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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8)> 국호 '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놓고 정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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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헌법제정시 국호놓고 대한민국이냐, 고려민국이냐 대립.
-이승만,초대의장 인사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계승들어 대한민국고집.
-김성수등 한민당, 통일된 나라의 뜻담에 '고려민국' 고집.
-구한말 고종의 '대한'선포...13년 단명한 뒤 일제가 대한 못쓰게해.
-30명기초위원 무기명 투표에서 대한민국17표로 가결...7월17일 공포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大韓民國)을 요약하면 어떻게  설명될 까. 두산백과사전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BC 108년까지 존재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및 남북국시대를 거쳐 중세에는 고려가 세워졌으며, 이후 조선이 건립되어 근대까지 이어졌다. 

현대 들어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과 소련 군대의 한반도 분할 주둔으로 남북으로 나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 휴전중이며, 현재까지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우리 나라 이름이 정해졌다.  

◇… UN승인 위해 정부수립에 최우선을 둔 이승만

당시 5.10 총선으로 구성된 초대 국회(제헌국회)는 그해 5월31일 개원하자마자 연장자인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았다.

이승만 초대의장은 의장에 취임하면서 가장 큰 현안이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왜냐면 정부가 수립되야 그해 9월  유엔총회에서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을 위해서는 근간이 되는 헌법제정과 정부조직법마련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무엇보다 헌법제정과 정부조직법 제정작업을 서둘렀다. 

그의 구상은 세상없어도 8월 15일까지는 정부수립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제헌국회 개원 이튿 날인 1948년 6월 1일의 제2차 본회의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30명과 국회법 기초위원 15명을 선정하기 위한 전형위원 10명을 선출했다. 

전형위원은 각 시.도별로 호선의 방식으로 1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기초위원 30명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여 6월 2일에 열린 제3차 본회의에 보고했다.

제헌국회속기록을 보면 헌법기초위원은 다음과 같다. 
  
유성갑(柳聖甲, 고흥 을),  김옥주(金沃周, 광양),  김준연(金俊淵, 영암),  오석주(吳錫柱, 고흥 갑),  윤석구(尹錫龜, 군산),  신현돈(申鉉燉, 무주).  백관수(白寬洙, 고창 을),  오용국(吳龍國, 남제주),  최규옥(崔圭鈺, 춘천),  김명인(金命仁, 울진),  이종린(李鍾麟, 서산 갑),  이훈구(李勳求, 서천),  유홍열(柳鴻烈, 제천),  연병호(延秉昊, 괴산),  서상일(徐相日, 대구 을),  조헌영(趙憲泳, 영양),  김익기(金翼基, 안동 갑),  정도영(鄭島榮, 영천 갑), 김상덕(金尙德, 고령),  이강우(李康雨, 진주),  허 정(許 政, 부산 을),  구중회(具中會, 창녕),  박해극(朴海克, 밀양 을),  김효석(金孝錫, 합천 을),  김병회(金秉會, 진도),  홍익표(洪翼杓, 가평),  서성달(徐成達, 고양 갑),  조봉암(曺奉岩, 인천 을),  이윤영(李允榮, 종로 갑),  이청천(李靑天, 성동)등이다.
  
이들의 소속 정당은 독촉국민회가 6~9명,  한민당이 5~7명, 그 밖의 군소정당이 2~4명, 그리고 무소속이 13~14명인 것으로  다르게 분석됐다.

이러한 숫자는 국회 내 세력판도를 대략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들 기초위원 30명 가운데는 전형위원이 8명(윤석구, 오용국, 이윤영, 유홍열, 이종린, 서상일, 허정, 최규옥)이나 포함, 논란을 빚었으나 그대로 확정되었다. 
   
◇… 우리나라 국호(國號)는 어떻게 변했나

해방후 우리 나라 국호 유래를 파악하기 위해선 구한말 황실의 역사를 들춰보면 된다.
 
120여년 전인 1897년이었다. 그해는 고종(高宗) 34년이다. 황제국을 선포하려던 고종은 그해 10월 11일 전· 현직 대신(大臣)들을 소집한 '확대어전회의'를 한번 더 열어 국호제정에 대해 의견을 청쥐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약칭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 따르면 고종은 생각을 먼저 말하지 않고 대신들의 얘기를 경청했다고 전한다.

