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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6)> 한국판 마타하리' 김수임 사건'...그러나 고문 자백 논란

이화여전 나온 미모의 재원, 11살에 민며느리였다가 선교사 도움으로 상경
세브란스 병원 통역으로 일하다가 공산주의자 이강국 만나 열애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미군정 헌번대장 베어드 대령과 동거
검.경찰은 미군 정보 빼내 북한 전달한 간첩 vs 김수임측 "북한 정보 미군에 전달"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 재미교수, "각종 증거와 견디기 힘든 고문으로 자백 강요"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74년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1950년 한국판 마타하리로 알려진 김수임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원작, 각본은  오재호가, 감독에는 이원세가, 그리고  윤소라, 신일룡, 이순재, 문오장,이강조, 김영인, 최무웅 로버트 아이어스등이 출연했다.

이에 앞서 10년전에도 김수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속았다'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시  문정숙이 김수임역을 맡아 연기 했다. 그런 뒤인  이후 1974년 기획영화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중에서  네번째 작품이 이원세 감독의 영화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이었다.

김수임역에는 미모의 여배우 윤소라가 연기했다.  윤소라는 서구적 미인으로 당시 트로이카 여배우 3명(윤정희, 문희, 남정임)의 명성에 버금가는 미인이었다.

순수한 미모만으로 따진다면 대전출신인 김지미 이후 가장 빼어난 외모라 할 수 있다.  윤소라는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여 이 기획영화에만 두 번 이나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실제의 인물, 여간첩으로 덧씌워진 김수임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 6.25 전쟁 직전까지다.

실제로 김수임은 6.25가 발발하기 며칠 전에 처형되기까지 얘기다.   

영화는 차분하게 전개가 된다.  미군 장교 베어드 대령과 어린 아들을 두고 행복한 상류층 삶을 살던 김수임.


그녀가  특별수사본부에 의하여 체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사를 지휘하는 인물은 시대의 최고의 공안통인 오제도 (이순재)검사.

미국 영관급 장교의 정부이며 아들까지둔 김수임을 오검사는 집요하게 회유를 하고 결국 김수임은 자신의 간첩 활동을 자백하게 된다.

초반부는 김수임의 행복한 삶이 잠시 보여지고 그가 오제도 검사를 만나서 간첩활동을 자백하게 되는 과정까지가 펼쳐진다.

이후는 김수임의 담담한 고백에 대한 내용이 전개된다. 명문인 이화전문을 졸업한 김수임과  역시 경성법대(서울대법대)출신인  이강국(신일룡)과 사랑에 빠지고, 동거도 했다.

그러나 좌익 정치활동을 하던 이강국이 미군정청에 쫒기다가 월북하며 헤어지게 되고,  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이복오빠(문오장)를 통해서 이강국(북조선에서는 리강국)의 소식을 간간이 듣는 정도 였다.

김수임을 이용하는 오빠에 의하여 자신도 모르게 점차 간첩활동을 하게 된다.

그녀는 주한 미 대사관 근무시 알게 된 베어드 대령(미국에 의해 이승만 정권내내 이름공개를 거부)과 동거, 아들까지 낳아, 정보를 빼돌리는 간첩활동을 하게 된다.

반공(反共)을 국시로 앞세운 이승만 정권 당시의 사건이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를 유혹했고, 애초에 이강국은 김수임을 철저히 이용하는 내용이었다는 게 줄거리지만 논란이 있다.


영화에서는 베어드와 동거한 이유가 이강국이 다른 여자를 사귄다는 오빠의 이간질에 속아서 홧김에 베어드와 동거하게 됐다.

이강국은 김수임을 만나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내용도 담겼다.  

영화는 김수임이라는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이 전개되며, 정치나 이념을 모르던 한 여자가 어떻게 해서 빨갱이 활동을 하게 되면서 북한의 노리개로 희생되는가의 과정을 차분히 다뤘다고 당시 평론들은 적고 있다.  

