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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8)> 임영신 초대 상공부 장관 독직사건과 기소·무죄 논란

임영신 초대 상공부 장관의 독직 의혹 사건...정부 수립 후 첫 장관 재판
최대교 서울지검장 이승만의 수사중단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수사지휘...18명기소
임 전 장관, 1948년 경북 안동 국회의원 출마...선거비용 마련 둘러싼 검찰의 집중 수사 받아
1심에서 임 전 장관 등 9명 무죄, 9명만 집유나 벌금형으로 석방...판결 결과에 국민들 의아
정부 수립 후 권승렬·김익진, 최대교 등 검찰 수호자 3인으로 기록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 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이승만 초대 정부는 아다시피 군이나 검찰보다, 경찰을 더 신뢰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을 수사중단명령이나,  기소중단명령을 거역한 검찰 수뇌부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친일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를 청산하자는 국민적 요구를 듣는 척하며 '반민족 행위자 처벌특별수사위원회(반민특위)'를 마지 못해 구성했으나, 이를 와해시키기위해 별별 꼼수를 다썼다.

결국 1949년 6월6일 장경근 전 서울중부서장( 후에 내무부차관)이 이끄는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본부사무실을 습격한 것도 이승만의 비호로 빚어졌다.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이 사퇴하고, 특위위원들이 사퇴할 정도 였다.

친일경찰들은 현장점검에 나간 권승렬 검찰총장을 무릎꿇리고 구타하고, 권총을 압수할 정도였다.

이 '6.6사건 이후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위해 권승렬을 검찰총장에서 법무장관으로 기용했다. 

특히 제헌국회 소장파의원들의 요구로 구성된 반민특위해산을 위해 해당 소장파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노골적이었다.

여기에다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 초대위원장, 부위원장의 협박에다, 테러가 버젓히 일어났으나 이를 조사할 경찰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때문에 들풀처럼 친일경찰청산과 반민특위활동 강화를 요구하는 여론이 일자, 반공을 구실로 국회프락치사건, 조봉암 농림부장관 독직사건과 해임, 그리고 말을 듣지않은 법조인들에 대한 용공조작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승만과 검찰이 각을 세운 것이 수면위로 오른 것이 여러 건이 이무렵 터졌다.

그중의 하나가 지난 주에 소개괸 검찰의 이승만 사조직인 대한 정치공작대 사건이며, 이어 임영신 상공부장관 독직사건이다.

◇…이승만의 대한정치공작대 수사중단 특명도 거부한 김익진 검찰총장

대한정치공작대는 이승만 권력의 비호 아래 1950년에 생겨난 사설 정보·탐정단체다.


이승만의 비서와 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정운수(鄭雲樹)가 배후핵심인물로, 대장은 김태수(金泰守, 일명 金嶺)가 맡았다.

정동엽(鄭東燁)·김낙영(金洛永)·오관수(吳官守)·이무열(李武烈)·정운수 등이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내무부장관 백성욱(白性郁) 등 고위 인사들도 이 단체와 관련이 있었다. 

대한정치공작대는 1950년 4월 트럭 10여대에 헌병과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인민군 부사령관이라는 최동석(崔東石)을 체포하고 경무대 근처의 땅 속에 묻어둔 장총 한자루와 실탄 등의 무기를 찾아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야당인 민국당(民國黨)의 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백관수(白寬洙)·김준연(金俊淵) 등의 거물급 인사들이 남하간첩들과 밀통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한 음모를 밝혀냈다고 발펴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오제도(吳制道)·선우 종원(鮮于宗源)·정희택(鄭喜澤) 등 세 검사는 이 사건이 철저한 조작극임을 밝혀내었다. 

결국, 대한정치공작대의 김태수·정동엽·김낙영·오관수·이무열 등은 불법단체조직·허위고발·무기불법관리 등의 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배후핵심인물이던 정운수는 미국으로 도망갔다.

이 사건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우세가 예견되던 상황 속에서 집권당의 하수인단체가 정치적 조작극을 꾸며 당시의 제1야당인 민국당을 붕괴시키려 하였던 정치사건으로, 당시의 정치문화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여기에 충남부여 구룡출신인 제 2대 김익진 검찰총장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용공조작, 간첩조작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이 잡아다주는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낙인, 법원으로 끌고 가서 유죄 구형을 하는 '권력의 시녀'가 되길 거부했다.


