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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9)>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단기'로 대한민국 연호(年號)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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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신라. 발해. 고려. 조선거친 연호..고종이 국가자존심세우려 지명.
-일제 때 친일파의 내선일체로 일제 연호로 통일했으나, 대한민국임정만 존속
-해방 후 대한민국. 단기로 연호 쓰면서 혼선,,,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주장했으나 국회부결.
-초대 국회에서 단군기원인 '단기'로 일원화.
-5.16 군사정변후 박정희 정권서 1961년 '단기→서기'로 법률안 개정.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지난해 걸 그룹 트와이스의 일본인(日本人) 멤버 '사나'가 논란에 휩싸였었다.

논란은 사나가 트와이스 공식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내용 중에 ‘연호(年號)’ 때문이었다.

사나는 일왕(日本王)의 교체로 연호가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변경되는 것에 대한 감상을 트와이스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국호(國號)못지 않게 국민자존심 갖게 된 연호

'사나'의 인스타그램 게시 글은 이렇다.
 
“헤이세이(平成)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헤이세이 시대가 끝난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지만 헤이세이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레이와(令和)라는 새로운 스타트를 향해 헤이세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을 상쾌한 하루로 만듭시다! 헤이세이 고마워, 레이와 잘 부탁해.”

지난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우리에게는 101주년을 맞아 국민적 자존심이 크게 훼손된데 비판이 쏟아졌다. 

한 언론은 '단순한 감상일 수 있지만 파장은 의외로 거셌다. 군국주의 상징인 일본 연호를 일본어로 언급했다는 게 불편한 시선의 출발'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연호는 그저 ‘시대의 구분’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헤이세이'는 아키히토 전 일왕이 즉위한 1989년부터 사용한 일본의 연호다. 

나루히토 일왕이 지난해 5월 1일 즉위하면서 일본의 연호는 '레이와'가 됐다. 

사나는 헤이세이 시대인 1996년생이다.

연호는 군주국가 군주가 자신의 치세 연차에 붙이는 칭호다. 


연도를 표시하는 호칭이기도다. 

연호는 근대 이전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인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 등지의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됐다.

특히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국가가 만든 연호를 주변 국가들이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유물’이 됐다. 현대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서력기원을 도입하면서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는 완전 폐지됐다.

북한과 대만, 그리고 태국은 불멸기원(불기)을 사용하는데 세계 불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자체 기년법을 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옛 방식으로 연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걸 그룹 트와이스 '사나'가 헤이세이니, 레이와를 게시한 것이다.

◇… 5000년 역사, 우리나라 연호 어떻게 변했나

B. C(Before Crist), 즉  그리스도 예수가 태어나기 전인 기원전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응하는 단어가 A. D( anno Domini), 기원후다. 즉 그리스도 예수가 태어난 후를 말한다.

기원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 기원 후 OOOO년 이라고 할 때 쓴다.

두산백과를 인용하면 신학자 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가 '부활절의 서(書) 525년'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기원 754년에 두었다. 이것이 3∼7년이 늦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나, 9세기의 샤를마뉴시대에 일반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리도 지금은 A. D를 쓰며 '서기 (西紀) OOOO년 O월 O일'식으로 통용된다.  서기는 이른바는 서력기원의 약자이다.

서기를 쓰기 전에는  단군이 즉위한 해인 서력기원전 2333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기원인   단군기원 즉 단기(檀紀)를 써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단기(檀紀)를 사용하다가 이후 1962년부터는 공식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기(西紀)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 즉위하면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남아있다.

이것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은 한반도의 최초의 연호이다. 

고구려는 또  연가(延嘉)나 건흥(建興) 등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나 백제에서 연호를 어떻게, 얼마나 사용했는지 전모를 밝히기는 무리이다.

역사 기록에서 연호 대신 군주가 즉위한 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따져서 연도를 표기했다.

신라나 발해는  역대 왕조 중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6세기 법흥왕이 처음 사용해서 진덕여왕 시기까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원(建元)→개국(開國)→대창(大昌, 혹은 태창太昌)→홍제(鴻濟)→건복(建福)→인평(仁平)→태화(太和)라고 두산백과사전은 전한다.

