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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풍옥헌(風玉軒)을 찾아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52편


052. 풍옥헌(風玉軒)을 찾아서
- 충남 서천군 서천읍 둔덕리 용학동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식견이 특출하였고, 가정에서 글을 배워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깨닫는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예제(禮制)를 다하여 복상(服喪)하다가 중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한 효자이기도 하다.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난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특히 타고난 자질과 진취적이며 씩씩하고 굳센 기상을 지닌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돈독히 노력하여 김장생, 김상헌, 이정귀, 권필 등 제현들과 교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풍옥(風玉)은 어느 것에도 굽히지 않는 꿋꿋한 정신의 표상이라 할 수 있거니와, 선생의 인품이 얼마나 존엄하고 거룩하며, 고결하고 고매한 인품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2020년 9월 10일 목요일 산애재(蒜艾齋.필자의 집필실)에서 빠져나와 시초면에서 벗어난다.

지방도 611호선인 서문로에 올라 서천읍내를 향하여 달린다. 매일이다시피 오가는 길이다. 그러나 C-19가 먼저 앞을 가린다. 마스크로 입을 봉한 채로 달린다. 달리다가 짐짓 멈춘다.

둔덕리 2리를 품안에 끼고 있는 봉학산이 굽어본다. 풍옥헌(風玉軒)이 내려다보고 있다. 풍옥헌은 짙푸르고 굵은 소나무에 싸여져 있다. 온 누리가 푸를 대로 푸르러 있다. 풍옥헌을 안내하는 표석을 뒤로 하고 마을 안길로 접어든다. 길은 좁다. 빠듯하게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너비의 길이다.

가다가 다른 차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택배차와 마주한다. 문득 멈추고 망설인다. 후진할 것인가, 전진할 것인가. 그러나 망설이는 시간은 길지 않게 되어 반갑고 고맙다. 택배차는 잠시 멈칫하더니 후진을 시작해 준다. 천천히 후진 차량의 앞을 따른다. 기사의 둥근 마음이 고맙다. 그리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인생에 있어서 후진하는 만큼 여유가 있으랴,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만약에 서로 고집한다면 아름다운 삶의 한켠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버렸을 것인가, 택배차를 비켜 올라가면서 클랙슨을 두어 번 눌러댄다. 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클랙슨 소리로 대신한 것이다. 그 순간의 마음은 비온 뒤의 가을 햇볕처럼 맑고 투명하게 출렁인다.

문득 동행인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는다.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의 14대 손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또한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서천에서 초등학교 교직에 함께 한 죽마고우(竹馬故友)이다.

같이 기행에 동행하면서 함께 서천을 말하기도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잇는다. 산을 좋아하는 천성(天性?)으로 군내에서 산악회의 일을 맡아 회원들과 더불어 전국의 명산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 산악인이다. 천방산(千房山)이라면 자신의 몸처럼 아끼면서 매일 오르내리고는 쌓아올린 돌탑처럼 굳은 마음을 새겨놓곤 한다.

동행인은 한발 앞서 차에서 내려 주차할 곳을 찾아준다. 다행스럽게도 풍옥헌 바로 밑에 넉넉히 주차할 공간이 있음을 손짓으로 말해준다. 차에서 내려 풍옥헌을 올려보다가 뒤를 돌아본다.

서천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탁 트인다. 간밤에 내린 비로 말끔하게 씻겨 내린 탓인지 푸른 들녘은 더욱 짙푸르고, 그 위에 가을의 맑은 햇살을 흩뿌려 놓으니 푸르름도 눈부시게 다가온다. 아니 굽이쳐 출렁이고 있다.


일생 동안 선비로 살아왔거니와 수기치인(修己治人)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을 본분으로 삼고, 존군부(尊君父)를 행하여 평생 동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 충의를 다하여 왔거니와, 이러한 삶의 향기가 푸른 들녘의 햇살로 빚어져 오늘날에도 우러러 일컬어지고 있는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 선생의 인품을 그려보게 한다. 문득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 선생의 생애와 활동>을 안내한 글을 읽는다.
 
