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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3)> 제주4.3사건·여순사건이 잉태한 국가보안법과 국군조직법 강화

-1948년 4.3사건 5.10총선.제헌국회개원.정부수립.여순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연속
-좌.우익 이념 대립...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의 무장봉기와 무력진압 소용돌이
-미군정 물러가자 이승만 정권은 반공국가화 표방 국가보안법 제정
-여순사건이후 군대 내 좌익척결 내세워 숙군작업으로 군인 4878명 옷벗겨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제주 4.3사건과 그해 10월19일 일어난 여순사건의 여진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남한 내 8.15 정부수립에 이어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체제가 들어서면서 분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념대결이 무력충돌로 변했다.

당연히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반공(反共)주의를 내세워 통치강화에 십분활용했다.

민족주의와 친미주의로 알려진 이승만은 제주 4.3사건을 계기로 국군조직을 정비하고, 여순사건이후에는 일제강점기때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답습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박정희 소령의 여순 게릴라 토벌 회견

제주 4.3사건에 이어 그해 10월19일 여순지역 군인반란사건은 유엔은 물론 미국과 소련, 중국, 북한 등이 예의주시하는 사건이었다.

미군정에 대한 반발에다, 유엔과 미국이 주도해 그해 이승만 정권을 수립하자마자 터진 남한내 좌익계의 무장봉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압과정에서 군·경이 무고한 양민을 대량학상하면서 세계 주요외신은 한국내 좌·우 이념대결을 크게 우려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반란군이 쓸고간 여수와 순천은 곳곳이 시체요, 건물과 집들이 모두타 잿더미들이었다.

국군 진압대가 순천에 들어와 보니, 시내 도처에 시체가 굴렀고 경찰관은 손이 뒤로묶인 채 총살을 당해있었다.

불에 탄 시내버스에는 백골이 나뒹굴었으며, 38이북에서 10여년 전에 내려온 월남민들은 모두 사살됐다.

어림잡아 300여 명이 반란군인들에게 처형되기도 했다고 8관구 경찰청 부청장인 최천이 보고했을 정도다.

당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은 이렇다.

 '제일 먼저 울고다닌 것은 경찰관 가족들이었다. 경찰서 안에서 희생된 가족의 시체를 찾아가고 싶지만 시체만 쌓인 텅빈 경찰서 마당에 단신으로 들어가기는 무서웠던 모양이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아 경찰서마당에 들어선 경찰관 부인네들은 어떠한 심리인지 한곳에 쌓인 시체는 보지않고 서장실로, 유치장으로 깊숙한 처소만 찾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한테 쌓인 시체를 찾아온다. 팔을 묶여 엎치고 덮치고한 시체속에서 자기 주인을 찾으려 하면서도 자꾸만 딴데로 시선을 돌린다.  기어코 자기주인을 찾은 부인은 이제는 전부 잊어버리고 다른 시체를 헤척이며 시체를 끄집어 내어 놓고는 목을 놓고 울기 시작한다. 경찰관의 가족들은 대부분 피신하여 피해가 없다하나 가구마다 집문은 전부 파괴 당한지라 시체에 입힐 옷이 한벌도 없다는 것이 그들을 더욱 서럽게하고 있다'


이후 여순 사건의 주모자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수 모 중학교 교장인 송욱이라고 했으나 실제 반란군의 총지휘관은 김지회였다.

그는 여수 주둔 14연대 중위로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대중을 선동하는 웅변술이 뛰어났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이외에 지도관에 이기종, 부지도관에 박기양 등이 배후에서 선동 모략함으로 사건이 현실화 된 것이다.

김지회는 지리산의 봉우리를 가르키면서 '이 골짜기에는 백명, 이골짜기에 5백명, 저 산에도 얼마... 이렇게 만명이나 된다'고 포섭해 나갔다.

