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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4)> 초대 이승만 내각과 정부 수립을 둘러싼 뒷 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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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총선.정부수립놓고 이승만과 김구의 영원한 결별.
-초대 내각은 전시때 행하는 거국내각... 조봉암.임영신등 입각.
-김성수의 제헌국회 최대정파인 한민당의 불만과 시시비비가리겠다는 조각비판 논평.
-맥아더 극동지역 미군 사령관, 정부수립식에 참석해 '朝美우호관계'천명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필름을 돌려 1948년을 돌아보면 그 해는 굵직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마치 아슬아슬한 국권을 다룬 드라마 같은 모습이 1948년 꼬리를 물었다.


좌우 이념의 대결 속에 연초 유엔에서 한국감시위원단을 파견해 남한 내 5.10총선을 결정하자 민족진영내 찬.반과 이를 거부한 김구.김규식진영의 보이콧으로 정국은 혼란했다.


이때 주로 이승만은 '이승만 박사' '이 박사'로 불렸고, 김구는 '김구 선생' '백범 선생'으로 불렸다.



우익계열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을 다녀온 김구·김규식일행에 대한 미 군정청과 이승만 진영의 음해, 여기에다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의 무력을 동원한 방해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4.3사태로 얼룩진 제주를 제외하고 5.10총선을 통해 제헌헌법과 정부조직법이 제정되고 제헌의회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뽑아 내각을 구성한 뒤 8월15일 정부가 수립됐다.

  
◇… 5.10총선의 씨앗과 우익 인사들의 결별 후유증들


그러자 9월에 북한역시 정부를 수립하면서 남북분단은 고착됐다.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려 같은 민족끼리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그해 제주·여수·순천에서 일어난 좌익계주도의 변란과 양민학살 등 곳곳에서 무력충돌을 빚었다.
 
남한은 이런 와중에 5.10총선을 시작으로 제헌국회개원, 그리고 이승만 정권 탄생과 8.15일 정부수립을 이뤘다.


해방 후 정부수립 때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는 작업은 물론 평양에 주둔한 소련군정과도 관계개선을 모색했다.


5.10 총선 전 4.3제주사태와 같은 해 10월 여순사건으로 국민을 불안에 몰아넣었다.


'남조선을 미군정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미명아래 전국 곳곳에서 빨치산( 무장게릴라)의 출몰과 습격이 잦았다.



물론 군·경 토벌대의 강경진압으로 선량한 제주도민과 여수, 순천시민의 학살 등으로 국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그해 말 유엔에서 남한 정부만을 합법정부를 승인했다.


이어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피습, 유명을 달리하면서 국민의 슬픔은 극에 달했으며, 친일 매국노와 민족반역자처단을 위한 반민특별법제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유엔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과 총선결과에 따라 대통령을 뽑아 단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안(案)을 놓고 찬·반에 휩싸였다.


이승만, 이시영 등은 5.10 총선을 적극 찬성하며 그해 1월부터 총선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김구, 김규식 등은 5.10 총선거부와 함께 남북통일주권국가 수립을 외치며 남한 내 단일정부수립에도 반대, 국민들은 우왕좌왕했다.
 
김일성, 김두봉의 북로당의 지시를 받은 충남 예산 대흥면 출신인 박헌영의 남로당은 단선(單選. 남한단일총선거),단정(單政. 남한단일정부)을 반대하며 시도별, 시군별 공개적으로 방해공작을 폈다. 


이 바람에 이승만 진영은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를 '빨갱이' 또는 '사회주의자', 심지어는 '빨갱이 앞잡이'로 모략했다. 


실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과 통일된 정부구성을 외치며 5.10 총선을 거부하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 협상하면서 미 군정청과 이승만 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양 김씨는 5.10 총선 직전인 그해 4월 20일부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협상을 벌이고 5월5일 귀환하면서 우익으로부터 큰 공격대상이 됐다.


김구는 자신을 남로당과 한패거리로 몰아세우는 이승만 진영과 우익 인사들이 야속했다.


남한 단일정부가 들어서면 북쪽도 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북이 갈라져 영영 남북통일국가가 세워지기가 어렵다고 우려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남로당도 공교롭게 김구·김규식의 5.10 총선거부와 남한 단일정부 반대라는 같은 입장이라고 해서 공격하는데 매우 불쾌해 했다. 


