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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3의 길 그리고 협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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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프랑스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의 나이가 화제다. 39세의 그는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가장 젊은 리더가 되었다. 젊은 만큼이나 그의 정치 노선도 개혁적이다. 그는 극심한 좌우대립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중도좌파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으로는 친기업적인 우파이며 정치사회적으로는 불평등 해소를 우선하는 좌파다. 이른바 ‘제3의 길’을 프랑스가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서구에서는 30~40대의 젊은 리더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유명하지만 그리스, 벨기에, 폴란드, 헝가리도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탈 기성정치를 지향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 전 총리처럼 개혁을 서두르다가 좌초하는 경우도 있다.

‘제3의 길’이란 영국의 사회학자 엔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실용주의 중도노선을 일컫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로 제시되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신좌파노선’과 독일 슈뢰더 총리의 ‘새로운 중도’, 프랑스 죠스팽 총리의 ‘현실적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유럽 중도좌파의 정치 이념으로 떠오르며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제3의 길’은 아직은 미완성의 이론이다. 20여년에 걸친 야심찬 추진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미미하다. 좌와 우의 조화는 양쪽 다 미흡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반발이 따른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잡탕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신세다. 

그러나 노자는 ‘대도(大道)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했다. 작은 길은 좌와 우로 뻗겠지만 큰길은 그 모두를 통섭한다. 헤겔의 변증법에 비춰보아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미 정(正)과 반(反)의 역할을 다했다. 숱한 수정과 변질로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제3의 길’의 등장은 역사의 순리일 수 있다.  
마크롱의 집권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이 때문만이 아니다. 유럽이 아직 ‘제3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겪은 유럽이라면 성과를 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젊은 정치인들의 도전이 계속되는 까닭이다.

마크롱의 아내의 나이도 화제다. 열다섯 살 고등학생이던 그는 서른아홉의 교사인 그녀를 만났다. 아이가 셋인 유부녀였다. 당연히 부모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의 끈질긴 구애로 그들은 결국 결혼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부부도 24살 차이가 난다. 트럼프가 59세일 때 35세의 모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들의 성공 사례는 부부의 나이 차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편의 연령이 아내보다 높았다. 연상의 남편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는 남성우월주의가 당연한 질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결혼연령과 평균수명의 역진으로 노인의 대부분은 할머니로 채워진다. 우리 사회는 노령화가 아니라 노파화를 향해 달려간다. 

이제는 차별철폐를 넘어서 평등의 시대다. 남녀가 평등하다면 남편의 나이가 많아야할 이유는 사라진다. 우리나라도 나이보다 능력이 우선시된다. 여성이 연상인 경우도 16%에 달한다. 이러한 추세는 결혼의 ‘제3의 길’이라 부를 만하다. 이처럼 명목보다 실질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뚜렷해지고 있다. 

정치적 실용주의는 나라마다 특색이 있다.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좌파와 우파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그 뿌리가 깊어 저항이 크지만 자본주의 단계 없이 공산주의 혁명을 겪은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명분에 집착하는 성향이 깊고 6.25를 겪어 이데올로기에 증오심이 크다. 중도세력이 자리 잡기 어려운 토양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는 그 명칭부터가 적절하지 않다. 일부 꼴통보수와 빨갱이 진보를 제외하면 유럽의 좌파와 우파와는 이념이 다르다. 국민이 선입견으로 정치권을 가르고 정치인들이 선명성 부담에 각을 세울 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개혁과 안정의 두 마리 토끼몰이와 이른바 ‘협치’의 길은 ‘제3의 길’을 연상시킨다. 문재인과 마크롱은 이상과 현실의 벽에 계속 부딪칠 것이다. 위장전입 같은 암초는 애교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디 기죽거나 옆길로 새지 말기 바란다. ‘협치’가 ‘제3의 길’과 ‘흑묘백묘론’에 상응하는 우리식 실용주의로, 또한 실학파가 꿈꾸었던 실사구시 정신의 위대한 부활로 거듭 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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