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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7)> 이승만 정부 방해로 놓친 친일청산...미완의 반민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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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진의원등 11명 제헌국회의원 친일청산위한 반민특위법 제출.
-그해 8월16일부터 관련법 3장 29조 반민법 제정...이후 제정.개정거쳐 1949년 1월5일 특위활동.
-박흥식 김갑순 이기용 이종량 노덕술등 체포했으나, 친일경찰의 큰 반발과 특위위원들 협박. 테러.
-이승만 친일청산외치면서 반공올가미 씌워 노골적으로 친일경찰 풀어줘라...1년 만에 해체.
-특위사무실습격, 국회프락치사건, 민족의 큰 별 백범김구선생 암살... 6.25계기 '반공'체제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 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일제 36년의 혹독할 사슬에서 벗어났지만, 시대적 요청은 친일파 청산이었다.

그런데도 해방이 된지 3년이 지나면서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으나 한반도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친일파 청산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군정청아래 좌. 우 이념타령과 좌, 우익 정부수립에 급급했다.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미군정 시기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8년 5.10 총선에 따라 제헌의회가 구성되면서 친일파 청산작업, 즉 법적근거인 이른 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됐다.

이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을 위한 예비조사를 담당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이승만 정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반민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 특위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을 담고 있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특위

친일파 처단하기 위해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49년 정초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법이 제정된 것은 정부수립후다.


시작은 이렇다. 우여곡절 끝에 5.10총선으로 제헌의회가 탄생했다.

제헌의회는 20여 일이 지난 1948년 5월31일 역사적으로 개원됐다.

초대 이승만 국회의장은 그해 6월 5일부터 곧바로  해공신익희 국회부의장과 서상일 권승열, 유진오 등 30명 안팎의 제헌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제헌헌법기초위원회는 법제정 작업에 착수해 제헌헌법과 정부조직법을 제정했다.

그해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 제101조에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 근거를 뒀다.

문제의 반민특위법은 제헌국회가 출법한 두, 세달 후인 1948년 8월 5일 제 40차 본회의에서다. 

이날 무소속 수원을 지역구의 김웅진 의원 등 11명이 반민특위법안을 냈다.

김 의원은 국회 동의안 제출과 관련해 동료의원들에게 법안제정의 취지와 필요성을 설명했다.

'헌법 제101조에 의해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특별법을 제정하기위하여 특별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러나 박해정, 조재갑, 장홍영, 윤병구, 이귀수, 김병희 의원이 반대연설을 했다. 

친일 인사들은 친일파 처단이 공산당의 날조라고 주장하는 전단을 뿌려 국회를 압박했다. 

여기에 김준연, 허정 등 일부 한민당계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다.

국회에서 찬반을 놓고 옥신각신하자, 이번에는 이승만이 나섰다.

정부는 국회 측이 공포 거부 시 다른 법을 만들까봐 같은달 22일에 할 수 없이 제정시켰다.

1948년 8월 16일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상정한 후 9월 1일에 통과시켰다

표결 끝에 참석의원 155명중 찬성 105명, 반대 6명으로 가결됐다.

국회는 이날 즉각 김웅진의원을 위원장으로한 '반민특위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기초특별위원회에는 서울과 각 시도 의원 중 3명씩(제주도는 1명)을 추천받아 김 위원장과 김상돈외 28명이 참여했다.

8월 9일 구 조선총독부건물이자 제헌국회와 미 군정청 건물에서 그해 8월9일 첫회의가 열렸다.

특별위원회 설치와 구성에 대한 방법을 논의는 계속됐다

첫 회의부터 반민특위법제정을 둘러싸고 토론이 있었다.

위원회는 새로운 법제정보다, 한 해 전인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 입법위원회(약칭 입법의원)에서 만든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참고하기로했다.

그리고 전문위원 고병국 등에게 초안마련을 위임했다.

1주일 뒤 전문위원들이 내놓은 최초의 반민특위관련 초안은 입법의원이 만든 것보다 완화된 것이었다.

해방된 지 4년이 지난 데다, 정부가 수립되었어도 미국(미군정청)과의 관계등 사회적 분위기가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해 9월7일에 이르러 반민특위법이 통과되고, 그해 12월공포됐다.

공소시효 1년이 있었다. 단, 해외로 도피하면 안 된다. 조항은 이렇다.

법은 제1장은 '죄'와 관련한 제1조부터 8조로 다뤘고, 제 2장은 조사위원회 관련 제9조에서 제18조로, 제3장은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 관련 제19조부터 제28조, 그리고 부직 제29조로 구성됐다.  

제1조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及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2조 일본 정부로부터 爵(작)을 수여한 자 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4조 좌의 각 호의 일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구로 발족했다. 

처벌 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일합방에 서명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형은 없고, 무기징역 이하로만 처벌했다.

참고로 딱 한번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 풀려난다. 

결론적으론 모두 풀려나 실제로 처벌된 사람은 없다

정부는 12월 7일부로 두 법률을 공포했다.

언급했듯이 중앙사무국의 발족에 앞서 국회는 1948년 11월에 제정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과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부속기관조직법’이다.

반민특위는 반민법에 근거하여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의 3부로 구성된 특별기관이었다.

하지만 실제 운영의 중심은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였다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은 조사에서 처벌까지 국회가 주도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그 중에도 특별조사위원회는 전원이 국회의원으로 구성됐다.

특별재판부 역시 국회의원 5명, 법조계 6명, 일반 사회인사 5명으로, 특별검찰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계 2명, 일반 사회인사 2명으로 각각 구성됐다.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의 초기의 구성은 다음 표와 같았다.
   
반민특위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자 이승만은 1월 7일 오전에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와 검찰총장 권승렬(權承烈),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과 경무대에서 ‘반민법’의 운영에 대하여 장시간 토의했다.
  
그리고 1월 10일에는 반민법의 시행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정리한 담화를 발표했다.

◇...특별조사위, 특별재판부, 특별검사부

이승만 먼저 반민법의 특수성과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강조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싸워서 국권을 회복하였다면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 등 반역원괴들을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돈케 하였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지금까지 연기했다.

 그러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공분도 다소 풀리고 형편도 많이 달라졌다.

 또 부일협력자의 검거 심사 등절이 심상한 법이 아닌 만큼 그 죄에 따라서 근본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냉철하게 참고하지 않고는 공정히 처리하기 어려움이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 

 지금 국회에서 이를 해결하기로 집행 중이니 그 제정된 조리와 선임된 법관으로 이 중대한 문제가 영구히 그릇됨이 없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원래 죄범을 처벌하는 법률의 대지(大志)가 오직 그 죄를 징계함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범법자가 없게 하고 순량한 국민을 보호함에 있으니 반민법의 정신이 반드시 이를 주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또 이 법률을 진행하는 모든 법관들도 이를 주장삼아 일체의 편협을 초월하고 명확한 사실과 증거를 거울 삼아 그 경중과 실정에 따라 오직 법에 의거하여서만 처단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은 이어 건국사업에 헌신한 사람들의 공훈을 참작하여 관용의 정신을 발휘할 것도 역설했다.
  
 “이에 대하여 한 가지 중대히 생각할 것은 오늘 우리가 건국 초창기를 맞아서 앞으로 건설할 사업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요, 지난 일에 구애되어 앞길에 장애되느니보다 과거의 흠절(欠節)을 청쇄(淸刷)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쇄신하고 국가의 기강을 밝히기에 표준을 두어야 할 것이니, 입법부에서나 사법부에서 왕사(往事)에 대한 범죄자의 수효를 극히 감축하기에 힘쓸 것이요, 또 증거가 미분명한 경우에는 관대한 편이 가혹한 형벌보다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하물며 40년 동안이라는 세월이 길었고 이제 반민법의 진행은 다소 시기가 늦은 감도 없지 않아 공분이 완화된 점도 있으니, 지나간 원혐(怨嫌·원망하고 미워함)으로 동족 간에 잔혹한 보조를 취하는 것으로 또 세인 이목에 보이기를 원치 않는 바이다.

 더욱 군정 3년 동안 우리의 정국이 심히 위험할 때에 우리가 누차 성명한 것은 누구나 왕사를 물론하고 국가에 공효(功效)를 세운 자는 장치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거기에 따라 안위를 얻고 건국에 많은 공효를 세운 사람들이 있으니, 이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
  
이승만은 또 담화를 이어갔다.

 "을사보호조약과 합병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법 집행 과정에서 3권분립이 조금도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사법부에 넘겨서 법에 따라 재판범절을 행하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진행할 것이니, 여기에 3권분립이 조금도 혼돈되지 말고 각각 직책대로 행하여 이 긴중한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관민일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재판결과에 대해서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재가를 받아서 집행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1949년의 상반기는 흔히 국회의 소장파 세력의 ‘전성시대’였다.

이 소장파 세력과 이승만의 사활을 건 정치투쟁이 벌어졌다.

쟁점이 된 것은 반민족행위자, 곧 친일파의 처벌방법 문제였다.
  
1949년 1월 11일자 서울신문에는 반민특위관련법과 특위구성으로 화신산업사장 박흥식의 검거에 즈음한 사설이 있다.

민족정기를 바로잡기위한 반역자 숙청의 반민법(반민특위법)이 공포된지 3개월이 지난 오늘 드디어 추상같은 반역자 처단의 막이 열렸다.

36년간 일제의 앞잡이로 조국과 동족을 좀먹던 친일파 민존 반역자에 대한 붙타는 원한과 울분을 이제 태극기가 날리는 하는 아래 우리 소리쳐 푸는 날이 돌아왔다.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비분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들 매국도배들의 난무에 유린당하며, 또한 조롱을 받으며  오늘이 올 것을 기다리며 참아왔던가.

이 땅의 모든 산천초목이, 또한 말없이 흐르는 구름마저 이들에 대한 원한에 밤이나 낮이나 불타고 있었다.

비록 군정 3년간의 후덕으로 이들 친일파아 반역자들이 뼈를 깎는 후회 대신 간교한 변명을 일삼고 대로를 활보하는 양을 주먹을 쳐가면서 보아왔으나 오늘 모든 요운(妖雲)들이 걷혀버린 푸른하늘 아래 우리의 등에 채찍을 내리고 죽음의 터전으로 우리를 몰아내던 이들의 매국도배를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 처단하는 날이왔다.

해방 후 미군정이 정권을 인수하면서, 그 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뒤늦게 터져 나온 것이다.


초창기 반민특위는 이처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출범했다.

그중에도 우리 언론들의 지지와 역할이  매우 컸다.  
 
◇...반민특위 본격 활동 착수

반민특위는 국민의 성원을 업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위원회 중앙사무국의 조사관 및 서기 취임식을 가진 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10월 12일 저명한 독립운동가출신인 김상덕(金尙德.독립운동가.1892~1956)선생(존칭생략)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경북 고령 출신 제헌국회의원이었다.