5.10 총선일 까지 전국의 경찰지서, 선거사무소, 투표소가 좌익과 남로당의 피습으로 인명살상과 건물·주택전소 등 혼란이 빚어졌다.


결국 미군정이 5.10 총선 하루전날부터 비상계엄을 발령하는 등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선거장마다  무장 계엄경찰의 삼엄한 경비가 전국에 펼쳐졌다.  


이승만·미군정 대(對) 김구·김규식·남로당의 모략과 음해, 비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정부수립 후에도 이승만진영은 김구를 '빨갱이' ‘반미주의자’로, 김구 측은 이승만을 '일제 못지않은 미국의 앞잡이'로 공격했다.


여하간 5.10 총선을 통해 정원 200명중 제주지역 2석을 뺀 198명의 제헌의원을 뽑아 그해 5월31일 역사적인 제헌 국회가 탄생됐다. 



제주지역은 1947년 3월1일부터 일어난 변란이 4.3사태로 이어져 결국 5.10총선에서 결과가 무효화 되면서 2명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1948년 5월 31일에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개원되었다. 


이승만 초대국회의장은 개원식 식사에서 이 국회에서 수립될 정부는 3·1운동으로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곧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라고 천명했다.


김구는 이를 두고도 "국회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강력 비판했다.


  
6월 2일에는 국회의원 30명과 자문위원 10명으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고려대 교수 유진오와 신익희가 조직한 행정연구회가 사전에 작성해 둔 초안을 토대로 3주일 만에 헌법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사이에 권력구조에 대한 사전협상 없이 작성된 것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 기초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본회의 상정 직전에 ‘비빔밥’식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헌법안 심의과정에서 가장 격심한 논쟁점이 된 것은 근로자의 기업이익균점권 보장 조항이었다.

 

이익균 점권 조항은 이승만의 조정으로 제헌헌법에 포함되었으나, 그 시행을 위한 법률은 1962년에 이 조항이 헌법에서 삭제될 때까지 제정되지 않았다. 

  
 7월 17일에는 국회의사당에서 헌법공포식이 거행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선출...김구 지지도 많아


온 국민의 관심사인 대통령과 부통령이 누가되느냐였다.

 

대통령과 부통령선거는 1948년 5.10총선 두 달여 뒤인 7월 20일에 열린 제33차 국회에서 치렀다. 
  
앞서 소개했듯이  당시 조선일보는 선거 직전의 국회 내 세 정파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했다.



“국회 내의 동향 및 항간에 이미 유포되고 있듯이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가 확실시라 하며, 부통령에는 이시영, 오세창, 김구씨 등이 논의되고 있으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을 것이나 물망 중의 인물은 신익희, 김성수(金性洙), 조소앙(趙素昻)씨 등으로 지목되고 있다. … 19일까지의 국회 내 각파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 한국 민주당계 = 19일 오전 11시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 독촉국민회 계열을 포함한 약 50명이 회동하고 사전 협의한 바 있으며, 따로 한민당원은 하오 2시에 당회의 실에서 회합하고 협의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시영씨를 지명 투표하기로 하였다 하며, 국무총리에는 김성수씨를 추천 공작중이라 한다. 
  
 ○ 무소속 구락부 = 17, 18, 19 연 3일간 회합하고 대통령에 이 박사, 부통령에 김구씨를 추대하고 국무총리에는 조소앙씨를 추천하기로 하였다 한다.
  
 ○ 독촉 국민회계 = 대통령에는 이 박사, 부통령에는 이시영씨를 추대하기로 하였다 하며, 국무총리에는 신익희씨를 추대할 것이라 한다. 
  
이로 보아 대통령에는 이 박사,  부통령에는 이시영씨가 유력시되나 절대 다수표는 독점하기 곤란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일부에서 서재필(徐載弼) 박사, 김구씨 등에게도 분산투표가 예상되는 까닭이라 한다. 


그리고 정·부통령 선출 후에는 국무총리 임명이 주목되는 바인데, 국회 내의 3파 세력의 각자 추천인물이 미묘한 관계와 그러한 점을 고려하는 이 박사의 태도는 규지할 수 없는바 예측키 곤란하다. 


여하 간에 국제정세로나 특히 국내정세로 보아서라도 불원간 북조선에서도 정부수립 기도 설이 전해지는 이때에 남북통일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명실상부히 유능한 인물의 등장이 긴요한 만큼 국회의원의 금일의 투표 여하는 중차대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선거결과는 이승만의 압승이었다. 



