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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32)> 여수·순천의 너무도 아프고 슬픈 좌익군인 반란 사건

-70여 년 간 진실규명과 양민들의 학살 피해...국가차원의 사과없어
-제주4.3사건 진압출병명령 거부한 여수주둔 14연대 지창수상사 등이 반란
-여수에 이어 순천 등 좌익세력 반란군에 합류...우익·경찰관 보복살해
-진압토벌군 과잉진압과 반란부역자·협력자 처형과 여수시내 5분의 3 폐허 만들어
-이승만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제정·국군 정비작업 강화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여순사건(麗順事件), 전라남도 여수와 인근 순천에서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 일부 좌익계 군인들이 병사들과 좌익세력을 선동해 전남일대를 점령하고, 우익인사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군·경이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선량한 전남 여수·순천 일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인데도 국가차원의 책임규명, 명예회복,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미완이다.  

여순사건은 그해 5.10 남한 총선거에 앞서 제주에서 벌어진 4.3 제주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제주 4.3사태는 1년전인 1947년 3월1일 오후 3시쯤 ‘3.1기념 도민대회’를 당국이 허가해주지 않은데 사건이 촉발됐다.

경찰이 시위행렬까지 막자 화가 난 군중일부가 경찰서와 감찰서를 찾아가 항의했다.

여기에다 제주기마경찰이 기념식장에서 6살 쯤되는 어린아이를 치고 달아나자, 이를 항의하며 경찰서로 몰려가 책임자처벌을 요구했다.

◇…제주 4.3사건 촉발과 진압이 여순사태로 이어져

위기감을 느낀 경찰이 발포, 사망자 6명, 부상자 8명이 발생하고, 십 수 명이 연행되어 구금됐다.

사망자 중에는 국민학생(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유부녀, 50대 농부 등이었다는 사실에 제주도민들은 격분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발포 경찰처벌과 배상,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고, 3.10 민관 총파업으로 이어지며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여기에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무장대또는 게릴라)가 민중봉기를 주도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다.

제주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가 무너지고 미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그 당시 제주에는 일제에 징병·징용자와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 등 6만명이 이주했으나 거의 실직한 상태였다.

생필품부족과 콜레라로 300여 명의 사망, 대흉년과 일제때 수탈한 방식을 미 군정청이 답습한 미곡정책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다.

또 하나는 일제때 거드름을 피며 주민을 괴롭힌 친일 경찰과 친일 공직자들을 처단하지 않은채 그대로 채용된데 불만이 한꺼번에 터졌다.

3.1사태로 촉발된 군·경과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의 토벌대와 님로당 무장대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상태로 이어졌다.

한 해를 넘겨 1948년에는 유엔이 실시 가능한 지역에서 5.10 총선거를 실시한뒤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5.10 남한 총선을 둘러싸고 미군정과 이승만 우익진영은 적극 참여한데 반해 이를 반대한 김구, 김규식의 진영은 강력 반대했다.

여기에 박헌영, 허헌 중심의 남로당과 남한내 죄익계열은 김구, 김규식의 입장을 지지, 남한 단선·단정을 거부하며 곳곳서 무력충돌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악몽의 제주 4.3사태가 터진다.

김달삼과 이덕규 등이 이끄는 남로당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새벽 도내 우익인사들와 경찰관 가정을 습격, 인명살상과 방화 등 참혹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반된 민심을 이용한 남로당 제주지부는 5.10 선거 단선반대투쟁을 선동하면서 이날 제주경찰서 등도 습격해 무장봉기를 주도했다.

때문에 미군정청장 하지 사령관은 미군을 비롯 군, 경과 본토에서 응원경찰, 그리고 서청·대청을 내세워 일년내대 한라산으로 들어간 무장대 토벌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좌익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군·경이 마을주민을 집단학살하는 끔찍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더욱이 그해 8월15일 정부가 수립된 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을 앞세워 제주지역의 좌익소탕에 주력했다.

때마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본정부와의 교섭문제에 앞서 맥아더 사령관과의 교섭이 중요해, 일본을 방문하는 날이다

여수·순천사건은 그날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아래 육군본부는 그해 10월19일 전남 여수지역에서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무장대 토벌을 위해 제주 파견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일부 좌익 군인들이 주도해 반란을 일으키고 좌익분자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 진압군에 맞서면서 참혹한 유혈사태를 빚었다. 

출범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가 맞은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한국전쟁암시한 이념의 대충돌·1995 이건상 전남일보),'두산백과' 등의 기록을 보자.

문제의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로 1948년 5월 4일 창설됐다.

