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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정치사(42)> 조봉암, 이승만정권 초대 농림부 장관…그리고 사형

이승만, 농지개혁을 통한 농민 장악 위해 조봉암 입각시켜 정책시동
지주가 많은 한민당계의 조봉암 장관 발탁에 강한 반발과 비판
농림부 장관의 관사 비용을 공금유용으로 구속 처벌하려다가 국회에서 투표 끝에 부결
장관 취임 6개월 만에  장관직 사퇴…진보당 창당하며 대통령 출마
육군 특무대의 조사로 양명산으로 부터 돈 받았다고 씌워 사형선고 17시간 만에 교수형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전에 2021년 4월7일 재보선도 있다.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 민의의 시대를 만든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지난1945년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속에 영욕을 함께 했다. <본지>는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과 국회의 이야기 등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 <편집자 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 취임과 함께 짠 초대 내각에 예상 못한 인물이 발탁된다.

바로 죽산 조봉암  (曺奉岩, 1899년 10월 29일 ~ 1959년 7월 31일. 존칭생략) 선생이다.  

친일부역자와 민족반역자는 용서해도 '공산주의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승만의 히든카드였다.

이승만은 예상을 깨고 독립운동가이자 행방정국에서 몽양 여운형과함께 진보정치의 거두로, 제헌국회의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앉혔다.

그러나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기용해놓고, 건건히 반공(反共)만을 외쳐온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조봉암이 한때 좌익였지만, 박헌영.허헌등 남로당과 결별한 전혀 다른 진보정치인였음에도 관사사용대금 시비등 올가미를 씌워 입각 6개월만에 사퇴하게 했다.

그런 뒤 국회부의장을 두번이나 지낸 그를  10년 뒤 사법살인까지 했다.


다행이 조봉암의 사후 52년이 된 2011년 간첩죄등 모든 혐의가 벗겨져 무죄판결로 국가의 사과와 27억여 원의 배상판결이 확정된 비운의 정치인이다. 

◇… 이승만, "조봉암 농림 장관 앉힌 건 농민들 잡으려고..."
 
1948년 5.10 남한 내 총선을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가장 연장자인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에 뽑혔다.

이 박사로 불린 이승만은 대통령자리에 뜻을 뒀다.

이후 초대의장이면서 유진오 박사 등 헌법제정기초위원회 등과 내각책임제냐, 대통령제냐를 놓고 갈등 빚으며  미국식 대통령제도, 내각제도 아닌 어정쩡한 권력구조가 탄생했다.

이승만은 제헌의원들의 투표로 초대 대통령에  뽑혀 그해 7월24일 취임했다.

그러나 이승만 초대 정부를 구성하며, 당초 이윤영 제헌의원을 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부결됐다.

이승만은 국회부결에 대한 대국민사과도 없이 일주일 후인 8월2일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설화적인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은 그때 마흔여덟 살이었다.

이윤영 지명이 부결시킨 제헌국회에서는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후에 표결하자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즉결하기로 결의하고 무기명투표에 들어갔다. 

개표결과는 재석의원 187명 가운데 가 110표 대 부 84표(무효 2표)로 승인이 가결되었다.

이승만은 정부수립(1945년 8월15일)을 꼭 2주일 앞둔 그날(8월2일) 이범석총리와 머리를 맡대고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을 공식 지명했다.

제헌국회내 한민당 의원들의 비판과 임명취소요구가 거셌다.

이승만은 한민당계의 요구를  무시하고 조봉암을 그대로 앉혔다.

그러나 조봉암은 장관 지명 소식을 듣고 어땠을 까.

그는 이승만과 자신은 지향점이 다르다며 장관 취임을 사양했다.


이승만이 조봉암의 개혁을 승인하기로 약속하고 재차 승낙을 요구하자 사양하다가 농림부장관직을 수락하였다. 

한민당 계열, 그리고 미군정청의 반대와 경계에도 그는 예정대로 농림부 장관직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농지개혁을 해야 평민주의가 이뤄진다고 믿어왔다.

실례로 이보다 2년여 전인 1946년 2월에 민주의원 의장으로서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을 보면 이승만이 농지개혁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 지가 입증된다.

그는 '일본인이나 반역자들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여 국유로 할 것'과 '모든 몰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안팎에 천명했었다.

◇…이승만, 농지개혁 추진의사 국회 시정연설서 처음 밝혀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그런 차에 5.10총선과 정부수립을 목전에 두고 하지 미군정청이 그해  3월  갑작스럽게 귀속농지(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지)를 그 소작인들에게 불하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청의 정책에 격노했다.

이승만은 그 직후인 3월20일에 미국인 친구이자 언론인인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에서 크게 반발한 대목이 나온다.

그는 '그것은 머지않아 수립될 한국정부가 할 일'이라며 하지사령관에게 각을 세웠다.

월간 조선 2012년 6월호 '단독정부수립이나 남북협상이냐'를 보면 이승만은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 토지개혁법이 제일 먼저 제정될 것”이라고 결심을 토로했다.
  
또한 이범석 국무총리의 국회인준에 이어 재무, 법무, 농림, 교통 4부의 장관 인사발표 직후인 8월4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봉암의 농림부장관 발탁사실을 언급했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는 초대 정부 농림부장관인 조봉암을  '사회주의자 조봉암 임명'으로 소개했다고 월간조선 2012년 11월호' 대한민국 건국의 여섯가지 기초'에 나와있다.


그는 편지에서 " ‘한국 공산주의자’인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민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조봉암의 역할은 바로 그 이후다

이승만은 정부수립 한달 반만인 1948년 9월30일  국회의 요청에 따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이승만을 대신해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이 대독했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은 미군정청에게 보란듯이  '헌법 조항에 따라 토지개혁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겠다'고 처음 밝혔다.
  
