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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0)> 3.1 기념식 불허가 4.3 제주 사건의 씨앗...지워지지 않는 이름들(상)

-한동안 좌익의 폭동이라는 정부기록과, 경찰의 토벌군의 양민대학살였다 상반된 기록
-1947년 3,1운동 행사 놓고 좌.우익 대립 최고조
-제주사건의 시작은 경찰이 3.1운동행사 허가 불허한 게 도화선
-1948년 4,3 봉기... 5.10 단선반대, 이후 본토의 군경 속속 제주파견
-1948년 10월말부터 게릴라 토벌전,1949년 1월부터 곳곳서 양민학살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글에 들어가기 앞서 제주 4.3사태로 희생된 분들에게 명복을 빈다. 또 유가족과 후손분들에게 위로를 드린다.



제주 4.3사건이란 우리에게 너무 아픈 역사의 상처가 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경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5.10 단톡선거, 단독정부 반대가 촉발됐다.

이를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아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군대간의 무력충돌이란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상흔이 남아있다.

그러나 좌익게릴라를 진압하겠다는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1만4000여명의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희생자들을 위로하지 않았고, 제주도민들외에는 그 누구도 이를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때 실체규명과 함께 국가가 처음으로 희생자가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면서 규명작업이 활발해졌다.

발단은 반탁, 찬탁의 회오리 속에 1947년 제28주년 3.1절 행사를 놓고 좌. 우익이 크게 대립했다.


 ◇…서울 3.1사태와 제주 4.3사태…그리고 좌·우익 대결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찾아온 좌익과 우익의 민족 분열은 곧 남북분단의 역사 뿐 아니라, 동족간 살상의 사건으로 치달았다.

시대적으로 남한 내  반탁운동을 벌여온 이승만, 김구 등 우익진영과 박헌영, 허헌 중심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던 좌익진영이 사사건건부딪혔다.

그런 가운데 일제로 부터 해방된 뒤, 1, 2개월 만에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이 갈려 서울에는 미 군정청이, 평양에는 소련군정청이 진주했다.

서울에서는 3.1절 기념식을 우익은 서울운동장, 좌익은 남대문에서 따로 가졌다. 

행사 뒤에 서울 시가행진 중 좌·우익 간에 서울 남대문-서울역 간 충돌, 투석전과 각목싸움이 벌어졌다. 

우익진영이 주최한 서울운동장 대회는 ‘기미선언 전국대회’라고 했다.

좌익 진영 민전(民戰)이 주최한 행사는 ‘3.1기념 시민대회’라 했다.

서울 운동장에서 이날 12시에 열린 대회에는 하지 중장을 대신한 브라운소장이 러치 군정장관 대신 윕스 소령 등 군정 당국자가 참석했다.

대회 도중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한 후 오후 1시 30분 대회는 큰 차질 없이 끝났다.

남대문 대회는 남산 정상의 광장에서 시작되어 민청원을 비롯한 각 단체의 축사 낭독 등으로 오후 3시경에 끝났다.


사건은 양측의 시가행진에서 비롯됐다.

그렇잖아도 각각 양보나 타협 없이 사사건건 충돌한 좌익과 우익은 이날 행사마저 따로 열만큼 감정대립도 심각했다. 

이런 마당에 행사 참가자 일부가 시가행진에 나서면서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을 빚게 되었다. 

한편 남대문 대회는 남산 정상의 광장에서 시작되어 민청원을 비롯한 각 단체의 축사 낭독 등으로 오후 3시경에 끝났다.

사건은 양측의 시가행진에서 비롯됐다.

그렇잖아도 각각 양보나 타협없이 사사건건 충돌한 좌익과 우익은 이날 행사마저 따로 열만큼 감정대립도 심각했다. 

이런 마당에 행사 참가자 일부가 시가행진에 나서면서 살벌한 좌우충돌의 열전을 빚게 되었다. 

오후 1시 반 대회를 끝마친 ‘기미선언 전국대회’에 참가했던 학련(學聯)을 선두로 일부 학생들과 청년단체는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이들은 서울 운동장에서 출발해 옛 중앙청인 군정청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앞에서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남대문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우익학생과 청년들이 남대문 주변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3.1기념 시민대회’측도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맨 민청원들을 선두로 하여 남산에서 내려왔다.