김상덕은 일본 유학시절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항일운동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장을 하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약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에서도 활약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동참하면서 문화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반민특위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승만 정부에 협조했던 친일파들을 선처하라는 압력을 거부하다가 위원장직을 자진사퇴한 뒤 6·25때 납북됐다.    

김상덕 위원장은 개식사에서 “반민법을 공표한 지 3, 4개월이 넘도록 아직 반민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있음은 대단히 유감이나 금년은 벽두부터 거창하고 어려운 이 사업을 국회의 지지와 행정부의 협력 밑에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다”라고 행정부의 협력을 강조했다.
  
부위원장은 서울 마포 출신 국회의원 김상돈(金相敦)이었다.

김상돈 부위원장은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한인들을 위해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농촌교화사업을 벌이고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조선일보사 이사로 근무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반민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3·4·5대 연이어 국회의원에 뽑혔다. 

4·19혁명 후 최초로 민선 서울시장으로 뽑혔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정계를 은퇴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 음모인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1986년 사망하여 고국 땅에 묻혔다. 

김상돈 부위원장 역시 격려사를 했다.

 “왜적에게 아부하여 우리의 선열들을 철창에 몰아넣고 자기 하나만의 영달을 꿈꾸던 자들이 해방후 또다시 정세의 전환을 교묘히 살피어 미국인에게 농간을 일삼던 것이 과거 군정 3년 동안의 억울한 사정이라 아니할 수 없거늘, 하물며 우리의 정부가 수립된 오늘날 민족의 감정과 울분을 풀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간 반민법의 공포 실시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으나, 하여튼 방해가 있더라도 이를 물리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들은 장한 결의와 각오를 가지고 머지않아 3천만의 박수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주기 바란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반민특위의 특별검찰부 차장이라는 막강한 실권자로 선임된 전북 순창 출신 국회의원 노일환(盧鎰煥)의 기자회견 내용이었다. 

반민법 피의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공작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그는 “권세와 금력과 간계만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검찰관이 기소중지를 하면 그 사람은 그대로 사회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처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거물 중점주의로 한다는 말이 있다는 지적에는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말했다.
  
 “제1차로는 한 20명 정도로 거물들을 조사할 것이다. 가장 미운 놈은 해방 전에도 친일행위를 감행하고 다시 해방후에도 버젓하게 나와 날뛴 놈들이다. 민심을 현혹시켜 대중의 분격을 산 것도 큰 죄이지만 그러한 놈들이 적산과 이권운동에 눈이 뒤집히고 심지어는 정치운동, 엽관운동에까지 몰두하며 모리배와 탐관오리의 대열 속에서도 활갯짓을 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맨 먼저 처단할 자는 그자들일 것이다. 그러한 자만 한 열 명 단호히 처단해 버리면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고 기강을 바로잡으면 민심은 자연 수습될 것이다.”
  
친일행위를 했더라도 개전한 흔적이 있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느냐는 질문에도 노일환은 자의적인 해석을 서슴지 않았다.
  
  “그 개전이라는 것은 친일파나 부일협력자, 반역자로서 해방 이전에 개전한 것에 한하여 적용되는 말이지 해방 후의 개전을 의미함은 아니다. 그 점을 혼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은 반민 법에 의한 처벌을 해방 이전의 행위에만 국한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 법)의 규정에 위반되는 말이었다.
  
◇...박흥식·최남선·노덕술 체포...특위와 정부사이 전운 고조

반민특위는 1월 8일에 맨 먼저 화신의 박흥식(朴興植)을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31일까지 서울에 거주하는 대표적인 친일파 15명을 검거했다.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검거한 친일파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은 죄는 이렇다.

그는 조선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해외도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외무부는 1948년 9월에 갱신하여 발급한 박흥식의 여권을 검거 직전에 반환시켰다. 

검거된 박흥식은 중앙청의 특별검찰부에서 20분가량 간단한 조사를 받고, 앞뒤로 기관총을 든 수십 명의 무장 경관이 포위한 가운데 택시에 실려 서대문형무소로 호송되었다. 
  
  
1월 10일에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던 대동신문사(大東新聞社) 사장 이종형(李鍾滎)이 검거되었다.

그는 만주에서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붙잡아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건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서서 사방에 적을 만든 탓"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그 후 1월 13일에는 3·1운동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하여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사장이 된 최린(崔麟)과 일본으로 도피하려고 하던 중추원 참의 방의석(方義錫)과 김태석(金泰錫)을 검거됐다.

1월 14일에는 남작 이종건(李鍾健)의 양자 이풍한(李豊漢)과 중추원 주임 참의였던 이승우(李升雨)를 붙잡혔다. 

이어 1월 18일에는 충남 도지사, 매일신문사 사장 등을 지낸 대동청년단 기획부장 이성근(李聖根)과 고종의 5촌 조카로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李琦鎔), 1월 21일에는 만주국 명예총령사를 지낸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金秊洙)와 아사히(朝日)신문 서울지국 기자로 밀정행위를 한 정국은(鄭國殷)이 차례로 검거됐다.

이기용 검거 당시 자택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개를 진열해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1월 25일에는 경기도 경찰부 경부,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 등을 거쳐 해방 뒤에 서울시경 총경이었던 노덕술(盧德述)과 전북 도지사, 경기도 형사과장 등을 지낸 이원보(李源甫)를 검거했다.

1월 26일에는 일본 헌병이었다가 해방 뒤에 종로경찰서장을 지낸 유철(劉撤)이, 1월 27일에는 경기도의회 의원,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조병상(曺秉相)을 검거했다. 

이렇게 하여 1월 31일까지 서울에서 검거된 사람은 모두 15명이었다.

독립운동가에서 변절자가 된 지식인들도 있었다.


2월 7일에 검거된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가 그렇다. 

최남선은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쓴 인물로, 소년 잡지를 만들거나 민족 문학 운동에 앞장서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3·1 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뒤부터는 변절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는 등 친일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광수는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일하고 2 · 8 독립 선언서를 쓰는 등 민족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창씨 개명에 앞장서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제의 징병이나 징용을 권장하는 등 친일 활동을 벌였다.

최린 역시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부터 변절하여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그중에 친일경찰 노덕술의 검거는 현대정치사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그는 1948년 7월에 장택상(張澤相) 수도경찰청장 저격사건 혐의자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다. 

그런데도 체포될 때에 경관 4명이 호위하고 있었고 권총도 소지하고 있어서 논란이 되었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치안행정에 없어서는 안 될 ‘치안기술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노덕술이 체포되고 사흘 뒤인 1월 28일에 열린 제14회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덕술 피검에 관하야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에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청되나, 유죄시 처벌당함은 무방하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은 이승만과 반민특위의 반민법 운영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는 조사만 하고 처벌은 검찰과 법원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의 실질적인 핵심은 친일 경찰의 처벌문제였다. 

이승만은 경찰은 치안의 ‘기술자’이므로 장공속죄(將功贖罪)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엄중한 심판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중시한 치안유지란 반공체제의 확립이었다.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첫 충돌은 곧  악질 중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때문이었다.

그는 전국 도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여러 명을 고문해서 죽인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다.

노덕술은 수배 중에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태우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기충천하여 김상덕 등 특위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그를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특위위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일파를 보호해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정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 출신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과 차석 홍택희는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불러 국회의원 3명을 납치해 38도선상의 어느 지점으로 끌고 오면 그 다음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이 음모는 무산됐다.

친일경찰들은 급기야 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습격 전날 밤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계획을 전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의 책임은 내가 진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며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김구는 처음에는 이승만과 가까운 생각을 했으나, 바로 이승만의 ‘기술자’ 주장을 반박하고 돌아섰다.
  
김구는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 열사비’ 제막식에 참가했다.
  
5월 18일에 이문원(李文源), 최태규(崔泰奎), 20일에 이구수(李龜洙) 세 국회의원이 반공법 위반으로 경찰에 검거된 것은 국회프락치 사건의 발단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공직을 가졌던 이들이 국정 운영의 기술자로 불리며 이미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49년, 경무에서부터 사찰 과장까지, 경찰 주요 부서에는 꼭 친일 전력의 경찰이 두루 포진했다.

아직 군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해방 직후의 남한에서 경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반대파에 대항할 기반과 여건이 불안정한 우파는 경찰 조직의 선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해방을 맞은 민족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장의 치안 유지에 골몰했다. 

맥아더는 제1호 포고령에서 '정부, 공공단체와 모든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라면 미군정에도 충실할 것이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미군정과 이해가 맞은 한민당은 미군정기 동안 경찰력을 상당 부분 장악했고, 남한 내의 권력 수단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여기에 오랜 해외 생활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이 손을 잡으면서 이 세력의 꼭대기에 섰다. 


그는 '친일파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하는 것이고 정부를 수립한 후 조치하는 것이 순서'라며 일단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무조건 뭉쳐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친일파는 기사회생하여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주류가 된다.

1949년 5월 말, 이승만이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보통 불러내는 입장이었던 이승만이 은밀하게 찾아가 건넨 카드는 감투를 이용한 흥정과 협상이었다. 

친일 피의자들을 대충 조사해서 내보낸 뒤에 정부로 들어오면 장관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죽이던 친일 경찰들을 기억하던 김 위원장은 분노하며 거절했고, 이승만의 위원장 회유가 실패하자 ‘6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활동을 시작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1949년 8월 31일 공식 해체의 순간까지, 반민특위가 다룬 사건은 682건이었다. 

이는 전체 7천여 건의 조사 대상 중에서 10%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408건의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221건만이 기소되었고 총 체포 인원은 305명이었다. 

재판까지 간 사건은 불과 38건이었는데 그마저도 무기징역과 사형은 한 건씩밖에 없는데다 무죄 6건, 형 면제 2건까지 포함되어 있다.

친일파 처단의 실패는 친일파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에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들을 처리한다는 명목 하에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누가 진짜 빨갱이인지도 모를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김철호 같은 반민특위 조사원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빨갱이가 되었고 일제의 개를 잡으려다 그 이빨에 물려 죽었다. 


민족을 팔아넘긴 친일파가 유일하게 영웅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민특위가 체포한 305인의 친일 혐의자는 1950년 봄까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은 1957년 진상이라는 잡지에 이제는 말할수 있다는 글을 기고 당시 반민특위사무실 습격을 증언했다.

반민특위를 해체시킬 음모의 결정타는 반민특위 습격사건이었다.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은 반민특위를 위협하는 대중시위를 조직하던 것이 드러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자 1949년 6월 6일 한밤중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와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으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40명의 무장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특위위원과 산하 특경대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체포·고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 지방의 특위본부에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친일경찰에 대한)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신이 직접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며 반민특위 습격자들을 보호해주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등의 당시 기록을 보자.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 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들겨 패면서 쓰리쿼터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빨갱이들이야~ 여긴 빨갱이 소굴이라고"

모두 35명이 끌려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윤기병이 이죽거렸다.

"최운하 과장과 조응선 주임을 진작 내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내놓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며칠 전 반민특위가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최운하와 조응선을 풀어달라는 얘기다.

