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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7)> 이승만에 각 세운 김익진 검찰총장과 '정치공작대 사건'

이승만의 비호로 2대 총선 앞두고 용공조작 등 시도한 대한정치공작대의 불법성 드러나
"인민군 부사령관과 이승만 정적인 야당 거물들 연루하고 정부전복...날조"
충남 부여 출신 김익진 제2대 검찰총장, 이승만의 "수사중단" 거부
김익진, 108명 체포해 11명기소... 검찰총장→고검장 강등→옥고치러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 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50년은 현대사중에 민족적 수난과 치욕이 난무한 해다.

얼핏, 6.25 동족상잔만 떠 올리지만 국운이 기우뚱하고, 아슬 아슬한 이념대결이 극에 달했다.

일제에서 벗어난 지 만 5년이 된 그 해는 당시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엿볼 수있는 '애치슨 라인'이 공표된 해다. 

즉, 그해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太平洋防衛線) 밖이라 발표하는 바람에 소련과 중공(지금의 중국)의 지원을 얻은 인민군의 남침하기에 이른다.

이를 전후해 남한은 매우 어수선했다.

◇…이승만 묵인아래 사설단체인 '대한 정치공작대사건'

정부가 수립된 지 만 3년 째에다, 제헌국회의 2년 임기가 끝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다, 제헌국회에서 김성수등이 이끈 한민당과 해공 신익희등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의 황제군림을 축소하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그해 3월13일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한숨을 돌린 이승만은 그해 5월 말일로 제헌국회의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만큼 새로 치러야할 제 2대 총선이 문제였다.

집권 초부터 국무총리임명이 부결되고, 농지개혁법안등이 수 개월간 개정법안이 미뤄지는 등 끝없는 갈등을 빚었던 이승만은 국회를 여대야소로 만드는 일이 더 급했다.


그는 미국 태평양사령관인 맥아더원수를 만나러 일본을 다녀와 '반공(反共)'. '멸공(滅共)'정책을 더 강화했다.

이승만은 자나깨나 반공을 외치던 차였다.

정부수립 전인 1948년 4월 부터, 남로당중심의 5.10 총선반대와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해 일으킨 제주사태, 그 해 10월 좌익군인들이 여순폭동등 끝임없는 내란을 겪었더 터다.
 
반공을 앞세운 이승만에게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연루된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쳤고, 38도선으 경계로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없은 남북군인간에 크고 작은 충돌도 잦았다.

그러더니 박헌영이 월북한 자리를 이어받은  남로당 총책임자 김삼용과 남로당 고문 이주하가 검거되는 큰 사건이 충격을 줬다.

이어 미국 헌병대장 베어드 대령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던 김수임을 체포. 여간첩으로 규정해  6.25 동란발발 직후 처형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초대 농림부장관인 죽산 조봉암등이 기초한 농지개혁도 그해 4월부터 단행됐다.

농지개혁은 이승만이 일제와 미군이 갖고 있던 농지, 친일 부역자인 대지주의 땅등을 넘겨받아, 이를 값싸게 소작농민들에게 불하하는 정책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지주출신이 많은 제헌국회 산업위원회의 반발과, 전국적으로 농지보상을 둘러싼 지주들의 불만이 커 이승만이 국회연설과 방송을 통해 설득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1950년 5월 31일 치를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곳곳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해 반대하거나 불만을 가진 정치.경제,사회.문화, 언론등 각계의 인사가 늘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이들 중 많은 인사들을  용공조작으로 몰아 모진 탄압과 처벌로 이어갔다.

그해 4월 초, 초대 이범석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청년단 대표인 신성모(申性模)를  국무총리서리에 앉혔다.

이처럼 이승만은 일제시대 공무원, 경찰등과 청년단체의 지지에 힘입어 권력을 행사했다.

문제의 대한 공작대 사건이 터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시 언론과 국회 속기록, 논문등을 보면 대한공작대사건은 이승만의 묵인 내지 사주였음을 의심케한다.

이는 그해 5월 30일 치르는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하기 위해 용공조작을 앞세운 것이다.

더구나 안하무인인 대통령 이승만의 권력횡포를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 사건중의 하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사설 청년단과 정치공작대를 비호하면서  '반공(反共)'을 내세워 친일청산요구를 틀어막고 체제 굳히기에 들어갔다.

