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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로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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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화 시인


나는 카톨릭 신자이지만 법정 스님을 좋아한다.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 만큼 법정 스님을 우러른다. 그 분이 쓴 ‘무소유’를 읽으며 이것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는 잠시의 만족만을 줄 수 있다. 한계가 뚜렷하다. 이를 넘어서려면 더 많은 소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무소유’는 말한다.


‘무소유’와 닮은 책을 대학 시절에 읽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갖고 있던 삶의 대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까지 나에게 바람직한 삶이란,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가족을 잘 부양하는 것이었다. 부와 명예, 가족과 건강.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나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삶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개미집단의 일개미처럼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수행해야할 책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보람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별적인 존재로서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을 그 책은 말하고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쓴 ‘월든’이 바로 그 책이다.


월든은 미국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 숲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혼자 살았다. 문명에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삶의 근본적 가치와 대면하고자 했다. 그의 문장은 그의 삶처럼 간결했다. 장식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여운이 길었다. 월든에 매료된 나는 기회가 되면 시골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를 전전하던 나의 꿈은 40년 후에 이루어졌다. 퇴직을 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서천으로

귀촌을 한 것이다.


법정 스님도 ‘월든’을 좋아했다. 그가 사랑하는 책 중에서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월든’이다. 그래서인지 무소유와 월든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가로막는 것은 과도한 문명의 편의와 거기서 비롯되는 물욕이라고 본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소유는 불교의 공(空) 사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고, 월든은 자연주의와 초월주의의 시각에서 분석한다. 그래서 무소유는 나이 든 기성세대들이 읽기에 편하고 월든은 젊은 층이 접근하기 좋을 것이다.


법정 스님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둘 있는데, 한 사람은 소로우이고 다른 한 분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이다. 간디는 평소에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남는 것은 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평판뿐일 것이라고 했다. 보잘 것 없는 평판이라니... 간디의 평판이 그러하다면 우리네의 이름값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로는 견디지 못한다. 선물 받은 난초 화분에 집착이 생겨도 법정스님처럼 초연하게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간소한 생활을 했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정신은 드높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분들의 경지를 따를 수 없다. 다만 약간은 흉내낼 수 있다. 검소하게 지낼 수 있고 물질보다 정신에 높은 가치를 둘 수 있다. 선하게 살며 어느 정도는 타인을 배려할 수도 있다. 월든이나 무소유만큼은 어림없지만 노력하면 책 몇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미국으로 건너가 월든 호숫가를 거닐고 싶다. 그 숲에는 소로우의 통나무집이 복원되어 있다. 법정 스님은 두 번이나 그 곳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소로우를 만날 수 있다. 서천의 자랑인 국립생태원에 가면 <소로우 길>이 있다. 그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더 놀랍게도 소로우의 통나무집을 만나게 된다.


마침 단풍의 계절이다. 낙엽을 밟으며 소로우의 길을 걸어볼 만하다. 월든의 것과 같게 지었다는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한 번쯤 소로우가 되어보는 것도 좋겠다. 인증샷을 남길 만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봤자 글 몇 줄 밖에는 교육시킬 만한 것이 없다. 간디와 법정 스님에 견주어 짐작해본다면 그 집에 볼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로우의 집을 보러 월든으로 가고 있다. 아마도 국립생태원을 찾는 관광객 머릿수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들도 그 곳에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안다. 그 통나무집에 담겨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러 가는 것이다. 단순한 삶이 주는 편안함, 비어있음에서 오는 여유로움,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유롭고 충만한 통찰의 세계를 엿보러 가는 것이다.


서천에 살면서, 누가 <소로우 길>을 묻는데 모른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다. 소로우나 법정 스님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오늘 한가하여 새벽에 무소유를 읽고 낮에는 월든을 펼쳤다. 오랜 벗을 만난 듯 반갑고 새로웠다. 가을 하늘은 높고 가슴이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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