경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하게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은 권총까지 뺏기고 밀려났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앞서 동아일보는 1949년 2월3일자 사설에서도 반민특위활동의 권력남용과 이승만의 방해공작을 언급했다.

당시 “정부와 국회와의 대립을 완화하고 정쟁을 지양하는 것 역시 집정이란 형식에서 입법권이 어느 정도 행정권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할 터인즉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국회 자체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위신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양비적 입장’을 취했다. 

동아일보는 1949년 2월15일자에서 국회의원으로서 반민특위의 조사위원을 맡고 있던 김준연의 칼럼(“반민법의 개정을 주장함”)을 게재하기도 했다. 


김준연은 칼럼을 통해 “전력을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를 육성하고 우리 국토를 통일하고 우리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도(圖·‘그리다’는 뜻)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는데 그러자면 공산주의적 파괴 세력과 싸우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됐다”면서 반민법 제5조로 ‘군과 경찰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민법 제5조는 일본 치하에서 관리나 헌병, 고등 경찰직 등에 있던 자들이 공무원으로 임명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인데 이 조항을 적용하면 군·경이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친일 청산 반대론자들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위원들 사퇴서 제출...이승만의 노골적 압박

반민특위의 무력화하려는 이승만 정부와 친일경찰, 친일공무원들의 반격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이런 저항은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 백범 김구 암살로 이어지면서 친일파 처단 무산되어 갔다.

1949년 6월 6일, 특위사무실을 습격받아 물리력을 빼앗긴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 위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지지해주던 김약수 부회장 등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이어 반민특위의 정신적 기둥인 백범 김구 마저 암살당하면서 '친일파 처단'은 물 건너가버리고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천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내무서원들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2006년 9월 3일 북한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에 의해 평양 룡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이렇게 한반도 남쪽이 친일파들의 수중에 떨어지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까마득히 지워졌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이 제대로 실시되기까지 17년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이승만 혼자 받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이시영을 끼워 넣었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것이 독립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반민특위는 1월 14일자로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에게 정부와 입법부에 반민법 제5조에 해당하는 자가 있으면 1월 31일까지 법에 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해 주기 바란다는 공문을 보냈다.

 
반민법 제5조는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勳)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1월 14일 아침에 열린 내외기자회견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공문을 아직 못 보았다고 둘러댄다.
  
 “국회는 입법하는 곳이요 집행할 권리는 없다. 법의 집행은 사법부에서 행할 것이므로 법에 해당자는 동위원회에서 사법부에 넘길 것이다. 사법부에서 동법에 의해서 처단되어야 비로소 반역자의 죄명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입법부에서 행정부에 건의하는 것은 일종 예외의 사실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은 1월 20일에 기자들을 만나 반민특위가 다른 세 국가기관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이 중요한 근본 문제인데, 사실상은 3권기관에 나란히 해서 4권기관으로 존재할 성질이지만 그러려면 3권분립 제도로 된 현행 민국 헌법을 고쳐야 할 난제도 생기고 해서 앞서 본회 수뇌부에서 토의한 결과 형식상으로는 국회, 즉 입법부에 소속키로 하고 실천운행은 3권과 뚜렷이 독립해서 행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사실상은 4권분립 중의 한 독립된 국가기관의 성격을 가진 특별한 기관이다.”
  
그것은 반민법이 혁명재판에서 보듯이 정치적 의욕과 민주국가 권력구조의 기본원리인 3권분립 원칙의 어중간한 절충으로 제정된 데서 오는 모호성이었다.

반민법은 “소송절차와 형의 집행은 일반 형사소송법에 의한다”(제28조)라고 규정했는데, 이때에 시행되던 형사소송법은 제국주의 일본의 형사소송법이었다.

친일파를 처벌하는 역사적 재판이 제국주의 일본의 형사소송법에 의하여 시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반민특위의 사법권은 물론 일반 사법부와는 독립해서 행할 것이지만 대통령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한 김상돈의 답변도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통령은 다만 본 기관의 좋은 협력자일 따름이요, 간섭이나 지휘권은 없다. 이것은 본 처단법 조항에 재정은 국고에서 부담하고 또 정부는 본 기관이 요구하는 대로 협력에 응해야 되기로 규정된 바이다.” 
  
이승만은  2월 1일에 열린 제15회 국무회의는 3권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반민법 시행을 강조하는지론을 공표하기로 의결했다.

이승만은 그러더니 이튿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반민법에 대하여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하고 적극적으로 진행하려는 고로 정부에서 협조해서 속히 귀결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지금에 발전되는 것을 보건대 심히 우려되는 형편이므로, 1월 27일에 국회 반민법에 관한 조사위원 제씨를 청하여 토의한 바 있었다. 

 그때 설명한 요지는 다음과 같으니, 조사위원들이 법을 범한 자를 비밀리에 조사해서 사법부에 넘기면 사법부와 행정부에서 각각 그 맡은 책임을 진행하여 처단할 것인데, 이러하지 않고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의 일을 다 혼잡하여 행한다면 이것은 3권분립을 주장하는 헌법과 위반되는 것이니, 설령 국회에서 특별법안을 만들고 또 그 법안에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할지라도 이것이 헌법과 위반되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 되므로, 지금이라도 조사위원들은 조사만에 그치고 검속하거나 재판하고 집행하는 것은 사법과 행정에 맡겨서 헌법 범위 내에서 진행시켜 정부와 국회의 위신을 보전하며 반민법을 단속(短速)한 시일에 완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1월 27일에 조사위원들을 청하여 토의했다는 말은 이날 이승만이 반민특위 조사위원 6명을 초청하여 노덕술은 경찰의 공로자이므로 석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종용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또 조사는 비밀리에 집중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조사할 책임을 속히 비밀리에 진행하여 범법자가 몇 명이 되는지 기록하여 검찰부로 넘긴 다음 재판을 행하여 귀정(歸正·그릇되었던 일이 바른 길로 돌아옴)을 낼 것인데, 만일 그렇지 못하고 며칠 만에 한두 명씩 잡아넣어서 1년이나 2년을 끌고 나간다면 이것은 치안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이를 교정하여 비밀리에 조사하고 일시에 진행되도록 함이 가할 것이다.”
  
  
이승만은 끝으로 이 시점에서도 경찰의 기술과 성력을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협조를 당부했다.
  
 “다음 한 가지 더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치안에 관계되는 문제를 중대히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 반란분자와 파괴분자가 처처에서 살인방화하여 인명이 위태하며 지하공작이 긴급한 이때에 경관의 기술과 성력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죄범(罪犯)이 있는 자라도 아직 보류하고 목하의 위기를 정돈시켜 인명을 구제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정책이 아닐까 한다. 만일 왕사를 먼저 중재하기 위하여 목전의 난국을 만든다면 이것은 정부에서나 민중이 허락지 않을 것이므로 경찰의 기술자들을 아직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기왕에 반공투쟁이 격렬할 때에 경찰기술자들이 직책을 다하여 치안에 공효가 많을 때에는 장공속죄(將功贖罪)로 한다는 성명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정부의 위신상으로 보나 인심수습책으로 보나 조사위원들은 이에 대하여 신중히 조처하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상 몇 가지 조건에 대하여 국회의 많은 동의를 요청하는 바이니, 국회의원 제씨는 이에 대하여 충분한 협력을 가지기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다음날 김상돈 부의장 명의로 이승만의 주장을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상돈은 먼저 3권분립의 원칙과 관련하여 “민의의 대표기관인 우리 국회가 반민행위자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를 구성하고 민족정기를 자손만대에 살리기 위하여 3천만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데 있어 무엇이 위험한 것이며 3권분립에 혼돈이 있을 것인지 이해키 곤란하다”라고 반박하고, “반민자를 처단하는 법률은 헌법에 명시된 특별법이 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대통령은 신속과 비밀을 주장했으나 “우리 자손에게 민족정기라는 산교육을 가르쳐 주기에는 체포 당시로부터 판결에 이르기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으므로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5) 위원장 김상덕도 이날 이승만의 담화내용을 반박하는 성명서를 따로 발표했다.
  
◇... 노덕술, 반민특위 간부 등 국회요인 암살 음모드러나 기소
  
노덕술은 친일행위에 대한 반민특위의 조사와는 별도로 검찰의 조사도 함께 받았다. 

그는 1월 27일부터 경찰간부들과 함께 반민특위 간부들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2월 12일에 기소되었다. 

혐의내용은 어마어마했다. 

전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崔蘭洙), 수사과 부과장 홍택희(洪宅喜), 전 중부경찰서장 박경림(朴京林) 네 사람의 기소내용은 기가 막혔다.

조사결과 이들은 1948년 11월 중순 무렵에 국회의 반민법 논의에 반감을 품고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白民泰)를 매수하여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강경한 발언을 한 김웅진(金雄鎭), 김장열(金長烈) 등 의원과 윤치영(尹致暎) 의원을 욕설한 노일환 의원 등을 납치하여 감금했다.

이어 이들은 노일환 의원에게 강제로 “나는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서 세 통을 자필로 작성하게 하여 한 통은 대통령, 한 통은 국회, 한 통은 신문사에 보내어 발표하게 하고, 38선 가는 길까지 끌고 가서 살해하여 애국청년들의 소행인 것처럼 가장한다는 것이었다. 

암살대상자는 이밖에도 반민특위 요인들인 김병로 대법원장, 권승렬 검찰총장, 김상덕, 김상돈, 서순영(徐淳泳), 서용길(徐容吉), 서성달(徐成達), 오택관(吳澤寬), 최국현(崔國鉉), 홍순옥((洪淳玉), 곽상훈(郭尙勳) 의원들과 신익희 국회의장, 그리고 우익청년단체 지도자들인 유진산(柳珍山), 김두한(金斗漢), 이철승(李哲承)도 포함되었다.

최난수와 홍택희는 백민태에게 거사자금으로 30만원을 줄 것을 약속한 사실도 드러났다.

최난수·홍택희는 1월 8일에 백민태를 만나 수류탄 5개와 권총 한 자루, 탄환 3발, 액면 3만원짜리 보증수표 한 장과 현금 7만원을 전했다.

그리고 범행 날짜는 1월 8, 9일쯤으로 정했다는 것이었다.

백민태는 최난수의 지시에 따라 실행계획서를 작성하여 노덕술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백민태는 암살자 명단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조헌영(趙憲泳), 김준연(金俊淵), 노일환, 원세훈(元世勳) 등 의원들에게 이 계획을 고백했고, 김준연이 이를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에 대한 공판은 3월 28일에 시작되었는데, 노덕술 등 피고인들은 모두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반민특위가 앞서 1월14일  이승만에게 정부안의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공직에서 추방할 것을 요청하는 공함을 발송한 사실이 알려지자 공무원들은 술렁거렸다. 

그리하여 국무총리 이범석은 1월 20일에 관하 각 관공서에 “반민법은 근일에 이르러 발동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번 대통령 각하의 설명으로 죄질에 치중하고 직위에는 구애치 않는다는 요지를 생각할 때에 관공리는 필요 이상의 동요를 하지 말고 성실히 대한민국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며 관하 직원을 지도하여 행정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라는 통첩을 발송했다.
  
