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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누각(樓閣)의 다리 곁에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56편


056. 누각(樓閣)의 다리 곁에서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文獻書院)>을 찾아서③

문헌서원은 강학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 진수당과 제례를 준비하는 영모제로 들어가는 경륜당 누각(樓閣) 아래 출입구로 나누어져 있다. 바로 이 경륜당은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을 말하는데, 그 밑으로 들어가면 바로 교육관에 이르게 된다.

보통 경사지에 지은 건물에서 누각의 다리 아래를 지나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높낮이의 조절의 의미도 있기는 하겠지만 이곳에 학덕이 깊은 스승을 만나러 오면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도 숨어 있다고 한다.

누각 중앙 통로에는 <머리조심>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것도 미리 경계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거니와 거만하게 목에 힘을 주고 오는 방자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설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러하거니와 강륜당에 출입이 통제되어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보다 오늘날 같이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 애쓰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세태를 떠올리다 보니 하 좋은 가을날의 햇살도 오히려 그림자만 짙게 내려 그려놓고 있는 것만 같다.


교육관과 영모재(永慕齋) 사이로 하여 마당 안에 들어서니 교육관의 정면이 나타나고 영모재와 마주한 강륜당(講倫堂)이 보인다. 교육관을 곁에 두고 강륜당 앞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강륜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동안에 쌓아올린 학문을 유생들끼리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갈고닦으며 토론을 하고 수신(修身)을 하며 지낸 곳이거니와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얼마나 높고 엄숙한 곳이겠는가.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까닭과 내력이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소중한 건물인바 길이 보존하는 마음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가짐을 스스로 저미게 한다. 옆길로 내려가는 돌계단으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자칫 하마터면 문설주에 머리를 부딪칠 뻔하여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어쩌면 이리도 낮으막하게 출입하도록 하였을까. 그러다가 강륜당이라는 당호로부터 그 의미를 찾아본다.

강륜당(講倫當) - 바로 이곳은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강학(講學)’의 의미와 더불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인 ‘륜(倫)’을 갖추어야 하는 곳으로서, 서원의 학생들에게 강론을 펼치거나 지방 유림들이 모여서 회의나 논의를 하던 공간이란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의미일 게다.

결국 학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와 규범을 갖추고자 하면서 연구하는 곳이니만큼 누구라도 이곳에 들고날 때면 자기 자신부터 낮은 자세로 하여 공손히 허리를 굽히라는 준엄한 장소로서의 명령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헌서원은 강학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인 진수당과 제례를 준비하는 영모제로 들어가는 경륜당 누각(樓閣) 아래 출입구로 나누어져 있다.

바로 이 경륜당은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을 말하는데, 그 밑으로 들어가면 바로 교육관에 이르게 된다.

보통 경사지에 지은 건물에서 누각의 다리 아래를 지나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높낮이의 조절의 의미도 있기는 하겠지만 이곳에 학덕이 깊은 스승을 만나러 오면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도 숨어 있다고 한다.


누각 중앙 통로에는 <머리조심>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것도 미리 경계하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거니와 거만하게 목에 힘을 주고 오는 방자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도록 설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러하거니와 강륜당에 출입이 통제되어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보다 오늘날 같이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 애쓰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세태를 떠올리다 보니 하 좋은 가을날의 햇살도 오히려 그림자만 짙게 내려 그려놓고 있는 것만 같다.

조심조심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상태로 안전하게 강륜당 밑으로 들어와 교육관(敎育館) 앞에 선다. 이 교육관은 가정 이곡 선생과 목은 이색 선생의 높은 학덕과 고매한 정신을 후예들에게 널리 알리고 육성하기 위한 곳이다.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르고 교육생이 종일 조심하여 저녁에 두려운 듯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는 마음으로 배움에 최선을 다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까지도 이미 오래전부터 문헌서원에서의 강학이 이루어진 교육관에서는 ‘선비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문헌서원’으로서 유생체험을 통하여 사당에 참배하는 알묘례(謁廟禮) 뿐만이 아니라 지역문화답사를 위한 천년솔바람길 답사, 전통 문화체험의 일환으로 다례체험이라든가 서예체험, 그리고 훈장님과 함께 하는 고전 산책 및 선비 밥상체험까지도 연간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하니, 문헌서원이야말로 옛과 오늘이 하나 되어 이루는 선비의 참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경륜당과 마주하고 있는 건물은 영모제(永慕齋)로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목은 선생의 후손들이 선조의 학문과 덕행을 영원히 기리고 제향(祭享)을 모시는 재실(齋室)로, 구한말에는 영모학교(永慕學校)로 사용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영모재를 뒤로하고 물러나면서 목은 선생의 <한산팔영(韓山八詠)>을 떠올린다. 목은 선생은 “우리 집이 있는 한산(韓山)은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의 제과(制科)에 급제한 까닭으로 천하가 모두 동국(東國)에 한산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훌륭한 경치를 가장(歌章)으로 전파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팔영(八詠)을 짓는 바이다”라면서 <한산팔영(韓山八詠)>을 짓게 된 이유를 스스로 밝혀놓는다. 그중 처음과 끝의 두 편을 소개한다.


