만나게 되었다.

 

 

계의산은 이리역에서 대전까지 합석하여 오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자기 경력을 대화하던 중 우연히 상대방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쉽게 친교를 이루어 구국의 동지로 함께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전좌한과 김응선 동지는 곧바로 창의단에 가입함과 동시에 창의단의 일원으로서 이제 폭탄 제조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준비되었다.

 

전좌한은 자기가 직접 고안한 도안을 가지고 비밀리에 옥천읍 삼양리에서 유기그릇을 만들어 파는 배석규를 찾아가 도면을 근거로 놋쇠제 용기 6개를 주문했다.

 

거금 46원 70전을 주기로 하고 철저히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 놋쇠제 용기는 사제 폭탄의 표피로 10월 말 경 전좌한에게 인도되었다.

 

김응선은 전좌한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11월 초순경 제작 완료하고, 곧바로 인적이 드믄 옥천군 이원면과 충남 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진위산 속에서 폭발을 실험하게 되었는데 그 위력이 예상외로 훌륭하였다.

 

이들은 두 손을 맞잡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전좌한과 김응선은 이 성공 사실을 창의단에 보고하는 한편 폭파장소를 물색하였다.

 

거사 일행은 폭파장소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 다섯 곳을 선정하고 창의단에서 경비를 송금해오는 즉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5. 일제 헌병대에 사전에 탐지되어 폭파 계획 불발

 

그러나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로부터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김응선 동지가 국내에서 뜻을 같이할 동지를 확보하기로 하고,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선정 등을 전좌한과 김응선 동지는 치밀하게 숙의하였다.

 

1926년 1월 27일 창의단으로부터 전의사에게 거사 자금이 송금되어오자 김응선 동지에게 이를 인도하고, 창의단의 지시를 받기 위해 전좌한은 먼저 상경하여 계의산 동지와 거사 계획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한편 김응선 동지는 같은 마을 강청리에 사는 송암우 청년과 이원리에 사는 정명옥과 김운용을 경성 구경시켜준다고 포섭하여, 1월 28일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그날 밤 용산역에 도착하여 계의산의 마중을 받았다.

 

 

다음날 1월 29일에는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폭파장소로 선정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진일여관에 일행은 투숙하였다.

 

1월 30일 또다시 폭파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통 중국 요리집 광흥원에서 최후의 기념 회식을 마친 후 계의산 동지는 창의단의 거사 계획을 일동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거사일은 1926년 1월 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인 진일여관으로 돌아왔다.

 

계의산과 김응선 동지가 전좌한을 만나러 간 직후였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사전에 탐지되어 급습을 받았다.

 

 

이에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의 봉천으로 도주하였다.

 

전좌한은 거사 계획이 탄로 났음을 알고, 매제 신화수집 골방으로 피신하였다.

 

창의단의 폭파 계획이 불행히도 거사 직전에 일제 헌병대의 치밀한 수사망에 의해 다수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가자 전좌한은 경성의 매제 신화수집 골방 등에서 4개월을 은신하였다.

 

다행히 매제 신화수는 당시 북만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명망을 떨치고 있는 양기탁 선생과 비밀리에 통래 해오던 사이였던 것이다.

 

1926년 4월 7일 의사는 북만주 길림성에 망명해 있는 양기탁 선생을 찾아가기 위해 매제 신화수의 소개장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자기 뜻을 펼 중원의 만주로 교묘히 망명하였다.

 

정원득·김응선 등은 3월 1일을 기해 다시 서울의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중국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북경(北京) 쪽과 연락하면서 창의단 조직을 재건한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26년 7월경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에 붙잡혔다.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및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으로 정원득은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김응선은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정원득은 건국포장을, 1991년 김응선은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 저수지 공사 3년 만에 준공

 

2곳의 저수지 조성공사는 공사 기간에 큰 사건 등이 발생하였고 몇 차례의 설계변경하면서 당초에는 1926년 4월 29일에 준공식을 갖고자 준비하던 중 창덕궁전하(순종:李拓-이척)가 4월 25에 서거하여 부득이 연기를 하여 1926년 6월 24일 서부(흥림) 저수지 현지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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