본관은 풍양이고 부친 의정부 서인 趙廷機와 관찰사 姜昱의 딸 진주 姜씨 사이에 1555.1.15.일(명종10) 과천에서 태어났고, 평택현감 재임 중 1612.4.3일(광해4) 대북파 이이첨 일당이 꾸민 김직재 무옥사건에 엮이어 광해의 심한 고문에 불복하다가 향년 58세에 옥사하였다. 선조 임금의 여섯째 왕자 순화군은 선생의 생질녀 남편이고,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 7대손 이후재는 선생의 사위여서 왕실과 혼맥(婚脈)을 이룬 명문가 출신이다. 선조 때에 성리학 중흥기 우계 선혼, 율곡 이이 양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풍양조씨를 대표하는 석학 명현으로 명성이 높았다. 출사보다는 학문과 후학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출중하였다. 선생은 靜菴 조광조의 란죽시(蘭竹詩)를 젊어서 한번 보고 외워 선생이 노년에 이를 기억해 내어 임진왜란에 잃어버린 시화첩을 복원하게 되니 모두 감탄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석학이 이 고을에 입향하여 후학을 훈육하고 인재를 배출하니 모두가 존경하여 후에 유림에서 1709년 건암서원에 배향하였다. 건암서원은 고종 때 훼철되었고 현재는 기산면 화산서원에 배향되어 유림과 후손들이 제향한다. 셋째 아들 조속(趙涑)과 조카 조흡(趙潝)은 광해 난정에 대항하여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인조인금 등극 후 선생은 신원되어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조카 조흡은 조실부모하여 백부 풍옥헌 선생의 양육과 가르침으로 후손들이 현달하였으며, 신정익 황후 조대비(趙大妃)는 조흡의 7대손이다. 서천지역에는 선생의 많은 후손들이 세거지를 이루고 유지를 받들며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선생은 충청도 서천 문조(文照) 마을에서 5년, 6년 가량 살았다 한다. 24세인 1579년(선조1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29세인 1584년(선조17)에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다음해에 체직되기도 한다.

35세인 1590년(선조23)에 선릉(宣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37세인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만 두었으며,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26)에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전란 중에 곧 체직되기도 한다. 그 후 1593년 서천 문장리로 이주하게 된다.

따라서 풍양조씨들이 서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93년~1601년 사이이다. 풍옥헌 조수륜과 서천의 첫 번째 인연이 마련된 것이다.

1593년 원래 문조향의 옛터인 서천 문장으로 오게 된 연유는 처가(창강 조속의 외가가 된다)의 별장이 있어서였으며, 외조부 김씨의 장례를 임시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 서주동에서 셋째 아들 조속을 낳는다, 풍옥헌은 당시에 서지동 아래 당산(堂山) 밑에서 살았으며 살던 집 서쪽으로 수 리쯤 되는 판산리(板山里) 용학촌(龍壑村)에 헌당(軒堂)을 짓고 주위에 대를 심었다고 한다. 이곳 헌당에서 후학을 강학하였다.(『서천의 풍양조씨와 풍옥헌·창강』.서천문화원, 2017. p.p.16-17)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식견이 특출하였고, 가정에서 글을 배워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깨닫는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예제(禮制)를 다하여 복상(服喪)하다가 중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한 효자이기도 하다.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난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특히 타고난 자질과 진취적이며 씩씩하고 굳센 기상을 지닌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돈독히 노력하면서, 김장생, 김상헌, 이정귀, 권필 등 제현들과 교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의 셋째 이들인 조속(趙涑 1595-1668)은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창추(滄醜)·취추(醉醜)·취옹(醉翁)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금석문을 수집하여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음보로 등용되어 1627년(인조 5) 덕산현감을 거쳐 장령·진선을 역임하고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으며,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함으로써 청표탁행(淸標卓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기도 한 인물이기도 하다. <風玉軒(풍옥헌) 헌당의 유래>에 대한 안내의 글을 옮겨 적는다.


선조 때의 석학 조수륜(趙守倫) 선생이 임진란 이듬해 1593년 文照鄕(문장리)에 노모를 모시고 피난살이하면서, 국난 중에도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곳 용학동에 조그만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후학을 강학하던 곳이다. 대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의 운치가 심오하니 풍옥헌(風玉軒)이라 편액하였고 그 후 선생의 아호가 되었다. 처음 건물은 병화(兵火)에 소실되고 그 후 중수된 건물도 도괴되어 1844년 철거하고 후손들이 재정을 모아 1889년 현재의 헌당을 중건하였다. 이곳은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후손들의 성지이며 지역 유림과 문화계 및 관계당국에서도 향토문화 유적으로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하고 있다. 성역화 사업이 계속 진행 중이며 1850년 풍옥헌선생유허비, 1978년 풍옥헌선생유적비, 1981년 건암서원선생기적비, 1984년 만회이유겸선생위사행적비를 건립하였다. 2018년 5.17일(음4.3 忌日) 헌당에 풍옥헌 선생 영정을 봉안하였고, 매년 5월 둘째 토요일에 춘향제를 봉행한다. 헌당 초입의 풍옥헌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서천군 보호수이다.

