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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6)> 유엔의 합법정부 승인 위한 막전막후...첫 국회 폭력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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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주둔 소련군 1948년10월 일방적인 철수 유엔 통보논란.
-이승만, 유엔의 대한민국합법정부승인위해 조병옥.장면.모윤숙을 파리에 파견.
-1948년12월12일 유엔총회 '大韓民國은 韓國의 유일한 합법정부' 승인...전국 축하행사.
-이승만정부 환영인 반면 김구.김규식은 한반도 분단고착된다 UN에 반대서한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물론 지난 2020년은 4.15 총선을 또 2021년 4월7일은 서울부산시장등 재보 선을 치른다.  이처럼 선거와 정치는 이제 참된 백성(民)이 군주(主)의 시대를 정착시킬 기회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각각 정부를 수립됐다.

남한은 광복 3주년인 그해  8월15일 '대한민국'으로, 북한은 이보다 26일 뒤인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남한은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북한은 김일성을 내각수상으로 뽑았다.

강대국들에 의해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린 뒤, 우려했던 분단의 비극이 현실화됐다.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의 군정청지배를 받으며 민주주의와 반러, 사회주의와 반미를 앞세웠다.

새로운 헌법과 정부조직법, 국회등을 조직했다.


이후 한국문제는 유엔 임시위원단의 보고서와 함께 1948년 12월 6일부터 파리에서 개최중인 제3차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서 토의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이승만의 외교시동

1948년 9월21일부터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유엔본부가 미국 뉴욕에 있지만, 당시는 유엔이 뉴욕의 본부가 없었다.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5.10 총선을 시작으로 파리 유엔총회일정에 맞춰 정부수립일정을 짰다.

이승만은  제3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장면(張勉)을 유엔대표단장으로, 조병옥(趙炳玉)을 대통령특사로 임명했다.

사실 이승만과 김구는 각각 다른 뜻에서 그해  9월21일부터 열리는 유엔총회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승만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정통성의 보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남북한을 통한 총선거를 다시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승만은 파리 유엔총회에 맞추어 헌법 제정 등 독립정부 수립의 일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막상 정부수립 작업을 완료한 시점에서도 유엔의 승인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그해 7월24일 초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은 직후인 7월26일에 워싱턴에 있는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렇다.

그는 파리 유엔총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파리에서 한국 승인을 절대로 반대하고 있으며, 캐나다도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반대를 주도하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뿐이 아닙니다. 

인도(메논)도 반대합니다. 이 세 나라와 시리아가 승인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한국을 영원히 ‘분단’시킨다는 것입니다. 

… 워싱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압력을 넣을 입장에 있지 않다면 영국은 두 영연방국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3대국 가운데 미국과 중국만 남게 되지요.

 … 만일 영국이 뒤로 물러설 경우 중국도 승인을 주저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면서 파리에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북한은 한 남한 사람을 수석으로 내세워 전 한국을 대표한다면서 그들의 대표단을 보낼 것입니다. 

… 캐나다는 시리아, 인도 및 우리에 반대하는 아랍 블록과 함께 북유럽 블록을 반대쪽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은 우리에게 반대하고 치열한 싸움이 예상됩니다.

 가능한 한 오스트레일리아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십시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금 앞장서서 우리를 반대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캐나다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 두 나라가 보조를 맞추고 있고, 인도가 뒤를 따르며 프랑스가 그 뒤를 따를 것 같습니다. 국내 선거에서 공산당의 표를 얻기 위해 소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지요.”
  
이승만의 이러한 상황판단은 올리버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조금은 과장해서 한 말인지 모른다.

국무부를 방문하여 관계관들과 회담한 올리버는 8월9일에 이승만에게 쓴 편지에서 “국무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태도와 또 박사께서 지적하신 다른 난점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국무부는 최선을 다하여 문제점들에 대처해 왔으며, 파리에서 유리한 결과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한국문제를 놓고 토의를 벌여 한국대표단의 참석요청은 가결했다.

반면  북한대표단의 참석요청은 부결했다.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참가를 가결한 것은 곧 대한민국의 합법정부승인안을 사실상 확정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통치시대가 개막하자, 설자리를 잃은 김구와 김규식도 통일독립촉진회 대표의 유엔총회 참석을 요구했으나 묵살됐다.

유엔총회에서 대표단 참석요청가결과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을 일주일 앞두고 12월5일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축대회가 열렸다.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그해 12월6일에 미국–중국–오스트레일리아 3국이 공동으로 제출한 '한국 독립 승인 결의안'을 상정, 3일 동안 토론을 벌였다.


한국 결의안은 대한민국의 합법 정부승인안과 직결, 그해 일요일인 12월12일의 총회 마지막날 회의에서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다. 

이승만은 즉시 방송연설을 통하여 "유엔총회의 한국 독립 승인 결의는 세계 사조에 새로운 세기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승만, "장면 대표단장임명과 김활란 적극신뢰"

이승만은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단 구성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승만은 위의 편지에서 종로 을구 출신의 국회의원 장면(張勉)을 대표단장으로 임명할 복안임을 알렸다.

이승만은 올리버에 보낸 편지에서 장면을 단장으로 임명하는는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장면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가장 쉽게 동의해 줄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꼭 유엔위원단의 동의를 얻을 필요는 없으나, 장면은 가톨릭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고 어디를 가나 가톨릭교회의 후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정 정당인도 아니었다. 대표단 구성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미군정부의 노블(Harold Noble) 박사를 미국 국방부 비용으로 파견하는 한국대표단의 전문 고문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노블은 미 국무부가 파리 유엔총회에 대비하여 제이컵스(Joseph E. Jacobs) 등 6명으로 구성한 한국문제 실무작업단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실무작업단이 작성한 한국문제에 관한 정책보고서는 유엔총회 개막 직전인 9월7일에 유엔주재 미국대표단에 전달되었다.
  
이승만은 한국대표단에 올리버도 포함시켰다.

노블은 자기와 올리버 가운데 한 사람만 참가하면 된다면서 올리버의 참가를 극력 반대했다. 

그는 파리에 가서도 회의 내내 올리버를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이승만은 한국대표단 인사들이 미덥지 않았다. 그는 9월10일에 올리버에게 그러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대표단 멤버들은 김활란(金活蘭)을 제외하고는 총회 안에서나 밖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예산 문제입니다. 되도록 많이 받아내려는 것이지요. 그들은 심리적인 게임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그들은 노블 박사나 다른 미국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나 믿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이 파리에서 유념해야 할 일들의 어두운 면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뿐만아니다. 이승만은 외무부장관에 충남천안출신 조병옥을 임명하려고 했다가 바꿨다.

그래선지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가운데서 이승만이 가장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조병옥이었다. 

미군정부 3년 동안 경찰 수장으로 일했던 조병옥은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 필리핀, 미국을 방문하고 유엔대표단의 고문으로 파리 유엔총회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된 뒤 이화장에서 처음 조각작업을 할 때에 조병옥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약속했다

당시 외무부 차관으로는 충남 금산 출신 임영신(任永信)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 3일 지나서 이승만은 조병옥을 불러 “외무부 장관보다 더 좋은 자리를 맡으라”면서 대통령특사로 각국을 순방하고 유엔한국대표단의 고문으로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자신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약속했다는 조병옥의 증언은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다.