다른부대와 달리 단단한 반경(反警)의식으로 무장돼 있었다.

이는 부대의 모인 4연대 병력이 전남영암에서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경험했다.

이어 반란 직전인 9월 24이 구례에서 또다시 경찰과 충돌해 어느 부대보다도 반경의식이 강했다.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金知會), 홍순석(洪淳錫)중위 등 외에 지창수(池昌洙)상사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3기생이다.

이 3기생의 80%이상이 장교가 아닌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미군정의 큰 실책이었다. 당시의 군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에만 신경썼지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후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新月里)에서 제14연대가 창설되었다.

창설 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상사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설 과정에서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反)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했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내에는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제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제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3차례나 발생했다.

3차례의 충돌에서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끝났다. 이에따라 제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여수·순천 지역의 정치상황은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우익간의 공존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했다.


이는 5.10 남한 총선이라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5.10 총선이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우익과 좌익 양측 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제주 토벌명령에 불만가진 지창수 등 하사관들이 주도

그러더니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폭력화됐다.

그러면서 여수·순천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제14연대의 반란은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인사계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비롯됐다. 

당시 1948년 10월 15~16일 경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제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했다.

그 당시 제주도 파병계획은 여수우편국 전보로 제14연대 1개 대대의 제주도 출동명령이었다.

이같은 작계(작전계획)을 중간에서 연대 내 남로당 조직에도 전파되었다. 

이때는 반(反)이승만 계열인 전임 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이 상부에 의해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연대 내의 남로당 조직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14연대에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됐다.

지창수는 40여 명의 남로당 세포 40여 명과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었다.

이날 저녁 장교들이 퇴근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 섰다.

지창수는 "지금 경찰이 처들어 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계속해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했다. 

이어 "동족상잔을 할 거냐, 반란을 할 것이냐 양자 택일을 하라"고 반란참여를 강요했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군인들은 즉각 사살되었다.


제주도 출병 반대와 경찰 침입이라는 격렬한 선동은 사병들에게 반경(反警)의식에 불을 지르면서 이들은 반란군으로 돌아섰다.

상사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시내로 진격하였다.

'두산백과' 등 기록들은 이 반란군에 참여한 군 병력은 1000~2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다.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20일 새벽 1시 20분 여수시가지로 진입, 좌익단체와 학생들에게 무기를 지급한 뒤  새벽 5시쯤 여수경찰서 등 각 관공서를 접수했다.

◇…반란 군인들과 좌익 인사들, 경찰과 우익인사 살해 보복

이어 오전 10시쯤 보안서와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익단체의 선도를 받아 경찰, 우익인사 색출에 나섰다.  

여수시를 장악한 것을 확인한 지창수는 오전 8시쯤,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진격시켰다.

순천읍에서 경찰이 이에 응전하였으나 패퇴하였고,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광주 제4연대도 총부리를 돌려 반란군에 합류했다. 

순천을 함락시킨 반란군은 3개 부대로 재편성했다.

이 가운데 주력인 1000명은 곡성, 남원 방면으로, 일부는 벌교·화순·보성·광주 등 방면으로, 나머지는 광양·하동 등으로 각각 진출했다.

제14연대 반란이 주둔지 여수·순천을  벗어나 전남 동부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반란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반란 소식이 알려지자, 지방 토착 좌익들이 반란군이 도달하기 전에 미리 봉기해 경찰과 교전을 벌여 해방구를 건설했다.

또, 붕괴된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등 거대한 민중봉기 형태를 보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주변 지역 공격을 속행, 반란 사흘째인 10월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했다.

반란군에 함락된 여수·순천 지역에서는 반란군의 점령에 호응하여 지역의 좌익 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인민위원회가 설치됐다.


또한 일부 학생들도 반란군에 가담했다.

여수·순천 등 반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좌익 지하조직은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남로당은 급격하게 진전되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여순지역을 점령한 반군을 1차적으로 토착 좌익과 합세하여 우익 인사를 색출하여 즉결 처분하거나 이들을 체포,연행하여 인민재판에 넘겼다.

또 인민위원회와 보안대, 의용군 등을 조직해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인민행정과 인민재판을 수행했고, 의용군은 전투를 담당했다.

여수지역의 경우, 인민위원회는 점령 첫날인 20일 오후 3시 중앙동 광장에서 민주여성동맹, 합동노도, 교원노조원 등 수만명이 참석한 인민대회에서 구성됐다.

이 자리에서 이용기, 박채영, 김귀영, 문성휘, 유목윤 등이 인민위원회 의장단과 간부로 선출됐다.

인민위원회는 21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 친일파, 모리배들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인구조사와 적산가옥조사도 벌였다.

