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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6)>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일생...그리고 초대 국무총리 인선 논란

-이승만,황해도 평산출신...고종암살연루 5년7개월투옥후 도미.
-1912년부터 해방까지 미국.중국, 하와이등에서 독립운동과 독립외교운동.
- 이승만 초대 이윤영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범석으로 재지명해 가까스로 승인.
- 8월4일 11부4처 장관과 처장 국회에서 가결 첫 조각...신익희 제 2대 국회의장선임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대한민국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 오전 10시15분부터 11시15분까지 한시간 동안 가진 뒤 곧 집무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일흔 세살이다.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은 중앙청 3층의 200호실로 정해졌다. 반면 이시영 부통령실은 미군정장관실로 결정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1875년(고종 12)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두 형이 있었지만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초대대통령 이승만...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 5년 7개월 투옥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주(全州)이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후손이다.

초명은 이승룡(李承龍)이며  호는 우남(雩南)이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4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으며,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를 창간, 주필을 맡았고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무려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펴냈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했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됐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끈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했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가 뒤쫓자 그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독립외교운동을 활발히 했다.

◇…임시정부 대통령놓고 안창호와 갈등... 후에 의정원서 탄핵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 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했다.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했다.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한국을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1919년 3월 21일 수립)에 의해 국무 급(及)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월 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1919년 6월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한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임시정부 규정에 없는 대통령 직책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안창호와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이어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 해방 후 귀국...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로 일했다. 

이어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때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고, 1934년 10월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곧 다가올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한국의 대표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재미동포 단체들의 분열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들러  미국의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했다.

그무렵 여운형등이 이름을 올린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과, 김성수가 만든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다.

하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에 반대하였다.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자유당 창당과 3.15 부정선거...하와이 망명중 사망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동조했다.

그러면서 남북협상을 주도한 김구. 김규식과 결별하게 된다.

이어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을 주미한국대사로 임명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 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었다.

대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대전에 도전한 후 전쟁경과에 대한 특별방송을 통해 현 전선을 고수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향을 촉구하는 내용을 공표했다.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했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에서 해공신익희 민주당후보가 급서하면서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했으나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했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집권후 닥친 국무총리 인선놓고 국회와 갈등 
  
1948년 초대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초대 내각구성에 분주했다.

독립정부의 첫 조각인 만큼 정파마다 그럴듯한 이유로 백가쟁명의 목소리만 내놨다.


정파마다 훈수가 연일 보도, 이승만의 고민을 가중시켰다.

물론 이를 이승만은 여간 못마땅한게 아니었다.
 
이승만은 그럴 때마다 “내가 원(願)하는 것이 민의(民意)와 같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승만은 특유의 저돌적인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심했다. 믿는 것은 ‘민의’, 곧 민중의 지지였다. 

그중에도 초대 국무총리 인선을 놓고  관심이 집중됐다.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직전인  7월 22일에 이화장에서 '국무총리 인선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원칙론만 내세웠다.
  
 “국무총리는 아직 지정한 사람은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다. 각 정당 사회단체가 다 소망대로 되기를 기대하는 중에도 이번에 여러 가지로 발표되고 낭설이 유행되었으나 내 생각에는 이와 같이 되지 않을 것으로 모든 사람이 다 놀랄 것으로 본다. 내가 또 믿는 것은 모든 정당과 단체가 자기 사람을 추천하는 것은 자기들의 믿는 사람이 정당한 자리에 앉아야 나라일이 잘될 줄 알고 기대하는 것뿐이니, 어쨌든지 자기들의 의외의 사람이 나서 일이 잘될 줄 믿게 되는 때에는 일심으로 복종할 줄 안다.”
  
기자들은 '국무위원의 각파비율에 대해 정하느냐'고도  물었다.

이승만은 이 질문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민의와 같다"고만 했다.
  
 “우리 정부수립은 남의 조직된 나라와 달라서, 어떤 정당이 득세하거나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오직 이것은 국권을 회복해서 새로 국가를 건설하는 정부이므로 정당이나 파당주의를 초월해서 오직 민의를 따라서 세워야만 될 것이다. 만일 우리 민의가 나의 뜻하는 바와 근본적으로 달라서 딴 길로 나아간다면 나는 극력 충고해서 만회하기를 도모할 것이다.
  