  
반민특위의 공함에 따른 공무원사회의 동요와 정부의 대처상황은 이 무렵에 열린 국무회의 회의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월 4일의 제16회 국무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내무, 반민법 제5조 해당자 조사보고에 관한 건. 

 대통령의 의명친전(依命親傳)으로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 조사하야 선처하라는 통첩을 관리들이 알게 되자 동요가 심하며, 대통령 담화와 상위(相違)가 있음을 보고하고, 대통령께서 이 일 처리하실 것을 유고(諭告)하시다.”
  
 이어 2월 9일의 제17회 국무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대통령,(1)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
  
  1. 반민법 제5조 해당 전국 관리 조사 선처 의명친전 건은 취소 지령하였다.  

  2. 반민특위의 구금, 구타 등 검찰, 사법, 행정을 자행함은 치안과 민심상 중대 영향이 있으므로 악화할 경우

  에는 대권(大權)을 발동할 작정이다. 따라서 이 법 개정법안을 조속히 국회에 제출하여 주기 바란다.
  
이승만이 언급한 대권 발동이 어떤 조치를 말하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때에 중대한 결단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법상 그가 행사할 수 있는 ‘대권’은 긴급명령이나 계엄령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2월 11일에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는 총무처의 통첩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러한 사실을 해명하라고 한 지시를 공보처가 또 잘못 알아듣고 중지한 것처럼 발표했다고 해명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2월 11일의 제18회 국무회의록은 이승만이 얼마나 격앙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대통령,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
  
  (1) 반민특위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터이므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에 대하야, 법무부 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이틀 동안 감금하였다는 보고가 있었고, 대통령 각하는 이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야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반민특위는 조사위원회,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 세 기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정부의 반민행위자 조사 중지는 반민법 운영을 방해하는 처사라면서 그 책임소재를 규명할 것을 반민특위 위원장이 국회에 건의했다.
  
 ◇... 반민법 개정 요구하는 강경한 담화...한달에 6번이나 발표
  
이승만은 2월 15일에 친일경찰 노덕술등의 석방을 위한 반민법의 개정을 강력히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반민법이 3권분립을 규정한 헌법과 모순되는 법률이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반민법에 관하여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선출하여 조사케 한 것은 일반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어니와 대통령이 과거에 위원 제씨를 청하여 협의적으로 논의한 내용은 전번에 발표한 바와 같이 국회에서 법률만 만들어 당국에 넘겨서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각각 그 책임을 진행케 하지 않으면 3권분립의 헌장과 모순이 되므로 어떠한 법률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헌법과 모순되는 법률이면 성립되지 못하나니, 조사위원들은 조사하는 일만 진행할 것이고 입법원의 책임에 넘치는 일은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다고 권고하였고, 또 범법자를 비밀리에 조사해서 그 조사한 결과를 사법부에 넘겨 속히 재판케 할 것이고 만약 지금 진행하는 바와 같이 며칠에 몇 사람씩을 잡아 가두어 1, 2년을 두고 끌어 나아간다면 이는 치안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지금 진행하는 방법을 모두 정지하고 우리의 의도와 합동하여 처리하면 정부에서 협조해서 이 법안을 속히 귀결하도록 힘쓰겠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검찰청과 내무부 장관에게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없애고 특별조사위원들이 피의자를 체포 구금하는 일을 금지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근자에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의도를 하나도 참고로 하지 아니하고 특별조사위원 2, 3인이 경찰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 고문한다는 말이 들리게 되니 이는 국회에서 조사위원회를 조직한 본의도 아니요, 정부에서 이를 포용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대통령령으로서 검찰청과 내무부 장관에게 지휘하에 특경대를 없이 하고 특별조사위원들이 체포, 구금하는 것을 막아서 혼란 상태를 정돈케 하라고 한 것이다.”
  
이승만은 정당한 절차에 의하여 제정된 법률이라도 전국 치안에 관련될 때에는 임시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조사원들의 과도한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반민법을 국회에서 정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것이니까 막지 못한다 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첫째로 치안에 대한 관련성이므로 이것이 상당한 법일지라 하여도 전국 치안에 관련될 때에는 임시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또 이 법을 정할 때에 국회에서나 대통령이 조사위원들에게 권리를 맡겨서 행정부, 사법부의 일까지 맡아 가지고 2, 3인의 자의로 사람을 잡아다가 난타 고문하라는 문구나 의도는 없는 것이니 즉시로 개정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국회에서 소상히 알기만 하면 즉시 법을 교정해서도 그러한 행동을 막을 줄로 믿는 터이므로 이미 법무부와 법제처에 지시하여 법의 일부를 고쳐 국회에 제출케 하는 중이니, 위선 조사원들의 과도한 행동을 금지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정부는 3권분립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손질한 반민법 개정안을 2월 16일에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반민특위의 재판부장으로 선출된 대법원장 김병로가 먼저 이승만의 담화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른바 김병로 항명파동이다.

그는 법률이 헌법정신 위반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헌법위원회의 소관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일의 대통령 담화를 보건대 반민법 운용 자체가 헌법정신에 위반되는 점이 있으니 개정하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어떠한 명령이나 규칙이 법령에 위반되느냐 안 되느냐는 대법원에서 최종 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이 헌법정신에 위반되느냐 안 되느냐는 헌법위원회에 그것을 판단할 것을 요청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는 대법관 5인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반민법이 헌법에 위반된다든지 안 된다든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반민법이 존속하는 한 특위에서는 반민법에 의지해서 하는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불법이 아니라고 본다. 반민법은 특별법이고 그 개정 여하는 국회에서 할 일이다.” 
  
이승만의 2월 15일 담화문 원고는 국회에도 제출되어 유인물이 의원들에게 배포되었는데, 흥분한 의원들은 2월 17일 하루 회의를 이승만의 이 담화문 성토로 보낸 다음, 정준(鄭濬) 외 12의원의 서면동의에 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 실시에 관한 대통령담화는 부당하므로 이것을 취소할 것을 요청함”이라는 결의문을 재석인원 119명 가운데 가 60표, 부 11표의 아슬아슬한 과반수로 가결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담화에 대한 국회의 취소요청 결의에 대하여 2월 18일의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회는 국회의 권리를 행사하고 정부는 정부의 입장을 명시하여 항상 토론을 하여 나가야만 잘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 담화문제로 국회에서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나 나로서는 앞으로도 할 말이 많다.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친일파를 옹호한다고 말하며 민심을 선동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무근한 사실로 타인을 얽어서 괴롭히는 것을 공산당이 취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추후에 글로 발표하겠다.”
  
이승만이 노덕술에 대하여 글을 따로 쓴 것은 없으나, 집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노덕술을 이승만이 그토록 필요한 인물로 생각한 것은 틀림없다.
    
이승만은 이어 반민법의 운행실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법률은 국회에서 통과하였다 하더라도 헌법정신에 위반되면 그 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성립된 법이라도 국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치안문제에 영향이 있을 때에는 이를 정지하고 치안유지에 관한 법률을 살려야 할 것이다. 국회에서는 치안 혼란을 선동하고 있다. 즉 경찰을 체포하여 경찰의 동요를 일으킴은 치안의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다. 특위의 몇몇 사람은 그러한 일을 고의로 행하고 있다.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남의 나라에 예속시키려는 반역행위를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과거에 친일한 자를 한꺼번에 숙청하였으면 좋을 것인데, 지나간 군정 3년 동안에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단행하면 앞으로 우리나라가 해 나갈 일에 여러 가지 지장이 많은 것이다. 특위에서 반역자의 징치를 목적으로 한다면 해당자를 비밀리에 조사하여 사법부에 넘겨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 두 사람씩을 체포하여 친일분자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면 한번 싸워나 보고 죽겠다고 그들이 발악하면 치안의 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사람 두 사람씩을 잡아다가 가두고 때리면 왜놈들과 관계하였던 자들은 공포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듯 문제점을 조근조근 지적한 다음 정부에서 제출한 반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면 그때에는 또 대책이 있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원하는 바는 국회에서는 한층 더 정부와 협조하여 미곡수집 같은 중대 사업 수행에 협력하는 동시에 농민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농지개혁법안 등을 좀 빨리 통과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국회의 위신도 올라갈 것인데 자꾸 말썽을 일으켜서 치안을 혼란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유감된 일이며, 또한 민중은 선동에 속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국무회의를 통과한 반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면 그때에는 또 대책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여 두는 것은 반민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며 처단하되 적당한 방법을 취하는 동시에 시기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렇듯 반민특위 관련 담화를 2월에만 여섯 번이나 발표했다. 

그것은 일반대중을 설득하고 그들의 여론에 힘입어 반민특위 그룹을 제압하겠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독립협회운동 이래로 몸에 밴 이승만의 대중선동가의 풍모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2월 21일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가 정부가 제출한 반민법 개정안을 제대로 심의도 하지 않고 “일거에 부결할 공기임을 보고”하자 격노한 이승만은 이튿날 또다시 “치안보장과 반민법에 대하여”라는 긴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일부 반민특위조사위원들의 지나친 행동에 따른 경찰의 동요실태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어서 눈여겨볼 만하다.
  
 “반민법에 대해서 대통령이 친일분자를 두호(斗護)한다는 말은 특별조사위원 중 몇 사람이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엄적(掩迹·잘못된 흔적을 가려 덮음)하기 위해서 민심에 반감을 일으키려는 의도이므로 그 내막을 발로시키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의도와는 절대로 대치되는 의도로 나아가는 것이니, 내가 하려는 바는 민심을 안위시키고 경찰을 정돈시켜 전국 치안을 보장해서 반란분자를 숙청하며 인명을 구호하려는 것이 제일 중요성을 가진 것이나, 조사위원 중 몇 사람의 의도는 이와 반대로 과거의 흠절만을 찾아서 현실을 더욱 험난케 만드는 것이니, 만일 이것이 고의가 아니라면 누차 대통령이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점점 기승해서 인심 선동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스스럼없이 '밖에서는 공산당이, 안에서는 국회의원들이…'하는 말을 자주 썼다.
  
서두부터 이처럼 노여움에 찬 말로 시작한 담화는 먼저 국회의원들이 미군철수 문제를 강조하는 저의가 어디에 있는가부터 따졌다.
  
 “미군철퇴 문제를 제출한 것은 과연 치안을 보장해서 민심을 정돈하려는 것인가, 미군을 배척하고 공산군을 청해 오려는 주의인가? 전쟁이 발생할 때까지는 경찰이 치안을 전담하고 그 책임을 지고 있음은 누구나 다 잘 알 것이다.