바로 그때 어느 편에서 먼저 투석을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와, 와’하는 함성과 함께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그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험악한 상태가 계속되자 남대문 근처에 배치되어있는 경찰대가 지하도에 숨어서 발포를 개시한 것이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미군정 지프차에서도 미군들이 총소리에 놀라서인지 자동차에 탄채 위협발포를 하고 달아났다.

◇…우익. 좌일 양측 충돌로 경찰대 출동

당시 수도청장(서울지방경찰청장)인 장택상과 수도청 간부, 그리고 수많은 기마 경찰대원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맹렬한 투석전과 각목전을 벌인 양측은 경찰의 총격을 피해 숨은 뒤였다.

남대문 인근 전선주 주변에는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당시 조선중학교 학생 정인수라는 소년으로 나이는 16살 앳된 얼굴이었다.

또, 근처인 대한기선회사 뒷마당에는 26세의 박수호라는 청년도 관통상을 입고 절명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었다.수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해 세브란스 병원과 적십자병원에 옮겨져 입원, 응급치료를 받는 등 야단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충돌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충돌사건의 사후처리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사상자의 대부분이 좌익진영측이라는 점부터 경찰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수도청과 신문사 간에 살벌한 관계로 변했다.

왜냐면 이날 자 석간신문들이 ‘축전 끝에 불상사, 경찰 발포로 수 명 사상’이라고 보도하니 수도청장 장택상이 매우 불쾌해 했다.

당시 전국일대에서 벌어진 3.1절 행사의 참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당국이 발끈한 것이다.

신문들이 이날 보도한 불상사의 보도 논평은 대략 이렇다.

‘관의 잘못인가, 민의 잘못인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전국각지에서 발생하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좌·우익 사이에 갈수록 반목이 더하여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싸움을 벌일 때였다.

민족은 가는 곳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던 때인 만큼 3.1절이라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3.1절 기념행사가 폭동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상자가 무려 40여명이나 되었다면 숭고한 3.1정신이 무색해지고 만 것이다.’

그때 3.1절 행사와 관련, 치안총수인 경무부장(현재는 경찰청장) 조병옥의 발표와 신문들의 보도내용을 종합한 기록을 보면 이렇다.

‘전국 도처에서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집단적으로 충돌에 가담했다,

곳곳에서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약탈하는 등 무법행위가 절정에 달했다.


경찰에서 치안유지상 부득이 발포를 하면서까지 폭동진압에 임한 결과 전국적으로 사망자 16명, 부상자 22명 등 38명의 사상자로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냈으니 이는 관(官)의 잘못인가, 민(民)의 잘못인가’

◇…4,3제주 사태의 비극은 3.1 기념식 불허로 시작

서울뿐만 아니다. 제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도 3.1절 행사를 기화로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좌익 측의 민전주최로 열린 ‘3.1기념 시민대회’장에서 일어났다.

대회가 끝날 무렵 갑자기 괴한이 단상에 올라가 연사를 구타하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졌다. 

경찰의 경고에도 연단을 향한 투석이 계속되자, 경비 중이던 경관대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는 대참사를 빚었다.

민 전측의 연사가 ‘이승만은 제2의 이완용’이라고 모욕하는 축사를 하자, 광복청년단원 3명이 그 연사를 구타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놀란 군중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자, 군중들은 자기들이 보복하겠다며 3명을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경찰이 거부했다.

문제인 비극의 씨앗은 제주도 제주읍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오후 3시쯤 ‘3.1기념 도민대회’를 당국이 허가해주지 않은데 사건이 촉발됐다.

경찰이 시위행렬까지 막자 화가 난 군중일부가 경찰서와 감찰서를 찾아가 항의하자 경찰이 이들에게 발포했다.

이로 인해 사망자 6명, 부상자 8명이 발생하고, 십 수 명이 연행되어 구금됐다.

사망자가 국민학생(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유부녀, 50대 농부 등이었다는 사실에 제주도민들은 격분했다. 

이는 이후 이로 인한 구금자를 석방시키라는 민중봉기로 이어지더니 결국 악몽의 제주 4.3사태로 이어진다.

또한 여순 사태로 비화되기도 했다.

당시 제주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가 무너지고 미군정 당국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일제에 징병, 징용자와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등 6만 명에 이르는 직장없는 귀화인구, 생필품부족, 설상가상 콜레라로 300여 명의 사망, 대흉년과 미군정청의 미곡정책실패 등 악재가 겹쳤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과 경찰 당국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 화하며 민심수습을 방치했다.