조병옥에게 외무장관 자리를 약속하면서 이승만은 동석한 김성수(金性洙)에게 “조 박사는 외무부 장관 취임을 승낙하였으니 인촌(仁村)도 재무부 장관 취임을 승낙하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러한 조병옥의 말로 미루어 보면 조병옥에 대한 외무부 장관 약속은 김성수를 재무부 장관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한민당을 제압하려고 한 이승만의 노련한 제스처로 보인다.


한민당의 다섯 사람 총무의 한 사람이었던 조병옥은 경무부장직을 맡으면서 한민당의 당적을 버리라는 하지(John R. Hodge) 장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적을 유지했다. 

그러한 사정은 정부수립직후 8월18일에 프란체스카 명의로 충남부여출신인 임병직(林炳稷)과 올리버만 보라면서 보낸 만리장서로도 짐작할 수 있다.

프란체스카는 조병옥과 상대할 때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조병옥이 주로 지지해 온 것이 한민당 안의 흥사단 분자들이었다.

이 분자들은 하지 장군과 친근하게 협조했다. 하지의 으뜸가는 고문은 흥사단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썼다.

그것이 왜 하지 장군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행동을 했는지를 말해주는 이유라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조병옥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경찰행정을 둘러싼 조병옥, 윤치영(尹致暎), 장택상(張澤相) 세 사람의 쟁투를 조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라고 썼다.

그리고 조병옥과 장기영(張基永)은 널리 알려진 술고래였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은 그들이 술과 여자와 장광설을 동반하는 비싼 연회의 동양적 습성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통령특사 일행의 출발에 앞서 이승만은 정일형(鄭一亨)을 별도로 불러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조병옥은 풍류를 좋아하니까 말리는 한편 모든 일을 정일형이 직접 자기에게 보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 받기위해  두개의 팀을 가동했다.

장면을 단장으로 한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의 단장은 장면을 단장으로 했다.

또다른 한팀은 조병옥을 비롯한 대통령특사 일행이었다.

유엔총회 대표단은 정사(正使) 장면, 부사 장기영,  법률고문 전규홍(全奎泓), 수행원 김활란 4명이었다.

대통령 특사 일행은 정사 조병옥, 부사 정일형, 경제고문 김우평(金佑坪), 비서 김준구(金俊九) 4명이었다.


이들은 9월9일 오전에 함께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일본 도쿄의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한 다음 유엔대표들은 미국으로 직행했다.

조병옥이 단장인  대통령특사 일행은 도쿄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부처 초청 오찬회, 주일 미국대사 초청 만찬회, 도쿄 거류 동포들이 주최하는 간담회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맥아더 장군과는 두 시간가량 간담했다.
  
이무렵 북한도 유엔에 대표를 파견할 의사가 있음을 공표했다. 

곧 조선최고인민회의는 “만일 유엔에서 조선문제에 대한 토의가 있을 때에는 그 필요에 따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대표를 유엔에 파견할 수 있음을 정부에 위임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대통령 특사 일행은 9월11일 아침에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후에 상해 용화(龍華) 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에 일주일 체재하는 동안 특사 일행은 동양식의 융숭한 국빈대우를 받았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이종인(李宗仁) 부총통 이하 정부요인들이 참석하는 정중한 오찬을 베풀었다.

장개석 총통은 오찬후에 정부요인들을 머무르게 하여 특사 일행과 세 시간 동안 한국문제에 관한 간담회를 가졌다.

장개석은 정일형에게 “정 박사, 지금은 당신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부탁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협조를 부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항일전에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장개석에게 한국의 장래는 특별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9월18일에 마닐라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필리핀에서도 퀴리노(Elpidio Quirino) 대통령을 비롯한 필리핀 정부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방송국과 신문들도 큰 관심을 나타냈다. 퀴리노 대통령은 조병옥 대통령특사단 일행을 위해 대통령 관저에서 국가 만찬을 열기도 했다.
  
9월20일 밤 마닐라를 출발한 특사 일행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22일 이른 아침이었다.

장면 등 유엔총회 대표단은 9월15일에 뉴욕에서 퀸 메리(Queen Mary)호로 파리로 떠난 뒤였다.

 
◇...이승만, 미국의 모윤숙에게 파리 유엔총회가서 한국대표단 합류지시
    
친 이승만계인 문학가 모윤숙은 이 무렵 미국 뉴욕에 있었다.

뉴욕에서 열리는 세계 YWCA총회에 한국대표로 모윤숙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회의가 끝나는 대로 파리로 가서 유엔총회 한국대표단에 합류하라고 타전했다.


그리하여 모윤숙은 한국대표단 일행이 파리로 떠난 뒤에 혼자서 퀸 메리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한국대표단 일행이 탄 퀸 메리호가 셰르부르 항에 가까워졌을 때인 9월19일에 올리버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썼다.
  
 “모든 일이 화목하고 즐겁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장면과 김활란과도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의 아이디어들이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승한 많은 다른 나라 대표들과도 회합을 가졌습니다. 저는 특히 유엔의 감사관인 엘빈스(Elvins) 씨와 친해졌습니다. 이 이가 파리에 있는 대표들에게 우리를 소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시리아의 엘 수리(El souri) 대사와 아랍 블록의 대표들도 동승했는데, 우리는 그중의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명확한 언질은 거부했으나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권하기보다 이번에는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북한에서도 상당수의 인원이 파리에 나타날 것 같습니다. 성가실 것이기는 하나 그들이 어떤 해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대표들 사이의 일반적인 여론은,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소련의 무의미한 장난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올리버의 편지는 유엔총회의 결과에 노심초사하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일단 안도의 숨을 쉬게 했을 것이다.
  
반면 조병옥 단장의 대통령 특사 일행은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러나 면담을 요청한 특사단일행은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선거 유세로 워싱턴을 비워놓고 있어서 2주일 동안이나 대기해야 했다. 

그 사이에 특사 일행은 워싱턴과 뉴욕을 오가며 임무를 수행했다. 

러벳(Robert A. Lovett) 국무부 장관대리를 비롯한 국무부 관계관들, 펜타곤의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육군부 차관 및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 등과 회견도 가졌다.

이어  워싱턴 주재 외교사절 가운데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국가들의 대사와 공사를 예방했다.
  
이후 특사 일행은 중국과 필리핀 대사관의 후원을 받아 리셉션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보낸 초청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워싱턴 외교가의 저명한 외교관들과 정계 및 실업계의 주요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미국 언론들도 이를  크게 다루는등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특사 일행은 10월4일 정오에 30분가량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트루먼은 퍽 평민적이고 친절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사절단을 소개한 여러 통의 전보를 미국친구들로부터 받았다면서 일일이 낭독해 주었다.
 

트루먼은 또 한국정부에 대한 군사적 및 경제적 원조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는 말도 했다.
  