후에 이들은 모두 피살되거나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8년 11월 5일 호남지구 작전참모 박정희 소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금번 반란군에 대해서는 순전히 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이다. 항간에는 미군이 배후조종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낭설이다. 앞으로 호남방면의 군의 방침은 먼저 무장폭도의 조속한 숙청, 두번째는 작전지구 내 치안행정과 교육, 생산 등의 각 기관 복구에 집중할 방침이다"

◇…남한 곳곳에서 치안불안...오대산 게릴라 폭동

제주에 이어 여순사건으로 이어진 후의 국내 정세는 좀처럼 살벌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당시 여기저기 불길한 징조들은 각 지방 산간벽지까지도 파고 들었다.

1948년 11월 국회 속기록을 보면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이 국회에서 전국의 치안상황을 보고한 내용을 보면 전국상황이 불안한 점을 읽을 수있었다.

윤 장관은 보고 내용 중간중간에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라는 내용이다.

거기에다, 정부당국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목도 여러 곳이다.

이는 여순사건의 여파가 근절되지 않은 채 부분적으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11월 15일 윤 장관은 비상사태를 대비해 경찰력강화를 강조하면서 전남일대와 경기 강화도 방면의 치안상황의 심각성, 그리고 강원도 산악지대가 특히 위험하다고 특정지었다.

전남 구례·곡성지방에 반란군 게릴라들이 출현해 8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등 난동을 벌였다.

전주와 이리지방도 비상사태에 준하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다.

전남 벌교지방 5개 경찰지서가 불탔고, 대둔산아래 충남 논산지역에서는 인명참사까지 빚어졌다.

무장게릴라의 준동은 강원도 산악지대로 문젯거리였다.

이런 가운데 11월 14일 강원도 오대산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빨치산들이 폭동을 계획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과 국군이 진압응원대를 급파했다.

이때는 여순사건 주모자 12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할 무렵이었다.

오대산으로 가던 진입응원대인 경찰관 20여 명이 한꺼번에 빨치산의 피습으로 모두 사망했다.

오대산은 강원도에서 가장 험난한 산의 하나로 지리적인 요인을 유리하게 이용해온 무장 빨치산은 북한으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들여오고 있었다.


오대산 빨치산은 북한 팔로군을 중심으로 500여 명이 산악정상에 방화선을 루트로 오대산을 거처 원주 치악산, 경기도 양평 용문산, 그리고 태백산과 소백산, 지리산 게릴라들과도 합류해 폭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경찰과 국군은 오대산을 중심으로 포위 섬멸전에 돌입했다.

원주에서 국군 8연대와 원주경찰서를 제압하고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북한에서 무기를 공수하는 빨치산 조직을 사전에 적발,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빨치산은 인민군 20여 명과 폭도 6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교전 중에 대부분 오대산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외에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소악산 일대의 무장게릴라와 교전하는 등 그해 11월 내내 쫒고 쫒기는 50여  차례의 공방속에 100여 명의 빨치산을 사살했다.

생포된 포로들을 취조한 결과, 남한내 좌익들과 연계해  원주·강릉·영월 등지에서도 여수·순천같은 폭동을 준비중이었다는 진술을 얻어냈다.

놀라운 것은 오대산 안에만 1600여 명의 무장계릴라가 있다는 사실과 전국 곳곳이 반이승만, 반미국성향의 좌익계열과 함께 어디서든 무장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승만 일본에서 여순사건 듣고, "맥아더, 무장반란에서 보위할 것" 

이승만은 8월 15일의 정부수립 선포식에 맥아더 장군이 참석해 준 데 대한 답방으로 10월 19일에 부부동반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도쿄를 방문한 바로 그날 밤에 전남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군인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김양천 비서관으로부터 보고 받았다.

제주 4.3사태에 이어 겨우 출범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가 맞은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도쿄에서 이승만은 여순사건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제주도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연대 안의 남로당 조직의 선동으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날 맥아더는 신생국인 한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에게 자신의 전용기 ‘바탄(Bataan)’을 보내 주었다.


