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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숭문동 8문장가 신광하 여동생 부용당 신씨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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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숭문동)는 고령 신씨가 세거하면서 17세기 당대의 8문자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숭문동은 조선의 대표적 3대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임벽당 김씨,와 함께 명성 떨친 여류시인 부용당 신씨의 고향이다. 진택 신광하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대표 3대 여류시인(女流詩人)을 말한다면 신사임당(申師任堂), 임벽당 김씨(林碧堂 金氏), 그리고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를 말한다.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는 서천이 낳은 여류시인이다. 비인 남당리 임벽당은 15세기, 신부용당은 17세기의 여류시인이다.

 

대표적 3대 여류시인 중 2명이 서천 인물이다. 부용당 신씨는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숭문동)에서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첨추공 부친 신호(申皓 1687∽1767)의 딸로 태어났다.

 

 

부용당 신씨의 가문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를 비롯하여,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의 오빠들은 당대 문장가로 널리 명성을 날렸다. 부용당 신씨도 오빠들처럼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후손들도 문장가를 낳아, 숭문동(崇文洞)에서 배출된 문장가들이 명성을 남겼다. 부용당 신씨는 석북 신광수의 이복동생이다.

 

부친 신호(申澔)와 모친 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석북 신광수와 신광연을 낳았고,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둘째 부인으로 보령 청라 이천령(李千齡) 따님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여 신광하와 부용당 신씨를 낳았다.

 

부용당 신씨는 3명의 오빠로 하여금 수업을 받았기에 문학가문의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 석북 신광수 막내 여동생 문인이 되다.

 

조선시대에는 남성 사대부가 문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써 문인으로써 작품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용당 신씨 이전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 신사임당(申師任堂), 우리 고장 비인 남당리 임벽당 김씨 등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석북 신광수 4남매의 막내였던 부용당 신씨는 별호를 산효각(山曉閣)라고 하였다.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과 어울려 오빠들에게 시문을 배웠다. 그동안 부용당 신씨의 삶과 문학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

 

부용당 신씨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5년 석북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간행한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숭문연방집은 우리 고장 한산(韓山) 숭문동(숭문동-현 화양면 활동리)에 세거한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 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숭문연방집의 해제는 당시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이 해제를 썼다.

 

특히 진택집(震澤集)은 진택공의 종7대손 신완식(申完植)과 이가원 회장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필사본으로 영인발간 하였다.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부용당집(芙蓉堂集)이라고 한 것이 여러 권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신씨는 많은 작품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소수만 남아있다.

 

 

2. 결혼 전 조카들과 함께 공부하다.

 

석북 신광수의 4남매는 숭문북동(숭문북동-현 화양면 대등리)로 새 집터를 마련하고 새집을 짓고 1750년 새해를 맞아 신년의 감회와 다짐을 하는 시(詩) 신제춘사(新第春詞)에 4남매와 아들딸들이 함께 새집에서 글공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새집이 이미 새로 이루어졌고/새해가 새로 왔네./영화스러운 빛이 초목에 피어나고/물건들이 모두 절로 이루네./봄 술도 또 새로 익었으니/당(堂)에 올라 부모님께 헌수를 하네./형제와 누이들이 문장으로 서로 우애하고/아손(兒孫:자기 아들과 손자)들이 다시 열을 지어/모두 시와 글을 외우네./가다가 부로(父老:나이 많은 어른)들을 만나면/들 사람 모습이 조금도 꾸밈이 없네./관장(官長:군수)의 일은 말하지 않고/다만 농사일만 이야기 하네/풍년들어 의식이 족하고/구실 돈은 기한을 어기지 않으니/이 밖에 더 무엇을 바라리오./맑은 마음으로 스승을 삼으려 하네./【新舍旣新成。新年復新至。榮光發卉木。物物咸自遂。春酒亦新熟。上堂壽父母。兄弟及少妹。文章自相友。兒孫復成列。詩書誦在口。時遇近父老。野態無餙辭。不言官長事。但道桑麻時。豐年足衣食。租賦無愆期。此外何所求。淸心以爲師】 석북집 <신석초 역>

 

 

큰오빠 석북 신광수와 부용당 신씨는 이복(異腹: 어머니가 다른) 남매로 나이 차이가 20여 세나 되고, 부용당신씨 큰오빠 아들인 조카들과 나이가 비슷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또래이자 나이 어린 조카들과 함께 벗처럼 자랐다.

 

부용당 신씨의 넷째 조카인 신석상(申奭相 1737∽1816)이 지은 ‘제고모윤부인문(祭姑母尹夫人文)’을 통해 부용당의 생전 모습을 알 수 있다.

 

“숙질간으로 나이가 서로 같고 도(道)가 서로 같다면 숙질이면서 친구이니, 어찌 남녀 간이라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생략-- 소자의 형제 다섯 명은 고모와 나이가 들쑥날쑥 차이가 났지만, 위아래로 서로 돕고 함께 책을 배우고 글을 짓고 음식을 먹고 장난을 치며 함께 즐겼다. 그 후 부인은 나이가 더욱 들어가니, 배운 것을 버리고 거의 글자를 잊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부용당 신씨와 조카들과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석북 신광수는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아들 신석상은 고모와 함께 공부하고 글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용당 신씨도 함께 공부한 것으로 여류시인으로 작품을 남기는데 세 오빠의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3. 궁핍한 생활고로 친정 숭문동과 외가인 보령으로 이사 가다.