그러나 훗날 김수임의 아들인 김원일 교수(미국거주) 는  이승만정권아래에서 무진 고문과 탄압으로 강제자백했다는 증거를 내놓았다.

베어드와 동거하며 미군의 정보를 이강국(李康國)에게 전했다는 이승만정부의 김수임이 여간첩이라고는 주장과 정반대의 주장이 나온것이다.

오히려 이강국을 통해 얻은 정보를 베어드에게 전달했다는 오히려 반공적 사상을 가졌다는 아들 김교수의 주장이 맞섰다.

때문에 70여년에 걸친 논란은 결정짓기 어렵다.

논란은 이승만정권에서는 이강국을 월북시키는데 베어드의 차량을 이용하게 했다는 점을 들어 여간첩으로 몰았다.

반면 아들 김원일 교수는  들것에 실려 재판장에 들어갈 정도의 고문과 강제자백강요가 명백하고 당시 사건기록만 모두 없어진 점에서 사실을 조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 사건의 주인공 김수임은 누구

김수임(金壽任)은 1911년 경기도 개성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불과 11세가 되던 해 팔려가다시피 민며느리가 됐다. 


그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이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시댁역시 윤택한 집안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이 어린 몸으로 구차한 시집살이를 견디어 낸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있는지 골몰하던 차에 2년만에 시집에서 탈출한다

그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는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화여전 영문과의 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총명한 머리와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했다.

그의 영어 회화가 뛰어나고, 사교술역시 감탄 할 정도 였다.

그 무렵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독일 유학에 당대 최고의 인텔리로 불렸던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만나게 되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날이 갈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 이강국은 남로당의 책임자인 박헌영 클럽에 들었으면서 최초에는 회사에 다녔다.

그는 매일 만나는 김수희와 밀회에 드는 거금 충당에 힘이 부쳤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서 8.15 해방되자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사무국장이라는 요직에 오르면서 입지를 다져가던 중인 1946년 8월 미 군정을 비판하는 칼럼을 써 미국의 표적이 돼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때 김수임은 미 군정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던 반도호텔에서 미국 헌병대장 베어드 대령의 통역 겸 수행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베어드가 마련해 준 옥인동 집에 살고 있었던 그녀는 베어드와 이강국, 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 이강국이 미국에 쫓기는 위험에 처하자, 그녀는 베어드의 차를 이용해 이강국을 월북시켰다. 


이강국이 월북했다는 북측 발표에 그동안 이강국의 뒤를 쫓던 남한은 발칵 뒤집혔다.

이같은 사실은 1950년 4월 초에 김수임은 간첩활동 혐의로 수사당국에 체포되면서 알려졌다.

죄목은 미군의 철수 정보를 북한에 넘겨주었고, 사형수였던 남로당 이중업을 빼돌려 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열흘 전인 1950년 6월 15일 '오늘’ 단발의 총성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간인 신분으로 군사법정에 선 그녀의 마지막은 고문으로 인해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수임이 죽은 5년 뒤 이강국도 ‘미제의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사형당했다. 

그 후 53년 이 지난 2008년 8월 16일 AP 통신은 ‘여간첩 김수임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도했다. 

주장의 근거는 비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의 자료에서 기인한 것으로, 당시 베어드 대령은 미국 중요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는 인물이었다.

김수임의 애인 이강국은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오히려 북측 정보를 베어드 대령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사실상 김수임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던 시대에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 김수임은 ‘여간첩’의 대명사로 남았다. 

격동의 시절 치열하게 산 한 여인에게 덧씌워진 족쇄는 아니었는지. 기구한 한 여자의 일생이었다.

◇…김수임을 둘러싼 이강국, 베어드 3각 관계

이강국은 1906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학과를 거쳐 독일 베를린대학을 졸업했다.

1935년에 귀국한 공산주의자로서 지적인 면뿐만 아니라 체격과 풍채가 좋아 겉으로 봐도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고 주색까지 겸비한 사나이였다고 한다.