원래 ‘풍옥(風玉)’은 당나라 때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무너진 절터에 남아있는 대나무를 보고 읊은 <작죽(斫竹: 베어 넘긴 대나무)>이라는 시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霜根漸隨斧(상근점수부:서리처럼 새하얀 대나무 뿌리마저 도끼에 찍혔지만) 風玉尙敲秋(풍옥상고추:바람에 댓잎이 내는 옥음玉音은 여전히 가을을 두드리고 있구나)에서 대나무에 바람이 불어댈 때마다 수많은 댓잎이 서로서로 부딪치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말하는 바, 이 소리가 마치 허공에서 옥(玉)을 구르며 내는 소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작죽’이란 자르고 쪼개어 대쪽을 쩍쩍 벌인 대나무인데, 이는 곧은 것을 베어 넘기는 무참한 짓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즉 이 시의 ‘베어 넘어진 대나무’는 신념과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요, 뿌리조차 도끼에 찍혔지만 바람이 불어 멈추지 않은 댓잎이 소리 내는 풍옥은 어느 것에도 굽히지 않는 꿋꿋한 정신의 표상이라 할 수 있거니와, 선생의 인품이 얼마나 존엄하고 거룩하며 고결하고 고매한 인품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함 때문일까? 선생이 남겨놓은 『풍옥헌유고(風玉軒 遺稿)』에는 평생 종유했던 인물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추포 황신(楸浦 黃愼), 상촌 신흠(象村 申欽) 등등 이 기록되어 있고, 문인으로는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중 상촌 신흠은 시를 지어 지금까지 풍옥헌에 게판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다.


小屋叢篁裏(소옥총리리) : 대나무라 숲속의 작은 집에서
幽人歲暮居(유인세모거) : 숨은 선비 한평생 살아가누나
直綠淸節竝(직록청절병) : 오로지 맑은 절조 감추었기에
고得世情疎(고득세정소) : 세상 정 소원함을 한껏 얻었네
鳳尾斜連悟(풍미사연오) : 봉황 꼬리 기우뚱 토담 닿았고
龍吟上徹虛(용금상철허) : 용 울음은 저 멀리 허공에 퍼져
休誇洛陽里(휴관낙양리) : 낙양의 흐드러진 붉은 모란 꽃
紅紫漫紛如(홍자만분여) : 속인들 아름답다 자랑을 마소

또한 약산거사 김종남(藥山居士 金終男)은 《풍옥헌 서문(風玉軒 序文)》에서 “대나무는 군자(君子)가 아니면 사랑할 수가 없고 더욱이 대나무의 높은 운치에 이르러서는 군자 중에서도 안정(安靜) 된 자가 아니면 들어서 해득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주인옹(主人翁)이 모든 면에 있어서 별로 사랑하는 것이 없으나 오직 대나무만을 사랑했고 대나무에 사랑할 만한 점이 많지만 유독 그 운치를 취택해서 헌당(軒堂)이 완성됨에 앞에는 경치 좋은 강산이 있고 뒤에는 구경할 만한 화죽(花竹)이 있는데도 오로지 이로써 그 헌장을 이름 지었으니 곧 이분의 간직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 말한다.

풍옥헌으로부터 대나무 잎이 부딪는 소리를 가슴 가득 담는다. 짙푸른 소나무들의 옹위를 받으며 그 푸른 기상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풍옥헌을 내려오는데 선생이 심었다는 하늘 높은 은행나무 우둠지에서 까치집이 동그마니 앉아 굽어보고 있다.

감히 우러러볼 수조차 없는 지엄한 선생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잠시 주춤하던 걸음을 달래고는 문장리 서주고을(서지동.棲遲洞)을 향하여 내친걸음을 재촉한다.


대숲, 대바람소리
                   구재기

온몸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소리도 보일까
올곧고 푸르게 자라온 
대나무는 언제나 둥글다
텅 비어있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비어있다는 것은 
둥그런 마음이 스스로 한가로운 것
참아가려는 어려움이라든가
무엇인가 좋아지게 하려고 
애써 일을 한 적은 없다
그냥 어떠한 마음도 비워놓고
둥글게 둥글게스리 
편히 스스로 울리는 모양새다
그렇다, 대숲 대바람 소리는
둥근 몸에서 울려나온다
양쪽 가[邊]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가운데[中道]에서 
둥근 몸으로 울려나오는 
대숲, 대바람 소리는 둥글다
모[角]진 곳의 울림에서는 
결코 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울려나오는 소리마저
텅 비워놓고
안에서 밖으로 
환하게 울려오는 소리
무엇이 몸으로 하여 
세상이 바로 보이게 되는가
풍옥헌의 맑고 푸른 
대숲, 대바람 소리, 
온몸으로 들어보면 
너른 세상이 둥글게 보인다 
곧고 푸른 소리가 
온 누리 가득 넘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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