•崇井巖松(숭정암송)
峯頭蒼石聳(봉두창석용) : 산봉우리엔 푸른 돌이 솟아 있고
松頂白雲連(송정백운연) : 소나무 끝엔 흰 구름이 연하였네
羅漢堂寥閴(나한당요격) : 나한당은 적적하기만 한데
居僧雜敎禪(거승잡교선) : 중들은 교종 선종이 섞이었구나

•雄津觀釣(운진관조)
마읍산횡장(馬邑山橫障) : 마음의 산은 병풍을 비껴 친 듯
웅진수염태(熊津水染苔) : 웅진의 물은 이끼 빛으로 물들었네
조사풍리뇨(釣絲風裏褭) : 낚싯줄은 바람 받아 간들거리다
흡득명월회(恰得明月回) : 달이 밝은 뒤에야 돌아가네 그려

위의 2작품 외에 두 수 이외에 <한산팔영(韓山八詠)>에는 ‘日光石壁(일광석벽)’ ‘孤石深洞(고석심동)’ ‘回寺高峯(화사고봉)’ ‘圓山戍高(원산수고)’ ‘鎭浦歸帆(진포귀범)’ ‘鴨野勸農(업야권농)’ 등이 전한다.

목은 선생은 이 8작품의 끝에 한산팔영(韓山八詠)을 소나무[松]로 시작한 것은 스스로 책려(策勵)하는 뜻이고, 낚시질[釣]로 마친 것은 곧음을 생각한 것이며, 그 다음의 일광(日光)은 동방에서 나와 원근(遠近)에 두루 미침을 의미한 것이고, 그 다음의 고석(孤石)은 확고한 그 바탕에 드러난 우뚝함을 취한 것이며, 그 다음의 회사(回寺)는 군(郡)의 사적(史蹟)을 중히 여기는 뜻이고, 그 다음의 원산은 병사(兵事)를 삼가는 뜻이며, 그 다음의 진포(鎭浦)는 백성의 이로움을 보인 것이고, 그 다음의 압야(鴨野)는 백성의 생활을 정립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벼운 일로부터 중한 일로 들어가서 말단적인 것을 먼저 말하고 근본적인 것을 뒤에 말한 것은 곧 전문(晉問)의 글이 당(唐)에서 마친 것을 본받은 것이니, 고을의 선사(善士)들은 감조(鑑照)하기 바란다”면서 작의(作意)를 밝혀놓고 있다.

여기에서 ‘전문(晉問)’이란 이백·두보·한유(韓愈)와 더불어 당나라 시대 시문의 사군자(四君子)로 불리는 유종원(柳宗元)이 지은 글의 편명(篇名)인데, 그 글이 맨 처음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논한 것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으로 견갑이병(堅甲李兵)과 병마(兵馬) 등을 논하고, 맨 뒤에 이르러 진(晉)은 곧 옛 당(唐)으로서 요(堯) 임금의 유풍(裕豊)이 있다는 것으로 마쳤기 때문에 이를 본받은 것이라고 한다. - 『목은집 제3권』(민족문화추진회편,『신.편 국역 목은 이색문집』VOL.1. ㈜한국학술정보).P.P. 235-237

목은 선생의 <한산팔영(韓山八詠)>을 읊조리듯 생각하면서 장판각 밑으로 하여 진수당 뒤에 이르니 돌계단의 끝에 세워진 경현문(景賢門) 앞에 이른다.

굳게 닫힌 문을 곁에 두고 돌담 너머로 보이는 곳은 바로 효정사(孝靖祠)다. 이곳에는 가정과 목은 두 선생을 주벽(主壁: 사당이나 사원에 모신 여러 위패 중에서 주장(主張)이 되는 위패, 즉 사당이 지어질 때 봉안된 배향인물)으로 모시고 있다.