그러다 진덕여왕 재위 중에 당나라와 외교강화를 위해 당의 연호를 받아들이며 쓰던 태화(太和) 연호를 포기했다. 

당나라가 쓰지 말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던 묘호를 계속 쓰는 등 신라가 외왕내제를 계속한 정황이 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초기부터 중기까지 연호를 썼다. 대조영이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하나 확실성을 놓고 논란이 있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태봉과  왕건의 고려, 그리고 견훤의 후백제 모두 자체 연호를 썼다.

고려 광종 초기까지 주로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자체적인 연호가 사용됐으나, 10세기 중반 이후 송나라의 등장과 요의 성장 등 동아시아의 힘(力)이 재편되자 중국 왕조의 연호를 들여다 사용했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도 명나라와 사대의 예를 맺고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세력이 된 뒤로도 조선은 정부의 공식 문서나 대청 외교관계에서야 어쩔 수 없이 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연호 '숭정(崇禎)'을 유학자들이 계속썼다.

기록에 숭정 원년(1628: 무진년)을 원년으로 삼아 황명기원(皇明紀元), 또는 황명기원후무진후(皇明紀元後戊辰後)라고 하며 연도를 헤아린 사례도 있다.

◇…고종,  이씨 왕조 '개국' 연호 선포...일제식민시대 일제 연호

구한말, 즉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고종황제는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했다.

이와함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했다.

당시기록을 보면,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이후 고종임금은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선포했고, 고종은 이듬해인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어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드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의 주도로 기존의 연호 대신 일본 연호(메이지·다이쇼·쇼와)가 사용되었다. 

일본왕 즉위에 따라 일본의 명치·대정·소화라고 바뀌었으며, 이를 친일 매국노들이 '내선 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며 일제의 연호를 우리 민족에 강요했다.
 
내선일체란 문자 그대로 모두가 일본인이 되자는 뜻이다.

심지어 내선일체에 나선 언론까지 생겼다.

바로 일제가 전쟁에 광분한 1940년 1월1일자로 창간된 內鮮一體)(내선일체)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일제의 침략 정책에 앞장선 것은 물론 일문(日文)으로 된 친일잡지로, 1944년 10월 통권 38호로 종간되었다. 

학자 등이 낸 기록들을 보면 그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은 대조실신(大朝實臣. 조선인 박남규의 창씨개명된 이름), 인쇄인 金光容圭(김용규의 창씨개명이름), 인쇄소 (주)대동인쇄소(大同印刷所), 발행소 내선일체실천사(內鮮一體實踐社, 京城府 宮井町 83ノ1), A5판 100면, 정가 40전이었다고 전해진다.

제호에서 보듯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내(內)’는 내지(內地) 즉 일본을 말한 것이고 ‘선(鮮)’은 조선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1919년 기미 3·1운동 이후에는 내선 융화(融和)를 강조하며 연호 명치,대정등을 쓰도록 강권했다.


이어 1930년대에 들어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조선어교육을 없애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시키는 등 보다 강제적인 시정(施政)을 했다.

여기서의 ‘일체’란 둘이 하나가 되자는 것이 아니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天皇)의 신민(臣民)으로 만든다는 말이었다. 

일본 왕의 즉위인 일제의 연호까지 쓰게해 철저히 식민지화 했고, 더나가 황민화(皇民化) 정책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시대에도 조선인들 사이에서 한동안 명치니, 대정이니, 소화니 하는 일제 연호가 부르기 편하다며 이를 고집했다.

일각에서 이 일제 연호를 폐지하자는 운동을 벌였으나, 정부가 없는 조선에서 마땅히 부를 연호가 없어 혼란만 부추겼다.
   
◇…해방 후 연호 이승만 '대한민국' 주장했으나 제헌의회서 '단기'로 법제정

‘대한민국’도 연호에서 비롯됐다.

연호란 연도의 차례를 나타내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수립연도인 1919년을 원년으로 대한민국이란 연호가 사용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정 수립 연도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정하여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정부는 1990년부터 해마다 4월13일 열었던 임정 수립 기념식을 올해부터는 4월 11일로 바로잡아 행사를 추진할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1945년 해방이후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이승만은 8.15 광복 이후 1948년(대한민국 30년, 단기 4281년) 제헌 국회 개원사에서부터 대한민국 연호를 초대정부에서 계속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 분투용진(奮鬪勇進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위에 세웁시다.'라는 제목이 초대 대통령취임사에서 이를 언급했다.