당시 확대 어전회의 기록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지금 국호를 정해 써야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고종)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예전에 봉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명(天命)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의정 심순택)

심순택의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자가 누구인가. 이는 중국과 관련있다. 중국의 최초의 하(夏)나라에 이어 들어선 은나라, 그리고 주나라로 이어지는 역사성이 있다.

내려오는 구한말 역사에서 기자는 중국 은(상)나라 왕족이었다. 은(상)을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조선 땅에 책봉했다는 인물이다. 

때문에 기자가 다스리던 조선이라 해서 ‘기자조선’이라 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중국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의 낙점을 받아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확정했다.

그런데 이때의 조선이 '단군 조선'이 아닌 '기자 조선'이었다. 

“1392년 윤(閏) 12월 9일 명나라 태조(주원장)가 ‘동이(東夷. 동쪽의 오랑캐)의 국호에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영구히 번성하라’고 했다.”(<태조실록>)

문하 좌시중 조준 등은 명나라 황제의 조칙을 “기자(箕子)의 옛 봉토를 다스리니 황제가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평가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단군·기자·위만 등 조선이 셋 있었고, 신라·백제·고구려와 고려가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몰래 땅을 차지했다. 오직 기자만 주나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지금 명나라 천자께서 ‘오직 (기자)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다’고 했으니….”

정도전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기자(箕子)의 정통성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 국호를 정했다”고 천명했다. 전형적인 사대주의의 발로이다.

심순택은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500여년간 섬겨왔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과 황제국을 선포한 이상 ‘조선’이라는 국호를 고집할 이유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구한말 고종이 낸 국호는 '조선'아닌, ‘대한(大韓)’

대신들의 의견을 다들은 고종은 ‘조선’ 국호를 버리고 ‘대한’을 새 국호로 정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이다.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특진관인 조병세도 고종의 생각을 거들었다.

“예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한(韓)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한’ 자의 변이 ‘조(朝)’자의 변과 기이하게도 들어맞으니 우연이 아닙니다. 태평시대의 조짐입니다.”

조병세는 '조(朝)'와 '한(韓)'의 변이 들어맞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면서까지 조선을 대한으로 바꾸자는 고종의 명에 힘을 보탠 것이다.

고종은 “원구단(황제가 하늘제사를 지내던 곳. 현재 서울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내)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널리 알리던 조서)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틀 뒤인 1897년 10월13일 고종은 만천하에 “국호를 대한이라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했다. 

“우리나라는 단군과 기자 이후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三韓)’을 통합했다.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했다.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고종실록>)


고종은 우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삼한(마한·진한·변한) 통합이라고 여겼다. 또 조선 건국 후 북방의 4군6진을 개척하고, 남방의 탐라국을 완전 병합한 것을 ‘4000리 강토의 확보’라 보았다. 이것을 ‘한(韓)’의 개념을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대한(大韓)’으로 국호를 정한 이유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과 삼국(백제.고구려.신라)을 같은 개념으로 본 기록도 있다.

지난 2017년 8월30일 올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보면   '위략(魏略)'이나 '삼국지' ‘동이전’이 언급한 삼한(三韓)의 위치는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마한·진한·변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7세기부터 삼한은 원래의 역사적 실체와는 관계없이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당나라 고종이 백제왕에게 보낸 국서(651년)에도 해동 삼국을 ‘삼한(三韓)'’이라 했다. 

“해동 3국은 창건한 역사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여 지역이 실로 맞대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근래에 전쟁을 번갈아 일으킴에 따라 무사한 해가 없게 됐다. 이리하여 병기를 장만해서 삼한의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분풀이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

중국은 아마도 삼한(마한·진한·변한)에 이어 3국(고구려·백제·신라)도 동질적인 국가로 이해했기에 ‘삼한’과 ‘삼국’을 혼용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삼국유사, 신라 때 최치원도 삼한과 삼국 동일시
 
최치원(崔致遠, 857년 ~ 미상)이란 통일신라시대 '계원필경','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등을 저술한 유교학자이자 문장가가 있었다.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을 보면 "동쪽 바다 끝에 삼국이 있으니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언급했다.

삼한은 고려시대 들어 우리나라 전체를 일컫는 단어로 쓰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그 유명한 ‘훈요십조’에도 ‘삼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고려사 절요를 보면  “내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했는데…후대의 왕들에게 요긴한 가르침(훈요)를 적어 전하니… 다섯째 대업을 이룸에 있어 삼한의 산천이 도왔으니 특별히 서경(평양)에는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세나라는 서로 앙숙지간이었다. 

