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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9)> 39개 정당·사회단체에서 후보를 낸 제2대 국회의원 선거

한시법인 군정법으로 선출한 제헌국회 2년임기 끝나 첫 직선제 4년 임기 국회의원 선출
210개의 선거구에서 39개 정당·단체서 2209명 출마...투표율 91.9%
무소속 당선이 62.9%인 126명 압도적...여당인 대한민주당 24석, 야당민주국민당 24석
이승만, 선거 연기하려다 미국에서 "선거 연기시 원조 중단"에 애초 일정대로
제2대 국회 개회한 1주일 뒤 6.25 발발로 35명 잃어...납북·자진월북·피살로 얼룩져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sbn뉴스>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50년들어 초대 대통령 이승만측은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왜냐면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정부수립을 주도했으나, 적지않은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남한내 좌익이었고 또하나가 국회의 제동이었다.

남한 내 좌익은 1948년 일어난 제주 4.3사태를 주도한 남로당과 이어 그해 가을 10.19 여순 군내 좌익게릴라의 폭동을 계기로 '반공', '용공' 등으로 맞섰다.

그러면서 무고한 제주도민과 여수·순천의 양민이 이승만 정부의 군경에 학살되는 폭압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채 70여년이 흘렀다. 

또 하나는 이승만 권력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은 건 제헌 국회였다.

◇…이승만이 눈엣가시 정적들 하나씩 암살 또는 탄압

1948년 8월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38선 이북에는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38선 일대의 국지전을 비롯 김일성 집단의 수없는 남침야욕,  남한 내 폭동 등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가운데 일제 침략에서 벗어난 뒤 신탁통치 찬반 둘러 싼 분열에 이어 온 나라가 친일 청산을 둘러싸고 정치, 언론, 경제, 사회, 문화, 농업 등은 대 혼란을 겪었다. 

골치가 아팠던 제헌국회의 2년 임기가 1950년 5월30일 종료하면서 제2대 총선이 다가왔다.

제헌 국회를 대부분 자신의 계파로 채웠지만, 이승만 정권은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어 여론이 대단히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를 자신의 통치권력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더구나 보수의 중심인 고하 송진우와 중도노선의 몽양 여운형, 장덕수 등이 차례로  암살로 제거됐다.

그러더니 최고의 정적 백범 김구 마저 안두희에게 피살되자 이를 반전 이승만은 집권의 힘을 강화하고 나선것이다. 

이승만의 정치는 일제에서 벗어난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는 사라져 분단되고 일상의 곤궁한 삶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 먼저가 1949년 벌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무산 사건이다.

국회 소장파를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가 등이 뭉쳐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나섰으나, 이승만의 저해를 받고 좌절됐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벌여 온 이승만은 당연히 일본 앞잡이들을 처단하는 반민특위에 적극적일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 반대였다.
 
친일 공직자를 한 사람도 목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주저 앉혔다.

그럴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우리나라의 생사여탈권을 쥔 미국이 반민특위 해산을 요구해와 이승만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근거가 없다.

전지전능한 것으로 알았던 '이승만 박사'의 눈높이가 국민과 같을 것으로 믿은 국민들은 실망이 커갔다.

좌익이 선동한 곳곳마다, 많은 양민이 학살되어 민심이 흉흉하고 대다수 언론이 등을 돌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데다 미국마저 이승만과 큰 갈등을 벌였다.

그러는 동안 야당인 한민당계의 김성수, 민주국민당의 해공 신익희, 이시영, 조병옥, 장면, 진보당의 조봉암 등이 이승만의 독주에 등을 돌린 상태에서 제2대 국회의원선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총선을 통해 이런 난관들을 뚫고 나가야 대통령으로서 좌지 우지할 수 있다고 판단에 총선에 모든 것을 걸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제 2대 총선을 앞두고 몇달 전에 벌어진 김구의 암살사건에 이승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선거분위기는 여당의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생긴 것도 '대한 정치공작대' 사건이다.

무고한 서민들을 있지도 않은 용공조작을 했다.

그들의 각본대로 이승만이 사주해 고문과 탄압으로 무고한 서민들이 희생됐다.

