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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두 그루 배롱나무와 더불어...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57편


057. 두 그루 배롱나무와 더불어
-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文獻書院)>을 찾아서 ④

가을로 가는 발걸음의 급한 속도 속에서도 몇몇 가지에 붉은 꽃송이를 여전히 매달아놓고 있다. 옛 선비들은 몸체에 껍질이 없어 매끈하고, 속이 그대로 노출되어 투명하고 맑은 배롱나무의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만큼 밝고 해맑은 몸체에 흰빛을 띠고 있으면서 부드러운 촉감에 이르기까지 배롱나무는 깔끔하고 청렴한 선비들을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일까, 목은 선생을 따르는 어느 이름 모를 선비가 선생을 추앙하는 마음을 모아 영각의 좌우에 배롱나무를 심어놓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배롱나무는 느긋하게 세월의 흐름에 따르는 양반과도 같다 하여 ‘양반나무’라 불릴 정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기다릴 줄 안다. 그러고는 다른 봄꽃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갈 때서야 비로소 번창한 가지 끝에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붉은 꽃송이들을 활발하게 불러들여 장관을 이루어놓는다.

영각 좌우로 한 그루씩 심겨진 배롱나무는 그 크기와 높이와 폭이 엇비슷하여 목은 선생을 따르는 문하생들이 다정스레 어깨를 겯고 있는 듯하다.


진수당(進修堂)으로부터 출입문으로 빠져나오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은선생영당(牧隱 先生影堂)을 바라본다. 진수당을 에워싸고 있는 담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영당의 지붕 위로 드리우고 있는 배롱나무에 먼저 눈길이 멈춘다.

이미 배롱나무의 꽃철이 지났음에도 아직 아쉬운 듯 두어 송이 붉은 꽃을 보인다. 세상은 모두 가을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다. 배롱나무의 가지 끝도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여름의 호시절을 끝내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배롱나무의 작은 가지 끝에 매달린 꽃송이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붉게 피어나 있다. 배롱나무가 자신의 꽃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듯하여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진수당에서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빠져나오고야 만다. 시각은 벌써 오전 10시 30분을 뛰어넘고 있다.

출입문 밖으로 나오자 먼저 반기는 것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 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색 신도비(李穡 神道碑)>이다. 안내문에 쓰인 설명을 그대로 옮긴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년(조선 세종 15년)에 세웠으며, 글은 호정 하륜이 썼다.

목은은 고려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삼은)으로 불린다. 그는 공민왕 때에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는 친명 정책을 지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려워지자 불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점진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은 바의 뒷면에 자신이 지은 음기(陰氣)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이 목은 이색 선생의 죄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심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도전과 하륜, 권전의 평전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묘의 남동쪽에 세워두고 후대로 하여금 그 정신을 기리도록 하는 비이다. 목은 선생의 신도비는 낮은 받침대의 돌 위에 비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후대로 하여금 선생의 학문과 고결한 선비정신을 이어 받도록 하고 있다.

1433년(세종 15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오늘날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것을 166년(현종 7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신도비 곁을 떠나 몇 발자국 앞으로 옮겨선다. 신도비에서 평지에 이르러 목은선생영당(牧隱先生影堂) 앞으로 다가선다. 목은 선생의 영당은 서울, 대전, 부여, 예산에도 있다.

이성계가 목은 선생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망국의 사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으며 해골을 고향 산천에 묻을 뿐이라고 외친 충절에도 태조는 끝까지 그를 친구의 예로 극진히 대접했다 하거니와, 목은 선생의 영당이 곳곳에 세워져 추앙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곳 영당은 묵은 이색(1328~1896) 선생의 초상(보물 제1215호)을 모신 영정각이다.


돌계단에 올라 영정각으로 드는 삼문 중 오른쪽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잠시 걸음을 멈춘다. 활짝 열려진 삼문에서 저만큼 영당 안에 모셔진 목은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촘촘하게 짜인 닫집 안에 영정 그림이 들어있고, 좌우로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짐짓 발걸음이 잦아드는 느낌에 휩싸인다. 천천히 발걸음 하면서도 선뜻 영당 앞의 돌계단에 오르지 못한다.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는 원래는 평상복 차림과 관복 차림 2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관복 차림 한 점 뿐이란다. 그러나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후대에 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지고 있단다.

