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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그의 삶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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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선생 출생부터 청년시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생가지’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과 유물들이 담긴 ‘전시관’까지


학창시절, 한번쯤은 국사에서 이상재 선생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종교운동과 청년운동에 투신한 인물로, 그는 당시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길을 밝게 열어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상재 선생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보냈던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집으로 돼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이 없이 안채가 훤히 개방된 구조가 특징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이곳저곳 둘러보니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재 선생 생가 본래 건물은 1955년 훼손되면서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1972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됐다고 한다. 


마당 한편에는 여러 민속놀이를 할 수 있는 널뛰기 등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어른들에게는 추억의 향수를, 젊은 친구들에게는 신선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생가입구 옆에 위치한 우물에는 신기한 일화가 있다. 보통 우물을 열어 놓으면 물이 썩거나 이끼가 생기는데 이 우물은 과거 이상재 선생이 열어놓은 40년 동안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우물을 열어보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어떻게 지금까지 우물이 그대로일 수가 있을까? 그 의문은 얼마안가 쉽게 풀렸다. 그는 바로 이상재 선생의 생가 앞에 한산 8경 중 하나인 건지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사에 의하면 우물이 건지산과 솔바람의 정기를 받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건지산과 이상재 선생의 기를 받기 위해 이상재 선생 안방 앞마루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특히 우물과 건지산이 함께 찍히는 뒷마당은 관광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생가를 나오면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1991년 7월에 개관한 이곳은 이상재 선생이 생전에 남긴 업적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크지도 넓지도 않은 유물전시관은 이상재 선생의 유품들뿐만 아니라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과 어두운 일제침략기에서 우리 민족의 강건함을 보여줬던 그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은 문화 해설사의 해설과 함께 둘러볼 수 있는데 이상재 선생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방문수도 굉장히 많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좋은 교육이 될 것 같다.  

이곳에는 서적 132점과 임명장 6장 등 총 244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유품은 지팡이, 문방사우, 망원경 등 이상재 선생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들과 그가 죽은 뒤 주어진 대통령 훈장이었다. 

이곳은 한국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진 이상재 선생의 장례식 당시 모습들도 볼 수가 있는데 그 당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는 무려 10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당시 모습에서는 처음으로 국민들이 애도하는 사회장을 치른 만큼 그 당시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특히 이곳에는 당시 죽은 이상재 선생을 애도하는 글이 담긴 만장이 여러 개가 전시돼 있는데 이들 중 1개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 이유는 바로 1명이 만장을 거꾸로 썼기 때문이다. 많은 인파로 인해 만장을 거꾸로 쓴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던 그 당시를 증명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몰랐던 사실들도 알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상재 선생이 과거 ‘조선일보’ 사장이었다는 사실. 친일지로 낙인찍혔던 조선일보를 당대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발전시킨 그의 활약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1902년 이상재 선생이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과 함께 투옥됐을 때 감옥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이승만 대통령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사형수였다고 한다.

또 이곳 전시관에는 사이다 같은 이상재 선생의 풍자가 몇 가지 적혀있는데 이상재 선생은 당시 일본 앞잡이 고위 관료인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세력들에게 농담 비슷한 말로 일침을 하는 민족주의자였다.

그중에서도 이상재 선생이 YMCA에서 강의를 할 당시 했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창문너머 먼 산을 보더니 “개나리가 활짝 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의 헌병과 순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개+나리”라고 조롱한 것이다.

이 밖에도 이상재 선생의 올곧음을 보여주는 일화와 당시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어려운 처지의 남을 걱정하고 도왔던 일화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그의 생가지와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이곳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온몸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싸웠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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