독립운동가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용공프레임을 씌워 매장시키는 일이 그무렵 다반사였다.

대한 정치공작대 사건 역시 정치깡패 등이 나선 예다.

당선이 유력한 야당인사들을 테러나, 협박 등으로 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그래놓고 야당 정치거물들을 이 용공조작의혹에 모종에 관계 있는듯 조작했다.

이승만의 비서 등 친위대와 백성욱 내무장관 등 관계기관, 그리고 OO청년단으로 이름 매겨진 이른바 주먹들이 가세했다.

그러니 이승만을 배후로 둔 이 '대한 정치공작대' 뒤에는 돈과 주먹과 무소불위의 폭력이 난무했다.


어리숙한 시대에 일부 경찰들까지 동원된 민관 선거개입이 횡행했다.

그래서 야당 정치인들은 이런 탄압 등을 피해 소속당의 공천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하루 아침에 야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후보들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폭정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 대한 공치공작대 사건은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시리 출신인 김익진 제2대 검찰총장의 지휘아래 모두 밝혀졌다.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등이 이를 이상히 여기던 차에 김익진 총장이 '수사를 중단하라'는 이승만의 특명을 거부한채 수사를 진행해 모두가 날조된 것임을 알게된 것이다.

남로당 출신의 가명을 내세워 용공조작한 뒤 경무대 인근에 소총, 수류탄 등을 묻어두고 '북조선의 지령으로 이 박사를 치려고 했다', '이들이 남한 내 야당 정치인들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뒤엎으로려고 했다'고 발표까지 했다

여기에 신익희, 장면, 김성수, 이시영, 조병옥 등 우익인사들이 이들과 접선했다는 거짓말로 국민을 호도했다.  
 
◇… 이승만, 선거 연기하려다가 미국 "선거연기하면 원조 중단" 선언하자 되돌려

초대 국회, 이른바 제헌 국회는 이승만 계파로 대부분 채웠다.

5.10총선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며 통일정부를 외쳤던 김구, 김규식 등이 5.10총선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들은 5.10선거를 3주일여 앞두고 38선을 통해 평양을 방문, 김일성, 김두봉 등과 유엔의 5.10선거 및 남한 단일 정부수립에 반대하고 돌아왔다.

이승만 등은 김구, 김규식 등을 남로당 박헌영 등과 합작한 5.10총선 반대자이자 반미주의자로 공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자신의 계파로 제헌국회를 구성한 이승만 정권은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었고 그 여론은 갈수록 싸늘했다.

지적했듯이 어렵사리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본부사무실을 그해 6월 6일 장경근 서울 중부경찰서장(훗날 내무부 차관)의 지휘로 경찰이 습격하는 등 탄압이 심했다.

습격자들은 친일경찰들로 현장점검에 나간 권승렬 초대 검찰총장을 무릎꿇리고, 구타하는 한편 권총을 압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상덕 초대 반민특위위원장과 특위위원들이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군정때부터 친일경찰을 비호해온 이승만은 당시 검찰이나 군(軍)보다 친일 경찰들을 더 신뢰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공·사석 석상에서 대놓고 군이나 검찰을 모욕하면서도 경찰을 감쌌다.

대부분 10명이면 8명이 친일경찰였던 당시, 국회 소장파국회의원이나 야당 국회의원이 친일부역자나 민족반역자 청산을 요구하면 할수록 경찰의 반발은 더컸다.

경찰은 이미 조직화되어 있어 반민특위에 찬성하는 자는 모두 북조선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로 씌워 탄압했다.

여기에 이승만은 제동을 걸지 않고 이들 경찰을 이용해  제2대 총선을 치르겠다는 야욕을 가졌다.
    
결국 6.6사태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끝내 좌절된 채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에 걸쳐 가난을 떨치지 못했지만, 친일분자의 후손들은 잘배우고 출세하고 돈 잘버는 자리에서 행세했다.
   
