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레이건 전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존 F. 케네디와 함께 인기가 높다. 그는 퇴임 후에도 지지율이 60%이상이었다. 취임 당시 미국은 역대 민주당정부의 무능으로 경제는 최악이었다. 높은 이자율과 경기 둔화가 동시에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비대해진 정부 권력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바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다. 큰 줄기는 감세, 정부지출축소, 민영화와 금융정책 등으로 잡았고, 여기에 담았다. 그리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효과가 곧바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감세에 인해 세입이 줄고 감가상각을 가속화시켰다. 세수 감소는 연방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다. 레이건은 휘발유세 등 간접세를 인상, 재정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국가 재정 지출 감소가 경기 둔화로 이어져 일시적인 경제 공황도 나타냈다. 레이거노믹스가 효과를 나타낸 것은 볼커의 고이자율 정책 때문이다. 이 정책이 먹히면서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다. 레이건은 정부규제를 깨고 민간 기업중심으로 정책을 폈다. 또 그 유명한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고 선언했다. 일자리 확대역시 민간기업의 기(氣)를 살리니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작은 정부와
정부는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물론 새로운 경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양축으로 하는 한국판 뉴딜을 제시하였다. 지난 5월 28일, 한국중부발전은 동백정해수욕장 복원사업 기본계획 수립 결과를 주민과 언론에 발표하였다. 동백정해수욕장은 지난 1983년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을 위해 서천화력 1, 2호기를 건설하며 매립되어 37년간 지역 주민과 국민에게 잊혀진 서해안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런 동백정해수욕장이 신서천화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건설이행협약 사항으로 한국중부발전에서 2023년 완료를 목표로 복원을 추진한다. 동백정해수욕장 복원사업은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가능한 발전 정책을 뜻하는 그린뉴딜의 대표적인 사업이라 생각한다. 그린뉴딜사업이란 기후변화대응과 에너지 전환 등 환경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기부양과 고용촉진을 끌어내는 정책으로 환경과 사람이 함께 더불어 가는 정책이다. 한국중부발전은 미세먼지 및 저탄소 에너지 정책의 일환으로 2017년 서천화력 1, 2호기 조기 폐쇄를 결정하였으며, 동백정해수욕장 복원사업을 통해 조성될 바다가 공기 중 탄소를 흡수(블루카본)하여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데 크
선배기자에게 예전에 들은 얘기다. 퇴임할 무렵 가장 기억 남는 취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1.21사태’를 꼽았다. 기자 2, 3년차일 때인 1968년 1월21일, 그 당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북한 ‘124군’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충격적인 사건을 취재했을 때다. 그가 생포된 김신조에게 침투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정희 모**를 따러 왔수다.” 였다. 이를 TV나 라디오로 보고 들은 국민들은 크게 놀랐다. 북한의 만행은 이것만이 아니다. 북한은 ‘1.21 사태’ 이틀 뒤인 1월 23일 동해안에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해서 북으로 끌고 갔다. 세상이 경악했다. 해외 언론은 제 2의 6.25 발발을 예상했다. 내외신은 ‘감히 미국함정을...’하며 사실상 한반도 전쟁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니 국민들은 크게 불안해 떨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약칭 박정희)은 대북정책을 자주국방강화로 전면 수정했다. 박정희는 2월 7일, 경남∼전남을 잇는 경전선 개통식 축사를 통해,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이제 우리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해야 한다. 내 고장은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면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겠다”고 천