대통령 선거는 오전 10시25분부터 1시간가량 무기명투표로 진행되었는데, 재적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출석하여 투표에 참가했다.    


개표결과 180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김구는 13표로 차점이었다. 


그 밖에 안재홍(安在鴻)이 2표, 서재필이 1표였는데, 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가졌으므로 그의 표는 무효라는 서우석(徐禹錫) 의원의 긴급동의에 따라 만장일치로 무효로 처리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하여 대표적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서로 다른 논평을 보면 우익진영내에서도  여론의 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성수가 당수인 한민당계의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박사의 대통령 당선은 그 인망으로 보거나 국내 정국의 귀추로 보아 당연한 일이며 대외적인 신망으로 보아 국제적으로도 다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외국인도 박사에게 중임이 낙착될 것은 이미 예측한 것 같으며 또 미-소가 세계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정세하에서 박사 이외에 인물이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여하간 우리는 우리의 자율적인 의사를 가지고 대통령을 선출하야 정부수립을 앞둔 박사로부터 국민의 공복이 될 것을 우리는 또한 들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 있어서도 일생을 갖은 압제와 폭압에 굴하지 않고 고절(苦節)을 지키던 그 위대한 정신을 살려서 여생을 독립완수에 헌신하기를 바란다.”
  
한편 김구에게 호의적인 '조선일보'는 이처럼 논평했다.
  
 “국회가 남조선만으로 성립된 거기에도 무한한 적요〔寂寥: 적적하고 고요함〕를 느끼거니와 김구, 김규식씨 등 커다란 정치세력의 불참이 국회의 또한 적요 감을 주었다.


 부득이 남북이 미-소 외교전의 결과로 갈리지 않을 수 없다면 남(南)은 남만으로라도 자주적 질서를 육성하여 앞으로 북과의 평화적 통일을 전제하야 모다 뭉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 남조선의 대다수의 심정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오늘 초대 대통령으로 추천된 이 박사는 오랫동안 태평양을 격하여 있었다.


 하지만 국권회복에 노심 분투하던 분 중 어느 분보다도 당연히 합력되었어야 할 김구, 김규식 양씨를 위시하야 오늘 국회에 불참한 일파와 한자리에서 신국가의 구상을 토론치 못하게 된 것을 이 박사 자신이 누구보다도 적적히 여길 것을 접어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국내 국제의 다단한 관계를 생각할 때에 지금 착수될 정부조직에 있어서 이 박사의 고심도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니, 이것이 또한 오늘 국민의 가슴에 서린 어설픈 느낌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을 맡은 이 박사야말로 난국타개에 더 큰 분투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헌국회는 오전에 이승만 초대대통령선출에 이어 이날 오후 2시부터 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부통령 투표 때에는 한 의원이 더 출석하여 197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개표결과는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張澤相) 3표, 서상일(徐相日) 1표로 최고득점이 출석의원의 3분의 2가 되지 못하여 헌법 규정에 따라 재투표를 했다.


재투표 결과 이시영이 20표가 더 늘어난 133표의 최고 득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차점인 김구는 62표로 2차 투표에서도 3표밖에 줄지 않았다.


김구의 정부참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국회 안에 그의 지지세력이 3분의 1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이구수(李龜洙)가 1표, 무효표가 1표였다.
  
◇…이승만의  초대 내각 구성과 이시영·김성수·탈북민단체의 불만 등 뒷 얘기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거처인 이화장의 작은 별채를 조각 본부로 정하고 조각작업에 착수했다. 


이화장은 7월 21일 아침부터 인성만성했다. 



오전 9시에 통위부장 유동열(柳東說)과 해안경비대 사령부의 손원일(孫元一)이 방문한 데 이어, 9시30분에는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 10시에는 하지 사령관, 10시30분에는 신익희와 대법원장 김용무(金用茂), 11시5분에는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金活蘭)이 차례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하지는 노블(Harold Noble)과 제이컵스(Joseph E. Jacobs) 두 정치고문을 대동하고 와서 30분 동안 요담을 눴다.


하지가 이승만의 사저를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요양 중이던 이시영은 오후 1시 15분에 이화장을 찾았다.

 

오후 4시10분쯤에는 하지의 경제고문 번스(Arther C. Bunce) 박사가 방문했고, 오후 5시에는 유어만 중국 공사가 다녀갔다.  