하네다(羽田) 공항에는 맥아더와 그의 막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승만은 이튿날 귀국했는데, 이승만 내외는 맥아더의 관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수행원은 주일대사가 될 이승만의 오랜 동지 정한경(鄭翰景)을 비롯하여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비서관 김양천, 공보국장 이정순(李貞淳)뿐으로 단출했다

당시 외교사를 보면 일본 경찰은 재일한인들의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삼엄한 경계를 폈다. 

오후에 히비야(日比谷) 공원의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거류민단 주최의 환영회에는 신변안전을 염려한 프란체스카의 만류로 이승만은 불참했다. 

그 대신 저녁에 한 극장에서 재일동포 지도자들이 모인 강연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이승만의 이 첫 방일 때에 있었던 일로 유명한 에피소드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공항에 나온 맥아더가 이승만을 얼싸안고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틀림없이 나는 우리나라의 캘리포니아를 지키는 것처럼 한국을 지킬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때의 인상적인 사진과 함께 외국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내 기자들에게 “나의 방일시에 맥아더 장군은 신생 대한민국을 꾸준한 무장 반란에서 보위하여 줄 것을 확약했다"라며 " 맥아더 장군은 미국인민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한국인민을 보호하고 캘리포니아를 방어하듯이 한국을 방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의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맥아더 장군의 한국방위 언약은 맥아더 장군 개인의 의사를 발표한 것이고 미국정부의 정식 정책을 말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애매하게 전했다
  
돌아오는 ‘바탄’호 안에서 이승만은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정식 외교대표부를 설치하는 데 합의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단시간에 몇 가지 상의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가 연합국최고사령부와 교섭할 수 있는 정식 외교사절단 파견문제였는데, 이에 대하여 맥아더 장군은 속히 이를 실현하기를 희망하고 사절단이 주접(住接: 한때 머물러 삶)할 공관까지도 준비할 수 있다고 흔연히 대답하였다. …”
  
이승만은 일본정부와의 교섭문제보다도 맥아더 사령부와의 교섭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귀국한 뒤 이승만은 10월 23일에 반란이 남로당의 소행임을 강조하고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경고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공산분자들이 지하에 정당을 부식해서 내란을 일으켜 전국을 혼란에 빠트리고 남북을 공산화시키어 타국의 부속(국)을 만들자는 계획이 오래 전부터 농후해 가는 것은 세인이 다 아는 바이다. 불행히 몽매천식(蒙昧淺識)한 분자들이 혹은 국군에, 혹은 어떤 단체에 섞여서 반란을 빚어내고 있다가 정부를 기만하고 국권을 말살하려는 음모로 여수, 순천 등지에 난을 일으켜, 관리와 경관을 학살하고 관청을 점령하며 난당을 초치하야 형세를 확대함으로써 국제문제를 일으켜 민국을 파괴하고 민족의 자상잔멸(自傷殘滅)을 고취하려 한다.

 …이런 분자들은 개인이나 단체를 물론하고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는 사정이다. 그동안 충성한 경찰관리와 국방군의 결사적 전투의 공효로 난도(亂徒)들을 진압하야 난국이 거의 정돈되었다. 

이 난도들이 산속으로 도주은피(逃走隱避)하려는 것을 관군이 예측하고 기선을 제하야 마침내 그들은 진퇴유곡의 형세를 이루었다. 이 반란지역은 불일내로 소토안돈(掃討安頓)케 될 것이니 더 고려할 것은 없으나, 극소수의 잔재한 난도들이 혹 도망하야 숨어 있는 도당을 꼬여 살인방화와 약탈파괴 등 행동으로 해물상인(害物傷人)을 감행하야 치안을 방해할 터이니, 방어상태의 방책을 취하지 않고는 후환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야 치안을 유지하며 인명을 보호할 것이요, 어디서든지 이런 반역도당이 있으면 이들은 군법을 따라 정형시위(正刑施威·사형으로 위엄을 보임)하여 여환의 만연을 절금할 것이며, 각 지방 남녀노소는 질서와 안녕을 범하는 자가 없도록 조직적 행동을 하야 반역자의 은닉 도탈(逃脫·도망) 등의 폐단이 없게 하고, 괴수된 자를 속히 포박하야 공분(公憤)을 설(雪)하여 국법을 밝힐지니, 관민 일심으로 격려 매진하기를 경고하는 바이다.
  
