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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39)> 제헌국회 프락치 사건과 이승만의 반공 정책

이승만, 친일청산법 반민특위 무력화 위해 반공체제 강화
반민특위로 국회 내 논란 일자 박헌영 남로당 10여 명 포섭
국회 프락치로 3명 구속 놓고 국회와 이승만 대립
박헌영과 월북한 여성을 개성에서 체포…전모 드러나
김약수 부의장 등 의원 13명과 서울지검 검사 6명 및 변호사 10명 구속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정부가 처리해야 할 현안 중의 하나가 미 군정청이 운영하던 주한미군문제였다.

제헌 국회 내에서도 조기 철수 론에 맞서 국군이 정비될 때까지 유지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주한미군의 철수를 앞두고 이승만과 미 국무부는 이를 놓고 심한 갈등을 벌였다. 

이승만은 미군정부의 정책이 한국의 공산세력을 양성했다면서 공산군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한국군의 증강을 요구했다.

◇…반민특위 계기로 이승만 반공체제 구축

반면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이승만의 태도가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때문에 이승만은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강력한 '반공(反共)체제' 구축에 나섰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와의 이론투쟁에서 교본이 될 만한 팸플릿을 저술하여 4월 20일 저녁에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으로 발표했다.

그가 ‘네 가지 평등’을 강조한 이 방송 내용은 '일민주의 개술(一民主義槪述)'이라는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보급되었다.
  
1949년  4월 22일에 전국의 대학생과 중등학교 생도 대표 4만여 명이 서울운동장에서 결성한 중앙학도호국단은 반공체제의 대표적인 조직 중 하나였다. 

학도호국단이 조직됨으로써 학원을 거점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무렵 친일부역자와 민족반역자 청산을 위한 근거 법으로 생긴 반민특위(反民特委)를 놓고 이승만 정부와 친미파 정치인들은 이를 발의해 법안을 제정한 국회와 충돌직전에 이르렀다.

특히 반민특위 내 특경대(特警隊) 문제를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극한 대립은 결국 그해 6월 6일 아침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사건이 촉발됐다.

당시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은 장경근 내무차관의 지휘로 이뤄졌으나, 그 배후는 반공체제로 정권유지에 나선 이승만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반민특위내 특경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사태로 발전했다.
  
특경대 해산은 나아가 반민특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반공은 내세운 이승만이 주도한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비화됐다.

급기야 6월 20일에 임시국회가 폐회되자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의원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들이 모두 14명이었다.
  
◇…국회 소장파 의원 구속 놓고 국회와 이승만 정부 충돌

이는 초대 주북한 소련대사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가 그해  9월에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보낸 '남북한 정세 보고서'에 프락치 사건을 자세히 기술됐다

북한의 '로동신문' 역시 국회 프락치 사건이 남로당과는 관계없이 성시백(成始伯)이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국회 소장파 그룹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앞서 국회 소장파인 이문원(李文源), 최태규(崔泰奎), 이구수(李龜洙) 세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에 개회된 제3회 국회(임시회)는 심상찮은 풍파가 예상되었다. 

임시국회 개회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이들의 구속에 대하여 “특별한 범법 사실이 있어서 구속했을 것이니 내가 범법 내용을 알기 전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면서 “그러나 정부나 국군, 국회 내에 공산당이 잠입하고 있는 모양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발하는 대로 처치해야 할 것이다” 하고 단호히 말했다.

반공체제 강화에 나선 이승만은  공산당이 국회 안에도 잠입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이승만은 그 다음날 국회 개원식에 나가서도 반공을 강조하는 치사를 했다. 