이들 두 사람은 우연히 갔던 파티 장소에서 처음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되었다.

김수임은 이강국의 첫 인상에 매력을 느꼈고 이강국은 김수임의 사교적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자주 만나 데이트를 하였고 얼만 안 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들이 아마 김수임이 살고 있던 동네에서 공개적으로 과감하게 애정표현을 한 것 같다. 

당시 두사람의 사랑은 김수임이 살던 서울 마포 공덕동에서는 이들의 애정행각이 선량한 가정주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추방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제기될 정도였다고 한다.

김수임을 그래서 공덕동에서  추방되듯 쫒겨 났다. 부도덕하다는 주민들의 돌팔매를 맞아야했다.

그러던 중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이강국은 자연스럽게 '민전'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수임은 자신의 영어실력을 살려 서울 주재 미국 대사관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그 후 이강국이 공산주의 운동에 푹 빠져들면서 김수임을 만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강국과 자주 만나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김수임으로서는 자신의 육체적 만족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허영심까지 심했던 김수임은 자연스럽게 서울경찰청의 최고 고문이자 헌병대장인 베어드  미군 대령과 사랑에 빠져, 그와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이강국을 사모하고 동경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공산당 활동으로 수사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던 이강국을 자신의 집에 숨겼다.  

미군정 시절 군정청에서 일하며 알게된  미 육군 장교였던 베어드 대령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면서 말이다.

이후  김수임은  나중에는 베어드 대령의 차에 태워서 월북을 돕는다.


훗날 이 사실이 밝혀지며 김수임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고,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사형당했다.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한 이강국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거쳐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초대 외교부 부상(副相)까지 올랐다.

그는 다시 '조선상사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대남공작에 김수임을 끌어들일 것을 계획했다.

이강국은 우선 자신에 대한 김수임의 태도를 확인한 다음, 김삼룡(남로당 조직책)의 비서 김형육(金炯六)와 김수임의 이부(異父) 동생 최만용(崔晩鏞)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들은 이강국의 지시대로 김수임을 찾아갔다.

이들은 김수임에게 멀지 않아 이강국이 중심이 되는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것, 김수임에 대한 이강국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 따라서 김수임이 이강국을 위해 일해 줄 것을 기대한 것 등을 전달했다.

그러자 김수임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잖아도 이강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던 김수임은 당장에 자기 집을 남로당 중앙간부 아지트로 사용하도록 승낙하고 사실상 당에 가입했다.

그 후부터 동거 중이던 서울경찰청 고문으로부터 군과 경찰의 비밀자료를 수집하여 앞집에 살던 최만용을 통해 당에 보고했다.

또한 당시 육군 특무대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남로당 군사부 간부 이중업을 군 프락치로 하여금 빼내게 한 다음 자신의 집에 며칠 숨겨두었다가 자신이 근무하던 미국 대사관 관용차를 태워 월북시키기도 했다.

◇…김수임의 체포

이강국이 월북했다는 북측 발표에 그동안 이강국의 뒤를 쫓던 남한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군과 경찰의 기밀이 그때그때 흘러나간다는 의심을 갖기시작했다.


서울경찰청은 남로당이 대공요원들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사전에 대비하는 했다.

때문에 서울경찰청에서는 그러한 정보들이 고위층 간부들을 통해 측근으로 흘러나갈 것이라는 예상했다.

경찰은 정보원들을 총동원해 군경 고위층이 접촉할 만한 '유한마담'(유한계급의 부인 즉 생활이 넉넉해 놀러 다니는 것을 일삼는 부인이라는 의미)들을 집중 감시했다.

그러던 중 서울경찰청 수사과에 근무하는 경찰관이 뜻밖에도 김수임이 남로당과 연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김수임의 집주변에 정보원들을 집중 배치해 감시하게 됐다.