김익진 총장은  '정치공작대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승만의 수사지휘를 특명의 친서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김익진은 서울지검을 독려해 대한정치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하고,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경무대(청와대)에 보냈다.

전쟁 사흘 전인 6월 22일, 김익진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됐다.

해임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해임보다 더 강력한 징계였다.

이 징계 역시 이승만의 뜻에 따라 이뤄졌다.
   
검찰총장이 서울고검 검사장으로 좌천됐다. 

그런데도 옷을 벗지 않고 버텼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은 6·25가 일어나기 사흘 전. 2대 검찰총장 김익진 이야기다. 

그리고 무죄로 드러났지만 이승만살해사건의 배후로 지목, 구금되기했다.

이승만은 이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더 심했다.

이시영(李始榮). 김성수. 김창숙(金昌淑) 등 범야 정치지도자들을 습격하여 폭행. 감금한 '국제구락부사건', 정부 보유불(保有弗)인 '중석불불하 부정사건',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이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중립화를 모의하였다는 '뉴델리밀회설', '4사5입 개헌파동', 야당계 인사들을 모함하기 위한 '국회불온문서사건' 등을 조작하였으며,<<경향신문>> 의 폐간과 <<동아일보>>의 1개월 정간 및 대구매일신문사 습격 등 혹독한 언론탄압을 강행하였다.

◇…제2의 김익진, 누룽지 검사장  최대교서울 지검장

이보다 꼭 1년 앞선 1949년  초대 권승렬 검찰총장 아래에 서울 지검장인 최대교(崔大敎ㆍ1901~1992) 라는 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검사의 직책에 있었으나 늘 가난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는 최대교 당시 서울지검장을 이렇게 소개했다.

‘냉수도 헹구어 마시는 사람’, 이것이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었다. 

그는 쌀 한 가마를 살까말까 한 월급밖에 몰랐다. 때문에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부업으로 편지봉투를 만들어 생계에 보탰다. 


자녀들은 수업료조차 제때 납부하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지위에 있었을 때도 그는 도시락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남몰래 누룽지로 허기를 때울 때도 많았다.

어느 날은 검찰청 출입기자들에게 그 장면을 들켰다. 

그 바람에 ‘누룽지 검사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최대교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1949년 4월에  일어난 충남금산 출신인 임영신(任永信. 1899∼1977)상공부장관 독직사건이었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임영신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였다.

측근인 그에게 대통령은 대미 경제교섭창구를 맡긴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물자에 크게 의존했다.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상공부장관직은 그야말로 권력의 실세요, 노른자위였다. 

대통령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지자 임영신은 장관 자리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국회 진출도 노렸다. 현직 상공부장관의 직권을 남용해가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임영신은 누구

교육자이자 여성·정치가다.  호는 승당이다.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에서  아버지 임구환(任九桓)과  어머니 김경순사이에서 12 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독교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뒤  1909년 고향의 심광학교, 1914∼1918년 전주의 기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9∼1921년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 1925∼193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공부했다.

석사학위논문은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며, 1957년에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부터 천안 양대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에 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1921∼1922년 공주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1933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보육학교 경영을 맡게 되었으며, 1941년에 조직된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다. 

1942년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조직되자 김활란·박순천 등과 함께 지도위원을 맡았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9월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 취임, 그리고 1953년 2월 중앙대학교 총장,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한편 1945년 10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여성최초의 정당대표다.

이듬해인, 1946년 2월에 설치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 의원을 지냈다. 

1948년 8월 상공부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으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으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50년 2월 상공일보사 사장, 1952년 여성계사 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1963∼1971년 대한부인회 회장, 1965∼1973년 교육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이 되었고,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이 되었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1972∼1976년 국민회의 대의원과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My Forty Year Fight for Korea'가 있다.

1977년 세상을 떠났으며 중앙대학교 교정에 유해가 묻혔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미국 아이젠하워상·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이승만·이인의 수사중단 회유와 압력 거부한 최대교

이승만이 미국 유학생인 임영신에게 청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48년 8월 제1공화국이 출범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임영신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였다.

측근인 그에게 대통령은 대미 경제교섭창구를 맡긴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물자에 크게 의존했다.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상공부장관직은 그야말로 권력의 실세요, 노른자위였다. 

