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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물 한국사(1)> 항일독립·언론인·사회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겨레 선각자

충남 서천군 한산 출생, 목은 이색 선생의 16대손
고종에 바친 거액현금뇌물 난로에 태워
과거 보러 갔다가 부정부패보고 시험 포기 후 박정양과 개화운동 전개
언론인, YMCA, 만민공동회 등 직접 주관…이준 열사 헤이그 밀사 파견주도
일제에 숱한 옥고 치르며 김옥균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조선교육협회·만민공동회 개최

3.1운동은 올해 102주년에다, 이어 8월15일은 정부수립 73주년이 된다. 한반도는 구한말 국운이 쇠퇴하자 영국. 프랑스에 이어  청나라,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침략참탈을 맞았다.  그중에 1945년 8.15 광복까지 일제 36년간 국권을 상실했다. <본지>는 구한말이후 영욕의 세월의 중심에 있던 한국 인물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월남 이상재 선생(李商在,1850.10.26. ~ 1927.3.29. ). 선생의 본명은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이다.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충청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애국애민정신이 재조명되는 가운데 이 가운데 월남 선생의 위대함이 거듭 주목을 받고 있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 중국 홍쿠공원의 윤봉길 의사, 아우네 장터의 유관순, 만해 한용운, 신채호, 손병희, 이상설 선생 등 수많은 충청 항일독립운동가와 함께 말이다.

월남 선생이 타계한 뒤 국내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렀다. 

당시 서울(경성)의 인구 30만 명 중에 10만 명의 추모객이 모일만큼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종교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월남 선생은 1850년 10월26일 충청남도 한산(韓山)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천은 비인 현(縣)과 한산 현이 있었다.

한산은 월남 선생의 본관으로 한산 이(李)씨다. 고려 충신 3은(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중의 한분인 목은 이색(李穡)선생의 16대손이다.

선생이 태어날 무렵은 조선역사 500년 끝자락의 소용돌이 속에 국운이 쇠했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맺어져 국운을 풍전등화의 신세였다.

탐관오리들의 부패가 극심하고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이 침략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됐었다.


18세 때 과거를 보러 처음으로 경성으로 상경했다. 관료계의 부패는 과거시험까지 번져 합격 여부는 순전히 금권과 정실에 달려있었다. 

낙방의 이유를 겪은 뒤에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

백범 김구 선생도 이 무렵 과거에 응시했다가, 국가시험에서 마저 부정부패가 극심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한 것과 똑같다.

선생은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門客)으로 10년 동안 세상을 배웠다. 

이때 그와 사귄 이가 박정양(朴定陽)이다. 박정양은 고종이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았다.

월남은 박 단장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면서 홍영식, 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그러면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후 선생은 1884년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맡고 있던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이와 연루된 의혹으로 형사 처분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당당히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임을 밝혀 처벌 받지 않았다.

이후 자신을 신임하는 박정양이 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선생의 미국 생활은 1년 뒤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부친상으로 한산으로 낙향한  그는 박정양이 1894년 갑오개혁 후에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다.

이어 학무국장(學務局長)을 맡으면서 청년의 바른 교육에 주력했다. 


그는 민족자주, 민족자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헌신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곧은 삶을 실천했다.

선생은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항일 독립활동을 했다.

​옥죄는 일제가 야욕을 벌일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은 고종을 뵐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일제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현금 뇌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월남 선생은 “임금님이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며  김홍육이 갖다놓은 그 뇌물을 보자기를 통째 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월남선생은 그러면서 통곡하며 왕 앞에 엎드려 대죄(待罪)를 고(告)했다.

선생의 애국충청을 안 고종은 눈물을 지으며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해 선생은 1896년 국어학교 교장을 맡았고 7월에는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아 서울 서대문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국민계몽을 위해 최초의 한글판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을 성토했다.

만민공동회 주최로 일반 민중들의 정치 참여를 선동했다는 혐의가 씌워져 첫 번째로 옥고를 치렀다.

이어 1898년에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열흘 만에 석방되었고,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 직을 사임했다.


일제의 악랄한 국권찬탈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1902년 6월에는 정부가 무능함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체개혁의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꾸며, 아들 승인씨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했다.

선생은 이듬해 1903년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했으며, 크리스찬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사범들과 함께 풀려났다.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했다. 1905년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었는데, 1910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 참찬을 맡았다.

선생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이준 열사를 밀사로 파견 준비하면서 한규설과 이상설의 집을 오가던 중 일제의 통감부에 구속되었다가 2개월 후에야 풀려났다.

선생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민중 시위를 전개했다.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다. YMCA는 지금 서울 종로 종각 역에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 회를 조직하여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다.

1913년 항일 애국운동의 하나인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인해 YMCA 총무 질레트가 국외 추방을 당했다.


후임으로 선생이 총무 직을 맡아 총독부의 집요한 매수공작을 뿌리쳤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하여 재일조선 YMCA, 경신 배재 전주 광주 등 10개 YMCA를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였다.

선생의 이런 항일독립움직임을 일제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선생이 배후 인물로 활약했다는 점을 파악하여,  3개월간 옥살이를 시켰다.

그해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 측 종교 지도자들은 3월 1일에 ‘독립선언식’ 방식의 독립운동을 거행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3.1운동 거사는 명망가들의 불참으로 좌초 위기에 놓였으나, 조선의 대표적 종교 세력인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손을 맞잡으면서 불씨가 당겨졌다.

막판 연대에는 천도교 측 최린(41)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과 기독교 측 이승훈(55) 장로의 역할이 주효하였다.

최 교장과 이 장로, 함태영(47) 전 대한제국 판사 등 주요 인사들은 24일 밤 최 교장 자택에서 비밀회동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방식의 거사를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왜 하필 1일로 정한 이유는 고종의 장례식인 3일을 피하되 국장을 보러 사전에 상경한 인파를 고려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3일에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하였다.

애초 2일도 거론되었으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인 점을 감안해 1일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여기에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최 교장은 밤늦게 불교계 대표인 충남예산의 만해 한용운 스님과 비밀회동을 하고 동참 의사를 확인했다.

선생은 이듬해인 1920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회장을 맡았으며, 그 해 6월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최규동 김병로 선생이 함께 했다.


협회는 장차 국권 회복을 위해 한국인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적인 힘을 기르자는 뜻에서 만든 단체였다.

1922년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가 열렸다.

대표단을 이끌고 나간 선생은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을 벌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 YMCA 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24년에는 한국보이스카웃의 전신인 연합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의 초대총재가 되었다.

이어 해 9월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4월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냈다.

3년 뒤,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고령에다,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이를 수락했다. 이는 그가 국민에게 사회운동가로서 마지막 복무한 직함이다.

그는 다음 달인 3월 29일 타계했다. 4월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 ’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에서 치러졌다.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명, 그의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10만 명을 헤아렸다. 

그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가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는 월남의 생가지가 조성돼 있다. 선생이 18세까지 지냈던 곳으로 1972년과 1980년 서천군이 복원·관리하고 있으며 1990년 충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됐다.




월남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이상복 회장은 사업회 인사말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은) 근대화의 선각자로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이끌며 민족의 이정표 역할을 하셨다"라며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시대를 화합과 협력의 시대로 이끌어 내는 사표"라고 소개했다.

▶▶참고문헌. 자료 : 월남 이상재선생 기념사업회. 독립운동사. 독립기념관, 충남도지. 서천군지. 신수용의 사건반세기, 변평섭 충남반세기, 네이버 지식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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