이 과정에 김수임의 집에서 밤이면 밤마다 고관 및 유명인사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춤추고 즐겁게 놀고 있다는 점과 유한마담들도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김수임의 집에 정체가 불분명한 미지의 인물도 가끔 출입한다는 것과 김수임이 8.15전에 이강국과 맺었던 사랑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수임은 서울경찰청의 최고 고문으로 있는 미군 대령과 동거하고 있었다.

그의 집 2층에는 영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그의 집에 출입하는 수상한 인물들에 대한 불심검문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등 김수임의 범죄사실과 관련된 추가 단서를 확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컸다.

경찰은 말썽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범위 내에서 내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여러 가지 증거를 확보한 후 1950년 3월. 심야에 가택수색과 김수임을 체포했다.

당시 김수임의 죄목은  간첩활동 혐의였다.


혐의는 미군의 철수 정보를 북한에 넘겨주었고, 사형수였던 남로당 이중업을 빼돌려 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김수임 체포 당시 그로부터 권총 3정과 실탄 200여발 및 북한에 보내려던 많은 기밀문서들을 압수하였다.

경찰은 김수임이 이강국과 북한을 도와 수행했던 중요한 임무로 앞서 언급한 이강국ㆍ이중업의 경우와 같이 남로당 간부들의 탈출 및 월북을 도와주고 고급 기밀정보를 수집해 북한에 제공한 것이다.

이는 김수임의 범죄사실과 관련한 당시의 기소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앞서 1948년 12월말과 1949년 2월에 남로당원 박민호ㆍ김용봉에게 미군철수문제와 한국 군경의 무장문제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강국의 연락원으로 남파된 신태희 등 남로당원들과 그들이 가지고 온 무기와 실탄 등을 자신의 집에 숨겨줬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무전기와 차량, 자금을 제공하는 등 편의를 보장해주는 단순 임무도 수행했다.

당시 수사기관은 김수임에 대해 밤이면 밤마다 베어드와 애정을 속삭이며 중대한 정보를 빼냈다고 밝혔다.

모든 기밀은 베어드의 입을 통해 김수임에게, 김수임을 최만용에게, 그리고 북한의 이강국통해 복한 정부수뇌부에 전달됐다고 설명됐다.

이 대부분의 정보는 모두 1급 비밀들이었다.

당시 신문을 통해 알려진 이사실에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와여전을 나온 미모의 재원이, 주한미군내  최고권력자중의 한사람인 헌병대장이자 경찰고문인 미군 대령과 동거하며 정보를 빼내어 공산주의자 애인에게 넘겼다"


그런데 최근 미국 AP통신에서 그의 죽음과 관련 새로운 시각을 보도했다.

비밀 해제된 ‘베어드 조사보고서(이하 베어드 파일)’ 등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1950년대 기밀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베어드 파일’은 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문서다. 

미 육군성은 1950년 8월2일부터 김수임의 자백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베어드 대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정부(情婦)인 김수임에게 주한미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여부와 그녀의 공산주의 활동을 보호, 지원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핵심이었다.

3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친 뒤 3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게 ‘베어드 파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한 사람은 바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교수 (·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신학) 였다.

김 교수는 10년 넘게 어머니 김수임을 연구했는데, 그가 찾아낸 자료만 ‘베어드 파일’ 등 1000여 쪽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김 교수의 곁에는 김수임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화하려는 조명화감독이 있었다.

조 감독 역시 6년째 김수임을 연구 중이라 서로 자료와 정보를 교환해왔다.

김원일 교수가 발굴한 베어드 파일 등 미국의 기밀문서들과 김수임 사건 재판 보도 기사, 북한의 이강국 재판기록,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했다.

◇…김수임의 고등순법회의 재판...그리고 처형

김수임이 간첩죄로 체포되자 누구보다도 당황한 것은 베어드 대령이었다.

이국여인과 단꿈을 꾸던 그는 김수임에게 말한 노총각이 아니었고, 유부남이었다.