 반민법으로 인해서 조사위원들이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 취조한 후로 경찰측에서 얼마나 요동되었는가 함은 이것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고로 다 무사 공평한 것 같지만, 경찰측의 말을 들으면 밖으로는 공산당에서 경찰과 그 가족을 기회 있는 대로 살해하는 중이요 안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살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 치안을 위해서 아무리 헌신하고자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고 눈물 흘리며 억울히 호소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내가 특별조사원에게 지성으로 설명한 것은 몇십 명, 몇십만 명이라도 비밀리에서 조사해서 일시에 다 잡아 가두어 그 법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마음놓고 일하게 하여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시일을 연기하여 공포심을 내게 한다면 이것이 치안을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원들이 고문한 것이 없다고 변명하나 지금이라도 공개로 조사하면 법관들이 다 아는 바이니 이것은 엄적할 수 없는 사실이요, 특경대도 조직한 일이 없다고 하나, 만일 없었다면 조사위원들이 체포하기 시작한 이후 각 신문에 연일 보도되어 세상이 다 알게 된 사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승만은 이어 현재의 치안상태와 경찰의 어려운 임무를 강조해서 말했다. 

이승만은 경찰이 어떻게 치안기술자이고 그들이 왜 지금 꼭 필요한지를 보기를 들어 자세히 설명했다.
  
 “경찰 기술자 중에 기왕 죄범이 있으나 지금 치안에 필요한 이유를 내가 누누이 설명한 바는, 그 사람들의 죄상은 법으로 재판도 할 수 있고 처벌도 할 수 있으나, 그 사람들이 뒤에 앉아서라도 기술을 상당히 이용해서 모든 지하공작과 반란음모 등 사건을 일일이 조사하여 인명을 살해하고 난동을 일으키는 위험상태를 미리 막아서 발로되지 못하게 하여야 될 것인데, 지금도 지방보고를 들으면 매일 2, 3명 혹은 3, 4명씩 살해당하지 않는 날이 없지 않다고 하는 터이니, 유엔대표단 환영시에 폭탄을 묻어서 전부를 뒤집어 놓으려는 이러한 종류의 음모를 기술적으로 방지하지 않으면 인명과 국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조사위원 중 몇 사람들은 이러한 것은 꿈에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이런 음험한 내용을 발로시키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국회 전체가 다 이 사람들과 동일한 것으로 세상이 알게 됨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크게 불리할 것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발표 아니할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그분들이 달리 생각해 가지고 반민분자를 처벌하더라도 치안을 보장하면서 다 할 수 있을 터인데 기어이 치안을 파괴시킬 일만 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를 줄 수 없을 것이다.”
  
 ◇...언더우드 부인과 박일원 살해...그리고 김구와 이승만의 마지막 만남
  
이승만은 끝으로 자신이 담화를 너무 많이 발표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담화를 너무 많이 발표한다는 비평이 없지 아니하나, 나로서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잘되어 가기만 하면 좋겠지만 내가 발표하지 않으면 이런 내용을 민중이 알 수 없게 되고 위기만 심하게 되는 터이므로 부득이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요, 지금부터는 정부에서나 국회에서나 언론기관에서 이런 내용을 알고 사실을 엄정하게 밝히도록 해서, 공론이 정당히 서서 국사에 잘못되는 일이 없게 된다면 대통령으로서는 마음도 평안하고 입도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치안상태에 대한 이승만의 설명은 사실이었다. 정부수립 이후 불법화되면서 남로당의 행동은 지하공작과 격렬한 테러 행동으로 전환했다.
  
3월 17일에는 연희대학 학장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元漢慶)의 부인이 자택에서 교수 부인들을 초청하여 간친회를 열다가 사살되었다.

뒤이어 3월 29일에는 '남로당총비판'(1948)의 저자 박일원(朴馹遠)이 살해되었다. 

남로당 경기도당 청년부장이었던 박일원은 전향하여 수도경찰청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남로당의 5·10총선거 방해공작을 방지하는 데 공헌했고, 정부수립 뒤에 외무부 정보국장으로 승진했다가, 장택상이 외무부 장관을 사임하고 서울 중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자 뒤따라 사임하고 장택상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남로당의 특수행동원에게 피살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과 다른 정치인들 사이에는 국가의 일차적인 임무가 치안유지라는 데 대한 인식에 간극이 컸던 것이다. 

이승만이 인식하는 치안유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확고한 반공체제의 구축이었다.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이 아무리 중요한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반공체제의 구축에 지장을 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반민법 개정안을 제대로 심의도 하지 않고 2월 24일에 열린 제39차 본회의에서 폐기시키고 말았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방해공작이 극에 달했을 때 백범 김구는 침묵을 했나.

오랫동안 경교장에 칩거하던 김구는 새로 구성된 유엔한국위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기자들과 만나 현안문제에 대한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그 가운데는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반민특위의 활동 문제도 물론 들어 있었다.

 2월 1일에 경교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반민특위의 적극적 활동에 만족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교각살우(矯角殺牛)란 언급까지 했다.
  
 “이 일은 시간의 신속성을 바라고 있으며, 광범위하게 파급하는 것은 불원한다. 예를 들면 면.구장(面.區長) 이하까지 추궁한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폐가 있을 것 같다.” 
  
김구의 이러한 말은 귀국 직후의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벌에 대한 그의 신중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반민법 처리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김구의 생각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다. 

2주일 지난 2월 18일에는 현재의 반민특위 진행에 대한 소견을 묻는 질문에 김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친일 반역분자들에게 악형을 당하고 성명까지 빼앗긴 수많은 선열들의 영령과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아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반민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하려는 특위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며 인민들도 이것을 찬양할 것이니, 무릇 이를 방해하는 행위는 청소하여야 할 것이다.”
  
김구는 1949년  3·1절을 맞아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이 된 3·1절 기념사를 발표했다.

이 기념사에서는 친일파 숙청에 미온적인 이승만의 태도를 강력 비판했다.

김구는 2차대전 끝에 연합군의 혜택으로 한국이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3·1운동 전후에 무수한 애국선열과 지사들이 왜적과 용감히 싸우지 않았다면 어찌 이만한 해방인들 우리를 찾아왔겠느냐고 말했다.

 “미국의 은혜와 소련의 혜택에 감격한 눈물을 흘리는 무리는 적지 아니하되 우리의 애국선열과 지사들의 노력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무리는 적은 것 같다. 심하면 그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던 그자들을 기술자라는 명목하에 예우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모저모로 혼란, 도탄, 죄악이 표현되고 있다. …”
  
  
이러한 주장은 이승만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김구는 이제 이승만의 뚜렷한 정적이 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 이승만과 김구는 오래간 만에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그해 3월 29일 오후에 지금의 종각역인 종로 YMCA회관에서 열린 한국 YMCA운동의 대부이자 국내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인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22주기 추념식 자리에서였다.

이승만에게 이상재는 김구에게 이동녕(李東寧)과 같은 존재였다.

추념식에는 김규식(金奎植)도 참석했는데, 세 사람은 차례로 추도사를 했다.
  
김구가 이 무렵에 '자유신문(自由新聞)'의 ‘나의 애독서’라는 고정란에 기고한 짤막한 글은 김구의 일생을 통하여 온축된 사상의 근원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때때로 한가한 경우에 집어 드는 책이 요즘은 홍명희(洪命憙)씨의 '임꺽정》(林巨正)'이다. 그 사상과 사건의 흥미며 의협적인데 재미를 본다. 동양인으로 '금강경》(金剛經)'도 삼독의 필요가 있겠지만 '노자(老子)'는 그 가운데서 관념적인 운명관만 사상(捨象)하면서 읽는다면 서양인들이 말한바 변증법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성경), 특히 기독교의 구약(舊約)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하여도 읽을 필요가 있다. '고려사(高麗史)중 희세(稀世)의 정치가이며 절세의 명장인 을지문덕, 연개소문의 우수하고도 자주적인 긍지를 읽을 수 있다.

 '불란서혁명사', '링컨전', '육도삼략(六韜三略) '등도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다. 또 내가 중국에 있을 때에 노신(魯迅)의 '고향(故鄕)'과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으면서 나의 고향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다. 번역이 되었다면 청년학도들에게 행(幸)일 터인데 하고 궁금히 생각된다.
  
 요즘은 갓 입수한 이북만(李北滿) 저 '이조사회경제사연구(李朝社會經濟史硏究)'를 읽고 있다. 지금 열거한 책자들을 청년학도들이 꼭 읽어야만 된다고 강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읽은 책자 중에서 몇책을 들어본 것이니, 이것으로써 청년학도의 면학에 도움이 된다면 행심(幸甚)이다.”
  
이후 김구는 한독당 군산지부 주최의 건국실천원 단기양성 개강식과 한독당 옥구군당부결성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4월 19일에 한독당의 부위원장 조완구(趙完九),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19일 오전에 서부해방자호로 서울역을 출발했다.
  
김구가 많은 국민의 관심 속에서 남북협상을 위하여 38선을 넘은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김구는 기차 안에서 “북행 1주년을 맞이하며”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회고컨대 나는 작년 4월 19일에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서 북행했었다. 그 뒤에 조국의 현실은 마침내 분립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국제적 제약성에 기인한 데 불과한 것이며, 3천만 동포의 마음속에는 다만 하나의 조국이 있을 뿐으로서 남북동포의 통일을 갈망하는 열렬한 의욕은 시간과 함께 더욱 성장되고 있다.

 제1차 협상을 실패라고 규정짓는 것은 조급한 생각이다. 국제적 압력으로써 첨예하게 대립된 상극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시킴에 필요한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1차 협상은 복잡한 정치적 교섭의 여정을 계시하는 한갓 서곡에 불과하고 결국은 아니다. 협상에서 세워진 통일의 원칙은 국제적으로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남북의 통일을 위한 협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분단된 현실에 대하여 누구나 만족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미소양군의 철퇴는 우리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전진하며 정의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주장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김구의 주장은 미국의 원조로 자력에 의한 국방 태세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미군이 철수해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정부에 계속하여 군사협정 체결과 군수물자 원조를 요구하면서 미군철퇴를 주장하는 국회 소장파 의원들과 대립하고 있는 이승만을 여간 자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산에 도착한 김구는 이튿날 아침에 군산 부두에서 충남 서천·장항을 바라보며 한동안 명상을 했다.

이어 군산 어업조합을 방문하고 어류 판매상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11시쯤에는 이곳 기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화평통일을 위하여 조직적 국민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양군이 철퇴함으로써 급속히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미소양군의 철수를 거듭 주장했다.
  
그리고 오후 2시에는 군산공설운동장에서 ‘김구씨환영부민대회’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어 4월 21일에는 강습회 개강식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하고, 한독당 옥구군당부결성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옥구로 갔다.

한독당은 다가오는 전당대표자대회를 앞두고 지방조직 강화에 힘을 쓰고 있었다.
  
‘김구씨환영부민대회’에서도 김구는 양군철수를 강조했던 것 같다.

5월 3일에 열린 제45회 국무회의에서는 김구의 이날의 연설회가 논란되었다. 