세상의 명언들을 명상해 보면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예지를 가다듬어 보는 최민호 교수의 사색 칼럼을 매주 싣습니다. 최 교수는 대전출신으로 평생 공직자로 살아온 충청인입니다. 오래전에 세종시 연동면으로 이사, 10년 가까이 세종에서 살고 있습니다. 필자의 주요경력은 ▲현재 홍익대 초빙교수, 행정학 박사로 ▲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정자치부 소청심사 위원장(차관) ▲충남도 행정부지사·기획관리실장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추진 위원회 위원 등 역임 하였고 ▲대전 cbs라디오 '최민호의 아이스크림' 방송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주> ‘금을 훔치는 자, 사람을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 중국 이야기지만, 제(濟)나라에 매우 탐욕스럽고 재물을 좋아하여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어 영화를 누릴까 궁리하는 게 하루 일과인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의관(衣冠)을 잘 차려 입고 시장으로 구경을 갔다. 그때 그는 금을 팔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느닷없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금을 한웅큼 움켜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금을 팔던 사람은 ‘도둑이야, 저 놈이 내
지난해 서천군은 국토교통부에서 항공보안장비 시험기관으로 지정한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의 전국 지자체 대상 공모에서 공공기관인 ‘항공보안장비 시험인증센터’를 군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경쟁력을 뚫고 유치에 성공했다. 그동안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던 항공보안장비의 국내 생산을 촉진하고 장비 사용자의 신속한 사후관리(A/S) 등을 위하여 국토교통부에서 항공보안장비 성능 인증제를 본격 시행하면서 이를 수행할 국내 최초의 시험인증센터가 2023년까지 서천군에 구축되는 것이다. 항공보안장비는 테러 방지를 위해 폭발물·무기 등을 탐지하는 성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증을 통한 성능검증이 필수적으로 항공보안법에 의한 엑스선검색장비 등 총 8개 종에 대하여 성능인증제가 운영된다. 따라서, 본격적인 성능인증제 시행으로 국내 공항의 항공보안장비 대내외 신뢰성 제고는 물론 외산 장비 대체로 인한 국부유출 최소화, 보안검색장비에 대한 국내 기술 확보를 통해 서천군의 산업 패러다임을 4차 산업 도시로 전환하는데 기여할 전망이다. KTL에서는 생산 유발효과 4843억 원, 취업 유발효과 2239명을 기대하고 있으며, 항공보안장비 성능인증제가 항공뿐 아니라 철도역사, 항만, 국가주요시
해마다 7월이면 그 해 하반기의 경제정책방향이 발표된다. 내용에는 소비·투자 촉진 방안, 규제개혁 방안, 고용방안 등이 주로 담긴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지난 1일 발표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 상황을 감안, 다음 달 초로 잡힌 일정을 한 달이나 앞당겼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밝힌 하반기 경제정책은 예상대로다. 코로나19 사태 극복과 침체 늪에 빠진 경제에 활력에 맞춰졌다. 거기에는 소비·투자 촉진 방안이 담겼다. 또 문재인 정부 집권초 내놓는 규제개혁 방안에다, 일자리 확대도 골자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해외로 나간 국내 기업이 다시 돌아오는 리쇼어링(U턴)기업에 대한 내용이다. 파격적 인센티브도 담고 있다. 물론 리쇼어링은 갑자기 나온 얘기가 아니다. 지난 이명박 정부 때부터 정책으로 추진돼 온 것이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선진국들도 2008년 금융 위기를 교훈삼아 이를 실행한 지 오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우선주의를 고집하며 미국 기업의 U턴을 고집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도 리쇼어링을 지난 2017년 대선 때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어 지난달 취임 3주년 특별 연설에서 한국 기업의 U
'왝 더 독'(Wag the dog)이란 말이 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란 뜻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의미다. 주로 주식시장에서는 흔히 선물시장(꼬리)이 현물시장(몸통)을 좌우할 때 '왝 더 독'이란 말을 쓴다. 이를 소재로 나온 영화가 있다. 제목도 ‘왝 더 독(배리 배빈슨감독)’이다. 미국 대통령선거과정에서의 공작정치, 꼼수정치를 다른 작품이다.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재선에 도전한 대통령의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다. 백악관에 견학온 걸 스카우트 학생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백악관은 재선가도에 위기감을 느끼자, 정치 해결사 브린(로버트 드 니로)을 불러들인다. 그는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백악관은 브린의 제안대로 생소한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포장한다. 그러면서 반(反) 알바니아 감정을 부추긴다. 꼼수를 알아채지 못한 언론들은 B-3 폭격기의 전진배치와 미군의 이동을 연일 보도한다, 그럴수록 전쟁발발 가능성은 높아간다. 브린의 꼼수는 한 수 더 뜬다. 급박하고 생생한 상황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헐리우드의 유명한 제작자 모스(더스틴 호프만)에게 도움을 청한다. 모스는 할리우드의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총동원, 긴박한 현장을 재현한다. 이 가상