그러자 사건 10일 뒤인 3월10일부터 세계사에 유래 없는 민·관합동 대규모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는 제주도청 공무원을 비롯하여 전체 95%인 165개 관공서, 국영기업체, 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초중등학교가 항의휴교하고,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파업의 요구내용은 발포경찰의 처벌, 경찰책임자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보상등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민심수습아닌 외부세력으로 무력진압

한국기자협회가 펴낸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양조훈 4.3제주민중봉기>를 보면 당시 미군정은 본토에서 응원경찰 400명과 서북청년단을 대거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제주도지사마저 외지 사람을 데려다 앉혔고, 제주출신 경찰관은 밀어냈다.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처단한다'라는 이름으로 조금이라도 항의하거나 불평하는 주민을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또 500여 명을 연행해, 1948년 4.3제주사태까지 무려 2500여 명을 체포해 구금했다. 금품갈취나 입에 담기 어려운 만행이자행된 것이다.

1년 뒤인 1948년 3월까지 백색테러가 자행된 가운데 제주조천 모슬포지서 등지에서 3건의 민간인 고문치사사건도 발생했다.

이 무렵 남로당 제주지부 조직은 철저한 탄압대상이었다. 남로당사람들은 '앉아서 죽느냐. 일어서서 싸울 거냐'를 외치며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과의 대결을 선동했다.

당시 유엔소총회의 결의로 남한 내 5.10총선거를 통해 단일정부수립이 결정되자, 이를 반대한 김구, 김규식, 남로당 박헌영이 5.10 총선을 강력반대하며 저지에 나섰다.

그러나 이승만, 이시영, 이범석 등 반 김구, 반남로당전선은 5.10 총선에 주력하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볼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반된 민심을 이용한 남로당 제주지부는 5.10 선거 단선반대투쟁을 선동하면서 1948년 4월3일 제주경찰서를 습격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렇잖아도 꼬투리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들에게는 무력행사의 좋은 구실 감이었다.

때문에 1948년 4월3일의 이른바 '4.3 제주사태'는 생존권 투쟁이 정치슬로건을 전면으로 내세운 정치사건으로 비화된다.

이를 뒷받침 하듯이 미군정 아래 이인 검찰총장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고, 관리들이 부패한 것이 이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고 했다.

이 총장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라고 규정했다.

◇…1947년 3.1절기념식충돌 →1948년 4.3사태로 확대

1948년 4월3일 새벽 1시. 무장자위대 500명이 11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며 무장시위의 신호탄이 됐다.

무장대는 단선, 단정의 저지를 통한 통일국가수립, 그리고 응원경창과 서북청년회 추방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사태초기 이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규정해 4월5일 제주 비상경비사령부(사령관 김정호. 경무부보안과장)를 설치하고, 본토의 경찰인력 1700명의 제주파병을 승인했다.
 

또한 서북청년단원 500명을 추가 파견했다.

응원경찰의 토벌 작전이 전개되자, 선량한 많은 제주 주민이 산속으로 피신했다.

미군정은 4월17일 대기상태인 경비대 제 9연대에도 진압작전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부산의 제 5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에 파병토록 했다.
 

제9연대는 그러나 이 사태를 제주도민과 검찰, 서북청년회같은 극우 청년단체간의 충돌로 보고 '선(先)선무 후(後)토벌'로 작전을 세웠다.

9연대는 일단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일주일 뒤쯤 4월28일 김익열 연대장과 연대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측의 군사총책 김달삼 등과 회동해 '72시간 안에 전투중지', '무장해제', 하산(下山)한뒤 주모자들의 신변보장 등 3가지를 합의하는 평화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 직후인 5월1일 우익청년단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3기습사건'등이 잇따랐다.


5월 5일은 미군정 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에 내려와 최고회의를 갖는 자리에서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과 평화적 해결문제로 고집하며 충돌한 김익열 연대장을 해임했다.

이로써 게릴라측과의 평화협상은 1주일도 지나지않아 물거품이 됐다.

다음 날 김 중령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으로 부임하고, 수원에 있던 11연대를 추가로 제주에 파견됐다.

5.10선거에서 제주는 3개 선거구중 북제주갑구와 을구등 2개의 선거구가 과반수미달의 보이콧으로 선거가 무효화됐다.

제주는 남한 지역 내 유일한 5.10 총선 거부지역으로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4월 4일 아침부터 시작된 유혈극은 5.10총선까지 제주지역은 근 한 달간 살상·혼란·불안·분열 등으로 얼룩졌다.