그는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피생아사(彼生我死·네가 살면 내가 죽음)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그날 개원식 치사는 이렇다.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었든지 우리나라도, 저희 국가도, 저희 생명도 다 바치고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살자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자유로 살 수 있고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살 수 있을 것이지만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 십 년 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 화할지라도 우리로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한번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는 모든 세계가 다 남에게 속아서 공산주의의 압박을 감수할지라도 모든 민주국들이 다 자유와 독립을 희생하고 공산화해서 살려고 아니할 것이므로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될 것입니다. …”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주도 4.3사태와 여수 순천 군인반란사건 뒤에 우리 민족이 그것을 확실히 깨달아 관·민과 군·경이 합해서 반란분자들은 지하공작으로 발붙일 곳 없이 하려는 결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 내 국회 내부터 이 결심을 확실히 각오하고 이것을 지켜 나가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다시 경성(警醒)해야 될 것입니다. 이를 경고하는 것입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말 속에 담긴 이승만의 결연한 각오를 짐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국회도 이에 적극 대응했다.

이승만의 개원식 치사를 들은 이튿날 국회 본회의가 개회되자마자 전남 무안 출신의 민국당 소속 김용현(金用鉉) 의원 외 49명 소장파 의원들의 긴급동의로 세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요구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석방결의안은 이틀에 걸친 격론 끝에 재석의원 184명 가운데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부결은 되었으나 결의안에 찬성한 의원이 88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놓고 장외설전이 펼쳐졌다.

국민계몽회라는 단체는 5월 31일에 파고다 공원에서 결의안에 찬성한 88명도 공산당들이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이날 연설회를 보러갔던  유성갑(柳聖甲), 김웅진(金雄鎭), 김옥주(金沃周), 노일환(盧鎰煥) 네 의원이 현장에서  언쟁 끝에 유성갑이 전치 3주의 봉변을 당했다.
  
6월 2일에 열린 국회 제10차 본회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기부금 강징, 국군 월북, 국회의원 체포, 국회의원 구타 등에 대한 논란 끝에 노일환 의원이 제안한 국무총리 이하 각부 장관 총사퇴 결의안을 두 차례의 표결 끝에 재석 144명 가운데 가 82표, 부 61표, 기권 1표로 가결됐다.

이러한 결의는 물론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의 배경

격분한 반민특위는 6월 4일에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趙應善)을 시위군중 동원과 배후조종 혐의로 검거했다.

또한 계몽협회 회장 김정한(金正翰)과 동원부장 김정배(金正培), 정보부장 조용철(趙龍哲) 등을 체포하여 수감했다.
  
최운하는 6월 5일이 좌익청년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의 창립기념일이었으므로 경찰의 비상경계 태세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경찰은 반민특위의 처사에 분개하며  바로 이에 항의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서울시 경찰국 관하의 사찰과 계원들은 6월 5일에 회의를 열고 자기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정부를 신뢰하고 일을 할 수 없다면서 440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6월 6일 오전 8시 반부터 서울시 중부서장 윤기병(尹箕炳)의 지휘 아래 서울시 경찰국 경찰대 40명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어 반민특위 특경대원 20명을 무장해제하는 동시에 이들을 검거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들의 권총 16정과 서류를 압수했다.


소란 통에 현장에 갔던 검찰총장 권승열(權承烈)이 경찰관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소지했던 권총을 압수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출동 경찰은 두 시간 만에 철수했다.
  
이어 서울시 경찰국의 과·서·대·교장(課署隊校長)들은 이날 오후 6시에 회의를 열었다.

그런 뒤 (1) 반민특위 간부 쇄신 (2) 반민특경대 해산 (3) 금후 경찰관에 대한 신분 보장 (4) 위의 요구 조건이 48시간 내에 관철되지 못할 때에는 총퇴진을 단행한다는 결의문을 채택, 이를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서울시 경찰국 경찰관 9,000명도 6월 7일에 이들에 동조하는 결의문을 발표했으며, 철도경찰대 본대 사찰과원 일동도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격문을 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습격한 경찰에 직접 두둔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경찰관들이 요구한 시한인 6월 8일 오후 3시 무렵에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을 통하여 “곧 선처하겠다. 안심하고 조금도 동요 말고 치안확보에 일심전력하여 주기 바란다”는 회답을 김태선(金泰善) 경찰국장에게 보냈다.
 