특사 일행은 이승만이 지정한 여정을 변경하여 파리로 가기 전에 캐나다와 영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유는 유엔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왔던 캐나다 대표 패터슨(G. S. Patterson)의 언동에 나타났던 한국정부 수립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캐나다 정부 수뇌부와 의견교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러한 조병옥의 독단적인 행동은 이승만이 우려하던 대로였다.
  
사절단은 워싱턴 주재 캐나다 대사의 소개장을 휴대하고 10월9일에 기차로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갔다. 

캐나다 수상대리 살로는 패터슨에 대한 한국인들의 견해는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적극 지지하겠다는 암시를 내포한 말을 했다.

 조병옥은 선거 출마로 부재중인 피어슨(Lester B. Pearson) 외상 앞으로 파리총회에서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남기고 10월13일에 살로 수상대리와 함께 캐나다 여객기로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는 외무차관 태닝과 극동국장을 만나 영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했다.

마침 개회 중인 영연방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사절단의 순방 취지를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조병옥 일행은 10월17일에 파리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단과 합류했다.
  
...유엔총회 개막, 한국문제 정식 상정...김구의 유엔총회에 편지
  
 제3차 유엔총회는 9월21일부터 파리의 사이요 궁전에서 개막되었다.

유엔총회가 개막되자 한국정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 유엔총회로 쏠렸다.

파리 유엔총회 때의 유엔 가맹국 수는 모두 58개국이었다. 

이 58개국이 소련을 중심으로 한 6개 공산국가와 나머지 자유진영 52개국으로 나뉘어 사사건건 길항하는 형국이었다. 

자유진영 52개국 가운데서도 아랍의 6개국이 하나의 종족 블록을 이루고 있었고, 지난날 대영제국의 관할 아래 있던 영연방 8개국도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큰 세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아메리칸 회의(Pan American Conference)로 단결되어 있는 20개국이었다.
  
9월23일에 열린 총회운영위원회는 소련이 반대하는 8개 문제를 포함하여 65개 세계문제를 총회의 토의사항으로 결정했다. 

그 가운데서 세계의 관심을 끈 중요한 문제는 ▲베를린 봉쇄 문제를 비롯 ▲그리스 문제 ▲원자력 국제관리 문제 ▲군비축소 문제 ▲팔레스타인 분쟁조정 문제 ▲한국 독립 승인 문제였다.

운영위원회는 한국문제를 상정할 것과 한국대표단을 옵서버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시킬 것을 12 대 2로 가결했다.
  
유엔총회 운영위원회가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회의에 상정하고 한국대표단을 옵서버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시키기로 결의하자 국회가 감사문을 보냈을 만큼 국민의 관심이 컸다. 


국회는 9월24일에 유엔총회 의장에게 감사문을 보내고 한국대표단에도 격려문을 보내는 등 유엔에 대한 기대가 한결 고조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통일독립촉진회를 이끌던 김구·김규식은 9월27일에 경교장에서 상무위원회를 열었다.

회의끝에 양 김씨 공동 명의로 리(Trigue Lie) 유엔사무총장에게 남북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제시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편지는 먼저 유엔의 기대는 하나도 성취된 것이 없고 동족상잔의 위기가 박두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3천만 한인은 유엔의 감시하에 완전한 자유 분위기로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실행하고 이 총선거에 의하야 피선된 대표로서 외국의 간섭과 신탁이 없이 완전한 민족자결과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한국의 통일적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협조하라는 작년 11월14일부 유엔총회의 결의안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회의 기대는 하나도 성취된 것이 없이 한국에 있어서 국토의 분열은 더욱 심각화하고 민족의 감정은 더욱 첨예화하여 동족상잔의 위기가 박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독립촉진회의 대표를 유엔총회에 참석시킬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이번에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가 작년 11월14일부의 한국 독립원조에 대한 결의안의 정신을 관철할 것을 확신하거니와 귀회에서 한국문제를 다시 토의할 때에 어떤 한인이든지 자유의사로 말하라면 반쪽 조국 위에 세워진 정부를 자기의 통일정부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그 정부가 자기들의 행복을 줄 것이라고 승인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귀회에서 한국문제의 좀 더 정당한 해결을 얻기 위하여는 한인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청취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통일과 독립과 평화의 조국을 건립하기 위하야 남북을 통한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조직하려는 다수 한인의 대표적 의사를 귀회에 충분히 진술하기 위하야 본회는 본회의 대표를 귀회에 참가시킬 것을 견결히 요청합니다. …”
  
이러한 편지에 이어 한국독립당은 다시 중앙위원회의 결의로 유엔총회에 보내는 김구 주석 명의의 메시지를 작성하여 유엔위원단에 전달했다.


이는 김구나 한독당 인사들이 유엔총회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1) 미-소에 편의(偏依)하지 않고 진정한 민중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한인대표에게 유엔총회에서의 발언기회를 부여할 것.  
  (2)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고 진공기간에는 유엔에서 치안의 책임을 질 것.  
  (3)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야 남북을 통한 통일적 중앙행정기구 수립방안을 작성할 것.  
  (4) 유엔감시하에 절대 자유분위기를 조성할 것.  
  (5) 남북에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할 것.”
  
김구는 유엔총회에 이러한 메시지를 보낸 이튿날 전남 광주 지역에서 개최되는 한독당 간부 강습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광주로 갔다.
  
광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도 김구는 “한국통일은 유엔총회에서 남북총선거의 원칙으로 실시해야만 평화적으로 될 것이다. 

통일촉진회에서 요청서를 보낸 것도 이것을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단정을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유엔에 보낸 김구 편지, 소련군 철수놓고 이승만과 김구 날선 대립

김구·김규식의 이런 태도에 대하여 이승만은 격분했다. 


그해 10월6일에는 정부대변인 김동성(金東成)이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8일에는 외무부 장관 장택상이 “민국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행동을 계속할 경우에는 사직의 활동을 단연 요청하겠다”라고 경고했다.

이는 이승만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나아가 10월8일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이승만의 내외 기자단 회견에서도 양 김이 유엔총회에 편지를 보낸 문제가 거론되었다.

기자회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자들은 '양 김씨가 유엔에 편지를 보낸 일과 관련하여 정부대변인이 유감의 뜻을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에 대하야 대통령은 어떤 방안을 세우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양 김씨의 유엔 송한(送翰)에 대해서는 별로 방안을 세운 것은 없다.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정부를 세운 것은 인구비례로 보아 남북통일정부라고 공포했다. 공산당에서는 북한의 정부를 주장하나 남한정부가 통일정부인 것을 우리는 주장하니, 어떠한 한인이든지 이남정부를 통일정부로 믿어야 한다. 