김구의 암살에도 이승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머지 않은 2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패배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이 야심차게 내놓은 농지개혁으로 인해 시골 농민의 민심도 썩 좋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를 알고 제2대 총선의 선거일을 12월로 미루고 시간을 두어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이승만 스스로 지지도가 열세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조짐이 보인 숫자 장난질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승만의 술수를 안딘 애치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강력한 경고로 1950년 5월 30일로 예정된 제2대 총선이 치러졌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승만 정부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선거 연기를 검토할 때 미국에서 이승만에게 압박을 해왔다.


애치슨 미국무장관은 "이승만이 제2대 국회의원 총선을 연말로 연기하려는 것은 매우 유감"이며 "만약 선거가 연기되면 한국에 대한 미국의 모든 경제 원조를 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냈다.

애치슨은 여기에 한술 더 떠 1950년 1월 미국의 동북아 안보구역(이른바 애치슨라인)을 발표하며 일본, 대만,  필리핀, 괌 등을 포함시켰으나 한국은 제외했다.

순전히 이승만 길들이기에 나선 듯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정부수립 이후로 일단 물가폭등이 일상이었던 미군정 시기에 비해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런 안정된 경제상황에는 미국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정말로 원조를 끊어버리면 그 즉시 신생국가 한국의 경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 제2대 총선 소선거구제와 제헌의회보다 10석 증가 210석 '선거룰'

1950년 1월 이전 정계는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차기 의원선거를 둘러싸고 파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이를 예의 주시한  미국정부가 여기에 뛰어 든 것이다.

당시 애치슨의 메시지를 우리말로 풀면 "만약 한국정부의 인플레경제의 안정책과 5월 총선거를 단행하지 않으면 미국의 대한군사경제원조는 재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이 꼬리를 내리고 울며 겨자 먹기로 비로소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는 이유다.


제헌 국회의원선거와는 달리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는 공산주의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사회단체 및 정치인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바꿨다.

각 정당의 선거정책과 선거양상을 보면 이전과 같이 부일협력자(附曰協力者)를 차별함이 없이 피선거권자를 차별하지 않았다.

이 역시 미국의 눈치를 보며 만든 것이다.

1950년 제2대총선과 196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제도는 시한법으로서 제정됐던 군정법령인 종전의 제헌 국회의원선거법이 폐지됐다.

이로인해 제2·3대 총선법은 제헌 국회에서 새로이 제정되어 1950년 4월 12일에 법률 제121호로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으로 성문화됐다.

개정된 선거법은 과도정부(過渡政府. 약칭 과정)시대의 선거법령을 새 국가이념에 입각, 개정했던  것으로 민주선거의 공정성을 유지·육성하여 선거의 명랑화를 기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있다.

또한 입후보자들의 선거 비용을 최소로 축소시킨점도 눈에 띤다.

이는 선거기반이 없는 월남동포의 민의를 최대한 반영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다.


주목되는 내용은 국민의 정서와 맞지 않게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공소시효가 대략 만료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선거권 제한을 해제했다는 점이다.

제2조 조항에 피선거권은 현역 군인, 법관, 검찰관, 심계관(審計官), 감찰관, 경찰관 등에 대해서 제한을 두고 오히려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제한 규정 역시 철폐했다.

그러나 세부항목에서 ▲일본정부의 녹을 받은 자 ▲일본제국의 의원 ▲중추원 고문·부의장·참의 ▲일제시대 도의원 ▲고등관 3등 이상 ▲일제시대 경찰 및 헌병보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는 여전히 피선거권을 제한하였다.

제2대 총선은 소선거구제를 유지했다.

국회의원 정원은 210명으로 제헌 국회 200명에서 10명이 늘렸다.

즉, 전국의 선거구는 소선거구제로 하되 선거구 획정은 전과 동일했으나, 선거구 수를 200개 구에서 210개 구로 증설된 것이다.

경쟁률은 의원정수 210명에 대하여 무려 2209명이 출마하여 평균 10.5 대 1로 역대선거 중 가장 높았다. 

이러한 과열경쟁의 결과는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파와 중간계열의 참여 그리고 대한민국을 수립한 지 2년간에 조성된 정치적 과열현상이기도 하다. 

정파별로는 3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했다.

이 가운데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소속이 165명으로 가장 많았고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이 154명이었다. 

