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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먹방과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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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끝나고 식당에서 아구찜을 먹는 중이었다. 티비에서 먹방이 방영되고 있었다. 하필이면 아구찜이었다. 리포터는 갖가지 재료와 비법에 감탄하며 먹어댔다. 괜스레 식당 주인 보기가 민망했다. 앞에 앉은 분이 한 마디 했다. “공짜로 먹으면 다 맛있지. 요즘 티비는 죄다 먹자판이야!”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이다. 티비를 틀면 온갖 먹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잘 먹어대는 연예인이 전성기를 누린다. 생소했던 ‘셰프’라는 호칭이 ‘주방장’을 밀어내고 일상어가 되었다. 온갖 맛집 리스트가 돌아다닌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토록 기름진 식탁을 즐겼던가?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아 방방곡곡에서 먹자판이 벌어지고 있다.

먹방의 유행은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해외로도 소개되었다. 장기적인 경제 침체로 한국인들에게 깔려있는 불안감과 불행이 원인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한류를 등에 업고 유튜브 등에서 확대 재생산된 'Mukbang'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대단한 신드롬이다. 일시적인 유행으로 흘려버리기에는 그간의 성공이 아깝다. 우리가 먹방을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먹방은 오락 프로그램이다. 대충 늘어놓고 마구 먹어도 흉이 되지 않는다. 인기의 비결이자  약점이어서 웃음은 있지만 울림은 없다. 비주얼은 있지만 미학은 없다. 그러나 티비의 장점인 영상미를 살리며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면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오락과 문화를 결합하면 개그맨 보다 문화 비평가의 유머가 더 흥미로울 수 있다. 조리법 보다는 아름다운 상차림에 주목한다면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올 것이다.

아내와 나는 ‘한식대첩’이란 방송을 즐겨 보았다. 이 프로그램은 전통음식의 재현이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지녔다. 먹는 연기에 의존하지 않는 면도 좋았다. 그러나 한계도 여전했다. 전통의 재해석과 어울리는 상차림, 그것을 제대로 먹는 법까지 보여주었다면 품격을 달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어 발전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공통적인 취약점이 여기서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른바 맛집의 기준도 무비판적이다. 오로지 손님이 많은가에 달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라면 굳이 찾아가서 먹어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들의 맛집이란 그저 ‘무난한 집’을 뜻한다. 반면에 손님이 적더라도 주인이 소신을 갖고 오랫동안 한 방면으로 특화된 곳도 적지 않다. 진정한 식도락가라면 아마도 후자를 맛집이라 부를 것이다.

먹방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사회적 트렌드는 이른바 3S였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는 우민정책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실제로 프로야구와 올림픽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곤 했다. 민주화를 이루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집단적 욕구가 약해지고 개인의 취향이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다. 그들의 개별적 행동이 모여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된다. 맛집을 찾고 여행을 떠나며 취미를 즐긴다. 

캠핑도 열풍이다. 나도 캠핑장에 가보았다. 값비싼 캠핑카와 고급 텐트가 즐비했다. 그들은 텐트를 치자마자 바쁘게 고기를 구웠다. 아이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만화영화 ‘슈렉’을 보았다. 어른들은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아침에 산책을 나가보니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가 캠핑장에 가득했다. 그들의 반짝이는 캠핑카와 텐트가 갑자기 남루해 보였다. 캠핑장비는 첨단이었지만 캠핑문화는 먹방 수준이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유래한 라틴어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삽입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현재를 즐겨라’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현재를 잡아라’이다. 근면을 미덕으로 삼던 기성세대들은 아마도 후자의 교훈적인 해석을 선호하겠지만 시대는 이미 바뀌었다. 

2017년의 트렌드로 떠오른 이른바 ‘욜로 라이프’도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미국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유래되었다. ‘한번 뿐인 인생’의 뜻으로 쓰인다. 미래보다는 현재를, 타인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는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다분히 서구적인 사고이며 소비지향적인 개념이다.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며 후회 없이 사는 것은 모두의 꿈이다. 기성세대들도 모르지 않았지만 실천은 곤란한 문제였다. 욜로 라이프는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한 신세대다운 행동양식 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카르페 디엠’이 술자리 건배 구호로 전락했듯이 우리의 ‘욜로 라이프’는 ‘욕구 라이프’로 채워지고 있다. 즐기고 보자는 풍조가 이래저래 정당화되어 간다. 

어떤 이들은 ‘카르페 디엠’이라 쓰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 읽는다. 유행에 따라 ‘욜로 라이프’로 갈아타기도 한다. 물론 잘 먹고 잘 놀러 다니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그만큼 필요하다. 몸으로만 즐기면 잘 지낼수록 공허해지는 내면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시간 앞에서 평등하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카르페 디엠도 욜로 라이프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 삶의 가치는 내가 부여한다. 시간의 소비자가 될 것인가, 주인이 될 것인가는 내게 주어진 이 순간을 어떻게 빚어내느냐에 달렸다. 

오늘은 내 인생에 마지막 날이 아니다. 남아있는 날들의 첫날이다. 행복은 내 범주 안에 있다. 내 영혼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주 어느 곳 어떤 행복도 무의미하다. 내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욜로가 아니겠는가? 지금 여기에 내가 오롯이 존재한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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