 어쨌든 정부가 있어야 나라를 세울 것이니, 이남정부를 반대하고 이북정부를 찬성하는 자는 절대로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은 이어 어떠한 방법을 취하더라도 두 김과 합작할 수 없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이승만은 “개인적 관계는 하등의 변함이 없으나 정책과 노선이 서로 다르므로 이것이 합치되기까지는 도저히 합작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어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의 주장은 소련은 무조건하고 즉시 철퇴하고 미군은 치안유지상 지장이 없을 때까지 주둔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퇴하면 미군도 철퇴한다고 하여도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요 미-소 양국이 행한 것이며 그 책임은 미국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진 미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철퇴하여야 될 것이다.

 또한 북한에는 20만의 공산군이 조직되고 있는데 대하야 남한에는 미군이 앞서 우리의 군대조직을 허가하지 않은 관계상 아무 준비가 없다. 앞으로 치안을 유지할 상당한 국방군이 조직되면 철거하라는 것이니, 이것도 미국의 책임일 것이다. …”
  
때를 맞춰 소련은 북한대표단의 유엔총회 참석이 부결된데 반발하듯 소련군정청의 해체와 소련군 철수를 일방통고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소련은 그해 10월 중순부터 시작해 1949년 1월1일까지 북한 주둔 소련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며 미국도 주둔군의 동시철수를 제의했다
  
이승만은 바로 소련군의 철수는 당연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만일 소련군이 금년 말로 북한에서 철퇴키로 결정하였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이익과 기타 관계 제국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네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벌써 이런 조치가 있었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필요 이상으로 하루라도 더 주둔치 아니할 것을 나는 아는 바이다. …”
 

그러면서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과 어떤 협정을 맺을 때에는 반드시 한국과 먼저 협의해야 된다고 다음과 같이 못 박았다.
  
 “나는 미국이 우리와 의논함이 없이 어떤 협정을 함으로써 소련의 책략에 함입(陷入)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미 간의 상호방위에 대한 성문된 협정이 없다지만 우리는 오히려 한-미 양국의 상호안전보장을 위해서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일해 왔고 또한 민주주의적 제 기관의 보존을 위해서 노력해 왔다. 대한인은 이 원칙에 충실하기 위하야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 온 것이다. …”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김구는 “소련군이 철퇴를 선포한 것은 한국민족이 무엇을 갈망하고 주장하고 있는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정치행동이다. 미국의 정책은 매양 늦은 감이 있다.

미-소 양국은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한국민족 자신의 요구에 순응할 만한 성의를 가져야 될 것이다”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미국을 은근히 비판했다.
  
김규식 역시 “외군이 하나라도 철퇴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화가 될는지는 명년 1월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소련의 발표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헌국회의 첫 폭력사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이끄는 국회는 그해  10월13일의 본회의에서 제출된 ‘외군철퇴요구안’의 처리를 놓고 개원 이래 처음으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제87차 국회 본회의는 하루 전날 전남 광산 출신의 무소속 박종남(朴鍾南) 의원 외 46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연명으로 제출한 ‘외군철퇴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의 처리문제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의안’의 요지는 “유엔총회는 총회 자신이 결의한 1947년 11월14일의 기록을 회상하고 한국에 대한 외군철퇴의 조항을 급속히 정상적으로 실천하도록 되기를 요망한다”는 것이었다.

회의 벽두에 의사국장은 이 ‘동의안’을 국회법 규정에 따라 외무국방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제안자들은 “본회의가 즉석에서 난상토의하여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절차를 둘러싼 갑론을박으로 회의는 중지되었다.
  
오후에 속개된 회의는 의사일정을 변경하여 지방행정조직법안 일부를 처리한 다음 ‘동의안’ 문제를 다시 논의했다. 


그러나 찬성파와 반대파의 극한 대립 속에서 단상에서는 폭력사태가 벌어져 신익희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국회는 속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신문'의 고정란 '국회스냅'의 다음과 같은 가십 기사는 이렇다.
  
 “외군철퇴 건의안을 위요하는 감정은 드디어 폭행으로 퇴보-. 박종남(朴鍾南)군(당시는 국회의원이나 시장.군수등도 호칭을 군으로 표헌함) 왈 ‘건의 내용이나 알고서 말해요’라고 하면서 낭독하려 할 때에 서우석(徐禹錫)군, 최석화(崔錫和)군 등 연단에 쇄도하여 박군을 끌어내리려고 엎치락뒤치락-.
  
 이때에 격정의 청년 이구수(李龜洙)군, 쏜살같이 달려들어 최석화군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죽일 놈’이라고 매언(罵言)을 퍼부으며 도전-. 김옥주(金沃周)군, 박윤원(朴允源)군도 발언 방해자를 제재하려고 살기에 충만-. 형세 이렇고 보니 신(申) 의장 경호원의 출동을 발령하기까지 되어 사태는 겨우 그럭저럭 진정-.
  
 ‘공산당의 모략’이라고 부르짖어 장내를 혼란케 한 장본인 김재학(金載學)군에게 난데없는 괴상한 전화-. 즉 14일 상오 2시경 전화로 괴한이 가로되 ‘김군에 대해서 사형 언도가 발령되었다’고 통고하였다고-.
  
 ‘외군철퇴 건의안’에 연명한 한민계 소장파 노일환(盧鎰煥), 장홍염(張洪琰), 김옥주(金沃周) 3군을 한민의 책사 서상일(徐相日)군이 모처에 불러 쑥덕쑥덕-. 동군들의 앞으로의 태도가 주목처-.”
  
그것은 한국 의회민주주의의 원죄인 국회 폭력의 효시였다. 


당시 김구는 이 국회 폭력 사태에 대해 논평을 냈다.
  
 “민중의 앞에서 약속한 자기들의 정견을 주장한 것으로 본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자는 과거 3년간 미-소 양군철퇴를 주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외군철퇴를 주장하는 것이 애국자로서의 양심적 행동이다. 공산군이 쳐들어올 것이 두려워서 외군의 주둔을 원한다면 이는 반탁이념에 배치되는 것으로 가도멸괵(假道滅虢·다른 나라의 길을 우선 빌려 쓰고 나중에 그 나라를 쳐서 없앰)의 화를 당할 위험이 없지 않다. 무원칙하게 철퇴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소위 진공기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적절한 국제적 약속이 요청되는 바이다...”

    
한편 한국대표단은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각국 대표들을 만나 설득하고 찬성표를 점검하느라고 불철주야 동분서주했다.

대표단은 늦게 도착한 모윤숙까지 합하여 아홉 사람뿐이었다. 이들은 만날 사람들을 나누어 맡았다. 

국회사무총장 전규홍은 유엔총회 진행을 궁금해하는 이승만의 소환에 따라 10월31일에 파리를 떠나서 11월14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각국의 수석대표 방문을 담당했던 그는 떠나올 때까지 10여 일 사이에 28명의 수석대표들을 만났다.

장면과 조병옥은 같이 인도 수상 네루(Jawaharlal Nehru)를 만나기도 했는데, 외교 관행을 무시하고 진지한 논쟁을 벌인 결과 네루는 인도대표단을 모아 놓고 한국문제에 기권하지 말고 동정투표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0월12일자로 된 올리버의 편지는 이승만의 마음을 한결 느긋하게 만들었다. 

올리버는 10월 둘째 주말을 이용하여 사흘 동안 런던을 다녀왔다.