법무부 장관 이인으로부터 “(김구가) 정부의 건전한 발전상을 왜곡 음해하는 악영향을 주는 연설을 감행하며, 경찰의 호위가 성대하였다는바, 내무부는 특별히 이런 점 단속을 요한다는 취지의 보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군산과 옥구를 다녀온 김구는 4월 29일에는 감찰위원장인 국학자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충남 예산읍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기념비는 예산군교육회가 주동이 되어 학생들이 푼푼이 모은 성금과 지방유지들의 찬조를 얻어 공사비 65만을 들여 건립한 것이었다.
  
정인보가 지은 깔밋한 문체의 한글 비문은 감동적이었다.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비문내용은 윤봉길의 행적과 홍구공원 의거를 적고 나서 그 의거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적을 죽이는 것이 의다. 중국만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준 바 아니었지마는, 중국은 열사의 의를 더욱 고마워하야 바로 전 서울, 평양에서 적의 이간에 넘어서 중국 상민을 박해한 일로써 두 민족 사이에 자칫하면 험악할 뻔하게 되던 것까지 구름 걷히듯 하고, 우리 독립의 온 힘을 아끼지 아니하고저들 하얏으니 장중정 총통이 우리 독립을 선창할 때도 윤봉길 열사의 저때에 던지던 폭탄소리가 귓가에 새로웠을 줄 안다.”
  
비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었다.  
 
 
 “김백범 선생이 입국하면서 덕산 시량리 렬사의 집을 찾아가서 제사하고 그 뒤 대판으로부터 유골을 찾아다가 국장 의례로 리봉창 백정기 두분과 나란히 효창공원 구광 뒤에 본장하얏다. … 렬사가 살아계셨다면 겨오 마흔넷이다.”
  
이러한 비문을 보는 김구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기념비 제막식을 마치고 김구는 덕천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의 생가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유족을 위로했다.
  
이처럼 김구는 5월 들어 정치문제에 한결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다. 5월 9일에는 한독당 창립 19주년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념사를 했다.
  
 “본당의 확고한 민족정신과 열렬한 혁명의식은 일관한 것이다. … 

 본당은 앞으로 반봉건적 반제국주의적인 부르조아 민주주의 민족혁명의 큰 기치하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평화적 방법으로써 모든 민족 역량을 통일 단결시킬 결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언제나 타협의 원칙 위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에 있어 무엇보다도 선결 조건은 강력한 민주주의 민족혁명세력이 조성됨으로써 조국평화통일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또 이 입장을 고수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아직도 미소 양대 세력의 제약성이 해소되지 못한 이 환경 속에서 우리가 반소반미적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
  
5월 21일에 제3회 임시국회가 개회되자 김구는 이례적으로 국회의원들을 편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한편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이유하에 선거에 출마하였던 것이다. 선거민에게 굳은 약속을 함으로써 당선되었다. 

 탐관오리의 숙청도 약속의 하나요 민생문제의 해결도 그의 하나였다. 

 그리고 공출 폐지와 토지개혁과 지방자치법 실시는 모든 약속 중에서도 가장 선거민의 관심을 끌던 약속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 

 이때에 있어서 그들의 심각한 반성과 아울러 새로운 투쟁이 없으면 민중의 기대를 만족케 할 길이 없을 것이며 민주주의는 거세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입장의 여하를 불문하고 다같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민주와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여론의 엄정한 편달이 필요하다.”
  
김구는 5월 28일에는 대구로 내려가서 대구역 광장에서 대규모의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준비했다. 

그러나 강연회는 예정일에 닿아 갑자기 취소되었는데, 그것은 한 달 동안 한국인사들을 만나지 않고 있던 유엔한국위원회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구와 유엔한국위원단의 면담은 5월 31일 오전에 덕수궁의 유엔위원단 회의실에서 1시간30분가량 개최되었다.

유엔위원단과 회담을 하고 나온 김구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소양군의 분할점령으로 인하여 생긴 삼팔 장벽이 제거되지 않고 또 남북한의 무장세력 간의 충돌이 반발하는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어떠한 장애도 제거되기 곤란할 것이다. 

 사회적 또는 경제적으로 부분적 교류를 추진시키기 위하여는 먼저 남북의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완화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도 미소의 협의를 원칙으로 하는 유엔의 노력이 기대되는 바이나, 한국을 분단해 놓은 미소양국이 자기점령지역에 각기 상반된 정권과 군대를 만들어 놓고서 그대로 나가는 것은 마치 남의 동리에 와서 싸움을 붙여 놓고 슬쩍 나가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내전이 발생된다면 그 책임은 미소양방에 다 같이 있는 것이다.”
    
◇... 김상돈의 교통사고 무마와 반민특위 검찰관 9명 사표 제출

그런 사이 이승만은 정부의 반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무참히 폐기되자 이런저런 새로운 국회 대응책을 모색중이었다.
  
  
먼저 반민법 개정안이 폐기된 이튿날인 2월 25일 오후에 열린 제22회 국무회의에서 반민법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실패한 데 대해 긴급히 대책을 수립해야겠다는 국무총리 이범석의 보고에 대하여 이승만은 “부득이 보류하고 국회가 자동적으로 제안케 하기에 노력하라”고 훈시했다.
  
이어 3월 2일에 열린 제23회 국무회의에서는 여당 조직 이야기를 꺼냈다.
  
 “국회 대 정부 간의 융화와 정책 수행상 여당 조직이 필요하니, 국회의원 출신 국무위원이 중심이 되어 국회의원 포섭에 노력하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틀 뒤에 열린 제24회 국무회의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민법 개정안의 실패의 원인은 우리의 진의를 국회가 오해한 데 연유한다. 전일 의원들을 만나 나는 특조(特調), 특검(特檢), 특재(特裁)의 세 기관을 다 인정하되 죄의 해당자를 일률적으로 비밀리에 조사하야 일회에 처단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하고 2년간이나 인민을 불안에 싸이게 하고 치안을 혼란케 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제창하여 이해있게 하였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소속의원들을 만나 자기의 지론을 일부 양보한 것이었다.
    
반민법 제5조 해당 공무원의 조치에 대한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은 집요했다. 

그런가 하면 지방에서는 일선 경찰이 체포되고 있어서 치안에 영향이 크다면서 정부의 확고한 대책과 방침을 빨리 세우라는 요구가 국무회의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3월 11일에 열린 이승만의 내외기자회견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에서도 신중히 고려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치안을 보장해서 생명과 질서를 보호 유지하는 것을 가장 긴절히 여기는 터이므로 특별조사위원들이 행하는 일에 치안에 방해되는 일이 있다면 결코 포용할 수 없으므로 특히 국회의원 제씨가 이에 대해서 협동하기 바란다.”
  
그것은 반민특위의 요구를 거부하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3월 25일에 열린 제35회 국무회의의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통령,국무총리, 내무, 법무, 국방 장관이 합의하야 책임지고,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정부의 확고한 태도 표명 및 대책을 수립하기로 의결하다.”
  
갈등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정부와 반민특위간 합동좌담회가 마침내 열렸다.
  
이는 정부와 반민특위의 타협은 사실상 이승만의 고집을 꺾을 수없고,그렇다고 반민특위가 스스로 백기투항을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이루어졌다.

국무위원들과 반민특위위원들이 ‘합동좌담회’를 열어 해결방안을 강구하기로 한 것이다.
  
4월 4일의 제38회 국무 회의록에 보면, 내무부 장관 김효석(金孝錫)이 “정부와 특위와의 합동좌담회에서 상호 협조할 것을 언약하고, 특히 국무총리가 정부직원에 관한 특위 조사를 통고하여 주면 정부가 처리할 것이니 특위는 직접 행동을 삼갈 것과 국회와 특위 측의 자가숙청을 촉구한바 특위도 정부측의 강경한 태도를 인식한 듯하다”라고 보고하자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처리하라”하고 지시했다.

  
4월 8일에 열린 제39회 국무회의에서 있었던 국무총리 이범석의 보고는 더욱 구체적이었다.
  
 “국무총리, 반민특위 간부와의 회담 결과 보고의 건.
  
  전번 국무위원과 반민특위 조사, 검찰, 재판 각부 간부 사이에 열린 연석회의에서  
  1. 정부 군(軍)경(警)은 직접 착수치 않을 것.  
  2. 정부 공무원은 자가 숙청케 하고 특위측 조사자는 명단을 정부에 이교(移交·넘겨줌)하여 처리케 할 것.  
  3. 국회측도 자가숙청할 것을 의결하였고, 특히 금일 김상덕 위원장과 회담하여 이 취지를 상호 담화 발표하기로 확약하였음을 보고하다.”
  
반민특위가 정부의 타협안을 받아들인 것은 국회의원 가운데도 반민법 제5조 해당자로 지목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처리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연석회의’의 합의사항 가운데 국회는 국회대로 자가숙청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부위원장 김상돈부터 친일경력이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3월 19일에 열린 제58차 국회 본회의는 일본점령기에 김상돈이 10년 동안 서교동, 합정동, 망원동의 총대(總代)로 있으면서 부일협력한 행동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고 그에 대한 반민특위 조사위원회 부위원장 파면결의안이 제출되어 저물도록 격론이 벌어졌다.

김상돈 뿐만 아니라 이종린(李鍾麟), 한엄회(韓嚴回), 이항발(李恒發), 이각종(李覺鍾), 신성균(申性均) 등 여러 의원들의 부일행동도 문제가 되었는데, 반민특위는 8월에 가서야 국회에는 반민해당자가 없다고 공표했다.
  
이처럼 국무위원과 반민특위위원의 ‘합동좌담회’의 합의에 따라 군대와 경찰 및 정부공무원의 반민법 제5조 해당자는 정부에서, 국회의 반민법 제5조 해당자 처리는 국회에서 각각 ‘자가숙청’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리하여 실제로 반민법 공소시효가 끝난 1949년 8월 31일까지 반민특위가 조사한 반민 피의자 688명 가운데 반민법 제5조 해당자는 모두 15명이었고, 군출신자는 충청북도 조사부에서 검거한 일본육사 출신의 밀정 박두영(朴斗榮) 단 1명뿐이었다.
  
그 무렵 반민특위 위원장 대행을 겸한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이 몰던 차에 치여 길에서 놀던 아이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이승만에게 사사건건 앞장서서 반기를 들던 김상돈이 사고를 저질렀다. 

2월 27일에 자기가 몰던 지프차로 길에서 놀던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서울 마포의 자기 집에서 두 가족과 호위 경관 두 사람을 태우고 시공관으로 가던 길에 아현동 로터리에서 정한진(丁漢鎭)이라는 여덟 살 난 아이를 치어 30분 만에 숨지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뒤의 조치였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김상돈은 두 호위 경관에게 이 사실을 엄비에 부치고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두 경관은 마포구청으로 가서 재무과 차석 오봉갑(吳鳳甲)에게 아이가 전날 병사한 것으로 허위 신고하여 즉석에서 화장인허를 받고 묘지사용 허가증까지 발부받아 화장하여 매장했다. 