◇… 이승만측의 2대총선앞두고 야당 정적들에 '올가미'씌워

1948년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해외망명을 하기까지 이승만은 집권기에 적잖은 용공조작, 간첩조작으로 선량한 시민들과 각계의 리더들이 희생됐다.

국민의 여망은 친일인사와 민족 반역자를 청산하자고 외치는 판에 그는, 친일청산 대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나 빨갱이 프레임을 씌워 처단했다.
 

이른바 6.25 동란 2개월전에 터진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이자 드러나 첫번째 케이스다. 

사학자들은 사회주의자인 죽산 조봉암 농림부장관의 해임과,4.3사태와 여순사태때 남로당이 아닌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한 것도 이와 같다고 한다.

'대한정치공작대'는 이승만 권력의 비호 아래 1950년에 생겨난 사설 정보·탐정단체다.

여기에, 이승만의 비서와  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정운수(鄭雲樹)가 배후핵심인물이다.

 대장은 김태수(金泰守, 일명 金嶺)가 맡았고, 정동엽(鄭東燁)·김낙영(金洛永)·오관수(吳官守)·이무열(李武烈)·정운수 등이 대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내무부장관 백성욱(白性郁) 등 고위인물들도 이 단체와 관련이 있었다. 

정동엽·김낙영·오관수·이무열·정운수 등이 행동 대원인 셈이다. 

 이승만의 사조직 대한정치공작대는 1950년 4월 트럭 10여대에 헌병과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인민군 부사령관이라는 최동석(崔東石)을 체포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최동석이라는 자를 심문해, 경무대 근처의 땅 속에 묻어둔 장총 한자루와 실탄 등의 무기를 찾아냈다고도 했다.

 대한 공작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사설조직 대한 공작대는 최동석등이 반 이승만계 거물급 인사들과 접촉해왔다고 발표했다.

문맹률이 60%가 넘을 당시 우리 국민들은 신문보도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의존해 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더구나 반 이승만계 거물급 인사인  민국당의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 등이  이 들 남하간첩들과 밀통한 것도 사실처럼 믿었다.

또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 등이 최동석등 남하간첩과 손을 잡고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음모를 밝혀냈다고 밝혔다.

당사자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부인했으나, 국민을 반공화시키려는 이승만 측의 꼬임에 속아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뒷날 모두 허위이자 날조된 이승만의 비호세력이 꾸민 자작극이었다.

◇… 정부 수립후 독립기관으로 중립성외친 법원과 검찰

우리나라 검찰의 시초는 미군정 시기인 1946년 12월 대검찰청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대법원 검사국'소속이었다.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대법원(大法院)이 탄생했다.

1945년 일제사슬에서 풀려나 해방된 지 3년 만이다.

이는 일제와 미군정시대를 마감하고 그해 5.10 총선을 거쳐 제헌국회가 개원되고 제정된 헌법과 정부조직법에 따라 대통령과 국회와 사법부가 들어서 조화와 3권 분립이 시작됐다.

당시 대표적인 법조인은 청념하며 항일독립운동가인 초대 대법원장은 가인 김병로 선생이다.

가인은  4.7 재보선 직후 물러난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조부(祖父)다.

김병로 선생은  고무신을 신고,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그 어떤 권력에도 헌법정신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제주도 4.3사건당시 토벌대의 양민학살과 여순사건때 무고한 많은 시민이 토벌대에 희생자들에 대해 이승만에게 쓴소리를 했다.

가인선생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수사와 판결없이 처벌한다는 것은  민주국가 정부가 죄를 짓는 것이요,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없다"고 직언을 했다.

더구나 친일경찰들을 청산하기위한 반민특위를 놓고도 선생과 대통령은 부딪혔다.

반민특위를 와해하려는 이승만측과, 친일부역자와 민족반역자를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세우라는 가인 선생은 대립각이었다.



가인 선생은 항일독립운동가였지만 헌법주의자인  요시나가 유스케 일본 검사총장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유스케는  " 판.검사는 재판과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판결이나 .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하면 법원이나 검찰 파쇼가 된다. 그것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초대 검찰총장인 권승렬, 그리고 제2대 검찰총장 김익진도 가인 선생의 헌법정신을 존중했다.