신라의 백제·고구려 정벌이 무슨 민족적 차원의 통일의식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상황에 180도 달라졌다.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백제·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통합정책을 폈다. 

이때 표방한 것이 ‘삼한 일통’의 사상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편(신문왕 12년)'에는 “선대 임금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하여 삼한을 일통하였다”고 되어있다.

삼국유사의 ‘기이·태종 춘추공편’에는 “왕이 유신과 함께 신통한 계획으로 힘을 함해 삼한을 일통하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또한 삼국사기의 ‘김유신전’은 673년(문무왕 13년) “김유신이 임종할 때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고 말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지난 1982년 충청북도 청주시 운천동에서 발견된 사적비를 보면 “삼한을 통합하여 땅을 넓혔다”(民合三韓而廣地)“는 신문왕 6년(686년)의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삼한과 삼국의 개념도 혼용되고 있다.

기록들은 삼한을 통일한 나라는  신라와 고려라고 적고 있다.

◇…‘대한제국 단명...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보면 조선왕조실록에도 삼한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태조실록의 ‘총서’에는 "1380년(고려 우왕 6년) 최영과 이색 등이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의 공을 상찬한다"하는 대목도 있다.

“태조(이성계)가 개선하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영접하면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일어난 것은 공의 승전 덕분입니다.’ 

또 한산군 목은 이색(충남서천출생)은 치하시를 읊었다.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삼한-삼국이 이처럼 오랫동안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조 고종은 왜 “고려 왕건이 삼한을 통일했다”고 했을까. 

조선왕조가 바라보는 ‘삼한 통일’의 개념을 잘 설명한 기록이 정조시대에 등장한다.

1799년(정조 21년)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조선 왕조의 개국 기원을 저술한 '흥왕조승(興王肇乘)'을 임금에게 올리면서 아뢴 말이 있다.

정조실록은 “동방에 단군과 기자 이후 삼한(三韓)으로 나뉘고 구이(九夷)로 흩어졌다가 신라와 고려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구한말 고종은  황제국과 함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런  ‘대한’은 1910년 한일병합으로 13년의 단명으로 끝난다. 

이후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독립운동가 현순의 셋집에서 중요한 모임이 있었다.

국내와 일본·만주·미국·시베리아 등에서 활약 중이던 독립운동가 29분이 이곳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가장 먼저 안건에 오른 것이 바로 국호문제였다. 

이 때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칭(稱)하자’고 결의했다. 

그 뒤 4월 14일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다.

기록만으로 보면 아주 쉽게 결정된 듯하지만 내막을 보면 국호를 결정하기까지 만만치않은 진통을 겪었다.

임시의정원에 참석한 몽양 여운형의 전기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국호는…대한민국으로 낙착되었다. 그렇게 결정될 때까지 상당한 격론이 거듭됐다. 대한민국 외에 조선 또는 고려공화국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대한은 이미 우리가 쓰고 있던 국호로서 그 대한 때에 우리는 망했다. 일본에게 합병되어버린 망한 나라 대한의 국호를 우리가 그대로 부른다는 것은 감정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을 주장한 사람들의 논리도 일리는 있었다. ‘대한은 일본에게 빼앗긴 국호이니 일본으로부터 되찾아 독립했다는 의의를 살리고, 또 중국이 신해혁명 후 새롭고 혁신적인 뜻으로 민국(民國)을 쓰고 있으니 대한민국이라 하는게 좋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수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채택됐다.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논쟁

임시의정원 때 처럼 제헌국회에서도  국호논쟁은 그대로 재현됐다.

1948년 개원된 제헌의회에서  단독정부수립을 즈음해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논란이 고스란히 불거졌다.

제헌국회의 촤대 국회의장인 이승만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1948년 5월 31일 이승만이 국회의장 자격으로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연설한 내용이 결정적이었다.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인연해서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이 못 되었으나, 우리 애국남녀가 해내 해외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 온 것이니,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는 전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이승만은 매우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탄생될 새 정부가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정의 계승’이라 선언했다.

이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23일 13도 대표자 24명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선포식을 열었다.

이것을 ‘한성정부’라 했다. 이때 이승만은 최고지도자인 ‘집정관 총재’가 된다. 

이승만은 5개월 뒤인 9월 상하이에서 완전체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으로서는 1948년 수립될  단독정부도 한성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맥을 잇는 ‘대한민국’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이승만이 ‘대한민국’ 국호를 고집한 이유다. 