김상돈과 두 경관, 그리고 마포구청 직원은 서울지검 최복렬(崔福烈) 검사에게 불구속으로 취조를 받고 4월 13일에 업무상 과실치사, 허위 유인(有印)공문서 작성 교사, 허위 유인공문서 작성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기자들의 서면질문을 받고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권상 제일 중요한 것이 생명재산 보호권이요, 정부의 제일 중요한 책임도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민법특별조사위원 중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서 어린아이를 치어 죽였다는데, 그 후에 경찰이 조사해서 사실을 소상히 보고할 기회를 주지 않고 시신을 없이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경관들과 검찰관들이 다 정당히 조치할 줄로 믿고 조치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종시 아무 소리가 없으므로 법무당국에 물은즉 사실을 조사는 했으나 특별한 조치는 없게 된 것을 알기에 이르렀으니, 나로서는 대단히 놀랍게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법으로 판단하고 공포해서 민중이 알아야 되겠는데, 아무 판단 없이 그냥 덮어주고 말면 경관과 검찰관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가 오직 특별조사위원 중 몇 사람들이 반민법을 진행한다는 명의로 헌법에 대치되는 일을 행해서 치안에 많은 동요가 있게 되므로 나로서는 이런 일을 법적으로 교정하기를 수차 선언하였으나 국회의원 중에서도 여러분이 협의하여 국회에서 조처하겠다고 누차 말한 분도 있었고 행정 장관 중에서도 순조로 막겠다고 담보하는 고로 기다리고 있던 중인데, 한 가지 양해된 것은 경찰이 조사위원의 명령으로 반민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것만은 막아서 조사위원들이 평민을 고용하여 특경대를 만들어 사람을 자유로 잡아 가두게 된 것이니, 이것이 다 위법한 행동이다. …”
  
이승만은 특별조사위는 조사만 하고 특경대는 해산시켜서 불법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단호하게 천명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소위 특별조사위원은 조사만 하고 사법에 넘겨서 행정이나 사법일은 조금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요, 특경대는 해산시켜서 그러한 명의로 불법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 징치할 것이니, 국회의원 중에서도 공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은 자기들이 정한 헌법을 존중히 여겨서 헌법의 대지를 위반하는 것은 여간 사소한 조문이 있다 하더라도 다 폐지하고 법을 존중히 하여야 될 것이다.”
  
반민특위 각 도지부의 조사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런저런 부작용도 나타났다.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 반민법 해당자로 지목되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금품을 요구하는 가짜 조사관이 날뛰는가 하면, 특별검찰관의 호위 경관이 사살되기도 했다. 

특별검찰관 서성달의 호위 경관이 살해되기도 하고, 고등경찰 출신의 중추원 참의 김태석을 변호하던 변호사 오숭은(吳崇殷)은 그 자신이 반민법 위반죄로 체포되었다.
  
반민특위 내부의 알력도 드러났다. 대표적인 현상이 거물 피의자들이 기소유예나 보석으로 석방되는 것이었다. 

조선항공사업 사장 신용욱(愼鏞頊)을 비롯하여 10여명이 기소유예나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4월 20일에 화신상사의 박흥식과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갑순(金甲淳)이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자 특별검찰부는 검찰관 9명 전원이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내고 일제히 사표를 제출했다.
  
 “금번 특별검찰부 검찰관장 이하 검찰관 일동은 특별재판부의 반민법 해당 피고인 박흥식에 대한 보석 결정을 계기로 검찰관 직무를 감당키 곤란하므로 대한민국 국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직무는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집무할 것을 결의함.”
  
박흥식과 김갑순은 거금 100만원씩을 보석공탁금으로 냈다.

북선교통회사의 설립자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방의석(方義錫)은 보석되었다가 물의가 일자 재구속되기도 했다.
  
4월 23일에 있은 김상돈의 기자회견은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 특별검찰부 총사퇴문제를 어찌 보는가?  
 =“총퇴직문제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후일 자세한 것을 발표하고 … 박흥식 한 개인 보석문제로 총사퇴를 운운하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각 부처에서 진지한 태도이니만큼 국민 여러분은 오해 없기를 바란다.”
  
 ▶특경대 해산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특경대는 전 윤치영 내무부 장관 때부터 현 김효석 내무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의하여 상호조직 간에 교섭 중에 있는데, 조직키도 전에 해산 운운은 문제가 안 된다.”
  
 ▶신용욱을 기소유예한 데 대하여 일반은 의아심을 가지고 있는데?  
 =“특검에서 기소유예한 것은 사실이나, 특위는 특검에 재고 요청을 하여 특검에서 합의한 결과 재조사하기로 하였다고 하니 불일간 실행할 것이다.”
  
 ▶대통령 담화 중에 특위는 조사에만 한한다고 했는데?  
 =“법치국가에서는 법이 있는 이상 법을 무시하는 담화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고, 동시에 본 위원회 운영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자동차 사고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는가?  
 =“인권옹호에는 나 역시 절대 찬성자의 하나이나, 개인의 교통사고문제를 가지고 특위부위원장에 결부시켜 신문으로 방송뉴스에까지 운운하는 것은 그 진의를 이해하기 곤란할뿐더러 문제의 인권옹호와는 별개일 것이다.”
  
 ▶부위원장에 대한 성토대회를 어찌 생각하나?  
 =“정당과 애국단체의 이름을 사칭하여 몇 개인의 악질적 모략으로 자기의 정치적 야망을 채우며 특위에 방해공작과 기관의 일부 책임자를 중상하여 약체화함에 불과한 것이다.”
  
 ▶모 국회의원의 동의로 부위원장에게 관한 비밀회의가 있었다는데?  
 =“그 점은 본래가 정치적 모략이고 역시 간접으로는 반민법 실천에 대한 방해공작인 고로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은 삼천만이 잘 알고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거물 반민자가 아직 많은데 앞으로 어떠한 방침으로 활동할 것인가?  
 =“거물 가운데 일부는 취급하였고 금후도 역시 더욱 정중히 취급할 방침이다.”
  
김상돈은 하지만 자신의 과실치사 사건에 대하여는 의아스럽게도 국민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승만 정부의 김철호 조사관 압박과 특위특경대 해산 명령

친일파들을 관리로 많이 등용한 정부조차 반민 특위 활동 제동이 갈수록 노골화됐다. 


반민 특위 활동이 민주주의의 원칙인 삼권 분립에 위배되며, 무엇보다 공산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때에 반공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들을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승만 정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반민법에 적극적이었던 국회의원들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 탄압했다. 

1901년 통영에서 태어난 김철호라는 분이 반민특위에 조사관으로 있었다.

그는 1925년 서울 협성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그 해 중국으로 떠나 광둥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 출판부 책임자로 일하던 그는 1927년 10월, 의열단의 밀명을 받고 극비리에 귀국했다.

김철호는 고향인 통영에서 비밀 결사를 위해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해 지하활동을 벌였고, 1929년 11월에는 ‘의열단 사건’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다.

그와 동료들이 조선박람회 개최를 기회로 놓고 일제 주요인물 암살과 주요기관 파괴를 위해 공작하던 중 발각되어, 서응호·윤충식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것이다. 김철호는 12월 7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에 김철호는 고향인 통영에서 충신과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이력으로 보나 해방 후의 행보로 보나, 그는 특위 위원으로 흠이 없는 인물이었다. 

조국을 위해 일하며 ‘나라의 땀방울이 되겠다’는 김철호의 의지는 국한(國汗)이라는 그의 호에서부터 드러났다. 

친일파 청산의 정국이 시작되고 나서, 그는 바로 반민특위의 경남 조사부 조사원으로 임명되고 부위원장의 자리에 올랐다.

1949년 1월, 경남 조사부의 조직 구성이 끝나자 김철호를 비롯한 조사원들은 부산 경남도청 내에 사무실을 두고 본격적인 수사를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는 조선총독부 관보와 신문 등, 일제 강점기의 각종 출판물과, 제보된 고발 내용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김철호는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일제 헌병과 친일 경찰을 집중 수사했다. 

한편 이 시기에 반민특위 중앙 위원들과 특경대 또한 전국의 유명 친일파들을 우선적으로 검거하기 위해 경남에 내려와 있어 김철호는 이들과 교류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 간부 및 친일 경찰 3명을 체포한 그들은 임무를 마친 뒤 김철호와 동료들에게 활동 내용과 방법, 수사 방향에 대해 공유했다. 

예비 조사기간을 거친 뒤, 경남 조사부가 본격적인 체포 단계에 들어서면서 경남 일대에서 친일파 처단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이승만과 정부는 이러한 김철호 등의 움직임이나 민중의 열기와는 상반되게 친일 청산이란 민족적 과업에  탐탁지 않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표명했다.

 “지금 국회에서 이 문제(친일 청산)로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으니 지금은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오.”

반민법 공포에 앞서 9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 말이다. 

친일파와 미군정을 등에 업은 그는 친일파 처벌 논의를 ‘선동’, 혹은 대한민국의 분란과 분열로 이해했다. 

당시 대통령과 제헌 국회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 

반민법 제정 시기와 방식, 판결 기관 등 무엇에 관해서든 양자의 입장 차이는 매우 컸다.

그 격차는 끝까지 줄일 수 없었다.

그러나 반민법 공포 이전에는 어떤 법도 통과시키지 않을 듯한 국회의 강경한 기세에 밀려 정부는 최종 서명을 했고 1948년 9월 22일 반민법을 법령 제3호로 공포했다.

반민법 공포 이후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담화 정치’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는 이틀 후에 “반민자 처단은 민의, 법운영은 보복보다 개과천선토록 하라” 라는 담화문을 냈다.

정부는 여론을 고려하여 반민법을 수용하면서도, 그 해석에서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의 담화 정치는 갈수록 더욱 노골적인 색을 띠었다.

기가막힌 일이 속속 드러냈다. 이승만은 심지어 반민특위내 특경대를 없애고 조사위원들이 친일매국노와 민족반역자 체포 및 구금하는 것을 막아 혼란상태를 정돈시키라는 대통령령을 내렸다.

2월 15일 담화에서 ‘반민특위의 행동이 지나쳐 국가치안에 방해된다’는 발언으로 대통령령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21일에 그는 친일 경찰 기술자들의 반공기술을 이용해야 하는데 조사위원들에게는 국가를 위한 생각이 ‘꿈에도 없다’며 반민특위 활동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반민특위 탄압을 비판하면 '반공', '빨갱이'로 몰아 처단

이승만의 연이은 강도 높은 발언과 함께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 세력의 공세가 점차 노골화되었다. 

한창 조사와 수사에 몰두하던 2월, 김철호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책동을 체감하게 된다. 

친일파를 옹호하거나 관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연판장들이 나돌았고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다. 

친일파들은 ‘반공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법은 일제 강점기 반장이나 동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온 국민을 친일의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공산당 프락치”라고 악을 쓰고 질렀다. 

친일파들에게 반공이란 생존의 유일한 무기였다. 

빨갱이 프레임을 이용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뿐더러 반민특위를 무력화하는 데에도 더없이 유용했다. 