이 기간 제주에서는 경관 12명과 가족 6명이 참살당하고,    경관 21명과 가족 3명 등이 큰 부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다. 민간인도 37명,  중경상자 58명,  관공서 공무원 사망 5명,  부상자 9명,  방화 45건, 납치된 경관 2명, 민간인 1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다, 사건발단 이후 제주도 내 400여 개 마을 중에 295개 마을이 전소됐고, 1만2250가구가 불에 탔다.

또한 관공서피해는 12개 면사무소 중에 5개가 소실되고, 경찰관서 소설12 개소, 학교 소실 34개소, 우체국 소설 1개소, 기타 통신시설 등 파괴가 속출했다.

이 기간의 제주지역 이재민만도 10만여 명에 달했다.
 
 
◇…5.10 선거 전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와 경비대 유격전

당시 우익진영에서는 이 민중봉기는 남로당 당원 등이 일으켰다고 결론을 내린다.

4.3사태 발발직후 미군정과 경비대 등에서는 제주도를 좌익게릴라가 손에 넣고 좌지우지한다는 보고서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 30년사(합동문화사)'에 의하면 '행정을 맡고 있는 관공리 (官公吏. 관리와 공리)가운데 제주도민출신의 좌익계열이 대부분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민들을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주도에는 당시 남로당 전남도위원회 산하에 대중단체라는 소위 합동노조, 농민위원회, 민예청, 민주여성위원과 별도의 군사부를 두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어 군사부아래 소위 인민해방군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각 읍면에 중대(中隊)편성을 하고 있었다.

군사부의 최고 간부급에는 과거 일본군에서, 그리고 팔로군 등에서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 청년들을 강제 징발해  일선에 내세우고, 팔로군 등이 산악지대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이른바 '나와 전법'을 쓰고 있었다.


군사부는 인원은 1000명였으나 이후 그들의 선전선동, 협박에 빠져 1000명이 새로 늘어 2000명 정도였다.

인민유격대 제1대사령관 김달삼, 제2대사령관 이덕구, 제3대사령관 정의봉이가 주도하여 한라산을 근거지로 주로 밤에 마을에 내려와 제주 인민공화국 선포를 동조하게 독려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는 지역을 다니면서 양민학살 방화 탈취을 저질 렀다. [출처] 37차.1948년 제주4.3사건의 진상|작성자 sdkim

김달삼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제주가 고향이다. 1943년 교토 오사카 성봉중학교를 졸업후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에 임관됐다.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1945년 일본에서 결혼했다.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원래 장인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으로 이승진이 이를 이어 받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해방 직후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8년 4·3 사건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달삼은 당시 친일파 척결, 외지경찰 철수, 남북 자주통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며 제주도에서 독단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4·3사건 이후 제주를 탈출한 김달삼은 인민유격대를 이끌고 강원도 영양과 영덕 일대에서 활동하다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험난한 일생을 마감했다. 

이들은 경찰관 살해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순경을 살해하면 1만원, 경사 2만원, 경위이상 간부 3만원, 경찰 유력자를 살해하면 100만원까지 현상금을 지급하겠다며 경찰과의 적대감을 불살랐다.

또 각 읍면에 후원대를 조직해 물자를 공급하게 하고 선전 흑색선정을 퍼뜨렸다.

군사부는 산악 방공호 내에서 등사판으로 종이를 인쇄해 '김일성 장군이 목포까지 오셨다'는 등 내용으로 비라신문을 발행했다.

4,3사태 촉발후 얼마동안은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폈다.

이렇게 20여 일간 공방을 벌였으나, 경비대와 국군이 증강되면서 이들의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한편, 5.10 선거가 제주에서 무산되자  군 병력과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됐다.

미군정은  5월 초 증강된 병력을 총괄 지휘하기위해 재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미 20연대장)을 파견, 현지의 최고사령관으로  경비대와 해안 경비대, 경찰, 미군을 통솔했다.

박진경 연대장은 김 전 연대장과 달리, 경비대의 평화회담이라는 온건전략이 아니라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곳곳에서 토벌작전에 대한 부작용이 속속히 발생했다.

1948년 5월27일 미군정 유동렬 통위부장이 밝힌 '포로로 잡힌 폭도'는 3126명(동아일보)에 이른다.

이후 이 숫자는 크게 늘어 그해 6월 10일에는 6000명(조선일보)에 달했다.