외무성 극동국 수석공보관, 유명한 시사 주간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편집장, 몇몇 신문의 논설위원 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요일은 중국 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이어서 중국대사관에서 기념 리셉션이 있었는데, 올리버는 그 자리에서 우연히 영국 외무상 베빈(Ernest Bevin)을 만났다.

그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빈에 대해 “올리버는 아주 점잖은 사람이며 틀림없이 대한민국 승인 문제를 전폭적으로 찬성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흡족한 이승만은 10월27일에 올리버에게 보낸 답장에서 “나는 당신이 영국의 베빈 외상을 만난 것이 매우 기쁘고, 좀 더 머물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성싶습니다”라고 써보냈다.
 
그러나 파리 유엔총회의 한국문제 토의는 총회가 개막된 지 두 달이 넘도록 뒤로 미뤄졌다.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11월12일의 정례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기자들은 '유엔파견대표단으로부터 한국문제의 정식 심의에 앞서 어느 정도까지 낙관하는 보고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특별히 낙관적 보고라고 할는지는 모르나 대표단으로서나 방관자 측에서나 동일한 관찰을 가진 것은 유엔총회의 결의가 총선거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진행해서 세우는 정부는 남북통일정부로 인정하고 국회 안에 1백명의 자리를 비워놓고 이북 한인들이 선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니, 오늘까지 진행해 온 것은 그 결의대로 된 것이므로, 유엔은 자체의 위신으로 보든지 법리상 공의(公議)로 보든지 또는 세계 대세에 비추어 보든지, 그 근본적 정책에 변동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한국에 온 유엔대표단이 유엔총회에 제출한 것은 미 주둔군을 얼마 동안만 더 있게 하라고 청구하였으니, 어디로 보든지 유엔정책이 약체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 귀국한 전규홍은 11월15일 유엔총회의 진행상황을 국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문제는 토론석상에서 다소 논쟁이 있을지도 모르나 결국은 대다수 표로서 승인을 받을 것이라는 나의 확신을 전달한다.

 이번 유엔총회에서는 원자력문제, 베를린문제, 군축문제로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며, 동서 유럽 간의 알력은 여기서 듣는 보도로서는 짐작 못 할 만큼 악화되고 있다. 

일부 약소국 대표는 회의가 지지부진이므로 11월 중순에 일단 휴회하고 명춘에 레이크석세스에서 회의를 재개할 것을 제의한 바도 있었으나 아직 회의는 더 계속될 것이며, 금주 내로 한국문제는 유엔총회의 조상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특히 유엔에 전해지는 뉴스 중 이번의 여수 사건과 국회와 정부 간의 불일치는 유엔 각 대표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다.

 나는 유엔에서 우리 문제가 최후적으로 결정되기까지 국내가 일치 합력하여 우리 자신 간에는 완전히 일치되고 통일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 이승만 정부, 국민 안심시키려고 미군 주둔 요청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국회는 그해 11월17일 본회의를 열어 전규홍의 보고를 들었다.

이후 이날 충남 예산 출신의 무소속 윤병구(尹炳求) 의원 외 87명이 제출한 ‘유엔총회에 보내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결의안의 내용은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한국민족을 대표하여 감사의 뜻과 1947년 11월15일의 유엔총회의 결의와 1948년 2월26일의 소총회 결의에 의한 5·10선거로서 성립된 대한민국 국회 및 정부는 한국민족의 총의라고 천명한 것이었다고 했다.
  
유엔총회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 토의가 지연되자 국회는 12월1일에 가서 충남 논산 을구 출신의 무소속 최운교(崔雲敎) 의원 외 54명이 제출한 긴급동의를 가결했다.

이어 11월17일의 결의문은 더 강력했다.
  
이승만은 11월24일에 외국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한국이 국방군을 건설할 때까지 미국이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고 확약할 것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우리는 미군에 대하여 조력을 요구할 당당한 권리가 있다. … 나는 미국에 대하여 북방의 소련인들과 싸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과 소련인들에게 정신적인 효과를 주기 위하여 한국에 일부 군대를 주둔시킬 것을 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한국 기자들이 한국문제가 아직 유엔에 상정되지도 않았고 결의도 없는데, 미군 주둔을 정식 요청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이승만은 대답했다.
  
 
 “양군 철퇴문제에 관해서는 최초에 미국 측으로부터 그 철수의도를 표명한 바 있었으나 소련 측의 불응으로 실현이 못됐다.

 그 후 북한에 공산세력을 부식 완료한 소련이 양군 동시철퇴를 주장하였으나 남한 적화의 의도를 간취한 미측도 이에 응치 않게 되었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면 그 결의에 따라 90일 이내에 외군 철퇴 실현이 가능케 되리라는 소식에 북한 공산세력의 남벌(南伐)을 기우한 민중이 점차 증대되어 감에따라 일반 민중의 안도감을 초래하려는 조처로서 미군 주둔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한국문제가 유엔정치위원회에 상정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국민에게 황당한 뉴스가 전해졌다.


일정상 한국문제 토의는 내년 봄에 레이크석세스에서 열릴 후기회의까지 연기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김활란은 12월1일 밤에 이승만에게 다급한 전보를 쳤다.
  
 “시간의 긴박성에 비추어 유엔정치위원회는 오는 5일 한국문제를 명년 1월 말까지 연기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는 현재 개회 중에 있는 유엔총회가 폐회되기 전에 전보로 한국문제를 이번 총회에 즉시 상정시킬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김활란의 전보와 관련, 이승만은 12월3일은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파리총회에 한국문제의 조속한 상정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어찌해서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지금 결정 못 한다는 것을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미국이나 한국은 유엔의 결의안을 철저히 준행하여서 성공된 것으로 세계가 다 아는 바이다.

 유엔은 지금에 이르러 그 순서를 고칠 수도 없고 또 물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결의안을 통과하기에 많은 시간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구든지 비평하기를 원치 아니하나, 유엔회원 중에 세계민주주의 안전을 긴절히 여기지 아니하는 분들이 파리에서 성공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분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민주정권에 의하여 계속하여 싸우는 것을 원하는가 공산테러에 조용히 양보하기를 원하는가. 공산 적색테러분자들이 도처에서 살인 방화로 우리를 공포시켜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을 그분들은 모르는가. 이것을 안다면 도의상 효과를 위해서라도 곧 한국문제를 결정해서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한국사람들을 권장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공산당은 어디서든지 공산화시키려는 공작에 시간을 요구하는 법이다. 유엔이 우리 한국문제를 연기해서 시간을 줄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간절히 세계의 우방인 민주국가에 호소하노니, 우리를 이때에 적극적으로 도와서 한국 민주주의를 유지케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승만은 뒤이은 기자회견에서 파리 유엔총회는 12월11일로 종료한다는데 만일 그때까지 한국문제가 상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앞으로 어떤 외교조치를 취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아직까지는 이 안건이 유엔에서 작정될 줄로 믿고 있는 터이므로 혹 지체될 염려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다.”