대통령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지자 임영신은 장관 자리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국회 진출도 노렸다. 현직 상공부장관의 직권을 남용해가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임 장관에 관한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그의 독직사건은 서울지방검찰청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 

평소 대쪽 같은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최대교가 마침 서울검찰청의 검사장이었다. 

최대교는 이 사건에 관한 수사를 진두지휘하여 임 장관의 혐의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자료를 다수 확보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임 장관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나섰다.

이인 법무부장관이 권승렬 검찰총장에게 불기소지시를 내렸으나, 권총장과 최대교 검사장은 이를 듣지 않고 기소해버리자 이인 법무장관이 사임했을 정도다.

이승만은 이어 경찰에 명령을 내려 수사에 협조하지 못하도록 했다. 역시 최대교 검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집권층은 최대교 등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건을 깊숙이 파고들면 보복인사를 단행하겠다고 협박했다.

사건을 담당하는 검찰측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들었다.

이런 경우 늘 그렇듯 부당한 압박의 이면에 달콤한 회유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수사를 적당한 선에서 유야무야 끝내준다면, 최대교에게는 법무장관 자리를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휘하 검사들 역시 요직으로 영전시켜주겠다는 제안이 잇따랐다.

그러나 최대교 검사장과 동료검사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검찰이 중립위치에 없이는 삼권분립이 어림없다는 것이 최검사장과 검사들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인 법무장관을 개입시켰다. 

정권 차원에서 임 장관에 대한 기소유예를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설사 임 장관이 개인적으로 부정부패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대외적인 체면을 위해서 그만 묻어두라는 것이다.

이승만측은 "허다한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상공부장관이 직권남용죄로 처벌될 경우, 미국은 한국정부를 불신하게 된다"라는 구실을 붙였다. 

그러더니 "이것은 국익에 해롭다. 따라서 임 장관에 대한 수사는 한시바삐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 장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비호를 방패 삼아 연일 큰소리를 쳤다.

임 장관은  “어떤 경우라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최대교 검사장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임영신 장관의 비리행위를 입증하는 증언과 물증을 낱낱이 수집해 그를 전격 기소했다.

고집을 부리던 임 장관은 결국 현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앞에서도 법도 약해보였지만,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 이것은 근대적 법정신의 요체가 됐다. 

최대교는 난관을 무릅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사건은

임영신은 1948년 경북안동에서 출마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그는 선거비용충당을 위해 이곳 저곳에서 돈을 끌어 모았다.

다음해 1월18일 상공부산하 대구메리야스 공장 관리인 이순희를 시켜 이 공장이 보유한 면사 6곤(梱)을 담보로 조선저축은행 대구지점에서 300만원을  융자받았다.

이어 이 회사 공금 244만원을 융통해 선거비용에 썼다. 

이어 셔츠 3타(시가 1만 5900원)를 뇌물로 받아 선거비용에 충당했다.

그래도 부족하자, 이 공장에서 3만9500원의 자동차 출장비로 부담하도록 했다.

대구 방직 공사로부터  휘발유 3드럼(시가 3만원)을 뇌물로 받았고,자동차, 선전용 마이크등의 비용을 회사 공금 27만4350원을 지출하도록 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경북도청 이**상공국장로부터 각 사업체에 할당 징수한 70여 만 원중에서 선거용 현수막 20개 대금 5만원과 선거운동을 하며 타고 다닐 자동차 비용 4만8000원, 도합 12만2000원을 뇌물로 받았다.

또한 자신과 수행원의 숙박비등으로 24만6822원상당을 향응을 받았다.

심지어 안동군 일직국민학교에 12만원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선거비용을 요청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관권 선거도 저질렀다.

안동경찰서에 30만원을 청소비용으로 주는 조건으로 선거에 적극 협조를 부탁했다.

경찰은  상대 입후보자를 소환심문하여 기권을 종용하는 가하면, 안동군 월곡면 도로를 수리해준다는 조건을 경북도 내무국장에게 선거에 도움이 되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임영신은 점차 도를 넘었다.


조선공업진흥회사로부터 금반지 9개(시가3만2000원)을 수뢰하고,1949년 3월 이승만 생일을 기념한다며 현금 5000만원을 만들기 위해 상공부 공업국에 2000만원, 광업국에 1000만원, 수산.무역.전기 등 각국에 500만원씩을 할당했다.