 “민생문제 해결에 있어서 항상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의 염원이다.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시급한 대책이 있을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헌법의 조항에 의거하여 앞으로 토지개혁법이 제정 시행될 예정이다. 

토지개혁의 기본목표는 전제적(專制的), 자본제적 토지제도의 모순을 제거하여 농가 경제의 자주성을 부여함으로써 토지생산력의 증강과 농촌문화의 발전 기여에 지향될 것인 고로, 먼저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을 확립할 것이나, 농민대중의 원하는 바에 의하여 정부는 균등한 농지를 적당한 가격 또는 현물 보상의 방식으로써 농민에게 분배할 것입니다.…”
    
◇…조봉암 장관 임명에 반기든  한민당과의 '악연'

앞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 된 뒤인 7월 22일 초대 내각 인준시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후보자로 지명했다.

그의 농림부 장관 승인을 놓고 혁신계 인사를 기용하여 미국의 경계와 의구심을 풀게 하고 좌우를 아우른 모양새를 취하려는 이승만의 의도가 작용했다.


여기에는 김성수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지개혁을 성공시키려던 이승만의 생각이 강하게 작용했다.

예상대로 한민당계 의원들의 반대는 소속의원의 상당수가 대지주 등이 많아, 농지개혁에서 큰 피해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국민 절대다수가 배고픈 상황에서 농지개혁자체를 반대할 경우 국민저항이 예상되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대신 조봉암의  사상을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욱이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당시 권력구도를 놓고 한민당계와 충돌한 묵은 감정도 한몫을 거들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에게 농림부 장관에 취임해도 장관직과 국회의원일을 겸하도록 했다.

그리고 농림부장관인 조봉암에게 부여된  임무인 농지개혁을 맡겼다.

그래서 실무책임자인 농지국장에는 조봉암을 신뢰하던 강진국을 임명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중 조봉암은 농지개혁법을 입안·추진했다. 

1948년 9월 4일 조봉암은 차관 강정택, 농지국장 강진국, 기획처장 이순택 등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조직하고, 농지개혁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9년 초 관사 문제로 농림부장관직을 사퇴했다. 

장관 관사를 농림부 전용 예산으로 쓴 것을 놓고, 한민당계 의원들과 민주국민당 의원들로부터 사퇴압력 받아 취임 6개월만에 장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1949년 연말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민강위) 조직이 추진되었으나 조봉암은 그것에 가담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제헌국회의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만드는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서상일)에서 유진오 안과 권승렬안을 놓고 한민당계열과 조봉암은 충돌했다.


무소속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으로 유진오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한때 사상적 동지였던 김준연마저 다수석을 가진 한민당이 밀고 있는 권승렬안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일이 커졌다.
 
내용은 유진오 중심의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재직 중 형벌에 관련된 공동법안'이 결정됐다.

'현행범인 경우만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도 체포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과, 영장제도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사제'의 추가,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이었다.

이때 김준연 등은 공동안을 반대하고 권승렬안에 지지를 보냈다.

원안인 공동안에서는 현행범인 경우만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도 체포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에 대해 김준연을 중심으로 한민당 측 의원들은 권승렬안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권승렬안에서는 현행범일 때만이 아니라,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도 사후 영장 청구로 대체할 수 있도록 예외 사유를 확대하고 있었다.

공동안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역시 김준연을 비롯한 한민당계 의원들이 앞장을 섰다. 

공동안에 있는 영장제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사제에 대한 내우외환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의 경우 법률로써 그 적용을 정지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추가하자고 나선 것이다.

김준연과 한민당계 의원들의 마지막 공격은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에 모아졌다.

 
공동안의 이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사상의 어려움으로 치안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항만으로 충분하다는 논거였다.

김준연과 한민당의 '현행범인 경우만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도 체포 등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과, 영장제도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구속적부심사제'의 추가, '고문과 잔인한 형벌 금지 조항' 반대에 흥분한 그는 감정적으로 김준연, 한민당 의원들을 공격하였다.

한민당계 의원들의 파상공세에 무소속의 조봉암 의원이 가장 전면에서 격렬히 맞섰다.

 당시 한 기자는 흥분한 조봉암의 욕설 섞인 항변을 기록했다.

"법률은 강자에게나 약자에게나 공평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는 사후영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또 고문과 잔혹한 형벌은 당연히 금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준연씨는 제2문제 규정은 당연하다고 하나, 이에 준할 비상 사태의 경우 운운은 집회에도 적용될 우려가 다분히 있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당연하다고 하는가. 

이 천하가 언제나 너의 천하가 될 줄 아느냐?"

그러나 조봉암 등의 분투도 비상사태 시 인신보호를 위한 절차 규정들을 정지할 수 있다는 규정의 삽입을 막는 데 그쳤다.

첫 번째 문제는 사후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예외 사유를 확대하는 쪽으로 쉽게 결론이 났다.

고문과 잔혹한 형벌의 금지 규정을 삭제하자는 수정안도 표결 결과 11대 10의 한표 차로 가결되었다.

◇…장관 취임 6개월만에 관사비용 공금썼다 시비로 사퇴한 조봉암

이 결과는 조봉암에게 좌절을 안겨줬다.

이 사건으로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회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행여 본회의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하여 이후 헌법기초위원회에는 일절 출석하지 않았다.

조봉암 장관이 이끄는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에 대해  한민당의 미움은 대단했다.

재산권 침해라는 헌법조문과 국가를 위해 강제로 국가가 농지를 수용할 수 있다는  조문이 충돌하면서 전국의 지주들의 저항은 거셌다.