 내가 귀국 후로 체험한 민의는 전적으로 나의 뜻과 같으며 나의 원하는 것이 민의와 같으므로, 우리의 부강 전진이 용이하게 될 것을 믿고 많은 자신과 흥분을 가지고 용감스러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하니 민족 전체는 다 지지 추대해서 국가의 위신을 존중히 여길 줄 믿는 바이다. 앞으로 국무위원 조직이 발표될 때에는 낙심 낙망할 사람이 얼마는 없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좌고우면 끝에 결단한 이승만의 책략이었다.

이승만은 국무총리 임명문제로 국회와 대립했다. 국무총리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사람은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세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임명 과정은 당동벌이(黨同伐異·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자기편 사람은 돕고 반대편 사람은 공격하는 일)의 한국 정치풍토에서 제헌국회의 중요 정파들이 벌인 적나라한 권력투쟁이었다.

그것은 또한 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 사이의 최초의 힘겨루기이기도 했다.
 
자신이 말한 ‘의외의 인물’이 누구냐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반응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7월 27일에 국회에 출석하여 극적인 방법으로 이윤영(李允榮)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박수를 받으며 의사당에 입장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이유를 30분에 걸쳐 길게 설명했다.

그는 먼저 국무총리 인선문제를 다른 정파들이나 중요 지도자들과 상의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중에 몇 단체와 중요 지도자들과 토의 협정하야 작정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오늘 우리 형편에 각 정당과 사회의 규례가 충분히 짜이지 못한 중에 미리 발설이 되면 매인열지(每人悅之·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하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사정에서 자연 분규 문란한 상태가 이루어질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부득이 혼자 심사각득(深思覺得)해서 오늘까지 초조히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각 방면의 지도자 측에서 나를 보좌하기 위하야 정부조직과 국무총리의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이 여러 가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명록을 채용하야 전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나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승만은 이 추천명록이나 신문보도 등의 여론으로 미루어 국무총리 적임자로 가장 인망이 있는 사람이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의와 또 내정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 세 사람은 국무총리에 임명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정부수립 이전에 정당이 먼저 생겨서 다소 분규가 있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요 또 유감으로 아는 바입니다. 일후에 정치상 풍운 변태가 다소간 정리된 후에 몇 정당이 각각 주의주장으로 대립하여서 공선을 따라서 그 정당이 득세하는 날에는 득세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고 다른 정당은 다 정부에 참여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형편이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중에 몇몇 정당을 포함해서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정당주의로 권리를 다투게 되는 중에서 행정처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간 양년 동안에 몇몇 사회 민족운동단체 경력이 소상히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정당의 선도자로 지목받는 이가 피임되면 다소간 난편(難便)한 사정이 있을 것을 염려하므로 아무쪼록 피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김성수씨로 말하면 누구나 정당을 주장하는 인도자로만 지목할 수 없을 것이고 그분의 인격과 애국성심과 공평정직한 것은 어떤 정당이나 단체 사람을 막론하고 추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줄로 나는 믿으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몇십 년 전부터 알아서 절대 믿고 애중히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각에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을 김성수씨에게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이다음에 발표될 때에 보시면 알려니와 이러한 각오하에서 김성수씨는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이란 재무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여러차례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불러 미국의 건국 초기에 재무장관으로서 독립정부 건설의 기초를 닦았던 해밀튼(Alexander Hamilton)의 보기를 들면서 재무장관을 맡을 것을 집요하게 권했으나 김성수는 거절했다.
  
해공 신익희는 입법부의 책임을 맡아서 일해야 할 것이므로 제외한다고 했다.
  