조선전기로부터는 100만원, 남전 100만원, 경전100만원, 서전 30만원, 광업진흥 150만원, 무역협회 60만원, 동양상사 10만원, 동양면화 20만원, 대양공사 5만원등 도합 595만원을 수금하여 이 대통령에게전하려고 했다가 감찰위원회에 발각됐다.

감찰위원회는 임영신 장관의 파면안을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임영신 독직·수뢰사건 국회로 번지며 파문확산

감찰위원회에서 올린 임영신 파면안 제출을 보고 받은 이승만은 임영신 장관의 두둔에 나섰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판결이 나기까지 파면할수 없다"고 거부했다.

임 장관은 자신의 일이 탄로나 확대되자, 1949년 4월10일 방송을 통해 군색한 말로 자신을 해명하기에 바빴다.

임 장관은 국회로 번지자, "이승만 대통령을 위하여"라며 이승만을 팔기도 했다.

국회에서는 임영신 상공장관의 독직의혹을 두고 '탐관오리'로 규정, 단호한 처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나용균 의원은 발언을 통해 "이제 다시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하기위해서도 임장관의 숙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재형, 장홍엽, 박윤원의원등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발언을 해 주목을 끌었다.

해공 신익희 국회의장역시 "어느 국가에서나 바른 정치를 하려면 먼저 탐관오리를 숙청해야한다. 구(舊)한국이 유례없는 탐관오리의 발호로 망했다는 것은 우리의 귀감이다.

신성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이 탐관오리의 숙청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헌법에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감찰위원회와 심계원이 이르 대행하는 기관으로 앞으로 많은 활약을 기대한다.

임장관의 문제도 역시 감찰위원회에서 제기된 것으로, 국회에서는 행정부의 실책에 대해 탄핵할 권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문제에 대해서 행정부에서 솔선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기다린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을 조사중이던 감찰위원회에는 임 장관에 대한 증거 수집과 함께 일부를 4월 22일 구속하고 계속 심문했다.

이를 통해 앞서 말한 임 장관의 독직과 수뢰내용 모두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또한 임 장관은 이  선거비용과 관련한  내용 외에도 또다른 내용이 탄로났다.

그러나 임 장관 자신은 검찰의 소환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사건을 담당한 강석복 검사는 법무부장관을 통해 국회에 구속동의안을 제출하도록 청원하기에 이르며, 사태는 점점 험악하게 됐다.
  
이같이 사건의 이모저모가 밝혀지게 되자 검찰에서는 사전승인없이 보도하지 말것을 물론 사건의 결말이 날때까지는 신문지상에 밝히지 말라고 주문, 국민들이 의아해 했다.

그해 5월28일 임 장관과 사건연루자 모두를 기소하며, 사건과 혐의를 공개했다.

'그간 2개월에 걸쳐, 면밀히 수사를 계속하고 있던 임영신 장관의 증스회 혐의사건은 28일 임장관 이하 관계자를 구속기소함으로써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부정선거운동에 관한 혐의는 계속 수사하기 때문에 지금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즉, 28일 임 장관은 배임 동 교사 혐의 증회, 수회, 사기, 업무상횡령,법령33호 위반으로,  임 장관 동생이 임영선은  증회,수회 법령19호 4조 가항위반으로, 임 장관 비서 황용우는  배임, 업무횡령, 법령 33호 위반으로, 박한서(상공부감찰과장)는 증회, 수회, 사기법령 19호4조 각각위반으로 각각 기소됐다.

앞서 공판에 회부된 전기홍도 역시 법령 19호 4조가항위반으로 추가 기소 되었다.

◇…임영신 장관의 구체적 혐의와 재판

임 장관의 공소장의  내용은 10가지였다. 

1)상공부령 43호에 준하여 성실히 배급사무를 처리함으로써 통제 물자를 진정한 소비자에게 공평히 배급, 소비자의 이익을 도모하고 산업부흥과 국가경제재건에 힘써야 했다.

그럼에도  1949년 1월 하순경 경북 학무국장 이규원( 여자 국민당 대구지부장 김선인의 남편으로 김씨는 임영신이 입후보했을 때 도움)으로부터  ECA원조 물자로 수입된 콩기름을 배급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후 황용우와 공모해 상무국장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장관의 특명이라하여 그달 29일 형식상 동화산업명의로 콩기름 40 드럼(시가 400만원)을 수배자격이 없는 이규원에게 부정배급함.