심지어 국가가 농지를 수용할 경우 보상절차와 보상가 산정을 놓고, 조봉암과 지주들의 갈등은 노골화됐다. 

때문에  지주층이 결집해 있던 한민당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1949년 1월 감찰위원회(현재 감사원)는  장관관사를 치장하기 위해 공금을 유용하고 양곡매입비를 회의비로 썼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조봉암을 고발했다.

그는 1949년 2월 스스로 사의를 표하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강정택 차관도 이때 함께 사임했다.

건국이래 지금까지 감찰위원회(현감사원)가 장관의 비위사실을 문제삼은 것은 꼭 두 번이다. 

둘 중에  하나이자 최초의 사건이 49년1월의 조봉암 농림장관 비위'로 보도된  이 사건이다.


초대 감찰위원장은 전형적 선비형인 정인보씨(6·25 때 납치되었다가 타계). 국학대학장에서 공무원 비위단속기구의 책임자가 된 정 위원장은 성격 그대로 엄하고 깐깐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감찰위원회는 '국무위원(조봉암 농림) 비행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이를 1월31일 국회에 보냈다.

내용은 양곡매입추진위원회의 예산 중 500만원을 농림장관 관사수리와 비품대, 요식대, 출장비 등 명목으로 유용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감찰위원회가 헌법48조에 열거된 공무원(국무위원 등)을 징계결의 했을 때는 이를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조봉암의 경우는 징계결의 이전에 일단 비위사실만을 통보한 것이었다. 

국회는 이 보고서의 합법성을 싸고 논쟁을 하지만 결국 정 위원장과 조봉암을 차례로 불러 증언을 들었다.

정 위원장은 예산 유용의 사례를 제시하고 '감찰위원회로서 징계결의를 할 것이지만 상대가 전례가 없는 국무위원이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징계결의 전에 국회에 보고한 것'이라고 했다.

조봉암은 '현재 정부의 임시 예산 속에는 회의비나 출장비등이 책정돼 있지 않아 양곡매입 계몽에 관한 활동은 그와 유사한 양곡매입추진위원회비용에서 썼다. 관사수리비는 국무회의에 보고한 뒤에 사용한 것이다. 단 한푼도 사용은 없다. 그럼에도 신문에 발표하고 국회에 보고해 장관을 망신주는 것이 어느 나라의 도덕이냐'고 반격했다.

이재형·김인식 의원 등은 감찰위원회 보고가 법적 요건을 구비하지 못했다해서 반송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돈 의원 같은 이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면서 장관 관사 수리비 등에 320만원을 쓰도록 국무회의가 허용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무총리 이하 모두 삼태기에 넣어서 내다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 큰 파문을 던졌다.


결국 국회는 표결로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서이환 의원(조사제1반)-'장관관사' 관사는 지정된 것이 아니고 내정된 것이며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바는 있으나 승인은 없었다. 수리비는 320만원이다.

이 시기의 장관관사 수리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요식대'-양곡매입 독려를 위한 도지사회의 및 경찰청장회의 때의 요식대였다. 모든 관계영수증이 첨부돼 있어 부정은 없었다. 다만 비록 도지사고 경찰청장일지라도 더 검소한 접대를 할 수 있었지 않나 아쉬움이 있었다.

'양곡매입계몽 영화'-영화는 취지에 맞았으나 10분 남짓 된 영화에 370만원이 지출된 것은 과다지출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전문가가 아니어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

△조혜영 의원(제2반)-장관과 직원들의 양곡매입 독려를 위한 출장비로서 유용은 부득이했다고 본다. 양곡매입촉진회 경비에서 농민일보에 4회에 걸쳐 63만원을 대부해 준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귀속농지관리국의 예산에서 농산비라는 명목으로 양곡매입 독려에 나선 국회의원여비를 지급한 것은 잘못이다.

△이동구 의원(제3반)-식량공사에서 비료구입을 했다. 그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욱중 의원(보충보고)-이번 사건은 감찰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조사권을 발동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서 조사에 착수했다는 것을 보충보고 한다.

국회는 이 보고서를 놓고 또다시 온종일 논쟁을 계속했다.

△홍성하 의원-조 장관이 한 일은 위법이다. 양곡매입촉진비라는 이런 중요한 비용으로 관사 수리비로 쓰다니 정치인의 양심으로 용납 못할 일이다.

△강기문 의원-나는 감찰위원회가 무엇 하는 곳인지 몰랐다.

이번에 지방에 갔더니 우리 군에 도지사가 왔는데 그때 따라온 감찰위원이 그후에 돌아가 군청에 편지를 하기를 '도지사가 너희 군에 갔는데…일본말이 되든지 영어가 되든지 그대로 하겠다…'무시다오루'를 네가 내오지 않았느냐. 또 아주 맛이 좋은 과자를 내 놓았더라. 왜 도지사가 왔는데 지방민이 그리도 많이 들락거리느냐'라는 편지였다. 

그래 나도 감찰위원회가 이런 일 하는 곳이구나 알았다.

저는 농지개혁문제를 앞두고 농림장관을 떼어먹으려 하는 여러 가지 모략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에 여러 부처가 있는데 대통령은 하필 농림부에 대해서 특명을 내려 조사하게 했느냐….


△조한백 의원-지난번 조 장관 변명은 조용히 듣고 감찰위원회보고는 발언을 중단시키다시피 장내가 소란했던 국회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윤병구 의원-조사보고서를 보니 감찰위와 농림부 해석 둘 다 크게 틀린 것을 지적하기 어려우니 법적인 문제는 행정과 사직당국에 맡기고 국회로서는 종결 지을 것을 동의한다.