김옥선 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었다. 나와 같이 충남 서천이 고향이다. 그는 여성이면서 하이칼라에 기름을 바르고 늘 정장차림인 남장 정치인이다. 정치 활동 내내 골수 야당인이었다.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나 김대중(DJ),김영삼(YS),이철승이 이끄는 야당에 합류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남장 여성의원이라는 것 외에도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떨어졌으나 부정선거 소송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재검표를 통해 당락을 뒤집었다. 그를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저격수로 불렀다. 장기집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1975년 10월 8일 국회 대정부 질의 사흘째인 사회분야 질의에김옥선 의원이 다섯 번째 질문자로 나섰다. “… 135억원이 들었다는 이 국회의사당의 첫 국회에서 발언대에 선 본 의원은 영광과 기쁨보다는 죄책감과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웅장한 건물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오늘 우리 의회는 ―·―·― 한갓 장식물에 불과하게끔 되어버린 정치현실 때문입니다. … 국민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만능이 된 행정부를 상대로 무엇을 물어보고 또 무엇을 시정(是正)을 촉구한다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이런 좌절감은 비단 본 의원만의 느낌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정권을 비판하거나, 별의별 올가미를 씌워 탄압했던 시절이다. 보안사와 민정당만 보이고, 야당과 검찰, 경찰, 국정원은 있으나 마나였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야당 정치인이 있었다. 제11대 초선인 민주한국당 한광옥 의원이었다. 그는 전두환 집권 2년차인 1982년 10월 7일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정치부 기자 입문 바로 직전이라 아직도 생생하다. 그후 국회를 출입하면서, 청와대를 출입하는 기자로서 한광옥의원 또는 대통령실장을 마주했으나, 표정이나 모습은 늘 그대로다. 어찌보면 느긋한 중년 신사랄까. 아니면 세상의 불의를 보고 호통치는 애국지사랄까. 그것도 아니면 약자를 끌어안고 권력자에게는 호통치며 글을 쓰는 노(老) 기자랄까. 어쨋든 이런 분이 이 시대에 있다는 것은 늘 행운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패거리 정치에 때묻은 우리 사회에, 불의를 불의인지 알면서 침묵하는 이 나라에 이 분이 있다는게 기분이 좋았다. 법보다 돈, 주먹이 가까운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를 함께 쓰는 이 시대이기에 말이다. 40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찾기 위해 국회회의록을 뒤졌다. 그랬더니 , ‘아 이런 정치인도 있었구
때가 되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코로나19도 지나갈 것이라 믿지만 코로나 이후 군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가 몰고 온 최악의 경제 위기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삶을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지 110일을 넘어서고 있는 가운데, 서천은 4월 11일 미국에서 입국한 재외교포가 확진 판정을 받으며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 발생 즉시 천안의료원으로 후송, 이동 동선을 공개하고 방역소독을 실시하여 확진자 접촉으로 인한 가족, 이웃 등 1, 2차 감염 피해를 막았다. 이후 현재까지 우리 군에는 추가 확진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지역사회 확산방지를 위해 군과 군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촘촘한 방역활동과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이뤄낸 성과이다. 따스한 나눔의 바람도 서천군 이곳저곳에서 답지하였다. 장항 원수농공단지에 근무하는 중국인 노동자는 월급의 반인 100만 원의 성금을 내놓았다. 매달 월급의 대부분을 고향에 보내는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가 내민 100만 원의 성금은 그 이상의 가치로 특별함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코로나 극복을
정직한 후보라는 영화가 있다. 4.15 총선에 앞서 지난 2월 개봉된 화제의 작이다. 장유정 감독의 정치코미디 영화다. 위선과 거짓말이 그 소재다. 지난 2014년 브라질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흥행작이 원작이다. 능란한 거짓말에다, 겉과 속이 다른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이 주인공이다. 그는 제21대 총선에서 4선에 도전했다. 주상숙 그에게는 암 투병중 모았던 10억상당의 재산을 기부한 김옥희(나문희)할머니가 있다. 그는 할머니가 암보험 있는데도 보장받지 못하자 1인 시위를 벌였다. 모두가 승산이 없다지만,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이겼다. 그 자금으로 할머니의 뜻대로 ‘옥희재단’을 설립,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다. 그래서 유명해졌다. 정치를 하면서 그의 가증스러움이 드러났다. 사람들 앞에서는 싸구려 옷과 신발로, 그리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척했다. 하지만 밤늦게 아파트를 몰래 나와 저택에 가서 지낸다. 새 신발을 헌 신발처럼 보이게 일부러 밟아 더럽혔다. 심지어 금배지를 달기위해 살아있는 할머니는 죽은 것으로 꾸밀 정도니까. 먹고 노는 남편 봉만식(윤경호)을 구박한다. 또 시어머니에게 물불 안가리고 화풀이를 해댄다. 숨어사는 할머니는 ‘상숙이가 거짓말을