권승렬은 특히 반민특위를 적극 지지하며, 검찰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이승만과 친일경찰의 방해로 번번히 무산됐다.

이승만의 비호속에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본부사무실을 습격하고, 위원들을 심한 구타와 고문을 자행하는 일이 생겼다.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인 김상덕이 사퇴하고, 특위위원들이 사퇴할 정도 였다.

친일경찰은 서울중부서 장경근 서장을 지휘로 '6.6사태'를 저질렀다.

심지어 현장점검에 나간 권승렬 검찰총장을 무릎꿇리고, 권총을 압수할 정도였으니 구타와 폭행등  오죽했을 까.

국민들의 반발과 동아, 조선,경향신문등은 기사와 칼럼, 사설로 반민특위사무실 습격을 대대적으로 비판했다.

더구나 장경근 서울중구경찰서장지휘로 경찰이 이른바 '6.6반민특위본부사무실 습격'한데 대한 국회와 언론이 연일 항의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 '6.6사건 이후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위해 권승렬을 검찰총장에서 법무장관으로 기용했다. 


그런 와중에 이승만은 사설 공작대를 동원해 '반공(反共)'을 내세워 친일청산을 잠재우고 체제 굳히기에 들어갔다.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수사에 들어간 김익진 검찰총장과 검사들

권승렬 초대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으로 옮기자 후임 검찰총장에 김익진(金翼鎭)이 임명됐다.

김익진 총장은 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오제도(吳制道)·선우 종원(鮮于宗源)·정희택(鄭喜澤) 등 세 검사들에게 지시해  이 사건이 철저한 조작극임을 밝혀냈다. 

결국, 대한정치공작대의 김태수·정동엽·김낙영·오관수·이무열 등은 불법단체조직·허위고발·무기불법관리 등의 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배후핵심인물이던 정운수는 미국으로 도피했다.

 초대 권승렬 총장못지 않게 김익진 검찰총장도 철저한 헌법주의자다.

당시 검찰의 발표는 이승만과 정부에게 매우 곤혹스런 내용이다.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은 제 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우세가 예견되던 상황 속에서 집권당의 하수인단체가 정치적 조작극을 꾸며 당시의 제1야당인 민국당을 붕괴시키려 하였던 정치사건이다".

이처럼 당시 법원과 검찰은 법앞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이승만 권력에 맞서 싸웠다.

 2개월 후  일어난 6.25와  그해 있을 국회의원선거에서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측의 흉계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직전 이를 내각의 책임으로 떠넘길 요량으로 권승렬 법무부장관등  3개 부처 개각과 검찰총장을 해임하게 된다.  

이처럼 대통령의 휘두른 인사권과 집권 여당의 용공조작 앞에  법과 검찰권은 무력해졌다.

이승만 정권 때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원의 재판없이 제주도 양민학살, 여순 양민학살, 거창양민학살등의 무지막지한 헌법과 법률위반및 유린행위가 있었다.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의 혼란 속에서 6.25전쟁을 겪고 난 정부로써는 전후복구라는 시급한 난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당인 자유당은 전후복구 및 경제회복보다는 장기집권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김성수, 조병옥 등이 간첩과 접선하여 정부전복을 꾀하였다는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을 조작 한 것이 그래서 첫번 째로 꼽힌다.

이후  정.부통령 직선제개헌을 위하여 국회의원들을 감금. 협박하고, 땃벌대.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의 정체불명의 단체를 동원하여 국회해산을 요구했다.


그리고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갖가지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여기에다, 이시영(李始榮). 김성수. 김창숙(金昌淑) 등 범야 정치지도자들을 습격하여 폭행. 감금한 '국제구락부사건'과  정부 보유불(保有弗)인 '중석불불하 부정사건'도 그것이다.

심지어 이승만 정권은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이 인도 뉴델리에서 한국중립화를 모의하였다는 '뉴델리밀회설'을 비롯, '4사5입 개헌파동', 야당계 인사들을 모함하기 위한 '국회불온문서사건' 등을 조작했다.