고인수 여수경찰서장 이하 사찰계 형사 10명에 대한 총살형도 집행했다.


23일에는 최고심사위원회를 열어 '요처단 반역자'로 낙인, 우익인사의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처형된 인사는 김영준 (천일고무사장·한민당 여수지부장), 박귀환(대한 노총 여수지구위원장), 연창화(경찰서 후원회장), 차활인(한민당 간부), 이광선(미군방첩대 여수주재원)등 9명이다. 

인민위원회는 식량 창고를 개방해 1인당 쌀 3홉씩 배급하고, 천일고무 창고에서 흰색 운동화인 '찌까따비'를 꺼내 읍민들에게 나눠줬다.

인민위원회는 각 금융기관과 산업체의 운영권을 종업원에게 위탁하고, 일반인에게 대출하기했다.

이런 인민행정은 제14연대 반란군에 의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연계된 토착좌익에 의해 실시됐다.

한편에서는 선심정책, 그 한편에서는 보복정책이었다.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가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을 처형하기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선심정책은 피폐한 민생고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해 일반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술수였다.

즉 당시 국민이 생활은 좌·우익 정치투쟁과 통화남발,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등으로 심각한 지경이었다.

48년 당시 생필품 가격은 해방직후에 비해 무려 25배나 뛰어올라 극심한 물가고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농촌은 미군정청의 미곡수집 정책과 저곡가 정책, 그리고 농민을 대변할 단체가 파괴 당해 배고품에 치를 떨었다.

이런 점을 긁어주며 제14연대의 반란이 성공을 거두면서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산된 것은 국군내에 침투한 좌익 세력 때문이었다.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 설치...과잉 진압 나서

제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상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사령관은 육군총참모장 송호성 준장이 맡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진압군(또는 토벌군)은 크게 두가지로 먼저 순천을 탈환해 반군의 기세를 꺾은 뒤 여수를 재점령하고 동시에 지리산 방면으로 날아난 반란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10월 22일 정부에 의해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순천탈환작전은 군산에서 출동한 제12연대 2개 대대(백인엽 소령 지휘)와 4연대 1개 대대가 반란군 인민군사령부인 동순천역을 일시 공격하면서 진행됐다.

지원군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81밀리 박격포와 L-4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했다.


이어 같은 날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鶴口里)에서 벌어졌다.

진압군의 총공격으로 김지회를 비롯한 반군 지휘부는 이날 오후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했다.

순천읍내에서는 치안대와 민애청원, 학생들만이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여기에서 승기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에는 순천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했다.

10월 23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宋虎聲)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美坪洞)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부산에서 급파된 제5연대의 지원을 받아 바다에서 시내로 박격포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박격포 사격이 미숙한데다 반군 강력한 저항으로 엄청난 사상자만 내고 여수진입에 실패했다. 

1차 여수진입에 실패한 지휘부는 광양방면으로 달아난 반란군 주력을 추격하던 제12연대를 회군시켜 여수지역으로 이동케 했다.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한국전쟁암시한 이념의 대충돌·1995 이건상 전남일보)를 보면, 제12연대 회군명령으로 반란군에게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펼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셈이 됐다.

이는 또 빨치산을 양산하는 계기를 마련한 결과였다.

토벌사령관인 송호성 준장은 24일 내외신 기자를 동원하고 제2차 여수탈환작전을 폈다.


그러나 토벌군은 반란군의 기습에 걸려 송 준장은 큰 부상을 입고, AP통신 종군기자 클린턴이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등 또다시 패전을 맞봤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이틑날인 26일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 6대가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토벌군은 여수시내 종고산을 탈환한 뒤 이곳에 박격포를 설치, 바다와 산과 공중에서 포사격을 개시했다.

이로 인해 여수시내는 화재가 휩쓸어 잿더미로 변해갔다.

그러나 이미 반란군의 주력이 빠져나간 여수에는 극소수의 반란군과 무장한 일부 민간인만이 여기에 대항할 뿐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여수는 10월 27일 완전히 진압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로써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진압군의 반란군 진압 과정에서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학교 운동장에 주민 집결, 머리 짧고 군용 속옷 입은자 즉결 처형

1948년 11월 13, 14일자 경향신문 보도는 참혹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초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여수읍은 어느 곳을 가나 탄환이 벽이며 유리창을 사정없이 깨뜨려 놓았다. 집집마다 탄환의 흔적이 콩을 뿌린 것 같았다. '

'질식할 만큼 전율과 공포의 7일을 겪고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재산을 모두 캐우고 가족을 잃은 이재민이 8800여명에 달한다니 가슴이 뜨겁게 느껴짐을 참을 길없다'고 여수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토벌 진압군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하였으며,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반란군 협력자, 부역자를 모두 색출하고자 하였다.