이기붕은 전임 서울시장 윤보선(尹潽善)이 6월 6일에 임영신(任永信)의 후임으로 상공부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된다.

같은 날 검찰총장 권승열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 이인(李仁)의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반민특위에 의하여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최운하와 조응선은 6월 6일 오후에 석방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을 놓고 국회는 시끄러웠다.
    
반민특위 사무실의 습격이 있었던, 6월 6일에 열린 국회 제13차 본회의는 저물도록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오전 회의가 끝난 뒤에 국회의장단 세 사람과 내무치안위원장 나용균(羅容均), 외무국방위원장 지대형(池大亨·이청천)이 이승만을 방문하여 사태를 보고하고 국회에 출석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특경대 해산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명령한 것이며, 국회의 요청에 응하고 싶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 하겠다."고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
  
배후로 알려진 내무부 차관 장경근역시 사건 전말을 보고하면서 특경대의 해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본래 특경은 내무부에서 정식 발령한 경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위에서는 경위(警衛)니 경감(警監)이니 하는 명칭을 붙여 경찰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므로 정부로서는 누차 해산을 종용해왔다.

그러나 종시 듣지 않고 경찰권의 불법행사를 하므로 오늘 아침 해산시킨 것인데, 상부의 명령에 의하여 질서정연하게 아무 피해 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압수한 문서는 특위 관계 외의 것은 곧 반환할 것이며 자동차도 경찰에서 대여한 것 외에는 전부 반환하겠다.”
  
국회의 대정부 대응은 갈수록 강경해졌다.

당시 국회 속기록 등을 보면  국회는 논란 끝에 6월 3일의 내각총사퇴 결의를 조속히 실행할 것과 반민특위 문제는 원상회복하고 책임자는 문책할 것, 만약 정부에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국회는 정부 제출 법안과 예산안 심의를 거부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재석의원 153명 가운데 찬성 89표, 반대 59표, 기권 3표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이튿날 자신이 경찰에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고 AP통신 기자에게 분명히 밝혔다.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한 것이다. 특위 습격이 있은 후 국회의원 대표단이 나를 찾아와서 특경대 해산을 연기하라고 요구했으나, 나는 그들에게 헌법은 다만 행정부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용허하고 있기 때문에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경찰대는 지난주에 국립경찰의 노련한 형사인 최운하씨와 조응선씨를 체포했는데, 이 양인은 6일에 석방되었다. 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국회에 대하여 특위가 기소될 자의 비밀 명부를 작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 명부에 백 명의 이름이 오르든 천 명 혹은 만 명의 이름이 오르든 간에 그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와 같이 명부를 우리에게 제출해 주면 우리는 기소자를 전부 체포하여 한꺼번에 사태를 청결(淸決)할 것이다. 우리는 이때까지와 같이 그렇게 문제를 오래 끌 수는 없다.”
  
이승만은 이어 6월 10일에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편지를 보내어 특경대의 운영 실태를 지적하면서 하루바삐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고, 경찰이 특경대 해산명령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과오를 범한 자가 있다면 조사하여 징벌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특경대를 원상회복시키라는 국회의 결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반민법을 헌법 원리에 맞게 개정할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6월 20일에 국회가 폐회되자마자 국회 프락치 사건의 나머지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었다. 

소장파의 좌장격인 부의장 김약수(金若水)를 포함하여 노일환, 김옥주(金沃周), 김병회(金秉會), 박윤원(朴允源), 강욱중(姜旭中), 황윤호(黃潤鎬) 7명의 의원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경찰은 헌병대와 협조하여 이들의 검거에 나서 6월 22일 오후까지 모두 체포했다.


 5월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아 오던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세 의원은 6월 25일에 기소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무엇?