그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체포되고, 자신의 보금자리가 공산주의자들의 아지트였다는 점에서 당혹해 했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김수임은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김수임은 양심의 가책이었는 지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외국인인 내남편(베어드)에게는 문제 삼지 말아주세요. 동거생활을 해오면서, 여러가지 혜택을 입은 그의 인격을 나는 존중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는 일체 외부로 누설되지 않는 것이 국제적인 위신상 졸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소행이 어디까지나 공산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수사과정에서 그녀는 '공산당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 영원히 잊지못할 연인인 이강국에게 애정어린 충성을 다하느라고 한 것이 탈선하고 말았다고 진술했다.

한국동란이 터지기 열흘 전인 1950년 6월14일, 15일 이틀간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열린 고등군법회의는 국내외 큰 관심을 끌었다.

14일 오전 9시부터 육군 대령 김백일 참모부장 주심아래 김수임(당시 39.金壽任)이라는 미모의 여인을 피고로, 여러가지 중요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민간인 신분으로 군사법정에 선 그녀의 마지막은 고문으로 인해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변호사 ; 이강국을 사귄 뒤 그의 주의(主義)를 알았나.

▷김수임 ; 알았다.

▶변 ; 이강국이 좌익에서 일하는 것을 알았나.

▷김수임 ; 알았다.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을 했고,민전 사무국장으로 있었다.좌익이 좋은 지 나쁜지는 잘 몰라도 이강국이 하는 일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보았다.

▶변 ; 해방전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보았나

▷김 ; 피압박과 비애를 느꼈다.

▶변 ; 지금도 이강국을 사랑하는 가.

▷김 ; 사랑하지 않는다. 월북한 후 사랑도 사라졌다.

▶변 ; 반도호텔에 취직했을 때 이강국을 만났나.

▷김 ; 취직후 이강국이가 한달에 한번씩 찾아왔다.

▶변 ; 이강국에 대한 체포사실을 알았나.

▷김 ; 신문을 보고서 알았다.

▶변 ; 체포령이 내린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나.

▷김 ; 좋아하던 사람인 관계로  섭섭히 생각했다.

▶변 ; 이강국이가 집에 온 날은.

▷김 ; 체포령이 내린후 3,4일 우리 집에 피신해 있었다.  그후 어머니의 병을 빙자하고 이강국을 의사로 변장시킨 후 개성까지 데리고 동생 최만용과 같이 내려주고  그대로 돌아왔는데 이북으로 가는줄로 알았다.

▶검사' 증인(김수임)은  이강국이가 수재이며 이강국이가 하는 일은 인생관계등 이데올로기가 옳다고 증언했나.

▷김 ; 그렇다.

▶검 ; 반도호텔에 취직하기 전에 이강국과 상의한 일이 있지 않은 가.

▷김 ; 취직후에 있었다.
 
▶검 ;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가.

▷김 ; 잘은 모른다.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보았다.

▶검 ; 이강국의 체포령은 무엇 때문인 것으로 아는 가.

▷김 ; 포고령 위반이라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으며, 사상문제도 알았다.

▶법무사 ; 이승만박사가 하는 일을  존경하는 가.

▷김 ; 존경한다. 이강국과 교제할 때는 관심이 없었다.

그 이틑날인 15일 아침부터 속개된 고등 군법회의는 여간첩으로 규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한 김백일 부장은 김수임에게 "피고인이 최후로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수임이 가만히 고개를 든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 방울이 맺혀있었다.

김수임은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지난 두달 편히 재워주고 먹혀준 데 대해 감사한다. 하나님과 나를 키워준 부모님, 그리고 나를 사랑해준 여러분들에게 감사한다"고 진술했다.

김수임은  6월 28일(베어드 파일) 단 한발의 총살형이 집행, 이슬로 사라졌다.

김수임의 애인 이강국은 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박헌영과 이승엽을 위시한 구 남로당 지도부 인사들과 함께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혀 체포된 후 1956년 처형당했다.