◇...가까스로 상정된 한국문제, 마지막날 48 대 6으로 가결
  
한국문제는 전반총회의 마지막 주일인 12월6일의 정치위원회 제225차 회의에 가까스로 상정되었다.

총회 제1위원회인 정치위원회는 유엔회원국 전체가 멤버였다. 

한국문제가 유엔정치위원회에 상정되자 이승만은 12월7일에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우리 우방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세계 각국에는 우리와 우방적인 국가가 비우방적인 국가보다 많다. 

 때로는 우리 우방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대하여 최소한으로 도의적 원조를 주는지 안 주는지를 의심하는 바이나, 공동보장을 믿고 있는 나라는 전부 서로 조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의 안전을 위한 유일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와 우리 자체의 지지방어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유엔 내의 민주국가 대표들은 우리에게 도의적 원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을 것을 믿는 바이다.”

유엔정치위원회 한국문제 토의에는 먼저 두 개의 동의가 제기되어 논란을 벌였다.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제의한 동의로서 북한대표를 초청하여 유엔정치위원회의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시키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제의한 동의로서 의장의 직권으로 대한민국 정부대표를 이 위원회에 초청하여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10월7일에 박헌영(朴憲永), 홍명희(洪命憙), 이용(李龍), 홍기주(洪基疇), 박정애(朴正愛) 5명을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할 대표단으로 임명하고 외무상 박헌영 명의로 10월8일과 9일 두 번에 걸쳐 유엔사무총장 리와 제3차 유엔총회 의장 에벗(H. V. Evatt)에게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시킬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또 프랑스 외무상 쉬망(Robert Schuman)에게 프랑스 입국 사증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총회는 이들의 총회 참석 요구를 거부했고, 프랑스 정부도 이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까지 가서 3개월 가까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헌영의 유엔총회 참석 요구에 관한 뉴스는 남한 신문에도 보도되고 있었다.
  
두 동의에 대한 표결 결과 체코슬로바키아 동의는 찬성 6표, 반대 34표, 기권 8표로 부결되고, 중국의 동의는 찬성 39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노심초사하며 기다린 축복의 첫 단계였다.
  
이어 회의장에는 미국과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으로 제안한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회부되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일원으로서 서울에서 활동할 때에는 사사건건 비협조적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발의국이 된 사실에 대해 한국대표단은 감격했다.

결의안의 핵심 항목인 (2)항의 문면은 다음과 같았다.
  
 “(2)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했고 전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한국의 부분에 효과적인 지배권과 통할권을 가진 합법적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이 정부는 이 지역 유권자 대부분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현된 동시에 위원단에 의하여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 정부만이 한국에서 그러한 유일한 정부(;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것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 문면은 다툼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앞 부분에서 말한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했고 전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한국의 부분이란 남한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그러한 지역, 곧 남한에 수립된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는 뜻이 된다. 그러고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한국에 수립된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고 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에 걸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문장의 작성자들은 5·10선거에 대한 국내의 단독정부 논란을 감안하여 고심 끝에 녹비에 가로왈자로 이처럼 기묘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개연성까지 이때에 이미 상정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승만과 김구가 이 시점에서 각자 유리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남한과 북한은 1991년 가을에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결의안은 그 밖에 (1) 임시위원단 보고의 결론들을 승인하고 (3) 점령국들은 가능한 한 조기에 한국으로부터 그들의 점령군을 철수할 것을 권고하며 (4) 1947년 7월14일자 총회결의에 설정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방법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필리핀, 시리아로 구성되는 유엔한국위원단(UNCOK)을 설치하여 임시위원단의 업무를 계속하고 (5) 한국위원단은 30일에 이내 한국에 부임하여 임시위원단을 대체한다는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유엔정치위원회는 한국결의안을 두고 사흘 동안 갑론을박을 벌였다. 

공산권 대표들은 번갈아가며 판에 박은 말을 두세 시간씩 지루하게 되풀이하면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연설)를 벌였다. 

의사일정을 넘겨 한국문제 토의를 다음 회의로 미루기 위해서였다. 

미국 수석대표 덜레스(John F. Dulles)를 비롯하여 중국 수석대표 장정불(張廷黻)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장 유어만(劉馭萬) 대사, 국제적으로 알려진 웅변가인 필리핀 수석대표 로물로(Carlos P(ea) Romulo) 장군,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수석대표 플린스콧(Jim Plinscott) 등이 이들과 맞서 열변을 토했다. 

한국대표단이 얼마나 초조했을 것인가는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역사는 언제나 파스칼이 말한 클레오파트라의 코다. 

유엔정치위원회가 12월8일의 야간회의에서 한국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수석대표 비신스키(Andrey J. Vyshinsky)의 감기와 치통의 영향이 컸다.

정일형은 “비신스키가 감기와 치통이 겹쳐서 급작스레 자리에 눕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 결정에 확실히 행운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비신스키뿐만 아니라 소련 부대표인 말리크(Yakov A. Malik)도 심장쇠약증으로 의사로부터 정양 권고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표결한 결과 한국결의안은 찬성 41표, 기권 6표로 가결되었다.

외무부 장관 장택상은 12월9일의 국회 제125차 본회의에 나와 유엔정치위원회의 결과를 보고하자,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국문제 결의안이 총회에 상정된 것은 전반기 최종일인 12월12일 오후 3시였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다가 비가 장맛비처럼 계속 퍼붓고 있었다. 한국대표단은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결례를 무릅쓰고 다른 나라 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서 그들의 잠을 깨웠다.
  
호명식으로 진행된 표결 결과는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였다.

기권국은 스웨덴이었다. 3개국이 표결에 불참했는데, 이 나라 대표들은 폐회 전에 귀국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련 블록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만장일치로 한국을 지지해 준 셈이었다. 

그런데도 소련은 유엔한국위원단의 한국 파견을 중지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 동의안은 찬성 6표, 반대 46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월요일인 12월13일에 수석대표 장면은 이승만의 재가를 받고 대한민국의 유엔회원국 가입을 신청했다.

그러나 한국의 유엔회원국 가입신청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부결되었다.
  
유엔정치위원회의 결정을 보고받은 이승만은 흡족했다.

그는 12월10일 오전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가진 내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피력했다.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가 세계 여론대로 결정된 것은 새로운 세기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크게 부여했다.
  
  “한국이 유엔정치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승인을 얻은 데 대하여 일반 동포나 나의 친구들이나 모두 잘되었다고 기뻐하므로 나도 기쁘다. 이번 결과는 1년 전 유엔총회의 한국문제 결의대로 유엔이나 우리가 실행하는 데 조리 있게 지켜왔기 때문에 온 것이다. 