이윤영 의원을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제헌국회는 부결시켰다.


그러자 이승만은 일주일 뒤에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설화적인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은 그때  마흔여덟 살이었다. 


이 후보자 임명 승인을 위한 국회 제37차 본회의는 8월 2일 오전 10시에 개회되었다.


197명의 국회의원 전원은 개회시간 전부터 자리에 착석했고, 방청석 출입구는 개회시간 훨씬 전부터 큰 혼잡을 이루었다. 
  
10시30분에 국회에 임석한 대통령 이승만은 이범석의 국무총리 임명 승인을 요망하는 연설을 했다.


현재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명하면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거쳐 청문보고서 채택 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과 다르다.   


당시는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국회에 나와 국무총리 지명이유를 밝히고 동의를 청했다.


원고가 없는 즉석연설이었다.  어떻게든 국회의원들을 구슬려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이 문제를 지체한 관계로 오늘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들도 나도 또한 우리 민족 전체가 모두 여기에 대하여 대단히 초조히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어떠한 정당이나 어떠한 단체가 많은 권리를 가졌다든지 하지 말고 우리 전 국민이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하겠다는 여러분의 생각과 이 사람의 생각이 유일한 생각일 것입니다. … 8월 15일 안에 여기 군정장관과 사령장관들은 다 준비를 해 가지고 하루빨리 주권을 우리에게 넘기려고 (국무총리 승인이) 하루빨리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또 우리 듣는 바에는 남북협의를 하는 분들이 벌써 남한대표를 뽑아 가지고 그쪽에 보낸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돌아앉아서 서로 토의만 하고 나가면 안 될 것입니다. … 국무총리로 누구를 지정을 할 테니 큰 문제가 아니걸랑 동의시키고 … 이번 부결되면 그 영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 지금은 누가 개인이나 무슨 당의 관계를 초월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때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여기에 세워 놓아야 하겠다는 그 작정을 가지고서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또 이런 말 저런 말 써 가지고 한다면 영향이 대단히 좋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
며칠 동안에 밖에서 유언하는 말에 이범석씨가 물망이 높고 해서 내가 이범석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해서 여러분에게 드려 놓으니, 국회에서는 길게 토의를 마시고 작정해서 통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1주일 전에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했던 자신의 권위와 통찰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듯한 당당한 연설과는 사뭇 달랐다.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후에 표결하자고 주장하는 의원도 있었으나, 즉결하기로 결의하고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개표결과는 재석의원 187명 가운데 가 110표 대 부 84표(무효 2표)로 승인이 가결되었다.

취임 첫 소감도 무인 정치가다웠다. 임명경위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월 31일에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승인하였다. 국내정세를 잘 알기 때문에 쾌락한 것이며, 만일 접수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심경에 어그러질뿐더러 현 국내외 정세의 긴박한 요청에 배치되는 것이다.


 나는 본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가 민족의 현실을 떠나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는 피동적이었지만 금후로는 주동적 입장에서 오직 나의 충성, 나의 정력,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다만 하루라도 바치고자 한다.”

  
조각에 대한 구상을 묻자 이범석은 “헌법상 조각은 대통령에게 중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이 끝나자 이승만은 그날 저녁으로 이범석과 함께 조각작업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9시40분에는 ▲재무부 장관 김도연(金度演) ▲법무부 장관 이 인(李 仁) ▲농림부 장관 조봉암(曺奉岩) ▲교통부 장관 민희식(閔熙植)을 지명했다.
  
한민당의 중앙위원인 김도연은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한 경제전문가였다. 
  
이인은 국내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 사건을 도맡다시피 하여 변호했고 조선어학회 간부로서 투옥되었던 변호사였다.


미군정부의 대검찰청장을 지낸 한민당계이면서도, 이승만의 신뢰가 두터웠다.
  
초대 내각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의 농림부 장관 임명이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국무위원으로 지명한 것은 내각 구성은 정치적 안배였다.

이승만은 훗날 조봉암 인선에 대해 “한국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농민들을 휘어잡기 위해서”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범석에게 의견을 묻자 이범석은 “조봉암이 아니라 김일성인들 무슨 상관입니까? 대권은 이 박사께서 쥐고 계신데” 하고 적극 찬동했다고 한다.
  
민희식의 발탁은 미군정부 관료 케이스로 배려된 것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한 민희식은 미군정부의 교통부장이었다. 
  