김수임이 어떻게 베어드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숙희씨는 “김수임이 피했지만 베어드가 워낙 김수임을 좋아해 계속 쫓아다녔다. 결국 자기도 외로우니까 받아들였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수임은 이강국을 월북시킬 때(1946년 9월) 이미 베어드가 마련해준 옥인동 집에 살았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났던 셈이다.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베어드는 김수임을 위해 집(옥인동 19번지)을 마련하고 동거했다. 

김수임은 1949년 11월 베어드의 아이를 낳았다.

김수임의 친구였던 낸시 킴은 “그녀는 베어드 대령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는 당시 김수임의 유일한 남자친구였어요. 그는 그 집에서 여러 밤을 보냈습니다. 아이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김수임은 임신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인지 출산을 전후해 6개월 동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장기입원하기도 했다.

김수임이 한국 수사당국에 검거된 것은 1950년 4월21일이었다. 

검거과정도 불분명하다. 김수임과 모윤숙은 생일이 비슷해 기숙사 시절부터 한날에 생일파티를 함께 하곤 했다.

그가 붙잡힌 날은 모윤숙의 생일(음력 3월5일)이었다.

검거 당시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는 모윤숙의 에세이와 전숙희의 실화소설, 오제도 검사의 수기가 있다.

그런데 붙잡힌 상황 설명이 저마다 다르다. 모윤숙은 김수임이 먼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오겠다고 해 자기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기록했다.

반면 전숙희는 모윤숙이 먼저 김수임에게 자신의 집으로 와서 밥을 먹자고 전화를 해서 김수임이 집을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적고 있다.

당시 김수임이 살던 옥인동 19번지는 미군 관할 구역이라 한국 경찰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김수임을 붙잡으려면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래서 모윤숙이 김수임을 밖으로 불러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명화 감독은 “베어드가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어드는 처녀였던 김수임에게 접근하면서 ‘본국에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사이가 안 좋아 이혼 수속 중이다. 내가 한국근무 끝나면 결혼해 미국에 가서 살자’고 했다.

김수임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고, 그래서 낙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윤숙의 증언에 따르면 베어드는 김원일의 백일잔치에도 참석해서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1949년에 베어드의 부인과 아들이 한국에 와서 함께 살고 있었다. 김수임을 속인 것이다.

또한 김수임이 한국 경찰에 잡혔을 때, 베어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김수임이 간첩이 아니라면 누구보다도 그걸 증언해줄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김수임의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서둘러 한국을 떠나 미국의 가족에게 가버렸다. 갓난아이까지 팽개치고.”

◇…배어드에 대한 의문

김수임은 남한 군사법정에 섰다. 

처음엔 혐의가 19가지였지만 정식 기소장에 기재된 것은 13가지였다.

가장 중대한 혐의라 할 수 있는 ‘1948년 12월에 육군특무대에 수감 중이던 남로당의 빨치산 총책인 사형수 이중업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는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던지 기소장에서 삭제했다. 

가택수색 과정에서 집에서 권총 3자루와 총알 180정이 나왔다든지, 북한으로 보내려던 많은 기밀물건이 압수됐다든지 하는 내용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기각됐다.

기소에 무리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김수임을 사형으로 이끈 13가지 혐의는 다음과 같다.

1. 1946년 9월 이강국을 자신의 집에 은닉시킨 후 베어드 대령 지프로 개성까지 데려다줌으로써 월북을 가능케 함.

2. 1946년 12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이강국의 연락원을 은닉 보호하며, 그를 통해 서신을 수신하고, 이강국에게 다량의 커피, 미제 연초 등의 물자를 제공.

3. 1947년 12월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정치자금(일본은행권)을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에 옮김.

4. 1948년 9월 북한에서 온 남로당원을 자신의 집에 은닉 보호.

5. 1948년 12월 및 1950년 1월 초 남로당 박민호, 김용봉에게 미군철수문제 한국경찰 무장문제에 관한 정보를 제공.

6. 1948년 9월 베어드 대령으로부터 지프 2대를 공짜로 얻어 1949년 7월 남로당 박민호 최만용에게 매도.