 나로서 한 가지 염려한 것은 과거 50여년간을 두고 세계 정치대가들이 주장한 평화만을 위한 완화정책으로 인한 양보로 세계전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평화를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 왔기 때문에 일본 같은 침략국이 양성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 완화정책으로 인하여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번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정식으로 승인된 것은 이런 평화정책을 뒤집어서 전쟁을 하더라도 세계적인 공의를 살려야 한다는 정의감에서 연출된 것이다.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서 세계 공의로 집행된 것은 세계 사조에 새로운 세기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가 이런 정의의 길로 나간다면 세계에는 새로운 평화가 재래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하는 일은 세계를 새로운 길로 지도하기 때문에 세계평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공의를 국가와 국가의 실천에 옮기는 데서만이 평화가 올 것이므로 유엔에서는 세계평화 수립을 위하여 적당한 법을 제정하여 대소 국가를 막론하고 평화를 무시하는 국가는 징벌하여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이어 12월11일에는 국민들을 상대로 파리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가 다루어진 경위와 그 의의를 자세히 설명하는 방송연설을 했다.

이승만은 먼저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결의는 세계 여론의 승리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유엔에서 우리 문제를 결정한 것은 우리 모든 우방 되는 나라들이, 즉 말하자면 5, 6개국 소수를 제해 놓고는 전 세계가 다 잘된 줄로 여기는 중이니, 이는 세력의 강약을 막론하고 공의를 세워서 시비를 공정히 판단하게 된 것을 다 환영하는 연고입니다. 

 가장 우리로는 지나간 40년 동안 불공평한 세계 대세에 압박을 받아 억울한 대우를 참고 지내오던 터이므로 기쁜 마음을 더욱 말로 형언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포는 남북은 물론 하고 관민 일체로 전국이 합해서 크게 경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이승만은 이어 이번 유엔결의의 근거가 된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한 감사를 표명했다. 


이승만은 “이 대표단이 5·10선거 전후를 두고 그중에 두셋 단원들이 다소 이의가 있어서 우리가 많은 우려를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파리에서 이 문제가 제출되면서 이분들이 다 태도를 일변해서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단장 유어만, 필리핀 대표단장 로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단장 플린스콧 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 후 국민 경축분위기...그러나 김구 등은 거부

 “공산당이 앞서서 나를 환영할 때에 앞길이 캄캄했다”
  
이승만은 이어 우리 남녀 동포와 전국 청년들의 애국 성심에 감사한다고 전제했다.
  
 “내가 3년 전에 처음 귀국해서 보니 전국이 다 인민공화국이 된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공산당들이 먼저 앞서서 나를 저희 대통령이라고 환영하며 떠들 적에 앞길이 캄캄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스크바 삼상결정이라, 신탁통치라 하는 모든 조건을 하나도 고칠 수 없는 법이라 하여 우리 민족을 겹겹이 속박하여 놓았을 적에 우리는 오직 앞이 보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중에서 민심이 순리로 돌아서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며 반탁운동이 처처에 발로되어 필경 태산대해(泰山大海) 같은 장해가 다 춘풍에 얼음 녹듯 없어지고, 5·10선거를 충분히 진행하여 국회를 세워 정부를 우리 손으로 조직하여 정권이 일일이 이양되어서, 모든 우방의 원조로 파리에서 대성공한 축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승만은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그랬듯이 이날의 방송연설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경고를 조근조근 피력했다.
  
  “아직도 애매한 사상으로 남의 선동에 빠져서 공산당이 일후에 성공하리라는 관찰로 국가독립은 어찌되었든지 공산당에 붙어서라도 잘살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의로 파괴운동을 응원해서 공산분자와 불충분자라 하는 지목을 들어가며 남의 노예 되기를 달게 여기는 남녀가 지금도 우리나라에 있다면, 이 사람들은 이제부터 크게 각성해서 어리석은 것을 깨닫고 다 귀화하여 우리와 같이 악수병진(握手竝進)함으로써 국권을 공고히 세우며 민생개량을 하루바삐 성취하여, 다 같이 자유복락을 누리기로 결심할 것이며,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다 같이 각오해서 우리 3천리 강산에서는 자유로 지낼 수 없는 것을 깨닫고 하루바삐 국경을 떠나서 어디로 가든지 잘살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권고하는 바입니다.”
   
 좌우합작 그룹과 남북협상파에 대해서는 언급했다.
  
  “기나긴 3년 동안에 우리 앞길이 밝아 보이지 않을 때에 혹 중간노선으로나 혹 우익진영으로나 다소간 우리와 대치되는 주의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남북통일을 달성한다, 국권회복을 다른 방식으로 이룰 수 있다 하여 여러 가지로 도모하던 정당이나 단체나 혹 개인이 있다면 지금부터 다른 의사와 방법을 다 폐지하고 우리의 나가는 궤도를 다 같이 따라서 새로 성립된 민주정부를 함께 지지하며 같이 협조하여 전 민족의 사상과 행동을 통일시켜서 우리 우방들과 협조하여 하루바삐 중간의 장벽을 헐어내고 여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화복안위(禍福安危)를 다 같이 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한민족이 바라는 바요 또 애국자들의 직책일 것이니, 이와 같이 각각 의도를 선언하고 나설 때에는 우리가 다 의사의 차별과 단체적 지장을 타파하고 동주병진(同舟竝進)하여 만년 기초를 같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북동포들은 더욱 단단히 결심하기를 과거 40년 동안 왜적 밑에서 결심하고 있었듯이 마음으로 조직하고 정신으로 융통해서 절실히 준비하였다가 시기가 올 때에는 다 우리와 합심합력해서 동성향응(同聲嚮應)으로 악수병진하여 남북통일을 이의 없이 반대 없이 성취하기를 도모할지니, 불충분자 중의 몇몇 거괴(巨魁)를 제한 외에는 다 회개 귀화하여 함께 살기를 구할 것이요, 귀화하는 동포에게는 이왕 죄상을 다 막론하고 포옹해서 우리 조상의 유업인 3천리 강토를 완전히 회복하여 가지고 영원무궁 동락태평(同樂太平)으로 문명부강을 같이 누리기를 도모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김구와 김규식 그룹을 비롯한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에 켜켜이 쌓인 떨떠름한 감회를 토로한 것이었다.
  
유엔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온 나라는 축제 분위기로 넘쳤다. 공보처는 서둘러 경축 표어를 제정하여 발표했다.
  
  ○당당한 대한민국! 빛나는 유엔 승인!
  ○유엔에 감사하라! 대한민국 정부 만만세!
  ○사설단체 인공국은 즉시 해산하라!
  ○인조견은 인공국 본견은 대한민국!
  ○너도나도 무장하고 공산당원 타도하자!
  ○분쇄하자 38선 타도하자 인공국!
  
전국적으로 보급시킨 이러한 표어들은 유엔총회의 승인 결의를 계기로 반공정신을 강조하는 캠페인이었다.

12월15일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거행된 유엔 승인 경축대회도 그러한 성격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경축대회는 오전 11시40분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됐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인파로 행사 시작 전에 넓은 운동장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되었다.
  
12월4일에 서울시장에 임명된 윤보선(尹潽善. 59)은 대회장 오세창(吳世昌)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오늘은 민족의 결의를 가일층 앙양하며, 불순한 책략과 음모를 감행하는 공산계열의 파괴공작을 완전 배제할 것을 결의하며, 한국의 무한한 장래의 행복과 발전적 향상을 마음 깊이 경축하고자 본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승인으로 하여 한국은 완전 자주독립이 된 것이며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므로, 우리의 최대의 기쁨보다는 더욱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 즉 그것은 우리가 38선 장벽을 분쇄하여 남북의 통일을 관철하는 중대한 책무이다.
  