2)1949년 6월 하순 연합신문사 사장 양우정에게 국산 신문용지 600t(시가 1500만원)을 장관 특명으로 배급했다.

3)상공부 보관 국고금인 영월광산에 대한 정부보조 예산금 60만원과 상공부 자동차 수리공장 경비 91만800원을  보관하던 중 1948년11월12일부터 1949년 3월 말까지 감리원 경비라하여 김헌 외 2명에 대한 여비, 급여, 상공부직원 후생용 장작비, 선거운동이쇄물 대금으로 또는 당선후 수차에 걸친 축하연회비로 지출 횡령했다.

4)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인 임영신피고는 같은 학원에서 경영하는 중앙대학장을 겸임하는 자인데 미국에 임의로 처분할수 있는 재산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10월 초 조은 부총재 구용서에게 이 은행 미국에 파견하는 행원에게 미화 5000달러를 60일 이내 지불하게 할터이니 장학금 250만원을 교부해달라는 부탁하여, 구씨를 속여 수차례에 걸쳐 현금과 보증수표를 편취했다.


5)1948년 11월 말경 장관실에서 보광인 자격 심사위원인 김용근에게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에 거주하는 강신상(이취성)이 광산에 대한 아무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업가로 장(이)는 경험이 많다'는 허위사실을 말하여 심사위원을 속임으로서 보광인으로 선출하여 이 권리권을 취득케 했다.

6)1948년 11월 상공부산하 귀속 사업체인 대구방직 관린인 최사열에게  회사 소유 면사 5곤(시가 150만원)을 상공부장관 비서 이효창에게 싸게 팔라고해 26만원에 팔게해 정부재산에 손해를 입혔다.

7)1948년 12월 초 장관실에서 동부 공업국장 유한상을 통해 직할 귀속사어베인 조선방적 서울 지점장 윤상구에게 이 회사 소유 낙선판매대금중 일부인 70만원을 이효창에 주도록 배임 행위를 교사했다.

8)임영선과 공모하여 1949년 1월 18일 오후 6시쯤  경북 대구 상서동 대구여관에서 상공부 직할 적선 대구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 이순희가 관리인 지위보장을 요청하여 안동에서 비고위 선거비용 부채 청산금으로 270만원ㅇㄹ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영선을 통해 수회했다.

9)전기홍에게서 금지품인 양복지 수입허가에 대하여 호의를 보여달라고 주는 현금 100만원을 수회했다.

10)이에 수입금지품목인 양복지 1680마에 대한 수입러가를 특명으로 했다.

이같은 임영신 장관의 혐의가 공개되자, 임 장관은 물론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져 갔다.

임영신 등 18명에 대한 재판은 기소사실이 공개된 뒤 꼭 한 달 만인 1949년 6월28일 열렸다.

첫 공판은 이 사건수사를 담당한 장석복검사입회 아래 주심 한격만 판사, 좌우에 사광욱, 민동식판사가 배석하며 대법원 법정에서 시작됐다.

이어 2회공판 때도 첫 재판 때 처럼, 사실심리가 열렸다.

2회 공판때는  조은 총재 최순주, 상공부차관 김수학, 조선전업사장 서민호,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등이 증인으로 소환됐다.
  
◇…임영신 장관 검찰 구형과 무죄 석방한 재판부

당시 최대교 검사장이 이끈 서울지검은 1949년 8월19일 임영신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의 벌과 벌금 30만원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당시 기록은 임영신 피고인은 구형을 받고도 담담했으나, 나머지 17명의 피고인들은 임영신을 원망하듯 쳐다봤다고 적었다.

이처럼 그해 4월4일부터 검찰이 착수한 임영신 상공장관 독직 의혹 사건은 5월 28일 기소하고, 그해 6월 28일 첫 재판을 시작되어 2만5000쪽의 조서를 작성하고 10여차례의 공판을 진행했다.

선고 공판은 1949년 9월17일 오전 10시 대법정에서 열렸다.

한격만 재판장의 주심, 이주영 검사가 입회로 임영신 장관등 18명이 모두 입장했다.

2시간 가량 진행된 선고공판에서 임영신 장관과 동생 임영선 피고인등 9명은 무죄가, 그리고 나머지는 집행유예나 벌금이 선고됐다.

그러나 특혜나 편법, 공금유용등이 범죄가 아니라는 재판부의 설명에 대해 향후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검찰의 기소내용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현격만 판사가 재판장인 판결문의 요지는 이렇다. 