 “신익희씨는 인격이나 민중의 신망이나 해외 풍상에 임시정부 책임으로 여러 해 분투하며 끝까지 지켜 내려온 그 역사를 보든지 정치상 기능과 수완으로 보든지 누구나 그분보다 더 낫게 생각할 국무총리 자격이 몇 분 안될 것이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으로는 수십 년 전부터 깊이 알고 친임(親任)하며 애중히 여겨 오던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삼권분립에 국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이 앞에 제정할 모든 법령에 급급히 할 일이 많은 수효를 점령하고 있는 중에 상당한 지도자가 없이는 전도가 심히 망창(茫蒼·큰 일을 당하여 앞이 아득함)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부의장 책임을 계속하야 이 중임을 담임하다가 국회에서 의장을 다시 선거할 때에 국회선거를 보아서 앞길을 작정하는 것이 다대한 도움을 주겠기로 입법부의 중대한 책임으로 인연해서 김동원(金東元) 부의장과 협의 진행하는 것을 부탁하는 것이 나의 고충입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조소앙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전인 7월 26일에도 이화장을 방문하여 조소앙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남북협상에 실망하고 돌아온 뒤로 김구 그룹과도 결별 상태에 있던 조소앙은 정부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명해 왔다.

이승만은  조소앙에 대해서도 말했다.
 
 “조소앙씨는 삼십여년 전 일본 유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그 명망과 위신이 내외에 전파되어 많은 추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친절히 알게 되어 마음으로 깊이 신뢰하며 추앙하던 터입니다. 그 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나와 거리는 멀었으나 밀접한 통신상으로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나간 터이며, 귀국한 후에도 더욱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언제든지 국사에 동주병제(同舟竝濟)할 줄 믿고 있던 터이었습니다. 불행히 근자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우리 대업에 다소간 방해가 있었고 민심이 따라서 현혹하게 된 것을 우리가 다 불행히 여기는 바입니다.
  
 다행히 근자에 이르러서는 차차 휴수동거(携手同去)할 희망이 보이므로 조만간 우리가 다시 한길로 나가기를 기약하고 있는 터이니, 우리 개인상으로는 아무 의점도 없고 정의상 손실도 없으나, 정권을 잡고 민족을 인도하는 자리에서는 민중의 아혹(訝惑·의혹)이 풀려서 다 소상히 알게 되기 전에는 얼마간 의문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차차 이 아혹이 다 풀려서 우리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장애가 없도록 만든 후에 책임을 분담케 되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되므로 조소앙씨나 그 후원하는 동포들이 나의 고충을 양해할 줄로 믿습니다.”

 ◇…이윤영 총리부결되자 이범석지명.. 국회내 갑론을박.

이승만은 이어 "국무위원 조직은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승인된 뒤에 국무총리와 상의해서 하겠다"라면서 "아무리 유자격자라도 자신의 친구와 친척은 배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런뒤 북한에서 온 이윤영(李允榮)을 7월 27일에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말한 “의외의 인물”이란 결국 그 자신이 김성수를 설득하여 자신의 선거구를 그에게 양보하게 한 이윤영이었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임명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공포에 대하여 이윤영 의원이 가장 놀랄 줄 압니다. 이분을 임명하는 나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째는 총리 임명에 먼저는 국회의원 중으로서 택할 것을 많이 생각한 것이니, 민의를 존중하고자 하는 본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이북대표 한 분이 그 자리 점령하기를 특별히 관심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급급한 우리 문제 중에 제일 급한 것은 남북통일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정책을 쓰든지 이북 동포의 합심합력을 얻지 않고는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먹으나 굶으나 머리 둘 집칸이라도 있고 이만치라도 자유 활동하고 살아온 터이나 이북 동포의 참혹긍측(慘酷矜惻)한 정형은 우리가 밤이나 낮이나 잊을 수 없는 터입니다. 
  
 정부를 조직하는 자리에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부통령으로 추대해서 이북 동포의 마음이라도 위로하고자 한 것이 우리 국회 전체의 동일한 원이었으나, 조 선생의 생명이 위험할 것을 염려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투표를 짐짓 아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만식씨의 유일한 정치단체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으로 이윤영씨가 국무총리 책임을 맡는 것이 정치상 지혜로나 민족적 정의로나 가장 적당할 것이므로 남북통일 촉성을 위하여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을 믿습니다. 조선민주당도 당이니 우리말과 모순된다 할 것이나, 그 당은 남한에서 압도적 세력을 가졌다 볼 수 없습니다. …”
  