 삼천만 동포의 애국적 단결로써 총역량을 집결하여 가장 급속한 장래에,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북한을 회복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통일 달성에 매진할 것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문화, 국방, 치안 등을 조속히 정돈시키는 동시에 세계 제 국가 대열에 가입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국가가 되도록 용약 매진할 것을 삼천만 동포와 함께 맹세한다.”
  
이날 이승만은 축사에서 미국에 대한 감사를 특별히 강조했다.
  
  “오늘은 우리 3천만의 경축의 날이다. 우리나라를 승인한 유엔에 참가한 제국에 감사하는 동시에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감사치 아니할 수 없다. 과거 40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배하던 왜적으로부터 귀중한 피를 흘리며 많은 희생을 하여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준 것은 미국이었으며, 미국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해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우리를 해방시켜 준 미군은 그들이 점령하였던 이 땅을 조금도 차지하려고도 않고 도리어 그들은 해방 후 정권을 우리에게 이양하였으며, 우리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이 땅으로부터 물러 나가려 하였으나 우리의 요청으로, 또 우리 국가가 튼튼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좀 더 머물러 있게 되었다. 즉 우리는 금년 5월10일의 총선거로 우리 정부를 세워 이번 유엔총회에서 법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완전히 산 사람이 된 것이다. 법적 승인을 얻지 못하면 법률상 보호받을 수 없으며 타인을 고소할 수도 없음은 우리가 과거 40년 동안 경험하였다. 이제 우리는 유엔총회에서 법적 승인을 얻었으므로 법률상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 이로부터는 우리 3천만은 기미년의 정신으로 대동단결하여야 할 것이며 사리사욕으로 동족을 해치는 분자들은 단호히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유엔총회의 한국 독립 승인 결의로 미국과의 공식 외교관계 수립이 곧바로 뒤이을 이 시점에 열린 대규모의 군중집회에서 이승만이 무엇보다도 미국에 대한 감사를 강조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유엔 승인 뉴스로 인성만성한 분위기 속에서 정가의 눈길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경교장과 삼청장으로 쏠렸다. 

유엔총회에 심드렁해 했던 김규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14일 오전에 찾아간 기자들에게 김규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승인에 대하여는 물론 한인으로서는 기뻐하고 경하치 아니할 사람이 없는 줄로 믿는다. 이 승인은 국제적으로 40여 국가가 동의한 것이고 역사적인 유엔 국제회합에서 된 것이니만큼 1895년에 시모노세키(下關)조약으로 왜놈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하여 한국 독립을 승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또 이번에 한국이 승인을 받게 된 것은 미국과 중국 이외의 여러 우방의 성심 노력에 감사하며, 현실 한국정부와 그 대표단의 강렬한 활약으로 된 것을 혜사(惠謝)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승인은 과거 40여년 동안을 두고 남북 만주에서 우리의 독립군이 희생 분투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민족진영의 모든 애국자들이 한 목표로 분공(分工) 노력한 까닭인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의 완전한 자유를 얻을 때까지 더욱 성의적인 분공 합작이 청요된다고 본다.”
  
그는 또 새로 유엔한국위원단이 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작정된 한국위원단은 먼젓번 위원단과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철병 감시 책임도 같고 한국통일에 협조 노력할 사명도 같다. 그렇지만 한국통일이라는 것은 유엔위원단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한국의 통일은 한인의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앞으로도 무수한 난관과 어려운 계단을 밟아 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계기로 민족자주연맹의 노선에 변화는 없겠느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연맹의 결의로 각 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되어 있으니까 이제 별다른 변화가 없다. 본래 나의 노선이라는 것은 김구 선생과는 달랐던 것이다. 나는 본래부터 대한민국 정부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규식 개인이 부인한다고 될 것이 안 되고 내가 시인한다고 안 될 것이 된다는 법은 없다. 나는 다만 이제까지 불합작했다는 것뿐이다.”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으로 북한의 인공국이라는 것은 완전한 비적(匪賊)으로 규정되었는데, 앞으로 이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김규식은 뼈 있는 대답을 했다.
  
 “유엔은 유엔으로서 북한을 부정하였으며 나는 나로서 북한을 대할 태도가 있을 것이다. 본래 남북협상이라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해본 것과 같이, 만일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또 그들과 만날지 모른다. 정치라는 것은 꼭 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안 될 일이라도 필요하다고만 생각되면 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김규식의 병약한 학자정치가 이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김규식과는 달리 국민대표의 유엔총회 참석을 집요하게 주장하던 김구는 그 희망이 좌절되자 조용히 붓글씨만 쓰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유엔총회의 한국 승인 뉴스가 전해지자 한적하던 경교장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김구는 12월16일에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먼저 “유엔의 한국 승인은 영원히 기억할 만한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지난 12일에 유엔총회에서 결정된 원문을 보기 전에는 아직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절대다수 국가의 찬성으로서 한국을 승인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독립운동 과정 중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할 만한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된 완전 자주독립 국가로서 이 승인을 받았더라면’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흥분되는 바는 더욱 심각하다. 듣건대 한국에서의 양군철퇴를 감시하며 남북이 통일된 완전 자주독립의 국가 건설을 협조하기 위하여 새로운 유엔위원단이 1년간 주재할 예정으로 머지않아 내한한다 하니 그 호의를 대단히 감사한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 내한할 유엔위원단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새로운 한국위원단이 과거의 임시위원단이 해결하지 못한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기를 기망(企望)하는 바이다. 그들의 이러한 임무를 진행하는 도중에 3천만 한인의 절대다수가 동족 유혈이 없는 평화로운 전국 통일로써 자주독립의 조국을 건설하며 또 이 새로운 국가에도 언론 자유, 신앙 자유, 굶지 않는 자유, 공포를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라도 잊어주지 말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스스로 도울 줄 아는 사람을 돕는다 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남만 믿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 있어서 국내적으로 더한층 복잡해진 정치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통일을 실현하고 나아가 국제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쟁취함으로써 자주독립을 완성할 절박한 과업이 있다는 것을 간절히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
  
이처럼 김구의 유엔에 대한 기대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언급한 언론 자유 등 네 가지 자유란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1941년 1월에 표명한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김구는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외군의 조속한 철퇴를 주장하며 동족끼리 유혈이 없는 자주적 민족통일 독립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 노력할 것이요, 또 노력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 있어서도 민중의 병고를 다소라도 제거시킬 수 있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미성이라도 공헌할 수 있게 되며, 아울러 통일된 조국을 세우기 위하여 전 민족이 단결되게 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과 선열의 영 앞에 기원하는 바이다.”
  
김구는 한국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도리질을 했다.

"세계 각국이 모두 현 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 만큼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는 분단 정부이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1995) 네이버두산백과.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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