7. 1949년 9월 남로당 최만용이 장물고매(臟物故買)한 지프에 대해 자동차 사용허가를 내줌.

8. 1949년 7월 자신의 자동차를 남로당 최만용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함.

9. 1949년 8월 남로당 최만용이 군 수사기관에 체포된 것을 구호 석방하는 자금을 대줌.

10. 1949년 8월 남로당 최만용의 불법무기를 자가에 은닉.

11. 1949년 8월 남로당 박민호에게 자가에서 라디오 1대 미제 무전기 1대를 제공.

12. 1949년 12월 남로당 이용원에게 돈을 빌려주어 적을 이롭게 함.

13. 1949년 12월 남로당 이용원의 불법무기를 자신의 집에 은닉.

김수임은 위와 같은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거쳐 형장에서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엄중한 간첩혐의였을까? 베어드 파일과 조명화 감독은 이의를 제기한다.

◇…각종 문학.드라마... 그리고 김수임의 아들의 사실 왜곡 제기

당시 한국의 마타하리, 또는 여간첩 김수임이라는 오명이 훗날 그의 아들의 노력으로 의문이 제기됐다.

사건이  이승만정권아래에서 무진 고문과 탄압으로 강제자백논란이 일어나 아직도 에 대한 사실여부는 후대에 논란이 적잖은 터였기에 더욱 그렇다.


김수임의 아들인 김원일 교수가 반론을 제기한 부분때문에 더욱 사실 여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졌다.

물론 김원일 교수가 워낙 어릴때 발생한 사건이라서 아들이라고 해서 전말을 잘 알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공안검사, 또는 사상검사로 간첩 색출에 앞장섰던 오제도 검사가 김수임 사건을 직접 담당했던 만큼 선입견없이 본다면 진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책이나 영화에서 다룬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수임은 한 남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이념싸움에 희생된 가엾은 여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부분의 반공 영화가 빨갱이 색출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고, 반공열사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영화는 김수임이라는 한 여성의 삶과 심리,

그리고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간첩활동에 깊이 관여되면서 노리개처럼 희생됐다는 점이 그렇다.

6.25 전쟁 이전에 발생한 간첩 수사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점이 독특하지만  그 시대가 해방후 좌우익이 이념적으로 대립하며 혼란기 였댜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김 교수 등 김수임 간첩설에 대한 과장이 있다고 보는 측에서는 이강국의 처형된 것을 보면 그가 미국을  위해서 일한 요원이기 때문에 김수임이 간첩이라는 것이 과장이 많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군사기밀 보고서에 김수임-베어드대령간의 문제가 그간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다는점도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을 다룬 책으로는 당시 낙랑 클럽과 김수임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작가,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이다

TV극에서는 드라마 서울 1945에서 1화에 나오는데 베어드 대령이 아닌 작중 설정인물인 이동우와 신혼여행 중 리강국의 모티브 인물인 최운혁을 트렁크에 태워 월북을 돕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한동안 그녀에게는 별명처럼 스파이며 요부 혐의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2001년 이강국이 실제로 미국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김수임 역시 스파이가 아니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김수임의 아들 김교수도 어머니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나는 속았다’(1963), 1974년에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극화되었다. .

1982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도 김수임의 이야기가 12화(12화 제목 : 김수임)에서 다뤄졌다. 

김수임 역은 당시 20대였던 정애리가 맡았다. 1985년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윤미라가 맡았다.

2006년 KBS1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 나온 김해경(한은정 분)의 모티브가 바로 이 사람이다.

한편, 지난 2008년 8월 미국 AP통신은 그간 비밀로 지정되어 있다가 해제되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1950년대 비밀자료 기록들을 분석한 결과 이전에 알려졌던 '김수임 사건'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드라마로 여러 편 제작될 정도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주연한 드라마에서는 ‘아시아의 마타하리’로 묘사됐다.

워싱턴의 칼럼니스트 드류 피어슨은 ‘그의 간첩행위가 6·25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도화선이 됐다’며 6·25전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하면서 김수임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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