다음날에는 ▲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사회부 장관 전진한(錢鎭漢)▲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이 기용됐다.


윤치영은 이승만의 재미시절부터 그를 도왔고 귀국한 뒤에는 민주의원 비서국장 등으로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윤치영은, 미군정부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과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 두 사람의 알력관계로 어느 한 사람을 내무부장으로 임명했다가는 경찰행정에 큰 혼란이 예상되어 내무부를 맡게 되었다.


같은 한민당의 노일환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윤치영은 8월 2일에 한민당을 탈당했다
  
이승만은 조병옥을 외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가 대통령 특사로 정부승인 외교를 벌이게 하고, 장택상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전진한은 대한노총 위원장으로서 헌법에 근로자이익균점권 규정(제18조 2항)을 설치하는 데 앞장선 노동문제를 관장하도록 중용됐다.


전진한이 사회부 장관에 임명된 뒤에도 대한노총 위원장을 겸임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문교부 장관으로 장면(張勉)을 내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천명록에 안호상의 추천이 많고, 또 앞으로 큰 임무를 담당해야 할 주미대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여 안호상에게 문교부를 맡기고 장면을 특사로 보내어 일하는 것을 보아 주미대사로 임명하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안호상은 민족청년단의 이데올로그였다.
  
이틀 후인 8월 4일에는 ▲외무부 장관 장택상(張澤相) ▲상공부 장관 임영신(任永信) ▲국방부 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체신부 장관 윤석구(尹錫龜)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법제처장 유진오(兪鎭午)을 임명했다.



조각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있던 임영신은 이화장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자기가 귀국할 때까지 최종결정을 보류해 달라고 이승만에게 졸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8월 3일에 급히 귀국하여 공항에서 이화장으로 직행한 임영신은 조각당 마루에 허정(許政)을 상공부 장관으로 발표하려고 붓으로 써서 펼쳐 놓은 것을 보자 발로 짚으며 “우양(友洋)이 상공을 뭘 아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범석이 임영신에게 “그러면 당신이 상공장관 하겠소?” 하고 물었다. 때문에 발표 직전에 상공부 장관이 허정에서 임영신으로 바뀌었다.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윤석구가 체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무소속구락부에 대한 배려차원였다.


이승만은 윤석구가 “말썽을 많이 부리는 귀찮은 사람”이라면서도 “실력은 있다”면서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았다.
  
 8월 4일에 열린 국회 제39차 본회의는 이승만의 후임으로 부의장인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신익희의 의장 피선으로 결원이 된 또 한 사람의 부의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김약수(金若水)가 한민당의 김준연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에 열린 국회 제40차 본회의는 이승만이 임명한 김병로(金炳魯)의 대법원장 인준안을 가결했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뼈대가 갖추어졌다

◇…초대 내각 구성에 ...김성수·이시영 등 불만 고조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은 전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에서나 보듯 각 정파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으로 격심한 길항을 보이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그러한 거국내각으로는 이승만이 말한 “좋은 시계 속처럼 돌아가는” 정부의 기능을 하기는 어려웠다.

 

우선 부통령 이시영부터 조각작업에 불만을 느끼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8월 4일에 서울을 떠나 수원의 친지 집으로 가 버렸다. 


그는 이튿날 열린 첫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8월 4일 오후에 동부인하여 혜화동의 이시영 집을 방문했으나, 이시영은 이미 서울을 떠난 뒤였다.


이러한 해프닝도 결국은 미국식 정부운영 제도와 내각책임제 정부운영 방식에 대한 인식과 정치풍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시영은 8월 10일의 제5차 국무회의부터 참석했다.
  
첫 국무회의가 열리던 날 아침에 이승만은 허정에게 연락하여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허정에게 총무처장을 맡아 보라고 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점잖은 허정이었으나 이승만의 이 제의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거절했다.
  
 “저는 국정에 참여하여 정정당당하게 저의 포부를 펴 보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도 했고 해방 후 정치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국무회의에서 표결권도 없는 처장은 저의 포부를 실현할 자리는 아닙니다.”
  
허정은 이렇게 말하고 바로 회의장을 나갔다.
  
그날 저녁에 재무부 장관 김도연이 허정을 찾아갔다.
  