이러한 단호한 경고는 국민들의 신뢰를 촉구하면서 반란군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부화뇌동을 엄중히 경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김구도 담화발표...이승만은 국가보안법 제정 촉구

이승만은 10월 28일에도 반란지대 국민들의 협력을 촉구하는 2차 담화를 냈다.

김구도 이승만의 담화가 나온  1주일 뒤에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의 담화는 “피눈물로써 하소연한다”며 매우 신중하면서도 비장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 방화, 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요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 아니냐.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때에 있어서 마땅히 충동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 숙고하여 용감히 회오하고 정궤(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만큼 김구는 착잡했다.
  
 “여러분의 기대와 탁부(託付)와 애호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구는 10월 28일에 요양차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이 담화는 병원에서 발표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단호한 좌익의 주동의 반란에 대해 단호했다.

그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그해 11월 초 국가보안법 제정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여순반란사건으로 위기감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국회는 서둘러 의원입법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회에는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인 9월 20일에 경기도 옹진 출신의 대동청년단 소속 김인식(金仁湜) 의원 외 33명의 요청으로 대한민국 내란행위특별처벌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는 긴급동의안이 제출되었다.

이어  9월 29일의 제77차 본회의는 이 긴급동의안을 법제사법위원회에 이송하여 법안의 초안 기초작업을 하도록 했다.

'손세일의 비교 평전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승만과 김구'를 보면 국회는 그러나 10월 15일부터 20일 동안 휴회에 들어갔으므로 내란행위특별처벌법 초안 기초작업도 중단되었다.
  
여순반란이 일어나자 국회는 휴회를 앞당겨 10월 27일에 속개됐고, 속개된 바로 그날 전남 광주 출신의 한민당 소속 정광호(鄭光好) 의원의 동의로 법사위는 앞으로 3일안에 반란행위처벌법 초안을 기초하도록 결의했다.
  

법사위는 이 법의 이름을 '국가보안법'이라고 정하고 8차례의 토의와 법무부 장관, 법제처장, 대법원장, 검찰총장 등과의 토의를 거쳐 전문 5조로 된 법안을 작성하여 11월 9일의 제99차 본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초안에는 문제점이 많아서 여러 의원들이 논란을 벌였다.

회의에 출석한 법무장관 이인과 검찰총장 권승열(權承烈)도 법률적 문제점이 있음을 시인했다. 

이인은 정부도 이 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정부안을 만드는 중이라고 말했다.

경북 영암 출신의 한민당 소속 조헌영(趙憲泳) 의원은 국가보안법안의 폐지를 동의했으나 부결되고, 결국 법사위가 정부와 협의하여 11월 10일까지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법사위는 본회의의 결의대로 새 국가보안법 안을 작성하여 11월 11일에 본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보안법 제정 반대파 의원들은 전남 광양 출신의 무소속 김옥주(金玉周) 의원 외 47명의 이름으로 ‘국가보안법안 폐기에 관한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 폐기 동의안은 11월 16일의 제105차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찬성과 반대의 치열한 논쟁 끝에 폐기안은 재석의원 122명 가운데 가 37표, 부 69표로 부결되었다.
  
이어 11월 18일의 제107차 본회의에서 법사위가 새로 작성한 국가보안법안의 제1독회가 시작되었다. 