이에 반해 10명 이내의 후보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30개에 달했고 이 중에는 1명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18개로서 정당 및 사회단체의 극심한 난립현상을 보여주었다

무소속은 전체 입후보자의 68.5%인 1513명으로 제헌국헌의원선거의 417명보다 무려 1096명이나 증가하였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의 맛을 본 국민들이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권력을 쥘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한민국이 처음 수립될 때는 아무리 선거가 실시된다지만, 나라를 이끄는 자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분들이라는 봉건적 관념이 만연했었다.

하지만, 2년 간의 민주주의를 경험한 후에 치러진제 2대 총선에서는 각 지방의 유지들이 앞다투어 출마하게 된다.


다만 정당정치가 아직 뿌리잡지 못했던 터라 무소속 후보가 많았고 선거 결과에서도 무소속 의원의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

선거구는 소선거구제로 하고 선거구 획정은 전과 동일했으나, 선거구 수를 200개구에서 210개구로 증설했다.

선거법 개정안 제10조는 투표구 설치를 선거구 선거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결정토록 했다.

선거인 명부는 선거인의 자진신고 등록제를 철폐하고 직권작성제도를 채택했다.

제13조와 14조에는 명부의 성립효력 요건으로서 열람기간 및 이의신고제를 신설 또는 강화하였다.

또한 선거관리기관으로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9인은 대통령이 위촉하고 서울특별시, 도 선거위원회위원 7인을 서울특별시장, 도지사의 추천으로 중앙선거위원회가 위촉하도록 정했다.

이어 선거구 선거위원회 위원 7인과 투표구 선거위원회위원 5인도 같은 방법으로 위촉하였다(제18조와 제19조). 

선거운동에 있어서는 그 운동의 자율을 제한하여 운동기회의 균등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일부 공영선거운동제를 실시하였다(제32조와 제33조 그리고 제37조).

◇…제2대 총선 전 이승만의 장황한 소감 피력

불리한 선거판세를 예상한 이승만은 제2대 총선을 앞두고 서울방송국을 찾아 준비된 원고를 읽었다.

800만 유권자와 2200명의 입후보자에게 자신의 소감을 밝히겠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이번 총선에 대해 몇가지 의도를 동포들에게 간단히 설명하고자 하는 바 이다. 금번에 실시되는 민국 제2회 총선거는 장차 우리의 화복안위를 조종하는 중대한 기회라 할수 있다.


이는 다름아니라,  우리가 이남만이라도 찾아가지고 민주국가를 건설해서 국민의 자유선거를 보호하여 세계모든 민주국가들과 합작해서 공산동포를 평화로 해결해서 남북을 통일하고 국권을 확보하자는 것이 우리 3천만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 유일한 결심으로 이 목적과 결심을 위하여 우리가 동족간에 사생을 걸고 싸워 온것이다.

공산분자들은 자유와 노예라는 것을 다 막론하고 우리 민주국을 결단내서 남의 노예국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의 자유권을 없이 해서 남의 구속을 요청하느라고 한편으로는 남의 군기와 재정과 세력을 얻어다가 선동해서 꾀며 위협하며 압박하여 또 살해하려고 한다.

제2총선거가 긴요한 이유는 공산분자들이 기회를 이용해서 공산당 사람이나 혹은 동정자나 그렇지 않으면 좌우익 중간노선을 다 막론하고 정부를 불평분자하나라도 더 선발되게 만들어서 국회내 들어가 정부와 충돌을 해서 민주주의를 혼란하게 만들어서 반정부분자들이 득세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지금 외국 재정을 얻어다가 돈을 물쓰듯하여 사람을 꾀고, 달래고, 싸우기에 대활동을 하는 중이다.