△김상돈 의원-조사결과가 있으니 그 처리방안을 논의해야한다. 개의한다.

결국 표결에 붙여졌다. 결과는 더 이상 거론할 것이 없다는 조봉암 옹호 쪽이 재석147석중 가 100. 부10으로 통과됐다. 


처리방안을 계속 논의하자는 개의는 가29, 부64였다.

◇…조봉암 구속하자는 이인 법무장관...그러나 국회에서 '제동'

국회의 조봉암 옹호론이 이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조봉암에 대한 신임의 확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복잡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이승만의 반응과 입장은 어땠을 까.

당시 모 대통령비서관은 이승만이 크게 화를 냈다고 몇해전 한 언론에서 전한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농림부장관에 대해서 선입관은 없었다"라면서 " 그러나 관사를 호화롭게 수리하고 접대비를 많이 쓴다는 얘기가 들어와 대노했다"고 회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국가재정이 빈약하다해서 경무대수리도 못하게 한때였는데 농림장관 관사수리비로 양곡매입과 관련된 돈을 썼다니까 철없는 행동이라고 나무랐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한 언론에서 말했다.

이 사건은 국회가 종결함으로써 일단락 된 듯했다. 그런데 이번엔 정부에서 문제를 재론했다. 

그해 2월21일 이인 법무부장관은 돌연 농림부장관인 국회의원 조봉암의 구속동의요청을 국회에 제안한 것이다. 

우리 헌정사상 현재까지로는 최초이자 마지막 단 한번에 그친 국무위원 겸 국회의원 ,구속동의요청의 요지는 의혹투성이다.

권승렬 검찰총장이 이인 법무장관에게 상신하고 이인 법무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구속동의요청서다. 


그런데 두 서류가 모두 즉각 구속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농림장관 조봉암씨에 대한 혐의사실을 입건 수사코자하며 즉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는 구속하겠으니 승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의안을 놓고 국회 논쟁이 가열됐다.

당시 국회회의록(속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권 검찰총장 제안설명-감찰위원회의 고발에 따라 대한식량공사 사장 조규설, 양곡매입촉진위원회사무국장 권서윤, 귀속농지관리국장 김형규 등을 조사한바 조규설은 1300만원, 권서은은 930만원, 김형규는 90여만원을 유용 내지 횡령한 혐의가 있어 기소했다.

조봉암씨는 농림장관 및 양곡매입촉진위 위원장으로서 이들 세 사람은 부하이거나 대행기관 직원이기에 감독책임이 있고 또 조사에서 이들의 유용 등 혐의에는 조 장관의 과오도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조사도중 증거수집을 위해 필요할 때에 대비해 구속에 관한 승인을 받아두고자 한다.

△이문원 의원-조 농림은 국회의원이면서 국무위원이다.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 논의가 있었는가.

△이인 법무-수사에 관한 일이니 국무회의를 거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지만 국무회의에서도 결정을 보았다.

△김광준 의원-조 장관에 대해서 지난번 감찰위원회서 제시한 문제라면 구속할 이유가 없다.


△김옥주 의원-법무장관이 구속을 요청할만한 사건인데도 조봉암씨의 국무위원 자격에 대해서는 아무 조치도 없이 국회의원의 신분이니 국회가 구속을 승인해 달라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조혜영 의원-조 농림장관은 중대과오를 범했다. 사법부에서 시작해 가지고 숙청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망한다.

△박충원 의원-지금 새 정부예산이 설립 안돼 모든 부처에 예산유용이 있다. 구속이란 말도 안 된다.

그런 뒤 기립표결로 결정했다.

△배중혁 의원-박약한 이유로 국회의원이고 국무위원인 조봉암씨를 구속하겠다는 검찰의 용기는 찬양하지만 감찰위원회의 통고내용에서 한 발짝도 더 조사해낸 것이 없으면서 혹시 구속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니…라고 나온 검찰에 실망치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조봉암씨에 연달아 타격을 줌으로써 정치생명에 치명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가 의심된다.

결국 토론 종결 동의가 제기돼 표결에 붙였다.

그런데 국회법 미비로 구속 등의 요청에 대한 표결방식이 정해져있지 않아 또 한바탕의 논쟁을 겪었다. 

결국 인사문제니 비밀 무기명투표라야 한다는 주장과 무기명비밀투표를 하면 모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있으니 기립표결로 하자는 양론이 맞섰다.

이 문제는 찬·반 토론 끝에 표결에 붙였으나 모두 과반수 미달로 폐기돼 결국 일반의안처리의 관례대로 거수표결에 붙였다.

결과는 재석152, 가52, 부77로 구속동의요청은 부결됐다.

◇…조봉암은 누구였길래 적이 많았나

국민들은 조봉암 장관의 퇴임과 정부의 압박은 그가 마련한 농지개혁안 때문임을 잘알고 있었다.

조봉암은 1898년 9월 25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 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劉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아들을 일찍 잃은 아버지 조창규는 셋째 아들을 명이 길었으면 하여 바위(岩)에서 이름을 따와 수암(壽岩)이라 짓고, 이어서 넷째는 봉암(奉岩), 막내 아들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지었다.

1911년 그는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한 뒤 생계를 위해 조봉암은 군청 공무원으로 임용, 강화군청 사환으로 잠시 복무했다.

뒤늦게 1919년 경성 YMCA 중학부 입학하면서 그는 여운형, 박헌영, 이승만, 김규식, 장면, 여운홍 등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조봉암은 YMCA중학부 재직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로 망명,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직원으로도 활동했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박헌영, 김규식, 여운형 등을 다시 만나게 됐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경무국장 김구(金九)의 휘하에 있었지만 그가 공산당에 참여하면서 김구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 뒤 조봉암은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감과 염증을 느끼던 차에 1921년 도쿄의 세이소쿠( 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어 주오 대학(中央大学)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박열(朴烈) 등이 조직한 '흑도회'(黑濤會)라는 사회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2년 귀국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를 수료했다.