법사위원장 백관수(白寬洙)는 “정부안은 완전히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을 구성하는 정신이 법사위에서 작성한 안과 전혀 다르므로” 이를 무시하고 법사위의 원안에서 일부의 자구만 수정한 것이라고 보고했다. 

회의는 이미 충분한 토론이 있었으므로 제1독회를 생략하고 바로 제2독회로 들어가자는 동의가 일단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회법 위반이라는 규칙발언과 의사진행발언으로 하루를 보냈다.
  
11월 19일에 속개된 제108차 본회의는 제2독회로 들어가서 축조심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전북 전주 출신의 한독당계 신성균(申性均) 의원 외 20명이 제1조를 삭제하자는 수정동의안을 제출하여 또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제1조의 조문은 다음과 같았다.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처벌한다.
  
  (1)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3)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조항을 삭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보안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격론 끝에 이 수정안은 재석 122명 의원 가운데 가 20표, 부 74표로 부결되었다.
  
가장 중요한 제1조의 심의가 끝나자 회의는 자구를 수정하는 정도로 논란없이 진행되었다. 

제2독회가 끝나자 회의는 법안 전문을 통과시키고 제3독회를 생략하면서 법사위에 넘겨 필요한 자구만 수정하여 보고하도록 결의했다.

 
법사위에서 몇 가지 자구가 수정된 전문 7조의 국가보안법은 이튿날의 제109차 본회의에 그대로 보고되어 접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공국가 건설을 위한 국가 강제력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국가보안법 제정당시 상황과 이후 존폐 논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특별형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1948년 12월 1일 제정 공포되었고, 1980년 전면 개정됐고, 이어 1991년 부분 개정 등 여러번의 개정을 거쳤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윤치영 내무장관은 국회에서 여순사건 반란자들이 제1호 사형선고자로 국회의원 여러명과 정부 요인, 금융·산업 각 방면의 인사 약 8만 명을 명단에 올려놓았다고 보고했다.


터무니없는 언급으로, 훗날 보고라기보다 일종의 협박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그는 또 경기도 강화에 3000명의 반란군이 침입했다고 설명도 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엉터리 논란이 불렀서였는지 그 다음 날 국회에서는 약 40명이라고 줄여 보고했다.

역시 그것도 거짓말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는 공산당취체법을 신속히 제정하고 위급할 경우 경찰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윤 전 장관만이 아니었다. 여순사건 발생 이틀 후인 1948년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역시 반란군 소속인 14연대의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좌익과 결탁한 것을 포착해 관련자를 검거하던 중 14연대의 1개 대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아직 반란의 진상을 알기 어려운 시점이었는데, 전 연대장과 관련된 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발표해버린 것이다.

다음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은 한 술 더 떠 최능진·오동기 등이 공산당과 결탁해 정부를 전복하고 자기들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삼아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에 이들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여순사건은 이들의 말단세포가 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최능진 선생은 5·10선거에서 이승만 출마지구에 나오려다가 경찰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어 대통령에 서재필을 옹립하려던 이승만 반대파였다. 오동기 선생 역시 광복군 출신이었다. 최능진 등이 숭배하는 정객이란 김구였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일제 검거가 있었는데, 검거당한 인물 중에는 김구의 오른팔인 엄항섭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김구 쪽에 압박을 가했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상황에서 탄생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9월에 발의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명칭을 바꾼 것이다. 

특별조치법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10월 27일 다시 거론되어 초안이 작성되었고, 11월 11일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때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라는 명칭이 기존 형법의 내란죄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이 되었다. 