언론에 대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언론의 본령인 비판감시기사가 주를 이룬 '경향신문' 의 폐간과, '동아일보'의 1개월 정간 및 대구매일신문사 습격 등 혹독한 언론탄압을 강행하였다.

◇…  살아있는 권력과 싸운 김익진 검찰총장

김익진 검찰총장 얘기를 꺼내기전 최근 2,3년간 우리 정부와 검찰청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7월 25일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임명식을 하던 자리에서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렇게 해야만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 국민들이 체감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권력의 부패도 막을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덧붙였다. 

윤 전 총장은  취임하자 마자 조국 전 법무부장관 일가에 대해 메스를 댔다.

윤 전 총장은 이를 계기로 다수의석을 가진 여당과  추미애 법무장관등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그런뒤 지난한 해 내내 '추.윤'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제한하고, 징계위원회를 열어 해임 위기까지 몰렸다.

또한 무소불위의 검찰개혁이라며 여권이 내놓은 검찰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공수처신설, 중수청 신설등에 윤석열총장이 맞섰다.
 
전국의 검사들도 연명을 통해 윤 총장을 지지하며, 여권에 대항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부 여권인사의 '미운털 검찰분해' 작업에다, 공수처나 중수청에 수사를 맡기는일이 진행중이다.
 
그러자 검사 출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의원과 금태섭 전 국회의원등  검찰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검찰총장으로 윤 전총장을 비롯 서, 너명을 꼽았다.

그들은 최대교, 그리고 김익진, 이명재 , 유석열등이다.

윤 총장 지인들은 '추.윤 갈등'에 있을 때  “국민의 검찰이 되자”는 발언 뒤에는 두 사람이 어른거린다고 했다.

 한 명은 이명재 검찰총장(2002년 1~11월 재임)이다. 

그는 로펌에 있다가 총장으로 발탁되자 같이 일하던 윤석열 변호사에게 다시 검찰로 돌아가자고 권유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의 총장 집무실에는 단 한 권의 책도 꽂혀있지 않았다. 

오직 법전 한 권과 낡은 서류 가방뿐이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명재 검찰총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과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동생까지 구속했다.

 그리고 취임 11개월 만에 검찰에서 피의자가 숨지자 사표를 던져 깨끗한 뒷모습을 남겼다.

 금 전 의원 등 전.현직  ‘검사들이 존경하는 검사’는 또 있다.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의 제2대 검찰총장인 김익진(1896~1970)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통령  이승만은 월남한 그를 ‘반공 투사’라며 검찰총장에 앉혔다. 

 김익진이 검찰총장에 취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임 검찰총장인 김익진이 정권 안정에 기여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가 공산주의 세력에 밀려 월남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경찰 파워가 검찰을 능가했고 이승만 정권도 경찰을 더 신뢰했다.

하지만, 정권 입장에서는 검찰의 협력이 당연히 필수 불가결했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 등을 외치며 이승만 정권과 싸우는 사람들을 경찰이 잡아오면 이 사람들을 판사 앞에 데려가 구형해줄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검찰의 역할도 긴요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정권 때문에 월남한 김익진이 그런 역할을 잘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경무대 권력의 비호를 받는 정치 브로커들이, 선량하고 무고한 반 이승만 정적들을 빨갱이로 몬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 터지자 참지 못했다.

 “그들(정치 브로커)을 기소하지 말라”는 이승만의 친필 서신을 보냈다.

김익진 검찰총장으 이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검찰총장인 그를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시켰다. 

자료에 따르면 김익진 검찰총장은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시리가 고향이다.

그가 총장에 임명된 다음날 발행된 1949년 6월 7일 치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에  김익진 검찰총장의 당시 약력이 소개됐다. 
  

'본적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시리 240. 

단기 4250년(서기 1917년) 경성전수학교 졸업.

 4250년 임(任, ~에 임명되다)재판소서기.

 4253년(1920년) '임'평양지방법원판사. 

4260(1927년)년 동(同) 지방법원을 퇴직. 

4260~해방까지 평양에서 변호사를 개업함.

