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끝나고 식당에서 아구찜을 먹는 중이었다. 티비에서 먹방이 방영되고 있었다. 하필이면 아구찜이었다. 리포터는 갖가지 재료와 비법에 감탄하며 먹어댔다. 괜스레 식당 주인 보기가 민망했다. 앞에 앉은 분이 한 마디 했다. “공짜로 먹으면 다 맛있지. 요즘 티비는 죄다 먹자판이야!”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이다. 티비를 틀면 온갖 먹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잘 먹어대는 연예인이 전성기를 누린다. 생소했던 ‘셰프’라는 호칭이 ‘주방장’을 밀어내고 일상어가 되었다. 온갖 맛집 리스트가 돌아다닌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토록 기름진 식탁을 즐겼던가?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아 방방곡곡에서 먹자판이 벌어지고 있다. 먹방의 유행은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해외로도 소개되었다. 장기적인 경제 침체로 한국인들에게 깔려있는 불안감과 불행이 원인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한류를 등에 업고 유튜브 등에서 확대 재생산된 'Mukbang'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대단한 신드롬이다. 일시적인 유행으로 흘려버리기에는 그간의 성공이 아깝다. 우리가 먹방을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먹방은 오락 프로그램이다. 대충 늘어놓고 마구 먹어도 흉이 되지 않는다. 인기의 비결이자 약점이어서
고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도구를 기준으로 나눈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3시기법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너무 단순해서 어쩐지 엉성해 보인다. 이를테면 청동기는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시기상으로 짧았고. 주로 의식용이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생략되기도 했다. 인류문명에 끼친 영향력을 따지자면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합성물질도 청동기에 못지않은 혁명적 도구라 할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도구의 시대가 기계의 시대로 바뀌었고 이제는 정보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19세기에 정립된 3시기법은 새롭게 논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석기시대에 앞서 목기시대가 있었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도구는 아마도 나무 몽둥이였고 돌도끼보다는 목창으로 먼저 사냥했을 것이다. 목기시대가 학설로 다루어지지 못하는 배경은 입증할 유물이 없고 연대를 가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목기시대를 굳이 부정할 근거도 없을 것이다. 아득한 나의 선조가 최초로 생산한 물건은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도시생활을 접고 산자락에 자리 잡으며 처음 가까이한 취미가 목공이다. 죽은 나무를 다듬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
세상을 움직이는 규칙은 무엇일까? 아득한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끊임없이 탐구하는 모든 진리의 갈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류문명사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종교가 큰 축을 이루었다는 데 이론이 없을 것이다. 신의 섭리라는 단순하고 절대적인 작동원리가 수천 년간 인류를 지배했다. 다윈은 우리에게 다른 작동원리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진화론에 각성되고 자연선택론을 교리처럼 믿지만 이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자연선택론은 우수한 종은 살아남고 열등한 종은 도태된다는 이른바 우월한 유전자라는 가설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이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유대인을 말살하려 했다. 지금도 몇몇 민족의 인식 밑바닥에는 타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기준이 변치 않는 것이라면 나는 신도 다윈도 집어치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월한 유전자로 분류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그 비정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최근 보도에 따르면 재커스펭귄이 서식지를 잘못 선택해 위기를 겪고 있다한다. 펭귄은 주로 남극에 서식하지만 그들은 아프리카에 정착하도록 진화했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먼 거리를 이동한다
며칠 전, 모임에서 어느 분이 혼자 밥 먹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분은 개인주의가 너무 심해지고 있다며 개탄했다. 개인주의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나홀로족의 증가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혼밥의 증가로 마트의 진열대에는 1인용 식재료가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식당에서는 4인용 테이블을 줄이고 혼밥 전용부스를 설치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한다. 내가 직장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혼자 점심식사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혼자 술 마시는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그런 인식들이많이 희석되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1인분을 주문할 때 조금은 덜 미안해해도 괜찮을 듯싶다. 혼밥도 겸상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만든 것일까? ‘고독한 미식가’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혼자 맛집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요리를 음미한다는 단순한 내용으로이루어져있다. 혼자 다니므로 당연히 대화는 거의 없고 혼잣말로 채워진다. 관계가 사라지면서 주제가 도드라지는 효과가있다. 시청자는 요리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혼자 밥 먹는 행위가 청승맞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