이승만의 제헌국회 연설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새로 건국한 것이 아니라 1919년 기미년에 탄생한 '한성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맥을 잇는 정부임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을 반대하며 외친 ‘고려공화국’파


하지만 이승만의 ‘대한민국’ 국호에  반대하는 측도 만만치 않았다. 

제헌국회의 성격을 볼 때 원래 우(右)파는 '대한', 좌(左)파는 '조선', 중도는 '고려'를 국호로 내세웠다. 

그러다 우파의 중추인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고려공화국을 밀어붙였다.

‘고려공화국 파’의 논리는 탄탄했다.

한민당 소속 제헌의원인 조헌영은 ‘고려민국’이 타당함을 조목조목 주장하는 기고문을 경향신문 1948년 6월6일자에 실었다. 

“국호는 고려민국이 좋다. 그 이유는 첫째 고려는 전세계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호이다. 둘째 고려는 우리가 완전히 통일된 때에 쓴 국호다. 셋째 고려는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 독립한 때의 국호다. 넷째 고려라는 국호에는 민족적으로 반감,  대립감이 없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조헌영은 ' 한(韓)'에 대하 반대하는 이유를 댔다.

그는 “한(韓)은 삼한으로 분립됐을 때 쓰던 국호이고, 대한은 일본이 침략의 방편으로 과도적으로 산출된 자주성이 없는 나라의 때묻은 구호”라 했다.

조헌영은 “조선이라는 국호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폄훼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을 빼놓고는 중국의 지배를 받던 기자·위만·이씨조선의 국호다. 더욱이 왜정 36년간 나라를 잃은 이 땅의 칭호일 뿐이다.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을 국호로 하자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후 사학자 현상윤도 동아일보 1948년 6월23일자에서 비슷하게 주장했다.

“대한은 불과 13년(1897~1910년) 동안 일컬어진 명칭이다. 게다가 삼한은 부락국가다. 한강·임진강 이남의 분산적 지방적 명칭에 불과하다. 하등 통일적·전국적 구호가 이니다. 대한은 일한합병의 치욕을 받아 영구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 찍힌 국호다.”

현상윤 등 ‘고려공화국파’의 주장 중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대한’이 제국주의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대한(大韓)의 대(大)자는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처럼 제국주의적 사상을 본떠 지었던 것"이라며 " 오늘날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국시로 표방하고 있는 때에 국호로 채용하는 것은 불가하다. 따라서 국호는 고려민국이 낫다.”고 외쳤다.

지금도 일각에서 아무 생각없이 쓰는 국호 ‘대한민국’에 제국주의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주장은  이미 7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현상윤은 “500년 통일국가인 왕씨 고려와, 한민족으로서 중국과 당당히 패권을 다투던 동양 사상의 영웅적 존재인 고구려를 인용하는 만큼 국민의 영예와 이상에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사학자 손진태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대한은 제국주의적 성격이다. 대한은 우리 민족 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국호이며, 삼한은 지역이 한강 이남에 한했다. 아무런 위대성과 적극성과 진취성이 없다. 국민교육상과 민족정신사에 막대한 지장과 위축을 초래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가하다. 조선은 어떤가. 단군조선은 전설이요, 준왕 때의 조선은 평안도의 미미한 나라였다. 이씨조선은 문약과 당쟁의 나라였고 국제적으로는 왜인에게 모욕을 받은 이름이다.”

◇…인촌 김성수의 '고려민국'vs이승만의 '대한민국'

한민당의 ‘고려민국’ 혹은 ‘고려공화국’ 주장에는 한민당 최고지도자인 김성수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김성수는 해방직후 보성전문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고려대’라는 새교명을 붙였다. 

김성수는 '상해 임시정부'를 크게 인정하지 않았던 세력인데다, 네가지의 논리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하나, 고려(Korea)는 전세계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호이다. 둘,  고려는 최초로 우리가 완전히 통일된 때 에 쓴 국호다. 셋, 고려는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 독립할 때의 국호다.넷, 고려라는 국호에는, 민족적으로 '반감 이나 대립감'이 없다.

그러나 김성수는 이승만에 밀려서, 자신의 주장이 받아드려지지 않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고려 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고려대 2~4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는 자신의 자서전 '양호기'에서 김성수가 ‘고려’에 특히 애착을 갖고 잇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유진오는 “대학 이름을 고려라 지은 것은 인촌의 발상이었다. ‘...조선이나 한국은 이민족에게 수모를 당한 일이 있어서 싫고, 고려도 여진·몽골의 시달림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하여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촌은 ‘우리나라 외국어 명칭인 코리아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것이 아니겠냐’고 누누이 말했다.”