이승만은 나아가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오랜 악습인 지방열을 타파하는 일에도 이윤영의 역량이 크게 기대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내가 믿고 아는 바는 이윤영 의원이 지방열을 절대 증오하여 이 악습을 극력 반대하는 분입니다. 총선거되기 전에 이북 이재동포의 특별선거구역을 정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인데, 유엔 결정으로 이것이 실시되지 못하였던 것이나, 그때에 이재동포들이 많이 흥분되어 여러 가지 여론이 있었으나, 이윤영 의원의 애국심으로 열렬히 설명해서 모든 문제가 다 침식되고 이북 동포의 대표문제는 다 중지하게 하여 이번 선거에 지장이 없이 대성공을 하게 한 것은 또한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 이유로 이윤영씨의 상당한 인격과 온화한 심법(心法)과 확고불변하는 기개가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바이며, 연부역강한 몸으로 우리들 대통령 부통령이 미처 생각지 못하는 뜻과 행하기 어려운 일을 다 대행할 수 있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퇴장한 뒤에 치른 무기명투표결과 이윤영 임명 승인안은 재석의원 193명 가운데 가 59표 대 부 132표(기권 2표)로 부결됐다.

각 정파, 특히 가장 강력한 세력인 한국민주당과의 사전협의 없이 대통령 선거 때의 180표라는 압도적인 다수표만 막연히 믿고 정면 돌파를 시도한 승부수의 패배였다.
  
윤석오(尹錫五) 비서가 “이윤영씨 총리 승인안이 망신만 당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이승만은 “그래, 부결됐어!” 하고 덤덤히 말하고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윤영 승인안의 부결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국회가 이윤영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을 다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회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을 내세워 재론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이윤영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7월 29일에  이번 총리 승인안은 단순한 인사 안건으로서 ‘의안’에 해당하지 않고 어떤 나라에서든지 일사부재의 원칙은 법률안에 한하며  이번 국회는 건국회의로서 정기회도 아니고 임시회도 아닐 뿐 아니라  총리 임명 승인에 관하여 대통령과 국회의 의사가 상충되는 경우에 대한 헌법규정이 불비함에 따라 이러한 경우에는 대통령의 재의 요청안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이화장은 또 다시 내방객들로 인성만성했다. 

국회의 표결이 끝나자 달려온 사람은 이윤영이었다.


이윤영에 이어 오후 4시에는 무소속의 최범술(崔凡述), 정현모(鄭顯模) 두 의원이 다녀갔고, 4시 반에는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李靑天)이 30분가량 요담하고 갔다. 

이튿날 아침 9시25분부터는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이 찾아와서 한 시간 동안 요담했고, 이날 오후 6시40분에 무소속 구락부를 대표하여 이화장을 방문한 오석주(吳錫柱), 윤재욱(尹在旭), 김병회(金秉會)는 조소앙과 신익희 두 사람 가운데서 국무총리를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한편 한민당계 의원들은 7월 27일 오후 3시에 당사 회의실에서, 무소속 의원들은 28일 오전 11시에 서울 호텔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기정 방침대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의 이러한 대립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어중간하게 절충한 정부 권력구조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와 관련한 기사에서 “국회내 각파, 특히 한민계와 무소속계는 국가대계와 헌정확립을 위하여 대통령의 총리 승인 요구를 거부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끝까지 국회내 세력을 무시하고 나간다면 절대 다수당이 존재치 않는 금번 국회에서는 입헌정치의 상식에 비추어 당연히 각파 세력을 기간으로 한 연립정부가 조직될 것이므로 국회내 각파는 타협하여 연립할 기운이 농후하며, 이미 무소속과 한민계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어서 총리 재임명을 명일에 두고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이승만은 민족청년단 단장 이범석(李範奭)을 다시 지명했다.

올리버에게 보낸 7월 26일자 편지에서 이승만은 유력한 총리 물망자로 김성수, 조소앙, 신익희 세 사람과 함께 이범석도 거명했다.

이승만은 7월 23일에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을 초치하여 장시간 논의했다.

다음 날 '국제신문'이 호외로 이범석이 국무총리에 내정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이승만과 이시영은 이윤영 승인안이 부결될 경우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문제를 논의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추천한 사람은 한민당계이다.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운 이인(李仁)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그리고 민정장관 대리로서 민족청년단을 공식으로 지원해 온 헬믹(Charles G. Helmick) 등이었다.