 

부용당 신씨는 1750년 19살 나이로 해남윤씨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 윤운(尹惲)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윤운(尹惲)은 큰오빠 석북 신광수 처조카이기도 하다.

 

큰오빠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부인은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딸이다.

 

또한 신광수 부인은 친정에서는 올케가 되며, 시댁에서는 시고모가 된다.

 

부용당 신씨는 결혼 초에는 해남에서 살다가 친정인 숭문동으로 이사를 와서 당분간 살았다.

 

1759년에 보령 외가에 농토를 얻어 한산 숭문동을 떠나 부용당 신씨는 큰아들 윤규영(尹奎永)과 둘째 윤규응(尹奎應-초명:尹持訥)을 데리고 보령 신성(현재 주포면 보령리)로 이사 갔다.

 

오빠 신광수는 동생 부용당 신씨가 외가로 떠나는 모습을 시로 남겼다.

 

 

그리고 큰오빠 신광수와 신광하는 보령을 자주 찾아갔다.

 

보령 청라의 외삼촌 이제암(李齊嵒)과 외사촌 이우경(李羽慶)의 도움으로 곤궁한 생활을 견디며 살아갔다.

 

‘보령 외가에 논을 빌려 농사지으러 가는 여동생을 이별하며’의 시에, “5월 신성(新城) 가는 길에서 너를 이별하자니/총총히 떠나는 네 모습이 가련하구나./가을걷이 끝나면 다시 만날 줄 알지만/병중이라 만사가 흩어지는 일이 많고/먼 길이라 편지도 때에 맞추기 어려우리/문까지 따라가 제일 우는 녀석은 누간가?/어미 없이 졸졸 따랐던 내 셋째 아이놈일세./”라고 한 것으로 친정과 외가댁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4. 결혼 23년 만에 남편 잃어

 

부용당 신씨는 결혼 23년(1773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 윤운(尹惲)은 윤선도(尹善道)의 5대손이고 공제 윤두서(尹斗緖)의 손자이니 부용당 신씨로서는 명가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당시 43세인 부용당 신씨는 두 아들을 두었고 또 다른 아이를 뱃속에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자 부용당 신씨는 순절하기로 결심을 세웠다.

 

 

보령으로 조문을 갔던 조카 신석상(申奭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의(義)이겠으나, 뱃속에 있는 유복자를 가지고 따라 죽는 것은 의(義)가 아님이다”라고 하니, 부용당 신씨는 흐느끼면서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또한 그리하려는 것이었느니라, 이제 너의 말을 듣고 내 어찌 차마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남편을 따라 자살하려 하였으나, 신광수의 아들인 조카 신석상(申奭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큰아들 윤규영과 12살 둘째 아들 윤지눌(윤지눌-개명 윤규응)을 두었고 그 후 유복자 딸을 낳았고, 딸은 여주 이씨(呂州 李氏) 이치범(李治範)에게 시집을 갔다.

 

5. 둘째 아들 윤규응 진천군수 제수와 모친 삶의 마감

 

신부용당은 2남을 두었었는데 큰아들 윤규영(尹奎永), 둘째는 초명에 윤지눌(尹持訥)로 쓰다가, 순조 1년(1801년) 윤규응(尹奎應)으로 개명하였다.

 

개명하게 된 사연은 천주교 박해 시절 윤지눌(尹持訥)의 6촌인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건인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여 역적의 항렬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이유로 조정에 개명을 요구, 허락받아 개명하게 되었다.

 

신부용당은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4년(1790년) 29세 나이로 문과 병과 1등으로 뽑혔다.

 

정조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최단기에 승진하니 주변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평양 상원군수(祥原郡守)를 거쳐, 진천군수(鎭川郡守)로 부임하게 되어 부용당 신씨는 아들을 따라가 그곳에서 살다가 삶을 마쳤다.

 

 

윤지눌(尹持訥)은 아들이 없어 당숙 윤지경(尹持敬)의 셋째아들 윤종구를 양자로 입양하였다.

 

아들 윤지눌(尹持訥)은 정조 19년(1795년) 정조가 주서(注書)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정조는 다른 유모씨(柳某氏)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지눌(尹持訥)은 외사촌 정약전(丁若銓)을 천거하였다.

 

정조는 다시 다른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바꾸지 않았다.

 

정조는 진노하고 철월부(鐵原府)로 귀양을 보냈다.

 

외사촌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귀양가는 윤지눌(尹持訥)을 전송하며,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산이 대신 일산을 펴 외로운 말을 맞고/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에서 놀아지만/ 우리 함께 백운봉을 오를 때만 같겠는가/ 듣자하니 신진 축에 뛰어난 인물 많아/ 검은 머리 붉은 얼굴에 감정 자태 다 좋다네./”라고 위로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딸 윤소온(尹小溫 1728-1770년)이다.

 

부용당 신씨는 다산 정약용의 외숙모가 된다.

 

신부용당 아들 윤지늘(尹持訥)은 귀양을 마치고 외가인 당시 한산군 활동리(숭문동)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면서 서천군(舒川郡)지역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부친과 모친 부용당신씨, 아들 윤지눌의 묘는 본가인 전남 해남군 화산면 신리로 이장하였다.

 

申芙蓉堂 詩 ‘늦가을’

“가을 산의 나무여, 비단 장막이 되었고(山木秋兮錦帳)/내려앉는 기러기여, 내 낀 물가로구나(下鴻羽兮烟汀)/산 빛이여, 찬란히 붉고(山光兮粲)/강 빛이여! 푸르고 푸르도다(江色兮蒼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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