이외에도 가정선생의 손자이며, 목은 선생의 이들인 현암(玄巖) 이종덕(李種德. ?~?), 목은 선생의 둘째 아들인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 1361~1392), 목은 선생의 셋째 아들로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해 효자로 일컬어지고,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린 양경(良景) 이종선(李種善. 1368~1438), 목은 선생의 손자요 이종덕의 아들인 한재(漢齋) 이맹균(李孟畇. 1371~1440), 목은 선생의 증손이요, 이종선의 손자이며, 이계주(李季疇)의 아들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 1417~1456), 목은 선생의 후손으로 대사간을 지낸 이예견(李禮堅)의 아들로 음애(陰崖) 이자(李耔) 등 8분을 모신 곳이다.

그리고 해마다 음력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8변(籩: 제기 이름으로 굽이 높고 뚜껑이 있으며 과실을 담는데 쓴다) 8두(豆:제기 이름 또는 제수 제물을 말한다)를 올린다고 한다. 효정사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효정사의 효(孝)는 가정 이곡 선생의 시호 문효공(文孝公)에서, 정(靖은) 목은 이색 선생의 호인 문정공(文靖公)에서 따온 것이라 전한다. 

돌계단을 경건한 마음을 모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뛰어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잠시나마 되뇌이고는 목은 선생의 시 한 편을 그려본다.


箕裘只願守家傳(기구지원수가전) : 나는 야 가업 잘 지켜 전하기만 원했으니
桂苑鑾坡是偶然(계원란파시우연) : 과거급제 한림학사는 우연일 뿐이요
拜表謝恩雙闕下(배표사은쌍궐하) : 표문 받들고 사은하여라 대궐의 아래요
擧觴獻壽一樽前(거상헌수일준전) : 술잔 들러 축수 올려라 술동이 앞이로세
村翁但訝連登第(촌옹단아연등제) : 촌 늙은이는 연이어 급제함을 으아해하고
里友皆警早著鞭(이우개경조저편) : 마을 친구는 모두 일찍 출세함에 놀라네
滿眼江山增秀氣(만안강산증수기) : 눈에 가득한 강산이 수려한 경치 더하니
北堂萱草媚晴天(북당훤초미청천) : 맑은 날에 북당의 원추리 곱기도 하여라
― 『목은집 제3권』(민족문화추진회편,『신.편 국역 목은 이색문집』VOL.1. ㈜한국학술정보).P. 222 


위 시는 연하여 급제한 후에 한산에 이르며 쓴 작품인 듯하다. 일찍이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던바, 연이어 급제한 목은 선생으로서의 귀향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현문 아래에서 물러나 진수당(進修堂) 뒤켠으로 하여 ‘한산문헌서원비기(韓山文獻書院碑記)’를 보고 쪽문으로 나오니 오른쪽 위로 ‘목은 이색선생영당(牧隱 李穡 先生 影堂)’이 보인다. 그리고 영당을 두 손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듯 영당의 뒤에서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을 본다.

화려한 꽃으로 지내왔던 지난여름으로부터 벗어나고서도 아무런 욕심도 부리지 아니한 채 담담하게 가을을 맞으면서 영당을 지키고 있다. 이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고려 말 선비들의 문집인《보한집(補閑集)》이나 《파한집(破閑集)》에 꽃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에서는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고 한다. 글자 그 자체로는 보라색 꽃이라 하지만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지은《양화소록(養花小錄)》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름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자미화를 백일홍이라고 한다”라는 내용이 있거니와 일찍부터 붉은 꽃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꽃이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나무’라 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의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에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붉은 꽃으로, 혹은 흰 꽃으로 피고있 는 배롱나무 꽃은 한층 더 돋보이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높은 학문과 덕행의 아름다움으로 뭇사람들의 가슴을 향기롭게 울려주는 목은 이색 선생생의 ‘영당(影堂)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껴진다.


누각(樓閣)의 다리 
                   구재기

허리를 굽히며 걷는다
머리를 숙이며 들어간다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세상을 향하여 외치던
그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
이제는 스스로 
낮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허리를 굽힌다, 목을 숙인다
아, 그러나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허리를 굽히다 보면
무릎은 더욱 꿋꿋하게 세워진다.
머리를 숙이다 보면
더욱 꼿꼿해지는 무릎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무엇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고개를 숙이는 일도
허리를 굽히는 일도
일상이 편안한 지금의 이 자리
다 된 자리이고, 다 한 자리가 되는 것
무엇을 더 차지하여 이루리
무엇을 더 바라면서 찾으리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면 보이리
하늘이 이룬 허공의 무게로
누각을 받들고 
지상에 내려앉은 구름은 
짙은 그림자로 흐른다

이제는 스스로 
낮추는 법을 배우기 위해
누각의 다리 곁에서
허리를 굽힌다, 목을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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