실제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는 1948년 9월 25일까지 대한민국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이때부터 입법, 재정, 외교, 군사 등 모든 공문서에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국회는 1948년 9월25일 법률 제4호로 ‘연호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했다. 

국회는 앞서 같은 해 7월12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며 그 전문(前文)에 제정연도를 ‘단기 4281년’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국회는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단군기원을 법정연호로 채택함에 따라 대한민국 연호는 신정부 수립 1개월 만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고집함은 대한민국이 북한에 맞서 정통성이라는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해 임정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

이 임정의 정통성을 연호로 지키려고 나섰던 이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출신 애국지사인 연병호(延秉昊·1894~1963)  1·2대 국회의원였다.

제헌국회는 1948년 7월1일 1회 임시회 22차 본회의에서 국호를 임정이 정한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그 뒤  이번에는 연호를 놓고 혼선을 빚었다.

입법부인 국회는 '단기'로, 행정부는 '대한민국'로 연호를 달리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제헌국회는 개회부터 '단기 4281년'이란 연호를 썼지만, 행정부는 대통령 취임식부터 '대한민국 30년'으로 사용했다.

◇…제헌국회, 국호에 이어 연호 지정 놓고 혼선

국회는 이에 따라  그해 9월8일 신익희 국회의장 사회로 60차 본회의에서 연호 문제에 관한 건을 다뤘다.

연병호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연호 채택을 호소했다.

그는 "외국 민족(일제)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그 백성이 일어서서 나라를 건설하고 능히 민족의 국가를 회복했다는 그 역사를 3억만년 이후 역사가가 알도록 하고 우리 민족의 혁명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대한민국' 연호를 쓰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단기'를 쓰지 않는 우리 동포가 있다면 '대한민국' 연호를 써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혁명선열 앞에 우리는 칼을 박고 말 것이니까 '대한민국' 연호를 쓸 것을 주장한다"라고 설명했다.

연병호 선생의 이런 주장에 배중혁(1920~1991·경북 봉화)·김철(1898~1978·경북 경주갑) 의원이 재청·삼청으로 뜻을 모아 가부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재석의원 121명 중 찬성 33명, 반대 87명으로 부결됐다.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가 보고한 '단기' 연호는 재석의원 121명 가운데 찬성 89명, 반대 26명으로 채택됐다.

'대한민국' 연호는 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했지만, 연병호의 임정의 정통성을 연호로 계승하고자 앞장섰다.


연병호는 임정에서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임정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을 맡았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후 독립투사의 후손인 이종걸 더불민주당 의원도 지난 2011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연호에관한법률 전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 서기를 공용연호(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연대표기 방식)로 유지하되 단기를 함께 사용하자는 내용이다.

단기 연호로 계산하면 2020년인 올해는 ‘단기 4353년’이다. 

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자는 게 연호 병기를 요구하는 취지다.


이 의원에 따르면 법안발의 이유에 대해 “기존의 서구 편향적인 제도를 개선해 우리민족의 건국기원인 단기를 서기에 병기하도록 정부에 노력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 병기가 확대돼, 우리의 자랑스러운 반만년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국격에 걸맞는 자긍심 고취와 자랑스러운 반만년 역사를 가진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며 법안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민간단체인 ‘단기연호병기사용법제화추진위원회’는 “고조선 건국일을 경축하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고조선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으면서 고조선 건국일로부터 날짜를 계산하는 단기를 서기에 병기하는 것조차 못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도 국회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19대 국회가 막을 내린 2016년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당시 정부는 공공기관에서 단기를 병기하는 것은 법률에 위반된다는 입장이었다. 

20대 국회에선 ‘연호에 관한 법률안’ 관련 개정안이 발의되지 않았다.

현재 통용되는 서기는 1962년 초부터 사용됐다.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기 연호 사용을 추진했다.


그해  같은 해 11월 국회가 국제 조류에 따라 서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연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서기가 사용되면서 전통적 의미의 ‘연호’를 써야한다는 주장도 급속히 사라졌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 : 국회의사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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