충청도에서 여당 국회의장과 야당 국회부의장이 한꺼번에 탄생한 때가 있다. 지난 2012년 4월 11일 치러 구성된 제19대 전반기 때다.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5선인 강창희 국회의장이었고, 야당은 더불어민주당 4선의 박병석 국회부의장이었다. 공교롭게도 강 의장은 대전중구에서, 박 부의장은 대전 서갑구에서 금배지를 더했다. 둘 다 대전출신으로 고교 선후배다. 두 사람 모두 정치 분야가 전공이 아니었다. 강 의장은 육사를 나와 군에 있다가 제12대 때부터 의원으로 활동했다. 박 부의장도 중앙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베이징특파원등을 지낸 언론인이다. 당시 국회의장단이 구성된 뒤 두 사람에게 19대 국회상(國會像)을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강 의장도, 박 부의장도 말을 맞춘 듯이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두 사람모두 충청인의 기질 그대로 ‘꼼수를 모르는 정도’만 걸어온 터라 기대를 가졌다. 더구나 19대 국회가 개원도 하기 전부터 그해 연말에 있을 18대 대선분위기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의 존립이 걸린 대선에 매달리다보면 국회는 개원 초부터 막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마침내 그해 7월2일이 돼서야 제19대국회가 개원됐다. 예상처럼 지각개원
연 연전에 시인인 정성태 칼럼니스트의 글에 보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그의 뼈있는 말이 어쩌면 내 생각과 똑같던지 말이다. 그는 당시 야당이란 것들이, 진영의 권력을 독점하는 현실이 기막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정권의 민생침탈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야당을 향한 쓴소리다. 그는 ‘아랫목만 찾는 것들이 야당이랍시고’라고 했다. 온돌방에는 아랫목과 윗목이 있다. 온기가 있는 아랫목과 온기가 덜한 곳이 윗목이다. 그래서 대개 집안의 어른이 안방의 아랫목을 차지한다. 그러나 어론이 아랫목을 비우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비슷한 예로 골목대장이 있다. 우리는 한때 영남. 호남, 충청의 골목대장을 3김 씨라고 불렀다. 골목마다 3김씨가 있으니, 정치 조무래기나 잡범들이 설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정치권 일각에서 ‘3김정치 청산’이 정치개혁의 구호로 쏟아졌다. 마치 시대적 사명이 3김씨 퇴장인양 그것으로 옮겨갔다. 세월 속으로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렇다면 정치문화는 그들의 말처럼 나아졌을 까. 오히려 3김씨의 자리가 워낙컸던 때문인 지 우리의 정치는 혼란과 혼돈 속에 있다. 3김시대에는
YS계(김영삼의 상도동계)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골치 아픈 사람’으로 기피한 적이 있다. 그 유명한 ‘이회창의 YS 항명사건'을 두고하는 말이다. 문민정부가 취임 첫해, 연말 이회창은 제26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의 취임일성이 걸작이다. 그는 내외신기자들에게 ‘대통령의 방탄총리’, ‘대독(代讀)총리’,‘행사용 총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신을 폈다. 앞서 그는 중앙선관위원장 때 정치인들과 맞서 싸웠다. 1989년 강원도 동해시와 서울 영등포을구 재보선 당시 후보 전원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그러더니 동해시 선거구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를 매수, 사퇴시킨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친필로 경고했다. 또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이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보낸 서한은 대통령의 선거개입이자 위법이라며 문제를 삼았다. 그러자 여당 내에서 반발이 일자 사표를 던졌다. 정치권력 앞에 공권력이 무너진 것이다. YS 정부출범 후 첫 감사원장일 때도 일화가 있다. 감사원장 취임기자회견에서 "청와대, 국군기무사령부 등 어느 기관이든 법 규정에 따라 감사하겠다", "현 정권에 관련된 정치적 비리라 하더라도 성역없이 엄정한 감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소불위의 청와대비
우리나라의 최초의 국회가 처음 문을 여는 날부터 의원들은 다퉜다. 서울 세종로 중앙청에서 열린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회식 때이다. 건국 후 처음 뽑힌 제헌의원들이 역사의 현장, 첫 개회식장에서 옥신각신 다툰 것이다. 의원 좌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함과 삿대질이 난무했다. 지방출신들은 ‘출신 시·도별로 앉자’고 주장했다. 서울 출신들은 ‘가·나·다순’으로 앉자고 맞섰다. 또 다른 쪽에서는 ‘제비뽑기로 하자는 안을 냈다.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금 앉은 대로 알아서 앉는 방식’이 됐다. 또 충돌했다. 사회를 누가 볼 것인 가였다. 한쪽에서는 ‘나이순으로 하자’고 하면 , 한쪽에서는 ‘아니다, ㄱ·ㄴ·ㄷ순으로 하자’고 떼를 쓰는 것이다. 당시 198명을 보면 무소속이 84석으로 가장 많고 이어 이승만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당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이 2석, 그 밖이 11석이었다. 그러니 의견이 모아질 리가 없었다. 결국 ‘최고 연장자인 이승만 박사로 하자’고 티격태격하다가 이승만이 임시의장이 됐다. 임시의장은 곧 초대 국회의장으로, 부의장은 해공 신익희, 김동원이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