당시 국회 프락치 사건의 개요를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식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반민특위가 발족되어 반민족행위자들의 검거가 본격화하자 박헌영(朴憲永)은 남로당의 도상익(都相益)이 국회 공작책이 되어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로당에 비밀 입당시킨 다음 국회활동을 통하여 합법투쟁을 전개하도록 지령했다.

도상익은 언론인 출신의 인텔리 남로당원 이삼혁(李三赫)에게 비밀공작조직을 편성, 국회의 소장파 의원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벌였다. 

2월 초순 무렵에 노일환을 포섭한 이삼혁은 다시 변호사 오관(吳寬)을 통하여 하사복(河四福)이라는 가명으로 이문원을 포섭하여 이들 두 의원을 남로당에 입당시켰다.

이삼혁은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1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했고, 이들의 국회 교란책동은 더욱 가열해졌다.
  
3월 중순 무렵에 서울시 경찰국으로부터 이들의 동태를 보고받은 검찰은 정보부의 부장검사 장재갑(張在甲), 검사 오제도(吳制道),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를 중심으로 한 특별사찰반을 편성하여 은밀하게 내사활동을 시작했다.

검찰은 자수한 남로당원 전우겸(全禹謙)의 진술을 받아 이문원, 이구수 등의 범법 내용 일부를 밝혀내고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구속했다.
  
수사가 계속되고 있던 6월 10일에 광주리 장수로 가장하고 월북하려던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鄭在漢) 여인이 개성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중요한 신체부위에 비밀 보고문을 숨기고 있었다.

암호해독 결과 이 보고문은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박헌영에게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였다.

정재한의 집에서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관한 지령문과 보고문을 압수함으로써 조직의 실태와 범행내용을 파악했다.


검찰은 6월 21일부터 다시 검거를 시작하여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徐容吉), 신성균(申性均), 배중혁(裵重爀), 김병회 등 국회의원과 변호사 오관을 구속한 뒤  8월 16일까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구속기소했다.
  
이 사건의 재판은 15회에 걸친 공판 끝에 1950년 3월 14일에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되었다.

노일환, 이문원은 징역 10년,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김옥주, 강욱중, 황윤호, 김병회는 징역 6년, 나머지 피고인들은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사건은 공소되어 서울 고등법원에 계속(繫屬)되었는데, 6·25전쟁으로 피고인들은 서용길 이외에는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프락치 사건 연루자 한독당과도 연결?
  
이승만은 6월 28일에 미국인 친구 올리버에게 ‘비밀’이라고 표시한 긴 편지로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한 내용을 써 보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국회 사이의 마찰에 대하여 과장하고 있어요. 국회안의 몇몇 친공(親共)분자와 반미(反美)분자들은 한편으로는 한국독립당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 조직인 남로당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이따금 자기네 결의안을 지지하도록 국회 안의 몇몇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국민이 정부를 굳게 뒤받치고 있고 정부가 국민들의 의사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로버츠 장군은 친공적인 국회의원 세 사람이 체포된 것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드러났어요.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고, 경찰이 그들을 체포한 것입니다.
  
 최근에 박헌영의 비서가 어떤 여성과 38도선을 넘다가 개성에서 붙잡혔습니다. 그 여성은 비밀 통신문을 숨겨 가지고 가던 참이었어요. 그들이 붙잡혀 그 문서가 발견되고 그들은 체포되었습니다.  
 
현재 철저한 조사가 진행중인데, 다른 국회의원들이 관련되었을 가망이 많습니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어제 나더러 이들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그토록 나쁜 인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신익희는 그들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즉각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회가 조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자들이 남로당뿐만 아니라 한독당과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까지 국회 프락치 사건 보고
  
개성에서 붙잡힌 정재한의 집에서 발견된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대한 지령문이란 5월 23일에 검찰총장 권승열이 국회 보고에서 밝힌 것이었다. 

그것은  7가지 제안이었다.