신성한 투표권을 가진 시민 남녀들이 이러한 위험성을 깨 닫지 못하고 혹은 남의 꾀임에 빠지거나 남의 언론을 신청하거나 혹 남에게 팔려서 투표권을 등한히 사용할 진대, 그 결과로 이런 분자들이 국회에 들어가게 되리니 이는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이 민주국의 자유민된 자격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민주국은 전제와 압제의 정책을 위력으로 세우게 될 것이니 또 남의 속박을 위험이 없지 않은 것이니 애국동포들은 이에 극히 주의해서 오직 정직하고 애국애족하는 민주주의자만을 발저시켜야만 동포의 뜻대로 나라를 바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민국의 권리를 날로 권고히해서 동요되지 않게 할 것이니 각 후보자의 말이나 선전만을 듣지 말고 과거의 행적과 경력을 일일이 조사하고 재고려해서 투표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라도 몇몇 불충분자라들이 발각되어 반동공작으로 정부를 위태롭게하거나 사업을 지전되지 못하게 할 때에는 투표자들이 정확한 계획과 순서를 만들어 그 사람의 대표권을 삭제하고 다시 투표해서 개선하는 권리를 마땅히  사용해야한다.


또 투표장소가 멀다든지 혹 어떤 사고가 있어서 기권자가 있다면 이것은 민주국가를 다스려가는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없도록 서로 권면해서 충분한 결과를 이뤄야 한다.

만인 협잡이나 불법한 일이 있어 추잡한 말이 신문상에라도 나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 외에 선거에 대한 불평불문을 가지고 투쟁하거나 분란을 일으켜서 온전한 태도를 잃어버리거나 또는 정치 관리나 군경의 간섭으로 자유분위기를 손상시켜서 선미한 성과를 이루는 폐단이 없어야한다.
 
대소관민이나 각 애국단체에서는 일번으로 치안을 법리와 규칙에 따라 선거를 완전히 실시해서 세계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또 우리의 복리를 완수하도록 노력하여 성공하기를 마지 않는다.

시간이 총망하므로 대략 이만 큼 설명해서 금번 나의 시찰소감을 일반 동포에게 알리는 동시에 특히 이번 총선거에 관한 몇가지 조건을 제공하나니 일반 투표자들은 재삼 고려해서 이개도 실시 진해주기를 바란다'

◇… 6.25 한 달 전 치른 제2대 총선...직선제로 첫 4년 임기 의원 선출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91.9%를 기록했다. 

임기는 1950년 5월 31일부터 1954년 5월 30일까지였다.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가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한사람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 피선거권은 남녀 만 25세 이상이었다. 

선거인명부는 제헌국회 때의 자진신고등록제를폐지하고 구·시·읍·면의 장이 선거권자를 조사해 선거인명부를 작성하는 '정기직권작성제도(定期職權作成制度)'를 채택했다.


선거관리는 중앙선거위원회와 서울특별시·도·선거구·투표구 등의 선거위원회가 맡았다.

의원 후보자는 유권자 100인 이상 200인 이하의 추천장을 첨부해 등록하도록 했다.

투표는 단위 무기명투표로 하되 투표함의 규격을 법정화하였다.

당시 총유권자 수는 843만 4737명이었다.

이 가운데 775만 2076명이 투표에 참가해 10명 중 9명이상이 투표에 참여했다.

특히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던 김구 계열과 김규식 계열 정치인인 남북협상파와 중도 계열이 선거에 참가했었다.

선거 결과는 자못 궁금했다.

손으로 표를 계산하는 수작업으로 진행된 개표는 이날 밤새워 진행했다.

개표결과, 제2대 총선에서 제헌 의원의 재선율은 불과 15.5%로 31명에 불과하여 역대 선거 중 재선율이 가장 낮았다.


재선율이 낮은 이유는 제헌 의원은 임기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의원으로서 업적을 남기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기도 했다. 

세계적 관심을 끈 것은 무소속의 돌풍이었다.

예상대로 210명의 정당·단체별 당선자 중에 무소속이 모두 126명으로 총정원의 60%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여도, 야도 아닌 무소속 당선자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이어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만큼 향후 정계개편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정당으로는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후보가 각각 24명이 당선됐다. 

따라서 제1정당으로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정당이 없었다.


선거 결과대로 선거 후 6.25 동란 중에 정치 세력들의 이합집산을 맞은 것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이승만 지지자들의 당선이 크게 줄어든 반면 무소속이나 소수정당에서 한, 두명씩 당선자가 나와 이승만 정부를 위협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불리한 간선제에서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하게 만들었다.

이후 결국 부산 정치파동을 거쳐 발췌개헌을 하기에 이르도록 하였다.