 “우양, 오늘 한 말은 과했던 것 같소. 이 대통령이 몹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소. 몇 번이고 우양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허정과 함께 이날 기획처장에 임명된 군정부 중앙물가행정처장 이교선(李敎善)도 이튿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8월 7일에 총무처장에는 조민당 정치부장 김병연(金炳淵), 기획처장에는 연희대학 상학부장 이순탁(李順鐸)이 임명되었다.
  
그후 허정은 그런지 한 달 조금 지나서 입각하게 되었다. 


9월 14일에 경부선 내판(內坂)역에서 특급열차 ‘해방자호’끼리 충돌하여 미군 24명과 한국인 1명이 즉사하고 10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열차사고가 발생하여 교통부 장관 민희식이 인책 사임함에 따라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첫 내각구성에 대한 정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그중에도 가장의석을 많이 가진 김성수의 한민당은 분개와 가까웠다. 김성수의 국무총리직은 단념하더라도 이승만과의 공동정부를 기대했던 한민당은 8월 6일에 상무위원회를 열고 즉각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가 거족적으로 대망하던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된 것은 경하할 바이다. 물론 정부구성의 방법 기타에 대하여서는 논의할 점이 불무할뿐더러 사회의 물의도 높을 듯하나, 우리는 차제에 오직 우리의 중앙정부가 하루바삐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정중하게 전제한 담화는, 그러나 앞으로는 시시비비주의로 임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본당(本黨)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한사람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부로 하여금 하루빨리 남북을 통일하고 화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여 진정한 민족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책선(責善)적 편달과 감시를 게을리 아니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성수는 이승만에게 장관 7석을 그의 한민당인사들에게 할애할 것을 요구했었다.
  
한편 조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북애국단체연맹은 8월 6일에 조민당 회의실에서 전체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이승만이 이북인에 대한 약속을 위반한 것은 물론이고 “비서진을 강화한 데 불과한” 약체내각이라고 격렬한 성토가 쏟아냈다.


회의는 ‘도각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문제까지 검토했으나, 그것은 유엔 총회의 승인을 고려하여 자제하기로 하고 내각개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내각비판 가운데서도 특히 임영신의 상공부 장관으로서의 능력을 의구하는 평언이 많았다. 당시 대한상공회의소도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현하의 최대의 급무이며 자주독립의 기초사업인 산업재건을 담임하는 각 행정부처의 책임자 중에 그 수완이 미지수인 인물이 등장한 데 대하여 일말의 불안이 없는바 아니나, 우리는 상공회의소의 본령에 비추어 모든 비판은 구체적 정책과 실적을 볼 때까지 보류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여 8월 5일에 김성수, 이청천, 이윤영 세 사람을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내정하고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김성수는 끝내 고사하고, 다른 두 사람도 8월 12일에 가서야 취임했다
  
  
​◇…8월 15일 정부수립과 이승만
·맥아더의 연설


​8월 15일에는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및 광복 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자정을 기해 미군정부의 행정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되기 시작하는 뜻 깊은 날이었다. 


개회시간 전부터 식장인 중앙청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청 정문으로부터 세종로와 태평로에는 각 정당 및 사회단체, 청년단체, 학생 등 수십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식전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태평양지역 연합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 내외가 도쿄(東京)로부터 날아와 참석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단상에는 이승만 내외와 맥아더 내외를 비롯하여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3부 수장과 유엔임시한국위원단, 하지 장군을 비롯한 남한 주둔 미군수뇌, 로마교황청 사절을 비롯한 각국 민간사절들이 자리를 잡았다. 
  
기념식은 오전 11시30분에 개회되었다. 회장 오세창의 개회사를 명제세(明濟世)가 대독한 다음, 이승만의 기념사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긴 옷고름 대신에 단추를 단 회색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특유의 방식으로 개량한 한복이었다. 
  
이승만은 30분에 걸쳐서 연설을 했는데, 그것은 국가건설의 기본이념을 명수사를 구사하여 이론적으로 피력한 것이어서 꼼꼼히 톺아볼 가치가 있다. 그는 먼저 이날을 맞는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국민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사십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하여 온 사실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간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

  
그는 이어 맥아더 장군 내외가 기념식에 참석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서,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기에는 아직도 험하고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사천여년을 자치 자주해 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문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에 전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을 일시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 태도로 연일 행진함으로써 앞의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 나갈 것입니다.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하지만 말고 내일을 위하여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

  
이승만은 그러면서 “건국 기초의 요소될 만한 몇 조건”을 말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들었다. 
  