색출작업은 먼저 모두 읍민을 학교 운동장 등지에 집결시켜 머리가 짧거나 군용 속옷을 입은 자를 가려내는등 외모를 통해 판단했다.

또, 경찰관과 청년단원, 우익 인사 등이 일일이 부역자를 색출하는 방식이었다.

반란군에 협력했다고 지목된 사람은 즉결처분되거나 곤봉으로 타살되거나 총살되었다.

10월28일부터 시작된 색출작업은 12월 중순까지 약 40여 일 간 진행돼 여수일대는 공포의 도시가 되었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라고 소문난 제5연대 김종원 대대장은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부역혐의자를 재판없이 일본도(刀)로 즉결 참수해 악명을 떨쳤다.

이외에도 여순사건과 관련해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2817명이며, 이 가운데 410명은 사형, 568명은 종신형, 나머지는 유죄나 훈방됐다.


서글픈 것은 이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여수·순천지역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또한 반란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되었다.
 
그 후 제8관구 경찰청에서는 11월3일부터 11일 사이 여수·순천사건으로 관련자 3293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다음해인 1949년까지 지리산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모두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당시 동광신문 10월 31일자에서 여수읍의 5분의 3이 폐허화하고, 피해 가옥은 수천호, 이재민 역시 수만명이 나왔다고 보도하고 있다.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여순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개다가 반란 주동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좌파 계열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여순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제정. 국군 정비 작업 강화

5.10 총선에 반대한뒤 방북을 통해 김일성, 김두봉 등을 만나 남북협상을 벌이고 온 김구, 김규식 등 반이승만 계열의 우파도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공격받았다. 


초대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건 직후 ‘극우의 정객’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하며 김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대학병원에 요양차 입원했던 김구는 '피눈물로써 하소연한다'면서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 담화문 요약은 이렇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 방화, 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요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 아니냐.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때에 있어서 마땅히 충동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 숙고하여 용감히 회오하고 정궤(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여순사건을 진압한 이승만 정부는 위기감을 느껴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다.

그 결과 5%가량, 4878명이 군복을 벗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나서 국군 조직법과 국가 보안법을 제정을 촉구했다.

이승만 정부는 또 임시 우편단속법 통과와 청년단체 통폐합, 학도호국단 창설 등을 통해 국가기구와 제도를 철저하게 반공국가화 했다.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서인지 국가 보안법을 1948년 12월 1일에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여순사건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반란군 부역자나 협력자로 낙인이 찍힌 가족과 후손들은 연좌제에 걸려 취업제한까지 받았다.

당시 '산(山)사람'으로 불리는 지리산 빨치산은 벌교 등지에서 종종 유격전을 벌였다.


강력한 반공국가와 빨치산 투쟁, 그리고 2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순사건이다.

그러나 진압군과 반란군사이에서 선량한 주민들의 학살 등은 미완의 상처다.

때문에 지난 6월 제21대 국회에 입성한 이 지역구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이 당시 희생자 유가족 등이 나서서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이에 앞서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지난해 10월 10일 국회 행정안전위 국정감사에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조속한 지정을 건의했다. 


도는 당시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은 해방 후 혼란과 이념 갈등 시기에 국가권력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이 지나 유족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고령이어서 국가 차원의 조속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어 “여순사건 특별법안은 지난 16·18·19대 국회에 발의됐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20대 국회에도 정인화·이용주·주승용·윤소하·김성환 의원 등이 각각 발의한 특별법안 5건이 제출됐다”고 설명했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국회 행정안전위에서 법안심사를 마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전남도도 올해 5억 원을 편성해 희생자 추모와 유적지 보전에 나섰고, 국회에서 명예회복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던 만큼 국가 차원에서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여순사건 유족회원 10여 명도 이날 국회 행정안전위 당시 국정감사 2반의 반장인 이채익 자유한국당 의원을 면담하고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자유한국당이 동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들은 “대법원이 지난 3월 민간인 희생자 3명의 재심을 받아들였고, 이후 광주지법 순천지원이 10월28일 재심 4차 공판을 열 예정이다. 여야가 합의로 특별법을 제정해 이제라도 유족의 눈물을 닦아달라”고 호소했다.

 ▶▶참고 문헌 및 인용 자료 :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한국기자협회, 한국전쟁암시한 이념의 충돌. 이건상 전남일보기자), 네이버백과. 두산백과.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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