이후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1925년 12월 박헌영 등과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1927년 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1932년 9월 상하이의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추격당하다가 체포되었다. 

1932년 11월 항일 운동에 연루된 혐의로 평북 신의주의 감옥에 수감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6년 동안 신의주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조봉암은 줄곧 독방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신의주 지방은 유난히 추워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 나가 형무소 생활 중 많은 고통을 겪으며 만기출소했다.

1939년 7월 만기로 출소하여 경기도 인천부로 내려왔다.


이후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 뒤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인하고 인천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지정돼 일체의 대외활동이 중지되었다. 

1932년무렵부터 조봉암과 박헌영은 사이가 안 좋았다 한다.

박헌영은 1940년 이후 공식 활동을 중단한 조봉암을 불신하였고, 공산당 일각에서는 조봉암을 유휴분자라며 비판했다.] 그리고 조봉암은 공산당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활동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계속 지하 노동단체 활동에 은밀히 참여해 오던 그는 1945년 1월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전격 검거되었다.

◇…광복 이후의 정치 활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수감에서 풀렸다.

여운형은 그의 출소를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 

8월 16일 인천부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를 조직했다.

이어 인천부 내 노동조합 결성과 실업자대책위원회 인천지구를 조직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인천지구책에 선임되었다.

계속 박헌영과 갈등, 반목하게 된다. 박헌영은 조봉암을 공산당 재건과정에서 배제하려 하였다.

1946년 5월,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선언을 했다.

그는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완전히 갈라섰다.

1946년 5월 15일 민전 인천부지구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46년 6월 12일 미국 CIC 방첩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같은 달  6월 22일 석방되었다. 

6월 23일 인천에서 여운형, 이강국(李康國), 김원봉(金元鳳), 성주식(成周寔) 등이 참가한 '미소공위 촉진 시민대회'가 열리자 조봉암은 이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조봉암은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민주주의독립전선에서 활동하며 남북협상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방북할 수 없었다. 

좌파에서 전향한 이유로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었으므로 1948년 4월 남북협상때 북한에 다녀올 수 없었다.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대표로는 이극로 홀로 북한을 다녀왔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난뒤, 이극로는 북한에 남아 있었다.

민주주의독립전선은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과 그의 계열은 남한에 남게 되었다.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한 조봉암은 선거 가능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는 것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좌우합작, 남북협상파의 5.10 총선 참여와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정부수립 이후에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5.10 총선거 참여 주장을 하자 그는 민족자주연맹의 중앙과 지방조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면서  강제 출당조치당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에 참여의사를 밝힌 뒤로는 협박과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5.10총선 기간 중 테러의 위협을 피해 민가에 은신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1948년 5.10 총선거때 선거에서 강원명이 조봉암을 도와달라며 이범석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였다. 


역시 이범석의 총리 인준시 무소속 의원들이 협조를 부탁하자, 조봉암은 이범석을 '군국주의자'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48년 5월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할 때 한민당에서 무기명투표방식을 주장하며 곽상훈 과함께 다수득표자 순으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자고 곽상훈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 뒤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6월 1일 한민당에 비판적이거 반대하는 우파 및 온건파 무소속 의원들 및 6 . 1구락부, 민우(民友)구락부를 통합하고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하는데 참여하였다.

당시 무소속 구락부에 속한 의원은 72명이었고 그는 무소속구락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조봉암의 입각한 이후, 한민당이 확대 개편된 민주국민당과의 대항하기 위해 조봉암은 무소속구락부와 윤치영 등 이승만의 측근들과 연합한다.

1949년 관사 문제로 농림부장관직을 사퇴했다. 장관 관사를 농림부 전용 예산으로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민주국민당 의원들로부터 비판을 받다가 장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1949년 연말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민강위) 조직이 추진되었으나 조봉암은 그것에 가담하지 않았다.[26]

그는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통해 194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 각지의 농촌조사를 거쳐 농지 실태를 조사하고, 농림부 초안을 완성하여 11월 22일 개혁안을 발표했다.

1949년 1월 4일부터 조봉암은 농림부 관료들 및 농지개혁위원회 위원들과 각지를 순행, 각 도의 도청 소재지에서 순회 공개청문회를 개최하여 각지,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1월 24일 농림부안을 완성하여 국무회의에 입안하여 채택시켰다.

조봉암은 농촌에서 생산한 쌀과 벼, 보리 등의 곡식 일부 중 잉여생산량을 정부에서 매입하는 양곡매입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역시 한민당은 시장경제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했지만고 국회에 상정하여 48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1949년에는 식량임시긴급조치법으로 개정되었다가, 그가 농림부장관에서 물러난 뒤 1950년에는 농수산물의 잉여생산량은 국회의 동의하에 예산을 배정하여 구매하는 양곡수매법으로 개정되었다. 

이후 양곡수매법은 이승만 정권 붕괴와 함께 무효화되었다가 뒷날 박정희 정권의 추곡수매법으로 부활하게 된다.

농림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조봉암은 장관실에 그래프를 붙여 놓고, 비서를 시켜 양곡매입량을 체크하게 했다.

1948년 소속 정당이 없었던 조봉암은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과 함께 이정회를 결성했다.