다른 많은 청년단체들과는 달리 1946년 10월 9일에 미군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민족청년단은 1947년부터 정부수립 때까지 미군정부의 예산항목에 포함되어, 1947년에는 2064만8000원의 예산이 할당되었다.
  
이시영과 협의하여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확정한 이승만은 국회 정파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7월 29일 오전에 먼저 독촉국민회의 고희동(高羲東)과 배은희(裵恩希)를 부른 데 이어 낮 12시50분에는 한민당의 김성수를 불러 협조를 당부했다.

그리고 1시 반에는 이청천을 초청하여 요담했다.  


그러나 그는 광복군총사령으로서 참모장 이범석을 지휘하는 관계에 있었던 이청천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에 반대했다. 
  
이범석의 내정사실이 알려지자 한민당계 의원들과 무소속 그룹은 7월 29일에 각각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조소앙을 강력히 추천해 온 무소속 그룹은 이범석 임명에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6시쯤에 윤재욱과 윤석구(尹錫龜)가 대표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한민당 쪽에서는 윤치영(尹致暎), 허정(許政) 등 이승만 직계들과 김준연(金俊淵) 등 호남파 사이에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7월 30일 오전에 이범석이 계동 집으로 김성수를 방문하여 장시간 요담했다.

 이범석의 협조 요청을 받은 김성수는 12부 4처 가운데에서 적어도 6석을 한민당에 배정해 주지 않으면 당 간부들을 설득할 수 없고, 또 자기로서도 대한민국 성립과정에서 한민당이 치른 역할이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비중으로 보아 그것은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범석은 자기도 동감이라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범석 총리승인과 조각 마무리 

같은 날 국회에서는 한민당의 노일환(盧鎰煥) 의원과 같은 한민당이면서 이승만 직계인 윤치영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이승만은 국회에 나가서 당파를 떠나 새로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런데도 노일환이 등단하여 7월 28일의 이승만 담화를 문제 삼아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천황(天皇)과 같은 태도라면서 이승만이 먼저 그 담화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윤치영은 노일환을 반역자라면서 징계에 회부할 것을 동의했고, 그러자 의원석과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
  
국무총리 임명문제로 조각작업이 늦어지자 정국경색을 우려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 

한민당은 김성수의 설득으로 이승만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하자는 의견이 많아져서 표결에서는 자유의사에 일임하기로 했다.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도 이번에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물을 승인해야 한다는 의원들이 늘어나 7월 31일에는 윤치영, 정준(鄭濬) 등의 주도로 70여명의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따로 모였다.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위한 국회 제37차 본회의는 8월 2일 오전 10시에 열렸다.

197명의 국회의원 전원은 개회시간 전부터 자리에 착석했고, 방청석 출입구는 개회시간 훨씬 전부터 큰 혼잡을 이루었다. 
  
10시30분에 국회에 임석한 이승만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요망하는 연설을 했다. 

그것은 원고가 없는 즉석연설이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이 문제를 지체한 관계로 오늘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들도 나도 또한 우리 민족 전체가 모두 여기에 대하여 대단히 초조히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어떠한 정당이나 어떠한 단체가 많은 권리를 가졌다든지 하지 말고 우리 전국민이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하겠다는 여러분의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유일한 생각일 것입니다. … 8월 15일 안에 여기 군정장관과 사령장관들은 다 준비를 해 가지고 하루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국무총리 승인이) 하루빨리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또 우리 듣는 바에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가지고 그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돌아앉아서 서로 토의만 하고 나가면 안 될 것입니다. … 국무총리로 누구를 지정을 할 테니 큰 문제가 아니걸랑 동의시키고 … 이번 부결되면 그 영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 지금은 누가 개인이나 무슨 당의 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때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여기에 세워 놓아야 하겠다는 그 작정을 가지고서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또 이런말 저런말 써 가지고 한다면 영향이 대단히 좋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
  
 며칠 동안에 밖에서 유언하는 말에 이범석씨가 물망이 높고 해서 내가 이범석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여러분에게 드려 놓으니, 국회에서는 길게 토의를 마시고 작정해서 통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1주일 전에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했던 권위등은 보이지 않았다. 의원들은 무기명투표에서 재석의원 187명 가운데 가 110표 대 부 84표(무효 2표)로 승인이 가결되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설화적인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은 이제 마흔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취임 첫 소감은 “7월 31일에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승인하였다. 국내정세를 잘 알기 때문에 쾌락한 것이며, 만일 접수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심경에 어그러질뿐더러 현 국내외 정세의 긴박한 요청에 배치되는 것이다.
  