선거에서 무소속에 이어 한민당의 후신세력인 보수야당 신익희의 민주국민당(24석)이 제1당을 차지했다. 

헌정사에는 제1당이 야당에게 넘어간 최초의 선거이라고기록되어 있다.

반대로 친 이승만파인 대한국민당은 71석에서 24석으로 줄었고 이승만이 만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잔당(48석->12석->14석), 대한청년단(19석->10석), 대한여자국민당(1석)를 더해도 단 57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의원들도 대부분 물갈이되어 기존 국회의원 중 재선된 의원의 비율은 불과 31명뿐이었다. 

얼마나 무소속이 강세였는가 하면 무소속이 차지하는 비율이 62.9%. 참고로 신익희가 이끄는 민주국민당, 여당인 윤치영이 이끄는 대한국민당을 멀치감치 밀어냈다.

이 두 당을 합쳐도 의석의 20%가 안 될 정도였다. 

의석을 구체적으로 보면 신익희, 이시영 등이 이끄는 민주국민당과 이승만의 대한국민당이 각각 24석(11.4%), 국민회가 14석(6.6%), 대한청년당이 10석(4.76%), 대한노동총연맹과 일민구락부가 각각 3석, 사회당이 2석, 민족자주연맹이 1석, 기타가 3석 등을 차지하였다.

사실상 제1당 같은 걸 따지는 의미가 없는 상황. 지난 선거의 제1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국민당으로 대부분의 의원이 빠지면서 제3당을 유지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치러졌던 북한 최고인민회의 선거도 무소속이 강세였다.

하지만 역시 6.25 전쟁으로 완전히 망했다

이승만은 여소야대로 끌려다니며 탄핵설까지 대두되었다.

이승만은 그러나 6.25동란으로 탄핵위기를 모면하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위헌적인 발췌 개헌(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저질렀다. 

임기는 4년으로, 하루 뒤인 5월 31일부터 시작됐다.

6월 10일 개회된 국회는 보수야당과 중도파가 크게 신장되면서 초대 국회의장은 신익희(申翼熙)가 선출됐다.

의장선거에서 사회당의 조소앙이나 무소속 오화영도 큰 지지를 받았다. 


2대 국회의장단은 국회의장은 신익희, 부의장은 장택상(張澤相)·조봉암(曺奉岩)·김동성(金東成)이 선출되었다. 

의정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회의원 선거법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신익희 의장은 개원사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우리들의 힘과 책임으로 실시된 총선거에서 아무런 과오와 분규도 없이 모든 애국정당단체에 소속하는 의원 여러분을 총말라하여 거족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의기관인 이 국회를 구성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비운의 제2대 국회 ...개회 1주일만에 6.25 발발

제2대 국회는 6 · 25 한국전쟁으로 35명의 의원을 잃었다.

그 후 9 · 28 서울수복 이후 원내 각파의 세력 결속으로 헤쳐모여식 정계개편이 이뤄졌다.

때문에 민주국민당이 40명, 대한국민당과 대한청년단을 배경으로 한 민정동지회가 40명, 국민회계 의원의 결집체인 국민구락부가 20명, 무소속구락부가 50명으로 형성되었다.

이합집산은 계속되어 6.25 동란 중인 1951년 3월 4일 교섭단체가 정식으로 구성되었을 때에는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발족한 신정동지회가 70석이나 됐다.

무소속 구락부가 개칭한 공화구락부가 40석, 민정동지회와 무소속구락부의 이탈파가 구성한 민우회가 20석을 점하게 되어 잔류 무소속은 5석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제2대 국회에서 모두 398건의 법률안이 발의되었고, 그중 54.3%인 216건의 법률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러한 수치는 제헌 국회에 비해 증가된 것이다. 