1948년 11월 대한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대한국민당의 일부가 1949년 2월 탈당하여 한민당과 연합, 민주국민당을 결성한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할때 조봉암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민국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여 국회가 파란에 휩싸였던 1950년 2월과 3월 조봉암은 국민당에 소속해 있었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대한국민당 공천으로 민의원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국회의장 신익희와 함께 대통령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이승만은 각료들의 권고로 도피했다.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한 조봉암과 신익희는 국회 휴회를 선언하고 의원들에게 피신령을 내렸다.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했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진보당원이었던 남재희의 회고에 의하면 '진보당을 한 건 죽산을 좋아해 따른 것이지 원래는 '털이 난 보수'였다.'는 것이다.

이때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서울을 점령하고 수립한 서울시 인민위원회는 조봉암에게 귀순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뒤늦게 조봉암이 야밤에 자동차로 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은 공산당과 내통하였다고 들었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에는 다른 야당인사들과 함께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카드로 5월 15일부터 7월 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다.

◇…부산 정치파동에 대통령 출마...호헌동지회 참여놓고 전향 확인 성명

또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 역시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했으나 장면은 단번에 거절했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지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전쟁 휴전 후 조봉암은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국민 직선제로 하면 자신이 유리할 것이라는 이승만의 의향으로 대통령 선거는 개헌을 통해 국회선출제에서 국민직선제로 바뀌었다. 

국회에서는 반발하였으나 이승만은 장택상과 이범석을 동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부산 정치 파동이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인사가 없었다. 조봉암은 야망이 있었고 이승만 혼자 대선에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봉암은 이시영을 찾아갔고, 출마의향을 물었다. 

원로들 의중을 떠보니 신익희도 이시영도 출마하지 않겠다는 반응이었다. 

이시영은 찾아온 조봉암에게 출마를 권했다. 조봉암은 민중을 위한 후보가 없으므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놀란 것이 조봉암과 숙적이었던 민국당이었다. 조봉암이 야당을 대표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민국당 측은 이시영을 출마하도록 했다

김규식 영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던 민국당은 끊임없이 이시영을 찾아가 출마를 권유하였다.

이시영은 처음에 덕이 부족함을 이유로 들어 사양하였으나 거듭된 요청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 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선거 과정에서 그는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낙선했다.

1954년 5월 국회 민의원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정치 깡패들의 방해로 후보등록을 못하였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 이승만에게 도전했다는 괘씸죄 때문이었다.

민의원 선거 후보 등록마저 정치깡패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도정궁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도정궁은 조선 선조(宣祖)가 나고 자란 생가이다. 

도정궁에 칩거하던 그는 동료인 진보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한 최희규의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그가 붓글씨를 즐기게 된 데에는 동료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윤길중, 조규희, 전세룡 등 서예를 즐기던 동지들이 있었다.

자유당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등록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무려30%의 지지율을 얻을 만큼 선전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논란이 일자 장택상, 김성수, 박기출, 서상일은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에 찬성했으나, 조병옥, 장면, 김도연, 박순천, 곽상훈 등은 조봉암의 참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장택상, 서상일, 박기출, 김성수 등은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약칭 호동) 참여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봉암의 영입을 반대하는 세력은 자유민주파, 찬성하는 입장은 민주대동파로 불렸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호동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했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언론인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했다.

인촌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왔다.

결국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다시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2차 성명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인촌 사망직후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장면, 곽상훈, 박순천 등은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극렬히 반대했다.

장택상, 서상일, 박기출 만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찬성했다.

결국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이 일로 장택상, 박기출, 서상일 등은 호헌동지회 참여를 거부하게 되었다.

◇…조봉암, 서상일 박기출 등과 진보정당 창당

장택상은 다시 자유당으로 되돌아갔고, 조봉암은 이후 박기출, 서상일 등과 함께 혁신정당 구성을 추진했다.

여기에서도 서상일 등과도 이견이 생겨 서상일 일파가 분리되어 나갔다. 

1956년 11월 박기출 등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다.

55년 6월 그는 한국일보에 독점자본가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한국인은 강도 일본의 침략을 받아서 40년 동안 신음하면서 일본식 독점자본주의의 잔인성과 무도와 비인간성을 보았고 또 그 해독을 보아왔으며, 그 독점자본주의가 우리 농민이나 노동자의 노력을 착취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고혈을 빨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 고 지적하였다.

1956년 1월 조봉암은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

그의 창당이유와 발기문에서 주요 내용을 밝혔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1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환기 계승하여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의 배격과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조봉암은 근로인민당계열의 장건상, 임정 계열의 김성숙 등 근민당계열, 임정 계열을 포섭하여 혁신정당 창당을 계획했다.

그런데도 장건상과 김성숙은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으므로 그의 진보당 창당운동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혁신정당 창당운동에 자극을 받은 장건상과 김성숙도 뒤에 독자적으로 혁신정당 창당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사람을 보내 장면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장면은 그의 공산당 전력을 들어 과격파로 보고 있었으므로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진보당이 정식 창당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1956년 무소속으로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등록했다.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한 신익희와 만나 후보단일화를 협상하기도 했다.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

신익희와 조봉암은 선거운동에 돌입하기 전에 협상부터 해야 했다. 

단일후보가 나와야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의 압력 때문이었다. 

진보당은 4월 3일 두 당이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새로 연합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진보당추진위 측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봉암이 양보하는 조건으로 신익희가 3대 대통령을 하고 조봉암이 차기를 차지하기로 계획하고 지지를 몰아주기로 묵계했으나 5월 5일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후보단일화 논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호헌동지회때부터 반감을 갖던 민주당에서는 조병옥 등이 나서서 신익희후보의 표를 다른 정당 후보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여 개표결과 신익희 추모표가 발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그러나 5월 15일 선거 결과 216만 4000여 표로 504만 6000여 표를 받은 이승만의 절반에 해당되는 득표를 했다.