구체적으로는 (1) 외국군을 완전히 철수시킬 것 (2) 남북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남북정당 사회단체대표로서 남북정치회의를 구성할 것 (4) 남북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원칙에 입각한 선거 규칙을 작성하여 최고입법기구를 구성할 것 (6) 반민족행위를 처단할 것 (7) 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 프락치 사건에 관련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위의 국회의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사건 당시부터 조작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1993년에 한국정부에 제공한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극비 군사외교 문서에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실상에 관한 중요한 기밀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것은 1949년 4월에 북한 주재 소련대사가 된 슈티코프(Terentii F. Stykov)가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보낸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 1949년 9월 15일'이라는 비밀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의 다음과 같은 기술은 분명히 남로당 프락치들의 활동을 설명한 것이다.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국회 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 등이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실행된 보기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법률안 심의 때에 이들은 법률안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슈티코프는 또 이 보고서에서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은 1948년 말에는 당원이 90만 명에서 24만명으로 줄었고, 1949년에는 정치적으로 확고하지 못한 당원들의 탈퇴와 노동당 등록당원에 대한 탄압으로 그 수가 더욱 감소했다고 기록됐다.

이러한 보고는 위기감을 느낀 남로당 수뇌부가 각계에 프락치를 침투시켜 세력을 만회하려고 시도한 동기를 짐작하게 한다.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법조계에 잠입해 있는 남로당 프락치들이 검거된 것도 그러한 보기였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김영재(金寧在)도 1947년부터 남로당에 입당하여 활동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법조계 프락치 사건은 1949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수사가 진행되어 김진홍(金振弘), 김두식(金斗植) 등 검사 6명과 양규봉(楊圭鳳), 백석황(白錫璜) 등 변호사 8명이 검거되었다.

때문에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은 기소 내용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라고 적혔다.

재판은 사광욱(史光郁) 주심판사, 박용원(朴容元), 정인상(鄭寅祥) 배심판사의 참석하에 오제도(吳制道), 장재갑(張載甲) 검사가 입회했다. 

1949년 11월 서울지방법원에서 개정된 공판정에서 피고인들은 모두 남로당과의 관계를 부인했으며 취조 과정에서 자백한 내용이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임을 주장했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이 되지 않은 암호문서를 근거로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 北 로동신문, "성시백의 공작이었다"고 주장

이 무렵 수수께끼 같은 성시백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련의 공산주의 프락치 활동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무역상 행세를 하면서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와 '우리신문' 발행하며 활동하던 성시백(成始伯)이다.

그는 남로당과는 관계없이 움직이는 방대한 조직의 활동이었다.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라는 이 조직은 김일성의 직접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시백은 포섭한 인사들을 1950년 5월 10일에 실시되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킨 뒤 합법 투쟁을 전개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성시백은 1950년 5월 15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때에 검거된 인원은 모두 112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직업도 정당원, 공무원, 상인, 교원, 외국공관 직원, 회사원 등 다양했다. 북한은 평양에 ‘애국렬사릉’을 조성할 때에 그곳에 성시백의 묘도 만들어 놓았다.

북한의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매우 이례적으로 1997년 5월 26일자 2면 전체를 성시백에 대한 특집 기사로 채웠다.

이 기사는 19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 성시백의 공작에 따른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괴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 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 반미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 주었다. …”
  
'로동신문'의 이러한 기술의 동기가 뒤늦게나마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남로당의 투쟁사를 역사에서 지우기 위한 역사왜곡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크게 공헌한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 중앙 분실장 김호익(金昊翊) 경감은 수사가 마무리되고 있던 8월 12일에 남로당의 서울 총책 김삼용(金三龍)의 하수인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국회 세력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초대 제헌국회에서 한 때 전성기를 구가하던 소장파 그룹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어 각자 보신책에 급급하게 된다.

그런 사이 민국당은 원내 제1세력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네이버백과. 두산백과.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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