나는 본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가 민족의 현실을 떠나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는 피동적이었지만 금후로는 주동적 입장에서 오직 나의 충성, 나의 정력,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다만 하루라도 바치고자 한다.”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이 끝나자 이승만은 그날 저녁으로 이범석과 함께 조각작업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9시40분에는 재무, 법무, 농림, 교통 4부의 장관의 명단을  발표했다. 
  
재무부 장관 김도연(金度演), 법무부 장관 이 인(李 仁),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교통부 장관 민희식(閔熙植)이었다.
  
한민당의 중앙위원인 김도연은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한 경제전문가였다. 
  
이인은 국내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 사건을 도맡다시피 하여 변호했고 조선어학회 간부로서 투옥되었던 변호사였다. 

미군정부의 대검찰청장을 지낸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웠다.
  
초대 내각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의 농림부 장관 임명이었다. 

이승만은 8월 4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각 구성은 정치적 안배였다고 말하면서, “한국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민들을 휘어잡기 위해서”라고 썼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범석에게 의견을 묻자 이범석은 “조봉암이 아니라 김일성인들 무슨 상관입니까? 대권은 이 박사께서 쥐고 계신데” 하고 적극 찬동했다고 한다.
  
민희식이 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미군정부 관료 케이스로 배려된 것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한 민희식은 미군정부의 교통부장이었다. 
  
이어  이튿날 오후에 내무부, 사회부, 문교부 세 부의 장관이 임명되었다.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 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이었다.
  
이승만의 재미시절부터 그를 도왔고 귀국한 뒤에는 민주의원 비서국장 등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 온 윤치영은, 미군정부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두 사람의 알력관계로 어느 한 사람을 내무부장으로 임명했다가는 경찰행정에 큰 혼란이 예상되어 내무부를 맡게 되었다.

같은 한민당의 노일환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치영은 8월 2일에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승만은 조병옥을 외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가 대통령 특사로 정부승인 외교를 벌이게 하고, 장택상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대한노총 위원장으로서 헌법에 근로자이익균점권 규정(제18조 2항)을 설치하는 데 앞장섰던 전진한은 노동문제를 관장하는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전진한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된 뒤에도 대한노총 위원장을 겸임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문교부 장관으로 장면(張勉)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추천명록에 안호상의 추천이 많고, 또 앞으로 큰 임무를 담당해야 할 주미대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여 안호상에게 문교부를 맡기고 장면을 특사로 보내어 일하는 것을 보아 주미대사로 임명하기로 한 것이었다.33) 서울대학교 교수인 안호상은 민족청년단의 이데올로그였다.
  
8월 4일에는 나머지 외무부, 상공부, 국방부, 체신부의 장관과 국무총리 직속인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4개처의 일부 처장인사가 있었다.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상공부 장관 임영신(任永信), 국방부 장관 이범석 국무총리 겸임, 체신부 장관 윤석구(尹錫龜),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였다.
  
조각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있던 임영신은 이화장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자기가 귀국할 때까지 최종결정을 보류해 달라고 이승만에게 졸랐다. 


8월 3일에 급히 귀국하여 공항에서 이화장으로 직행한 임영신은 조각당 마루에 허정(許政)을 상공부 장관으로 발표하려고 붓으로 써서 펼쳐 놓은 것을 보자 발로 짚으며 “우양(友洋)이 상공을 뭘 아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범석이 임영신에게 “그러면 당신이 상공장관 하겠소?” 하고 물었다. 

그리하여 발표 직전에 상공부 장관이 임영신으로 바뀌었다.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윤석구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무소속구락부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이승만은 윤석구가 “말썽을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이라면서도 “실력은 있다”면서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았다.
  
  
8월 4일에 열린 국회 제39차 본회의는 이승만의 후임으로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신익희의 의장 피선으로 결원이 된 또 한 사람의 부의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에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는 이승만이 임명한 김병로(金炳魯)의 대법원장 인준안을 가결했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뼈대가 갖추어졌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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