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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3.9대선 Y-1> 박지원, “DJ에게 수십 번 설득, 노무현이 대통령 됐으면 좋겠다는 말 얻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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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n뉴스=서울] 신수용 대기자 = 국가의 운명을 가를 내년 3.9  제 20대 대선이 꼭 1년 남았다. 


1년을 앞두고 여권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1등을 달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크게 앞서고 있다.

야권인 범보수 진영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압도적 우세속에 무소속 홍준표의원이 추격하는 양상이다. 

여권의 이재명지사는 2017년 5.9 대선 경선에서 경쟁 후보인 문재인 대통령과 맞섰으나 고배를 마셨다. 

당내 경선에서 후보들은 인정사정없이 공격한다. 이 때문에 승자가 확정된 후에도 앙금은 길고, 오래 가기 마련이다. 

노무현과 이인제가 그랬고, 이명박과 박근혜가 그랬다. 뒤끝 작렬인 비정한 정치의 세계라고 전한다.

뿐만 아니다. 1년 전의 대세론은 큰 의미가 없다. 

여러 선거에서, 그 중에도 대통령선거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세론의 주역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1997년과 2002년 허망하게 패했다.

2002년 여권의 대세론이던 이인제역시  노무현에게 경선에서 압도당했다.

당시를 들여다 보자.

2002년 충청은 들떠있었다.

그해 한일 월드컵이 끝나면, 곧바로 이어질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이냐, 김종필이냐, 아니면 이인제냐가 차기 대권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예상은 무너지고 민주당 노무현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이들 세사람모두 패배하거나 사라졌다.

이런 과정에서 1997년 15대 대선당시 한나라당경선에 불복하고, 신당을 만들어 500만표를 얻은 이인제의 힘을 받아 당선된 김대중(DJ)대통령의 입장은 어땠을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인 박지원 국정원장이 동아일보에  당시 상황을 밝혔다.

동아일보 보도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지난 2013년 4월 박지원 당시 민주당 의원(현 국가정보원장)은 채널A에 출연해 “이제는 공소 시효가 지나 말을 할 수 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박 원장은  “(2002년 대선당시)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무현을 대통령후보로 만들어야 한다고 수십 번 얘기하고 열심히 설득한 끝에 김 대통령으로부터 ‘노무현이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말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2002년 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논란이 된 청와대의 의중, 김심(金心·김대중 대통령의 마음)을 11년 만에 실토한 것이다.

민주당은 당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선거인단 7만 명의 표를 놓고 대선후보들이 경선을 한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고안해냈다. 국민적 관심사를 끌기 위한 흥행 이벤트였다. 


엄정 중립을 자처했던 김 대통령의 지원이 노무현 후보를 향했다는 것은 중대한 발언이었다. ‘공소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범죄에 해당될 수 있다는 점을 자인한 것이기도 하다.

2002년 2월 시작된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는 ‘대세론’을 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5년 전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맞설 때 이인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후보로 완주했다.

보수표가 분열되면서 DJ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 됐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을 기대했던 이인제로선 김 대통령이 자신을 밀어주기를 기대하며, 적어도 중립만 지켜준다면 자신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기 대통령’으로 각인된 이인제의 선거캠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막상 경선 시작 후 시간이 흐를수록 당 안팎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 

레이스 초반만 해도 지지율이 하위권이던 노무현 후보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노랑 풍선을 경선장에 들고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미풍일 것으로 보이던 바람은 급기야 폭풍으로 번질 조짐이었다.

이상하게도 이인제 캠프엔 초반부터 악재가 잇따랐다. 

핵심 측근이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잡혀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막판까지 달려야 할 다른 경선후보들이 후보직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는 것을 이인제 캠프에서는 느낄 수 있었다. 토끼를 잡았더니 이제 사냥개를 잡아먹을 참인가.

이인제는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청와대를 향해 거친 불만을 터뜨렸다.

경선 첫 번째 지역인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1등을 한 것은 대이변이었다. 

예상을 깨고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광주 경선은 ‘호남의 민심’이 노무현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시그널이었다. 