임영신 피고인의 배임을 보면 당시 최고 결제권자가 장관인 데도 대두유 배급문제는 비서실장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임피고인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연합신문에 편파적 신문용지 배급은 고의가 아니라 국산용지를 애용시키기위한 행동으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임영신 피고인의 업무횡령으 박성대와 공모하여 자동차 모터플회사 운영 자금등을 유용했다는 범죄사실은 대통령에게 여수순천반란지구의 관리공장 종업원 계몽에 사용하겠다는 서한을 냈으며, 또한 이에 사용했음으로 범죄가 구성되지 않는다.

법령 33호 위반의 경우 임영신 피고인은 보광인 결정에 있어 이취성을 이 회사 위원에게 애국지사이니 고려해달라고 부탁한 것 뿐이니 범죄가 안된다.

임영신 피고인의 배임교사위반도 대구 메리야쓰 공장장인 이순희에게서 150만원의 면사를 염가로 팔게 했다는 것은 무죄이니 재론하지 말라.

수회에 관해서 임영신 피고인은 조선방적 윤성구에게서 130만원을 받아서 이효창에게 준것이므로  우리나라를 소개하고자 파견할 의사의 소치이니 범죄구성이 안된다.

양복지 밀수입문제는 전기홍 아남상사 사장과  상공부 비서실 경리과장 박한서의 문제이지  피고에게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고주파사장 김승식으로부터 450만원의 공금대출한 것은 하지 중장의 승인을 얻어 유용한 것이므로 범죄구성이 안된다.

증회에 관해서는  경북 안동을구 선거당시 경찰서장에게 30만원을 기부금 형식으로 준것은 임영선피고인이 문제이지 서장등은 관계가 없다.

대통령 탄신 기념품 수집문제의 경우 이는 금액을 수집하다가 발각되자 중지되었고, 현금을 납부한 것이 아니니 옥신각신할 성격이 못된다.


재판장 현격만의 임영신 상공장관의 무죄 판결직후 담당 검사 이영주는 즉석에서,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그러나 1심의 무죄판결은 변치않고 원심대로 확정됐다.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이승만 압력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아

검찰의 기소에대해 법원의 무죄 판결은 이승만의 검찰시녀화를 부추켰다. 이는 곧 독재씨앗을 줄달음질 쳤다.

사건에서 보듯 재판부는 검찰이 낸 주요 피의자에 대해 범죄불성립이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석방했다.

그러면서 종범(從犯)에게는 되레 유죄를 선고해 삼권분립의 훼손이라는 지적이 지금까지 나온다.


심지어 재판부가 이승만 정부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한동안 쏟아졌다.

사건 10년 뒤 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망명한 뒤, 당시 혁명을 주도한 학생, 그리고 야당에서 이 사건을 다시 재판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법원이 정권의 눈치를 보고 판결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찌됐던 검찰의 중립과 공정을 지키려는 최대집 검사장의 헌법정신이 없었다면 그나마 삼권분립도 불가능했다.

이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자 유죄를  확신했던 최대교 검사장은 검사장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난 그는 변호사 개업을 서둘렀다.

임 장관 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은 검찰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검찰은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여 야당 탄압의 전위가 되었다.

누구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체포와 구금을 면치 못했다. 

행정부에 이어 사법부와 입법부를 무릎 꿇린 이승만은 초월적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1960년 ‘4ㆍ19 학생혁명’을 만나 좌초하고 맞게 됐다.

이처럼 초창기 검찰을 권력의 시녀화하려는 이승만 측의 간교함에도 권승렬, 김익진, 최대교로 이어진 검찰수호자가 지금껐 빛이 난다.

중년에 최대교는 서울 변두리에 20여 평 낡은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이 집에서 그는 평생을 살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사용한 변호사 사무실 역시 흔한 에어컨도 설치하지 않은 두어 평 좁은 공간이었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최대교의 삶을 가을 강(秋水)에 비유하며 그의 고고한 인품을 기렸다.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 띄우지 못할 얼음강과 다르다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

최대교는 참으로 강직했다. 

국가에서는 지난 199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주어 그의 노고에 보답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라도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평소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정치적 중립을 상실한 채 권력의 눈치 보기에만 익숙한 검찰의 추태를 목격할 때가 많았다. 

검찰 선배로서 김익진, 최대교는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의 칼럼.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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