연판장을 돌리고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반민법 위반으로 체포하고 적극적으로 반동 움직임에 대처했다.

하지만 친일파들은 조사관에게 살해 위협을 담은 협박장을 보내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소란들이 끊이지 않은데 이어, 심지어 중앙에서는 암살 모의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었다.

소개했듯이 친일 경찰로 악명 높던 최난수, 홍택희, 노덕술 등이 모의하여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시켜 반민특위 의원들을 암살하게 한 후, 이들을 공산당의 프락치로 조작해서 북한으로 넘어가려다 사살당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다. 

실행 전에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불안해진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들은 김철호는 암살이 미수에 그친 것에 안도하면서도 친일파의 반동 강도에 놀랐지만 설마 그들의 공세에 반민특위가 무너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5월이 되고 경남 조사부는 부와 군으로 파견을 가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철저한 조사가 우선인 것은 여전했고 조사 외에도 할 일은 넘쳐났다. 

김철호는 조사를 병행하면서 피의자를 체포하고, 영장 청구를 위해 중앙에 오가며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체포 직후 모든 조사를 마치고 20일 안에 송치 여부를 정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동료 조사관은 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였다. 

슬픔을 삭힐 시간조차 허락지 않을 만큼 모두가 오직 조사와 검거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중순 이후에 피의자 30여명에 대한 파면 신청을 제출하고 중앙에 15명의 영장을 청구하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6월은 달랐다. 수십 명을 잡아내던 전 달에 비해 이 달의 성과는 체포 인원 단 4명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김철호도 동료들도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고,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이상하리만큼 연달아 발생했다. 이른바 ‘6월 공세’가 시작됐다.

일련의 파동이 몰아친 후, 김철호를 비롯한 경남 조사부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친일파를 모조리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처단하려던 그들의 의지도 투지도 처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또 그들을 더욱 무너뜨리는 것은 특위를 향한 위협이 조직의 해체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로써의 위협은 곧 그들의 몸으로 다가왔다. 예고장에 그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사관의 집에 친일파가 침입하여 살해 위협을 가한 사태까지 일어났다.

분노했지만 두려움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김철호는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가만히 잦아드는 것은 도리어 친일파들이 반길 짓이었다.

그에게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김철호와 동료들은 시한이 만료되기 직전까지 끝없는 수사와 체포를 이어갔고, 그 결과 전국 9개 도 조사관 중 경남 조사부가 가장 뛰어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건수들을 정리해 중앙 위원회로 전달하던 중 아슬아슬하던 활동 기간이 다 되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결국 김철호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통영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통영으로 돌아간 김철호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 남는다. 

김철호 수사관은 어떻게 됐을까.

반민특위의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더 격화하였다. 

매국과 애국을 가르는 기준이 ‘친일파냐 아니냐’ 에서 ‘좌익이냐 아니냐’로 바뀌었다. 

정부의 비호 아래 가해진 친일파의 연이은 반격에 반민특위에 몸담은 김철호는 이념상 오히려 우익에 가까웠음에도 한순간에 좌익분자로 찍히고 말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그렇게 빨갱이가 된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되고 친일파가 더욱 득세한 시기, 전쟁은 저들에게 빨갱이의 탈을 씌워 전쟁통에 싹쓸이하고자 하였다.

특위 뿐만 아니라 좌익 활동 경력이 있는 전향자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목의 ‘국민 보도 연맹’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7월 8일 마산·고성·창원·통영에 보도 연맹원 구금 목적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통영에 불길한 기운이 퍼졌다.

특위 출신 낙인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든 불안 속에 지내던 김철호는 8월의 어느 밤, 자던 중에 부산스러운 인기척을 느꼈다. 

눈을 뜨자 눈부신 라이트가 비치고 7명 가량의 거구들의 서슬퍼런 눈빛이 보였다. 

정신을 차릴 새는 없었다.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끌려나오는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일이었다.

김철호의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철호가 사라지고 진상 또한 사라졌다. 실종으로 처리됐으나 친일경찰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부위원장은 끌려간 뒤 바다에 수장되었다, 

어떤 조사관은 납북되어 숙청당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말이 나돌았다.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소문 마다 ‘빨갱이’라는 단어 만큼은 분명한 한 가지라도 되는 양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김철호 조사관의 애국심과 실종등은 한국일보 이승호 논설위원이 통영읍장에게서 듣고 기사화되면서 알려졌다.

이승호의 회고록 ‘대지에 비가 내린다’에는 경남 특위 부위원장 K와 친일파 S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K의 초등학교 동창인 S는 언젠가 자신을 체포하러 온 K의 앞에 무릎을 꿇고, ‘차마 왜놈들을 거역하지 못했’다며 호소했다. 

K는 처자식을 봐서 살려 달라 애원하는 S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의는 선의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상황이 역전되자 S를 비롯한 그 지역 친일파들은 K를 빨갱이로 몰아갔다. 

경남근현대사연구회는 이를 사실일 것으로 판단했고 여기서 K는 김철호, S는 서병두라고 설명했다.

당시 통영 헌병대 문관이던 이판석 또한 서병두와 지역의 대표 친일파들이 김철호를 모함하여 죽게 했다고 증언했다.

실패한 반민특위와 살아남은 친일파, 반공 이데올로기와 낙인, 그리고 갑작스러운 조사관의 죽음까지. 조각들을 맞춰줄 실마리는 1950년 한국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 못내 자명한 것이었다.

◇...반민특위, 이승만이 친일경찰 끌어앉고 1년 만에 해체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활동 방해는 그해 6월들어 더 거세졌다.

이른바 ‘6월 공세’는 6월 본부 습격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까지가 해당된다. 

언급됐듯이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이 반민특위 위협 목적의 대중시위를 조직하던 것이 드러나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건 때문이다.

6. 6사건으로 기록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40명의 무장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의 한밤중  습격사건이다.

습격 당시 무장 경찰들이 특위 위원과 특경대원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 및 인간으로서는 할수 없는 혹독한 고문까지도 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친일경찰에 대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신이 직접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며 습격자들을 옹호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반민특위 활동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의회가 대립하다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게 바로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1949년 5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반민특위에 열성적이던 소장파 의원들을 포함, 구속된 국회의원 15명이다.

친일 청산에 앞장섰던 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반민특위에 실질적인 타격을 날린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과 날카롭게 각을 세우던 의회와 특위는 점점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6월 6일 본부 습격 후 20일 만인 6월 26일, 친일 청산의 버팀목이던 백범 김구가 암살 당했다.

김구는 반민특위에 앞장선 국회 소장파를 지지하고, 친일청산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암살범은 배후에 친일파를 둔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였다. 

특위를 비롯하여 그와 뜻을 함께하던 이들에게 그 날은, 분단과 친일을 극복한 하나의 독립된 자주 국가를 꿈꾸던 희망도 의지도 좌절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6월 공세’ 끝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반민특위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됐다.

미디어오늘 2018년 5월 3일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반민특위가 공중분해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49년 5월9일자 동아일보 1면 기고였다. 국회의원 김준연은 5·10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된 1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5·10선거 부인의 일파가 계속하여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이들이 “남로당의 선전 방침에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1949년 7월 1일 곽상훈 의원 등 친 이승만 의원 21명은 반민특위 활동 기간을 그 해 8월까지로 제한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는 7월 6일 통과되었고 다음날인 7월 7일, 반민특위 조사위원은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이처럼 반민 특위는 1년도 못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반민 특위의 활동은 시작할 때 큰 기대감으로 출범했으나, 결과는 거기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활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1949년 8월 31일 공식 해체의 순간까지, 반민특위가 다룬 사건은 682건이었다.

이는 전체 7천여 건의 조사 대상 중에서 10%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408건의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221건만이 기소되었고 총 체포 인원은 305명이었다. 

재판까지 간 사건은 불과 38건이었는데 그마저도 무기징역과 사형은 한 건씩밖에 없는데다 무죄 6건, 형 면제 2건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나마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판결이 난 경우는 40건, 실제로 감옥에 가서 처벌을 받은 경우는 고작 14명에 그쳤다. 

친일파들 대부분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아예 재판도 받지 않은 것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는 한국의 반민특위에 대해 요약한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은 한마디로 고여 있는 정치 집단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공직을 가졌던 이들이 국정 운영의 기술자로 불리며 이미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49년, 경무에서부터 사찰 과장까지, 경찰 주요 부서에는 꼭 친일 전력의 경찰이 두루 포진했다.

아직 군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해방 직후의 남한에서 경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반대파에 대항할 기반과 여건이 불안정한 우파는 경찰 조직의 선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해방을 맞은 민족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장의 치안 유지에 골몰했다. 

맥아더는 제1호 포고령에서 '정부, 공공단체와 모든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라면 미군정에도 충실할 것이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미군정과 이해가 맞은 한민당은 미군정기 동안 경찰력을 상당 부분 장악했고, 남한 내의 권력 수단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여기에 오랜 해외 생활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이 손을 잡으면서 이 세력의 꼭대기에 섰다. 

그는 '친일파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하는 것이고 정부를 수립한 후 조치하는 것이 순서'라며 일단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무조건 뭉쳐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친일파는 기사회생하여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주류가 된다.

1949년 5월 말, 이승만이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보통 불러내는 입장이었던 이승만이 은밀하게 찾아가 건넨 카드는 감투를 이용한 흥정과 협상이었다. 

친일 피의자들을 대충 조사해서 내보낸 뒤에 정부로 들어오면 장관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죽이던 친일 경찰들을 기억하던 김 위원장은 분노하며 거절했고, 이승만의 위원장 회유가 실패하자 ‘6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에 동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서거나 협력한 친일파들은 해방된 이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공직을 가졌던 이들이 국정 운영의 기술자로 불리며 이미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49년, 경무에서부터 사찰 과장까지, 경찰 주요 부서에는 꼭 친일 전력의 경찰이 두루 포진했다.

군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해방 직후의 남한에서 경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반대파에 대항할 기반과 여건이 불안정한 우파는 경찰 조직의 선점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해방을 맞은 민족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장의 치안 유지에 골몰했다.

맥아더는 제1호 포고령에서 '정부, 공공단체와 모든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라'고 했다. 

여기에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라면 미군정에도 충실할 것이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미군정과 이해가 맞은 한민당은 미군정기 동안 경찰력을 상당 부분 장악했다.

남한 내의 권력 수단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여기에 오랜 해외 생활로 인지도는 높았지만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이 손을 잡으면서 이 세력의 꼭대기에 섰다. 

친일파 처단의 실패는 친일파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에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들을 처리한다는 명목 하에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누가 진짜 빨갱이인지도 모를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김철호 같은 반민특위 조사원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친일파의 모함으로 빨갱이가 되었고 일제의 개를 잡으려다 그 이빨에 물려 죽었다.

민족을 팔아넘긴 친일파가 유일하게 영웅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민특위가 체포한 305인의 친일 혐의자는 1950년 봄까지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렇게 친일파는 기사회생하여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주류가 된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1995) 네이버 두산백과.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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