이런 가운데 박 연대장의  토벌작전에 나섰던  41명의 경비대원이 무기와 장비, 탄약5600발을 들고 탈영, 산속의 게릴라에 합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미군정 군정장관인 딘소장은 현장으로 달려와 박진경 연대장을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시키며 무력진압을 격려했다.

하지만 딘 장군의 신임을 받던 박 연대장은 그의 숙소에서 부하에게 암살 당했다. 박 연대장은 제주지역 유지들이 대령진급을 축하하기위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자다가 부하의 M1소총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후 9월까지는 소강상태였다. 그러다가 10월이 되자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10월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광주주둔 제5여단장인 김상겸 대령을 앉혔다.

이 제주도 경비사령부는 9연대 1개 대대, 5·6연대 각각 1개 대대, 해안경비대, 경찰대를 총괄지휘하는 부대다.
 
◇… 여수 주둔부대 '항명'과 10월부터 토벌작전 시작

그런 가운데 여순사건이 터졌다.

그해 10월19일 제주에 파병하려던 14연대 소속 대대가 항명하며 총뿌리를 돌리면서 전국은 걷잡을 수없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군 당국은 14연대 대대의 항명이 일어나자, 10월 20일부터 해군함정을 띄워 제주와 여수간 뱃길을 차단하고  제주포구의 모든 어선에 대해 출어를 금지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상당기간 외부와 완전 차단됐다.

김상겸 제주도 경비사령관은 인책되고, 그 후임에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어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송요찬 연대장은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Km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인정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또한 중산간 주민들에게는 해안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도 발동됐다.

그렇지만, 일부 마을은 이 같은 소개령이 채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토벌작전은 그해 10월 말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토벌군은 계엄령을 내세워 게릴라 등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100여 마을을 모두 태우고 민간인을 사살했다.

토벌군은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3광(光)3진(盡)작전'을 썼다.

한라산은 온통 불바다였고, 예로부터 지켜오던 중산간 마을은 파괴되었다.


소개령 등으로 참화를 입은 가옥이 1만5000여 가구 3만5000동에 달했다.

9연대의 중산간 지대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는 동안에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살됐다. 
 
당시 미군정기록에서 보면 군경토별대와 게릴라측간의 비율은 1대 100명. 이는 토벌대와 산속의 무장게릴라간의 전투에서 피해라기보다 비무장 주민들의 무차별희생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기간에 해안지대로 이주한 중산간마을 주민들마저 집단학살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집단학살의 예로 제주시 표선면 토산리 주민들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한 나흘 뒤인 12월 14일 표선주둔 9연대 토벌대원들에 의해 포박 당한 채 표선 백사장으로 끌려가 157명의 주민이 총살을 당했다.

1948년 12월 29일 제 9연대는 철수하고, 제2연대(연대장 성병선 중령)가 투입됐다.

제 9연대가 인계할 당시 경비대 자체 판단으로는 게릴라주력은 거의 소멸되고, 잔여게릴라 소탕도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이어 12월 31일에는 제주지구의 계엄령이 해제됐다.


좌익게릴라인 군사부 총사령관인 이덕구가 지휘하는 게릴라의 주력부대는 연대 교체기를 틈타, 공세를 취했다.

이어 1949년 1월 1일 새벽, 100여 명으로 추정되는 게릴라 주력은 2연대 제3대대를 기습했다.

그러자 성병선 연대장은 상부에 해제했던 제주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을 지속시켜줄 것을 건의해 1월 4일 다시 계엄령이 되살아났다.

2연대는 곧바로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해군함정은 한라산쪽을 향해 37mm포로 공격했고, 공군은I-4, I-5경비행기로 수류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1월 18일 메주 모슬포 지서와 성산포 지서가 제3구 및 제4구 경찰서로 각각 승격되면서, 토벌경찰력이 증원됐다.

2연대는 게릴라를 지역주민과 완전차단, 고립시키기위해 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게했다.

이런 과정에서 게릴라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2연대 장병들의 집단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됐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게릴라주력이 남원면 중산간 마을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 2중대를 기습했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당시 국민학교에는 중산간을 헤매던 남녀노소 80여명이 수용돼 있었는데 토벌군인들은 이들을 국민학교 뒷밭으로 끌고 가 모두 사살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반쪽 조국 잠들지 않은 섬. 양조훈 제민일보 부국장), 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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