법안 내용도 내란행위 자체보다 반국가적 정당단체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내란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결사나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법안에 대해서는 제정이후, 각 정권 때마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독립운동자나 정부 비판자, 양민들을 때려잡는 데 악용될 수 있고, 일제의 치안유지법처럼 다수의 정치범·사상범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 확실하고, 내란죄 등 기존의 형법으로도 공산당의 범법행위를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 국가보안법이 비판당한 이유나 1990년대 이후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일보' 1948년 11월 14일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전도를 위해서나 우리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교양과 그 자주적 훈련을 위하여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을 국회 제공에게 경고코자 한다. ······ 국제 정세가 미묘한 가운데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는 정치론도 다기(多岐)할 수 있는 이 정세에서 국가보안법의 내용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국가보안법 반대 의원들은 세 차례에 걸쳐 폐기 동의안 등을 냈으나 그때마다 표결에서 패배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했고, 정부는 12월 1일 공포했다.

국가보안법은 분단을 법제화했고, 반공국가를 만들고 지키는 핵심적인 기제였다. 

국가보안법은 실질적으로 헌법을 초월해 절대적 존재로 군림했다. 이 같은 국가보안법체제-1961년 5·16군부쿠데타 이후 반공법이 덧붙여졌다.

반공은 민주주의나 통일에 우선하는 국시(國是)였다. 국가보안법은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사상과 문화활동에 지대한 제약을 가했다.

국가보안법은 국시라는 위력으로 국가의 정통성을 지키는 법적 장치였다. 

1950년대나 60·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국시 못지않게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해, 그것과 짝을 이루는 북한 정권의 불법성에 대해 무수히 들어야 했다. 북에는 괴뢰정권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북의 정권이나 북에 대해서는 반드시 북한괴뢰집단의 준말인 ‘괴집’ 또는 ‘북괴’로 부르도록 했다. 괴집이나 북괴 대신 북한이라고 쓰거나 말하면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처단될 수 있었다.

자신만이 유일 합법정부로 정통성이 있고, 그래서 중앙정부이고, 다른 쪽은 괴뢰라는 주장은 북에서도 강조되었다. 


남과 북의 이런 주장은 헌법에 담겨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고 쓰여 있다.

38선 이북의 지역도 대한민국 영토인 것이다. 

그런데 북의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다”라고 쓰여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북의 수도로 되어 있는 것이다. 

북의 국호가 중화인민공화국 등등의 경우와는 달리 인민공화국 앞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덧붙여 있는 것도 정통성과 관계가 있다. 


곧 자신의 정부만이 민주주의 정부여서 유일 합법정부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비민주주의 정부이므로 정통성이 없다는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이 정통성을 강조한 것은 명분론보다 한국은 1000년 동안이나 단일민족국가를 영위해 왔으므로 오로지 하나의 국가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에서 다른 조항과는 달리 헌법 제4조가 무소속 구락부나 다른 의원들의 별다른 이의 없이 쉽게 통과된 것은 그 조항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에서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서울시를 자신의 수도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기이한 현상이 표출된 것도 똑같은 관념 때문이었다.

이승만·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만이 유일 합법정부이고 북은 이북을 불법으로 점거한 괴뢰정부라는 이유로 국제연합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각별히 강조했다. 

그렇지만 과연 정부나 극우세력이 국민들한테 유엔 결의를 정확히 전달했느냐하면 그렇지 않았다.

◇…미군청 아래 국방사령부를 시작으로 국군의 태동

이승만은 제주도 4.3사태와 여순사건을 계기로 숙군작업과 동시 국군조직을 강화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따라 그해 9월 서울에 주둔한 미군은 11월 13일 군정청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한국기자협회가 펴낸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이건상 한국전쟁암시한 이념의 대충돌>에 따르면 미군정청은  이듬해인 1946년 1월 15일 군정청 국방사령부 아래에 국방경비대를 창설, 참모장에 광복군 출신인 송호성을 임명했다.