4281년(1948년) 3월 서울서 변호사 개업. 4281년 11월 '임'대법관.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사립 법률학교인 경성전수학교를 21세 때 졸업한 김익진은 그 해에 법원 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4세 때는 특별임용시험을 거쳐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7년 뒤 퇴직한 뒤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7년간의 일제 판사 경력 때문에 친일 여부를 의심할 수도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김익진은 누구길래

1896년 충남 부여군 논시리 240번지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조선총독부 판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해 평양지방법원, 공주지방법원, 함흥지방법원 등에서 7년 동안 판사로 일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서의 판사 일이 녹록치는 않았다.

 1920년 공주지법 강경지청 판사로 근무할 때는 판사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순사가 노골적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김익진 판사는  그 순사를 법정모독으로 법정에서 구속시켜버렸다고 한다.

결국 1927년 판사를 그만 두고 평양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조선 사람으로 이민족 통치 밑에서 오랫동안 무사하게 판사 노릇을 한 것이 부끄럽다.
 

애국자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외국에 나가 독립운동을 하는 판에 나는 그동안 일본의 녹을 먹으며 호의호식했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평양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연루된 수양동우회 사건 등의 변론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됐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김익진은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해 조선민주당 초대 총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군정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돼 7개월 간 옥고를 치르는 등 우파 세력 탄압이 벌어지자 1948년 월남을 한다.

그해 11월 대법관에 임명이 돼 다시 판사 활동을 하다 1949년 6월 6일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당시 검찰은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서울지검 검사장이었던 최대교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해 정권의 압력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수사권을 두고 군헌병대과 검찰이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에서는 김익진을 '자기 편'으로 생각해 검찰 통제에 용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양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받았기에 '대통령의 뜻'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 이승만 보복당하면서 '이승만비호세력' 수사독려

'한국 근현대의 법사와 법사상(민속원)등에 따르면 김익진 총장은 변호사 시절의 김익진은 일종의 인권 변호사였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법률을 통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시국 사건에서 그는 변호사로 등장했다.

일례로, 일제가 일으킨 공안사건인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 때도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 등이 검거된 이 사건에서 김익진은 가인 김병로 변호사 등과 행동을 함께했다.


 1964년 1월 17일자 '경향신문'보도내용 중,  '가인 김병로 선생의 추억'에 이런 대목이 있다. 

흥사단 사건은 예심을 거쳐 당시의 고등법원까지 올라가는 동안 전후 5개년이 걸렸다. 가인 선생은 이인·김익진 기타 몇 분과 함께 무료로 3심을 통해 시종(始終) 변호를 맡아주셨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해방 때까지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48년에 서울로 영업 무대를 옮겼다고만 언급돼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해방 직후에 그는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양 지부에 참여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건준을 해체한 뒤에는 좌·우파가 연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부위원장 겸 치안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11월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자 김익진은 거기에 가세해 총무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1946년 연초에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반대한 뒤 행방불명(실제는 호텔 연금)되고 조선민주당 간부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익진은 38선과 서울에 모습을 나타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48년 11월 남한 대법관이 된 그는 이듬해 6월 6일 문제의 제2대 검찰총장 자리에 임명됐다. 

애산 김익진 총장은 김중한 서울대 교수의 부친이다.

그는 1949년 11월 임영신 초대 상공부장관의 독직사건에 대해 이인 법무부장관이 불기소지시를 했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영신장관의 독직사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결하라는 지시도 거부하고 기소했던 검찰총장이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의 용공조작, 간첩조작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이 잡아다주는 '빨갱이'를 법원으로 끌고 가서 유죄 구형을 하는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검찰이길 거부했다.

 김익진과 이승만 사이에 자존심 대결을 벌인 것은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그것이다. 

 김익진은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승만의 친서 특명인 수사지휘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김익진은 수사를 정치공작대 뒤를 봐주던 것으로 의심되던 치안국장, 내무부장관 등 배후 권력층까지 확대시켰다.

김익진은  최대교 지검장이 이끄는  서울지검을 독려해 대한정치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한 뒤,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경무대(청와대)에 보냈다.


이승만은 노발대발했다.

결국 6.25전쟁 사흘 전인 6월 22일, 김익진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됐다.

 해임은 아니었으나 해임보다 더 강력한 징계였다.

 징계는 이승만의 뜻에 따라 이뤄졌다.
   