이승만측의 '대한민국', 김성수의 '고려민국'이 쉽게 결론나지 않자 제헌의회에서는 국호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초대 문교부장관인 철학박사 안호상은  “순 한글식으로 한나라 혹은 고려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자기 나라 헌법에 한글대신 한문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완전한 노예근성의 표현이요. 국어의 모독이자 외국에 대한 수치”라 주장했다.

천안 출신 이병국 국회의원은 “대한(大韓)보다 태한(太韓)이라 해야 한다”면서 “태(太)자를 쓰면 크다는 의미를 더 강조할 수 있으며, 태양의 의미도 담고 있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어떤 이는 ‘공화국’보다는 ‘동화국’이 어떠냐는 이색주장도 펼쳤다. 

기자출신인 설의식은 “새나라에는 새 국호를 사용하는게 옳다”면서 “새한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대한은 역사가 짧고 무게가 가볍고 권위가 약하며, 조선은 자국의 국호조차 스스로 짓지못하고 중국의 허락을 얻은 얼간이 조정이었다”는 것이다.

조소앙은 “한(韓)은 일본이 고의로 말살한 글자다. 그러기에 한(韓)은 자주독립의 상징문자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집결체다.”라며 조헌영의원의 고려공화국, 고려민국을 지지했다. 

일제는 한일병합 직전인 1910년 7월 7일 병합실무방법세목을 완성했는데, 제1조가 ‘한국을 개칭해서 조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이유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완용 등은 병합자체는 수긍했지만 '한국'이란 국호와 왕칭(王稱)은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제3대 한국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는 딱잘라 거절했다. 그 이유가 기막힌다.

“한국이라는 국호는 청일(靑日)전쟁 후 일본이 권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병합 후에도 한국이 존속한다면 나라의 안에 나라를 세우는 모양이 된다. 양국이 일가가 된다는 취지에 부응하지 못한다. 한국은 안된다. 대신 국(國)자를 떼고 그냥 ‘한(韓)’이라고 하던가, 옛 이름인 조선으로 돌아가던가 하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가 없는 테라우치의 주장이다.

“한국이라는 국호는 청일전쟁 후 일본이 권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나라 '국(國)'자는 붙일 수없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일제가 권고한 국호였다는 얘기인 셈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국호 '대한'을 못쓰게 했다.
 
대한인(大韓人)을 조선인으로 바꿨고, 대한 총독부를 조선 총독부로 바꿨으며,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변경했을 정도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탄생하기까지 이러한 우여곡절이 담겨있다.

1948년 6, 7월 초대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은 국호를 놓고 백가쟁명이 일자 “적절한 시기에 국호문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논쟁을 중단시켰다.

이승만의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해 우리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북측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남북 냉전분위기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헌법기초위원 무기명투표에서   대한민국 결정


결국 1948년 6월 7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30명은 무기명 투표 끝에 큰 표차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의결했다. 

당시 국회속기록에는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한국이 1표였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18일자 ' 대통령 책임제, 독촉서 지지성명'이란 보도를 보면 이승만은 6월 17일에 독촉국민회로 하여금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국회는 양원제, 정부구조는 대통령중심제로 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게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해 7월12일 기초위원회를 거친 국호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의 다른 조항과 함께 만장일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이처럼 국호 ‘대한민국’이 결정되기까지 엄청난 격론과 우여곡절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서상일 헌법기초위원장은 국회본회의에 대한민국국회결정안을 상정하면서 국호를 정할 때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호 문제가 말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혹은 조선이냐. 혹은 한국이냐. 이런 4가지 안을 두고 많이 논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후 7월 17일 오전 10시 대한민국을 국호로 하는 대한민국 제헌 헌법(大韓民國制憲憲法)및 정부조직법이 공포식이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단 위에 놓인 두 헌법정본(국한문본과 한글본)에 붓으로 서명한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헌법공포사를 낭독했다.

또한 존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3독 토의로 정식 통과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의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합니다. …”


이날 오후 3시에는 서울운동장에서 헌법공포축하시민대회가 열렸다.

이후 그해 9월1일 관보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대한민국이란 '대통합된 한민족의 국민국가'라는 큰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를 줄인 것이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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