미군정청은 이어 일주일 뒤인 1월 21일 남한내의 모든 사설 군사단체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해 6월 15일에는 해안경비대가 출범하고 1948년 5.10선거를 닷새전에 항공기지대가 등장함으로써 국방경비대를 모태로한 창군작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미군정청의 사설군사단체 해산명령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1945년 8월말 창설)와 학병단(1945년 12월16일 결성)등 30여 개에 이르는 군사단체를 정리하지 않고는 남한내에 질서정연하고 효울적이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정권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1945년 8월22일 결성)등 좌익군사단체는 조직력과 인원에 있어서 규모가 매우 컸다.
 
좌익 군사단체는 또한 뚜렷한 창군이념과 국가구상을 갖고 있었다.

국군준비대는 인민공화국의 결사대를 자처하면서 진정한 해방군이 되기 위해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거해야한다고 외쳤다.

때문에 미군정청의 사설군사단체해산은 사실상 좌익 군사단체의 붕괴를 겨냥한 셈이다.

대신 치안대 총사령부 등 우익 군사단체에는 국방경비대라는 합법적 공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국방경비대는 당연히 일본 육사, 만주군, 학병, 지원병, 광복군 출신 등 우익단체청년들의 집합소가 되었고 장교단은 이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청의 창군작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서 모습을 갖추자, 군에 대한 침투공작을 폈다.

당시 경비내는 사병모병시 입대자에 대한 신원조회를 철저히 하지 않아 누구든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도시나 농촌에서 좌익활동을 한 젊은이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정치적 피난처로 국방경비대를 찾았다.  


남로당의 군내 공작은 경찰에 대한 반감을 갖게하는 이른바 반경(反警)의식을 고취시켜 미군정청의 물리적 기반인 경찰과 반목 대립하게했다. 

더구나 미군정청이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면서, 좌익분자들의 정치투쟁의 공간을 더욱 넓히려는  의도속에서 선행되었다.

남로당의 군장교 침투는 사병과 달리 중앙당에서 관리했다.

주로 사관학교에 입교하거나 임관된 장교의 혈연·지연·학연 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해 포섭했다.

사병에 대한 침투공작은 당성이 강하고 성분이 좋은 노동자, 반농출신들과 좌익활동에서 노출된 청년들을 리·면·군당위원회를 거쳐 도당에 보내면 도당에서 일괄해 침투시켰다.

여순사건에서 보듯이 여수에 주둔했던 제14연대 침투방식을 살펴보면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가 도당내 군사부를 설치하고 군과 야산대의 공작을 총괄하였다.

도당군사부는 광주, 목포 등 각시군 당 군사부에 사병추천을 지시하고, 군당은 다시 면·리에 입대자의 명단을 제출하게 했다.

이러한 경로로 작성된 입대자 명단은 다시 도당 군사부에 제출되어 이미 침투포섭된 각 연대인사계(인사계장 여순사건 주모자 지창수)로 넘겨져 대대, 중대, 소대로 배치되었다.

전남도당 조직부 과장인 P씨의 경우 훗날 "14연대의 경우 사병의 절반이 전남도당에서 침투시킨 좌익계였다"고 증언했다.
   
한편 14연대는 광주에 창설된 4연대 1개대대를 근간으로 1948년 5월4일 창설되었다.


제14연대는 다른 부대와 달리 단단한 반경의식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는 부대의 모체인 4연대 병력이 전남 영암에서 경찰과 충돌을 경험한데다, 반란직전인 1948년 9월24일 구례에서 또다시 경찰과 충돌해 어느 부대보다 높은 반경사상을 갖고 있었다.

사태가 수습된뒤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숙군작업에 적극적이었다.

군내 좌익척결에 나서 4878명을 군복을 벗겼다.

이승만은 이들을 예로들어 국가보안법과 국군조직법 등을 제정했다

또한 이승만정부는 또 임시우편단속법 통과와 청년단체 통폐합, 학도호국단 창설 등을 통해 국가기구와 제도를 철저하게 반공국가화했다.

▶▶참고문헌 및 인용자료 :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한국전쟁암시한 이념의 충돌. 이건상 전남일보기자), 네이버백과. 두산백과.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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