검찰총장이 하루아침에 서울고검 검사장으로 강등되는 망신을 당했다. 

김익진은 그런데도 옷을 벗지 않고 버텼다. 

김익진은 정치적 압력으로 검사를 몰아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치욕스런 강등에도 불구하고 서울고검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승만의 특명을 무시한 검찰총장 김익진은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를 통해 108명을 검거하고, 11명을 기소했다. 
   
◇… 김익진, 이승만의 강등조치외에도 옥고치러

김익진의 시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 6월 25일 발생한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도 그를 피고인으로 세웠다.

김익진이 평소 좌천 인사에 대해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배후인물로 지목된 김시현과 연좌하였다는 피의사실로 구금되었다.

 하지만 1심과 2심은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면소(공소권 없음) 판결을 내렸다.


정치가 법치를 압도하던 시대였다.

 권력자는 검찰을 정권의 시녀로 생각했다

 살아 있는 이승만 정권 앞에서도  김익진 검찰총장은 양심과 소신을 굳건히 지켰던 것이다. 


지난 2006년에 '법사학(法史學) 연구' 제34호에 실린 문준영 부산대 교수의 논문 '헌정 초기의 정치와 사법'에 대통령과 검찰총장간의 대립을 다룬 내용이 있다.

문 교수는  "반공사법에 내포되어 있던 정권안보 사법의 성격이 노골화되면서, 대통령과 검찰총장 사이에 대립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문 교수는  "그중 하나가 1950년 4월 발생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또, 김익진 검찰총장이 용공조작과 대통령의 수사금지 특명등을 단호히 거부한 사건 개요를 이렇게 요약한다. 

"경무대에 줄을 댄 정치브로커 김태수·김낙영 등이 '공산 게릴라가 봉기하여 경무대를 습격하고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 한다'는 날조된 정보를 보고한 뒤,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공산당으로 몰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이승만은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특명과 관련,  "김익진 검찰총장은 권승렬 법무부장관 및 서울지검장과 손잡고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섰다"고 소개하고 있다.

 논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기소된 김태수의 허위 정보에 참모총장·헌병사령관·내무부장관·치안국장서리 등이 놀아났다. 


첩보가 입수된 뒤, 검찰이 수상히 여겨 수사하려 하였으나 대통령의 측근이 수사(받는) 중이므로 '검찰은 이 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말라'는 특명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권 장관과 김 총장은 대통령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서울지검의 정보부 검사를 수사에 투입하여 1950년 4월 정치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했다. 

◇… 검사들이 소신껏 수사하도록 이승만 특명사실을 발설도 안 해
 
김익진은 여기에다 악명 높은 일제 고문경찰을 비호하던 수도경찰청장 체포를 지시해 이승만의 눈밖에 났다. 

검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재임 1년 만에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전무후무한 강등 인사까지 당했다.

김익진이 얼마나 용감했는가는, 대통령의 친서를 무시하는 것외에도, 회답을 보내 공정수사 의지를 천명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문 교수는 논문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을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를 보냈으나, 담당 검사들이 소신껏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김 총장은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에도 맞서다 

김익진이 맞선 '살아 있는 권력'은 이승만 정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싸움은 '살아 있는 세계권력' 미국에도 맞서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용공조작은 동북아에서 냉전정책을 전개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김익진이 맞선 권력은 더 있었다. 

그는 반공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세력의 요구에도 부응하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맞서면서도 기득권층에게는 맞서지 않으려는 검사들이 대한민국에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김익진은 대통령뿐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익도 정면으로 무시했다. 

전남도경국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됐는데, 그를 풀어달라는 현역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원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면서 싸운 일화도 전해진다.

용공조작에 담긴 미국·기득권층·이승만의 욕망을 몰랐을 리 없는 김익진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다.

 공산주의 때문에 고향에서 밀려났다는 사적인 감정도 철저히 배제했다.

 오로지 법조인과 검찰총장의 자세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그는 지난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제2대 검찰총장으로, 훗날 후배 검사와 검찰총장들에게  수모와 치욕에 맞서면서 법치를 택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한국 근현대의 법사와 법사상(민속원) 이호철칼럼. 김진국칼럼(중앙일보),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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