그러나 의원발의 법률안의 가결률에 있어서는 42.9%로 오히려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의원발의 법률안 중 37.9%에 달하는 69건의 법률안을 폐기함으로써 무분별하게 발의만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입법활동은 국회의 권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제2대 국회에서는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세력 확대를 도모하자 국회를 통한 간선제로는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이 대통령직선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을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의원들을 의사당에 강제로 연금시키고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을 심야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른바 발췌 개헌 파동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발췌 개헌안은 헌법이 정한 공고절차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지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제2대 국회에서는 제헌 국회 때보다 더욱 활발한 국정감사와 국정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때 일반감사 4회와 특별감사 2회를 포함하여 모두 47회의 국정감사와 국정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치는 제헌 국회의 16회에 비해 무려 3배가량 증가된 것으로서 국회가 행정부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고자 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선거 직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국회도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정보를 늦게 받거나 수도 사수 등의 명분으로 붙잡혀 납북된 의원(일부는 자진 월북)도 있다.

대표적으로 납북된 의원은 민세 안재홍. 휴전 협정의 결과 일부 의원들의 지역구는 북한령이 되거나 지역구 대부분이 북한령이 되었다.

옹진군 '갑' 선거구는 백령도, 대청도만 남았고 옹진군 '을' 선거구는 연평도만 남았다.

또한 연백군, 개성시, 개풍군은 완전한 북한령이 되었고 장단군 선거구도 남은 지역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주민이 없었다.

옹진군의 경우 선거구를 개편하여 단일 선거구로 다음 선거를 치르는 안도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어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은 자리가 없게 되었다.

결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이들 지역의 국회의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권이 발동되었다.

◇…보수정파와 혁신정파 간 이념의 대립 구도 표출

그러나 5·30선거는 보수·혁신의 정책적 이념적 대결이 있었다.


또한 대한국민당, 민주국민당 등 주요 정당에서 공인후보자를 채택하였다는 점은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정당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를 갖게 한다고 중앙선관위가 말하고 있다.

즉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보수적 성격임에 비해서 사회당과 민족자주연맹 등은 혁신적 성격을 띠었다.

이 양대 세력은 특히 통일문제와 경제정책에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에서는 한때 단일후보자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를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양당이 여당적 지위를 향해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여당인 대한국민당은 선거에 임하여 당시(黨是)를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에 두고 ▲내각책임제 개헌 반대 ▲단원제와 대통령직선제 개헌 지지 ▲정국의 안정을 통한 국민의 복지사회 건설 등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민주국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책임정치구현 ▲독재정치배격 ▲중요한 기본산업의 국유화 또는 통제관리 ▲노동대중 본위의 사회입법 등을 당의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보수정당의 정책에 대항하여 사회당 및 민족자주연맹 등 혁신계 인사들은 민주사회주의와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적인 조국통일의 기치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민주사회주의적 정책으로서 ▲근로대중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익의 확보 ▲기회균등, 계획경제의 실현에 의한 복지사회 건설 ▲주요산업의 국유화 등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남북협상론을 표방해 남북민족자력에 의한 평화적 통일성취를 주장했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지난 2년간 이승만 정부의 업적과 시책이 쟁점이 됐다.

무소속 입후자들은 기성정당의 무정견과 부정부패를 지적했다.

이 시기의 정당들은 구체적인 정강·정책에 충실하였다고만 해석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국가권력의 구조에 대한 문제에도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인들의 정치경험이 일천(日淺)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유권자와 입후보자들도 실질적인 정치, 경제, 사회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 수정보다 정치적 이념과 총체적인 의견에 관심을 뒀다.

정당도 구체적인 정책의 실행에 관해서보다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와 반대에 집중하고 있어 지도세력과의 관계와 인물을 본위로 선거가 이뤄졌다.

 
이러한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종합적인 결과를 집계하지 못한 채 6월19일 개원되고 개원 한지 1주일도 되지 않아 6 · 25한국 전쟁이 발발, 관계자료가 소실 또는 분실되어 투표상황에 대한 자료가 없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회의사당은 대구 부산 등으로 옮겨가게 됐다. 

6월27일 '100만 애국 시민과 함께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를 했지만 이미 이 대통령이 피난을 떠난 뒤였다. 

의원들도 남하에 동참했다. 국회의사당은 전쟁 동향에 따라 대구(7월20일), 부산(9월1일), 서울(10월7일)로 옮겨 다녔다.

▶▶참고자료 문헌 = 기자가 본 역사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한국야당사(이기택 지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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