역대 민주당 선거에선 호남에서 1등을 차지해야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인제는 이런 이변을 연출한 배경에 ‘연청’(새시대 새정치연합 청년회)을 지목했다.

연청은 1980년 2월 DJ의 장남인 김홍일과 문희상 의원이 중심이 돼 결성된 김 대통령의 기간 조직이었다.

1987년과 1992년, 1997년 대선에서 ‘풀뿌리 조직’으로 DJ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당시 연청 회원은 10만 여명으로 3000여개의 읍면동 지회 결성 작업을 추진하면서 대선에서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초 이인제를 도우는 것 같았던 연청은 제주 경선에서 한화갑을, 그리고 광주 경선에선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찾기 어려웠다.

우군이라고 여겼던 연청이 은밀하게 노무현을 지지하는 기류를 포착한 이인제는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 일에 간여한 인물로 당시 박지원 대통령정책특보를 지목했다. 

선거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이 내심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다면 밝혀라. 김 대통령이 여러 차례 ‘때가 되면 누구를 지지하는지 밝히겠다’고 말한 만큼 이제 누구를 지지한다면 밝히는 게 떳떳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라며 청와대를 압박했다. 이인제는 급기야 “노 후보는 김 대통령의 꼭두각시”라고 표현해 청와대의 분노를 샀다.

2002년 3월말 민주당 경선이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이인제 후보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민주당 경선의 키를 쥐고 있던 중대한 이벤트였던 광주 경선에 앞서 이 후보의 최측근인 김운환 전 의원이 길거리에서 긴급 체포됐다.

그는 부산 다대지구 택지전환 의혹 사건으로 검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3선 경력의 여당 지구당위원장을 중대 선거를 앞둔 시점에 전격 체포함으로써 이 후보에게 타격을 주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된 2002년 3월 초엔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박지원 대통령정책특보가 경선 후보인 유종근 전북지사를 서울 여의도 한양아파트로 찾아가 “사퇴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압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유종근 후보는 뇌물 수수 혐의로 며칠 후 구속됐고, 후보 자격도 함께 박탈됐다. 

박지원은 당시 “같은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듣고 퇴근길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을 뿐이지 사퇴 압력은 없었다”고 했다.

검찰에 구속되기 직전 유 지사는 “특정인을 민주당 후보로 내세우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당시 3위를 달리던 한화갑 후보가 전격 사퇴하기도 했다. 

유종근의 예고가 현실화되면서 ‘음모론’은 보다 구체화돼갔다.

여기에다 한 방송사가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가상 대결에서 노후보가 1.1%P 차이로 앞섰다’고 보도했다.

다른 공중파 방송사도 며칠 간격으로 이와 비슷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불고 있는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며 이인제 후보 측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인제는 생각했다.

급기야 이인제는 김 대통령을 향해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심지어 “노무현은 김 대통령의 꼭두각시”라고 청와대를 들이받았다.

현직 대통령과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자신을 도와줄 줄 알았던 대통령이 등을 돌린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패색이 짙어지자 경선 완주를 중도에 포기했다.

임기 후반 아무리 레임덕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이인제는 노무현의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며 물러났다. 

13개 지역 순회 경선 도중인 2002년 4월 17일 이인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기로 했다. 중도개혁 노선의 승리를 위해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겠다”며 사퇴했다.

‘국민참여경선’은 김 빠진 맥주가 돼 버렸다.

이인제는 왜 사퇴했을까. 

사퇴 선언 이틀 전 김 대통령은 박지원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음모론의 핵심 인물로 이인제가 꼽은 박지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자 DJ의 뜻을 확고하게 알아챈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완주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박지원은 2002년 4월 15일부터 퇴임일인 다음해 2월 24일까지 DJ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은 순장(殉葬)조가 됐다.

DJ가 이인제를 버리고 노무현을 선택한 것은 대선 승리를 위해선 영남 표를 끌어올 후보가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회창과 본선에서의 경쟁력을 면밀하게 따진 것이다,

이처럼 변수하나가 대세론을 가르는 것이다.

그게 대선선거판이다.

그렇다면 1년 뒤 3.9 대선은 어떨 지 궁금하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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