 "하나,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애로 인하여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방침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삼십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이렇듯 이승만은 건국이념의 첫째 조건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그 이념과 제도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래로 실천해 왔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둘,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하여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력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자래로 저희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습관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삼십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이승만은 이처럼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과로 공화주의가 결실 단계에 있다고 강조하고 나서, 세 번째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셋,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히 하며 한도내에서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든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아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하여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권리를 사용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러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사상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승만은 이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의 중요성을 링컨의 유명한 민주주의의 정의를 인용하여 강조했다. 
  
 “넷,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에서는 공고하며 밖에서는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들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하는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시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반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이 받아들여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정부를)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다섯째로 정부가 가장 역점사업으로 추진할 것은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향상과 평등권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당위성을 태극기에 그려진 태극의 이치를 들어 설명했다.
  
 “다섯 정부에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의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생활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의 발전을 꾀하며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서로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두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러도 사리에 틀리거나 어그러짐이 없음)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들을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을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전쟁을 피하여 전민족의 화동을 도모하나니, 우리의 화동과 단체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상고적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의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를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마지막 조건으로 대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비판 여론과는 달리 미군정부의 한국인 관리들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여섯,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외국의 경제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하여 각 나라 간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 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의 화복안위(禍福安危)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되므로 어떤 작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들에 동일히 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그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기왕에 밝히 표시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며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욕망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관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며 대한정부는 시작되는 이 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친선을 한층 더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를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분전(分錢)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 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관(將官)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직원이 일을 계속 진행하기 바라며 부득이 개체(改遞)할 경우가 있더라도 국사의 순조 진행을 위하여 끝까지 기능과 성심을 다하여 애국심의 책심(責心)을 다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
  
이승만은 이어 미군 점령기간 내내 견원지간이었던 하지 장군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일들의 참된 친우”라고 추어올리고, 북한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 전국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일천만 우리 동포가 우리와 민국 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케 한다면 나중에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할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소련이 우리에 접근한 이웃이므로 우리는 그 나라로 더불어 평화와 친선을 유지하려는 터입니다. 그 나라의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히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키에 노력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취임사에 이어 또 다시 소련과의 국교수립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긴 연설을 마무리했다.
  

 “결론으로, 오늘에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앞으로 계속할 것을 우리는 길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바는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심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애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

  
이승만은 이날의 연설문 초고를 미국인 초고 올리버에게 기초해 줄 것을 부탁하여 써 보내 왔으나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날의 연설문에 올리버의 초안이 얼마나 채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승만의 기념사에 이어 연합합창단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가’ 합창이 있었고, 이어 맥아더의 축사가 있었다.

 

맥아더는 거물 정치가답게 격조있는 웅변으로 한국인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고 나서, 1882년의 조미우호통상조약을 거론하면서 한미 유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민주적 생활의 방어는 무엇보다도 개인 정신에 달렸습니다. 개인 자유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이것을 지킬 결심과 용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미국 국민은 귀국민과 다년간 각별한 우호적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찍이 1882년에 양국 국민 간에는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간에 영원한 평화와 우의를 선포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이 서약에서 이탈한 적이 없으니만큼 여러분은 그 불가분 불가리(不可分不可離)의 우호관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 각하가 신생 민주국가를 영도하는 데 각하를 보좌할 우수한 각원 여러분은 정치적 경험에서 지금까지 찾아보지 못한 가장 복잡한 문제에 당면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느냐가 귀국 국민의 통일과 복리를 대부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역시 아시아 대륙의 장래 안정을 결정할 것입니다. …”
  
뒤이은 축사를 통하여 하지 장군은 재조선 미군정부는 오늘 밤 자정으로 폐지되고, 한국 주둔 미군사령부 민사처가 생긴다고 발표했다.
  
맥아더 내외는 이날 오후 늦게 도쿄로 돌아갔는데, 이승만은 그에게 구왕실 소장의 질동(質銅) 향로 한 벌과 윤비(尹妃)가 사용하던 청옥 화병을 선물로 증정했다.


그리고 이범석은 은제 신선로 한 벌을 선사했다. 질동제 향로는 일찍이 고종(高宗) 황제가 맥아더 원수의 부친에게 보낸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맥아더는 부친의 유품인 그 향로를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태평양전쟁 때에 필리핀의 코레히도르(Corregidor) 작전에서 분실하고는 늘 아까워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이번 기회에 같은 것을 구하여 선사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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