후보단일화를 했을 경우를 가정했을때 이는 자유당을 경악하게 하고도 남았다.

그 후 진보당 결성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결성 과정에서 서상일 계열, 장건상 계열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조봉암은 박기출 등 소수의 인원과 함께 진보당 창당 조직을 준비하게 된다.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에 선출되어 정당활동을 하였다.

1956년 11월10일 서울시립극장에서 개최된 창당대회는 전국 대의원 900명 중 853명이 참석하는 응집력을 과시했다. 

그러면서 조봉암의 대선에 출마하게 된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였다. 

강원용 목사(한국 기독교 장로회)는 주한 미국대사와 8군 사령관이 조봉암을 찾아와서 대선출마를 권유했다 하며 단점이라면 영어를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했다.


조봉암은 미8군 소속 미군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사령관이 매일 아침 자기 부하를 조봉암 씨에게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강원용 목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신하였다. 조봉암의 측근이었던 윤길중 등은 그런 미국의 속내를 모르고 미국이 조봉암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3월 31일 진보당추진대표자회의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민주당은 진보당 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이 깨질 것 같자 김창숙 등 원로들이 나섰다.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는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 양보의 뜻을 밝히고 신익희에게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

신익희는 고려해 보겠다고 했으나 민주당 측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야당 단일화 협상은 5월로 이어졌는데 조봉암, 서상일 등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다.

정부통령 선거야 말로 조봉암이 진보당추진위의 정치이념과 정책을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고, 초반전 사퇴는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 판단했다. 

조봉암은 민주당의 성향으로 볼 때 자유당과 별로 다른 것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더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봉암이 일찍 사퇴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입후보조차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야당표 분산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조봉암은 일찍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신변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조봉암은 자유당과 민주당의 노골적인 견제와 공격 등으로 힘겨운 길을 가게 된다.

◇… 이승만 정부의 조봉암 구속과 사형집행

1958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진보당 간부 17명을 구속을 다룬 내용이 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중 북조선을 비밀리에 왕래하는 잡화상인 양명산(梁明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보도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당 정부와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은 조봉암이 양명산을 통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공격했다.

1957년 9월 정우갑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민의원 선거 4개월을 앞두고 선거대책에 몰두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든 윤길중, 조규택 등은 서울에서, 진보당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조봉암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월 13일 약수동의 조봉암의 집을 급습한 10여 명의 형사대는 이미 이틀 전에 그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극도로 당황했다.

이로부터 48시간 동안 시경은 관하 전 경찰관을 투입하여 조봉암 색출에 투입했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한뒤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 하겠다고 전하였다.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였으며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일 밤 그는 그곳에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친구들은 이제 붙들리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모든 준비를 해줄 터이니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다.

그는 거부하였다.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는 것이다.

정순석 검찰총장, 서정학 치안국장이 기자회견했다. 죽산이 북에 보낸 친서가 오래전 당국에 압수돼 필적 감정까지 끝났다고 했다.

그해 1월 23일 오제도 대검 검사는 죽산이 간첩과 접선해 보안법 위반이라고 했다. 

1월 16일 조인구 검사는 평양방송이 15일부터 조봉암이 당국의 탄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걸 소개했다. 

1958년 1월 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진보당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조봉암과 가까웠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장택상과 윤치영은 조봉암이 간첩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장택상은 수감 중인 조봉암을 찾아와 대신 변호를 서주겠다고 하였으나 조봉암은 이를 사양하였다.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이 양명산과 접선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접촉하였고, 정치자금(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여러가지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하였다.


조봉암 등이 간첩 혐의로 피소되자, 장택상, 윤치영 등은 조봉암이 간첩일리 없다며 탄원서를 제출하고, 탄원 서명을 받기도 했다. 

그의 조봉암 구명운동에 이어 윤치영이 조봉암을 옹호하고 탄원, 변호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당시 민주당과 조병옥 등은 조봉암의 이적행위 철저 수사를 주장하며 규탄했다.

하지만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공판기간 중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호사 선임을 알아봐주기도 했고, 조봉암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론과 항소를 작성하여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 발송하기도 했다.

조봉암의 딸 조호정은 마침내 전 총리 장택상을 찾아 갔다.

정이 많은 장택상은 조호정의 지극한 효심을 외면할 수 없어 홍진기 법무장관을 집무실로 찾아가 조봉암의 구명 을 호소했다.

홍진기 장관은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니 내년 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이박사의 82회 생신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장택상은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 저기 다 발설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1959년 장택상은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다.

조봉암의 정치활동을 변호하는 국회질의를 하였고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직접 추진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의 옥중 성명서를 대신 작성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의 인물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광복후 경찰청장으로 폭력적 좌익세력 검거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우익 단체로부터 사형을 집행하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그러나 장택상과 윤치영이 나서서 조봉암의 무고함을 주장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봉암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장택상은 조봉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고, 조봉암을 변호하는 변론을 써서 법정에 대신 제출해 주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조봉암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들과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반공청년회' 200명은 대법원에 난입하여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주심 김갑수 대법관)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

법조 출입기자인 김모씨가 신동아를 통해 "조봉암에 대해 무기징역으로 합의됐다가 모 대법관의 요청으로 선고기일에 대법관을 긴급 소집하여 사형으로 변경했다"고 주장하자 주심 대법관인 김갑수는 "재판장이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잘못 읽었던 것 같으나 형량이 갑자기 변경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등 사회적인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대법관에서 물러나 변호사를 하던 김갑수는 "지금도 오판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라면서도 "당시에는 무척 괴로웠다"고 말했다

재판 당시에도 언론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도 계속 이승만 정권에 경고를 보냈으나 자유당 강경파는 1959년 끝내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다.

미국에서는 소극적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에게 조봉암 사형을 철회할 것을 계속 주문하였다.


장택상은 해방 후 좌파탄압에 힘을 쏟던 사람이었는데, 조봉암에게 끝내 사형이 선고되자 장택상은 이를 개탄하였다고 한다.

윤치영은 이승만의 강경파 반공주의자 측근으로 유명하였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윤치영은 그가 정치노선을 잘못 선택했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가족과 측근들에게 심경을 밝혔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

1959년 7월 31일 아침 사형집행 직전 조봉암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사형전 성직자가 사형수를 위해 해주는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사형 집행 전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인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아라 한데 ...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를 읽어달라 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 사형당하였다. 시신은 서대문형무소 밖에서 기다리던 큰딸과 조카, 측근들에게 인도되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조봉암, 교수형직전..."나는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죽는 것" 

조봉암이 교수형 장면은 이원규 선생의 '조봉암평전'에 자세히 나와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 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의 죽을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유가족들이 장례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 경찰서장이 와서 조선총독부령 제120호를 다시 들이댔다.

일제가 순국한 독립투사의 공개 장례를 금지하고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던 규정인데,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5일장을 하려고 했지만 내일 매장하라고 하고, 조문을 받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복과 사복 경찰을 빈소로 향하는 길목에 배치해 조문객들 출입을 막았다.

1심 재판부는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고 징역 5월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사형을 선고했고, 재심 청구가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이렇게 사형이 집행됐다.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은 53년 전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9년 8월2일 17시반 유족들의 흐느낌 속에 죽산은 땅에 묻혔다.

8월1일 오전 이강학 치안국장은 조봉암 보도통제를 요청하는 경고문을 전 신문통신사에 보냈다.

한국일보만이 1단으로 보도했다. “지난 7월31일 상호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서울 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반 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보도통제의 근거가 된 법률이 총독부령 제120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신문들은 늦게 보도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죽산의 사진을 3단으로 싣고 이 사실을 보도했다.

영국의 이코너미스트는 “이승만의 경찰이 무고한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정적을 말살했다”고 논평했다. 일본도 죽산의 처형을 비판했다. 일본 거류민단은 8월12일 죽산 추도식을 올렸다. 

◇…사후 이승만의 사법 살인 의혹과 비판...그러다 52년만에 명예회복

북한은 그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80도 태도를 달리했다. 북한은 조봉암 생전에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에 찍고 공격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더.

심지어 조봉암의 사후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그의 명예회복은 반론에 부딪쳤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사정이 달랐다.

명예회복이 진행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북한이 혁명열사릉의 김규식, 조소앙 묘 옆에 조봉암의 허묘(虛墓)를 만들고 모신다는 점과 그가 북한의 애국렬사로 추서되었다는 점이 지적됐다.

조봉암은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으나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한 뒤 조국건국에 나섰다.

그러자 당시 북조선에서조차 ‘반역자’로 매도됐다.

그러나 북한은 한참 뒤에 출당시킨 조봉암을 복권시켰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청하지도 않은 불리한 증인이 수십년 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후 독립유공자로 표창 서훈에 추천되었으나 진보당 사건과 북조선의 애국렬사릉 가묘의 여파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 조봉암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장택상 등의 증언을 근거로 조봉암의 명예회복이 추진되었다. 

1993년에는 조봉암의 측근들이 장택상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조봉암의 명예회복을 요청했으나, 김영삼조차 이를 외면했다.

1999년 3월 25일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주비위원회'의 주최로 '죽산 조봉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대토론회', '죽산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론과 개혁론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도 공개리에 열렸다.

뒤이어 조봉암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000년 5월 조봉암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새얼문화재단이 인천 지역 정치인·학계·교육계 인사 등 112명으로부터 2211만원을 거두어 추모사업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모두 6000여 만원의 돈을 모아 2001년 7월 6일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피해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국가에 권고했고, 2008년 8월 유족들은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지난 1월 대법원은 국가변란목적 단체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고, 그 뒤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13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법률, 경제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09년 이후 다시 조봉암의 복권 노력과 독립유공자 신청은 진행 중에 있다.

대법원도 2010년 11월 “군인·군속이 아닌 일반인 조봉암을 국군정보기관인 육군 특무대에서 수사한 것은 위법이어서 재심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유족 등의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재심에서 이 중 무기소지 혐의에 대해서 유죄를 인정해 형의 선고 유예하고,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원심을 파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59년 2월 27일 선고된 4291형상559 판결에 대하여 재심으로서 원심판결과 제1심판결 중 유죄 부분을 각 파기하였다.(대법원2008재도11) 

다만, 무기불법소지에 의한 군정법령 제5호 위반죄에 대하여 형의 선고를 유예하였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공동피고인 1과 관련, 간첩의 점은 무죄. 제1심판결 중 진보당 관련 구 국가보안법 위반의 점에 대한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국가변란 혐의에 대해 "진보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했다고 볼 수 없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됐다고 볼 수 없다. 진보당의 통일정책도 북한의 위장된 평화통일론에 부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유일한 직접증거인 증인(양명산)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고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조봉암은 1959년 사형당한 이래 52년만에 복권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 사법살인의 희생자로 기록됐다.

이를 계기로 유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열렸다.

2011년 12월 27일 당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한규현 부장판사)는  "국가는 조 선생의 아들에게 13억원 등 24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했다.

조봉암의 딸 조호정씨는 “이승만 정권이 정적인 조봉암 선생을 두려워해 합법적인 재판을 가장해 살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이기택의 한국야당사,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한국편집기자협회),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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