다시 그린 그림이 5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목은서원본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영당각 안에 있는 초상화는 조선 중기 대표적 화가 중 한 사람인 김명국이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으로 보물 제1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을 살짝 곁들였고, 사모에도 회색 줄을 첨가해 입체감을 돋보이게 그려져 있다(「다음백과」에서). 양당 앞에 게시된 바에 의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영모암은 건지산 북쪽에 있는데, 이색의 화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 지은 화상찬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초상화의 원본이 당시 실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영당의 초상화는 그 크기가 가로 85.2cm, 세로 150.7cm로서 1755년 서울수송목은영당대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이라 한다.

영당 밖 저만큼에서 목은 선생을 우러러본다. 우러르면 우러를수록 한없이 어질고 자애로우면서도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조금도 흩어짐이 없는 고고한 모습을 엿보이고 있어 얼마나 고결하고 고매한 일생을 살아오셨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잠시 후 영당의 돌계단에 올라 활짝 열려진 영당 안에 든다. 다시 한 번 목은 선생을 한참 동안 우러르다가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영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영당의 추녀 끝을 보듬어 안 듯이 서 있는 배롱나무 두 그루를 만난다. 영당의 지붕 좌우를 옹위하듯 서 있는 배롱나무에는 한여름의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긴 개화의 시간을 가지고서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에 부응할 수 없다는 것일까.

가을로 가는 발걸음의 급한 속도 속에서도 몇몇 가지에 붉은 꽃송이를 여전히 매달아놓고 있다. 옛 선비들은 몸체에 껍질이 없어 매끈하고, 속이 그대로 노출되어 투명하고 맑은 배롱나무의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만큼 밝고 해맑은 몸체에 흰빛을 띠고 있으면서 부드러운 촉감에 이르기까지 배롱나무는 깔끔하고 청렴한 선비들을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일까, 목은 선생을 따르는 어느 이름 모를 선비가 선생을 추앙하는 마음을 모아 영각의 좌우에 배롱나무를 심어놓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배롱나무는 느긋하게 세월의 흐름에 따르는 양반과도 같다 하여 ‘양반나무’라 불릴 정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기다릴 줄 안다.

그러고는 다른 봄꽃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갈 때서야 비로소 번창한 가지 끝에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붉은 꽃송이들을 활발하게 불러들여 장관을 이루어놓는다. 영각 좌우로 한 그루씩 심겨진 배롱나무는 그 크기와 높이와 폭이 엇비슷하여 목은 선생을 따르는 문하생들이 다정스레 어깨를 겯고 있는 듯하다.

문헌서원에서 이 배롱나무가 한창 꽃을 피울 7~8월 한여름에 이르면 영각 주변 일대는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서원의 어디에서 보아도 그 화려한 꽃빛이 온통 서원 곳곳에 이르기까지 꽃그늘 품으로 끌어안으며 환하게 밝혀놓는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 홍살문에 들다 보면 정면으로 백일홍의 꽃빛이 두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장판각((藏版閣)에서도, 강륜당(講倫堂)에서도, 더더구나 인접한 효정사(孝靖祠)와 진수당(進修堂)에서는 아예 그 붉은 꽃빛에 물들어 버린다 하니 목은 이색 선생의 학덕과 고고한 정신이 배롱나무의 꽃빛으로 두루 퍼지고 있다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배롱나무야말로 문헌서원의 상징목(象徵木)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흔히 배롱나무는 개화 기간이 100일이라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린다고 하지만 한 번 핀 꽃이 백일 동안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꽃이 원추상의 꽃차례를 이루어 차례차례로 피어나는 기간이 백일이다.

또한 배롱나무는 햇볕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늘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혼자 자리하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떨어져 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고고한 기품을 지닌 선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목은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지닌 듯하여 모든 나무들과도 같이 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이 가을에 이르러서도 그 모습이 청초하고 맑고 견고한 기품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시 <백일홍百日紅>을 떠올린다.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 엊저녁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나고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 서로가 일백일을 바라보게 되니
對爾好衡杯(대이호형배) : 너를 대하여 좋게 한 잔 하리라

목은선생영당(牧隱先生影堂) 앞에서 뒷걸음질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와 목은 선생이 누워 계신 곳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한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최초이자 최후 왕사인 무학자초(無學自超.1327~1405)가 자리를 잡은 곳이라 전한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고 있고 야트막한 곡장(曲墻)이 묘지의 잔디와 경계를 잘 이루고 있다.

무학이 소점했다는 명당 터라서 그럴까, 무덤 앞에 서있는 동안 내내 포근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돌면서 선비들의 정신과 그들의 당시 치열하였던 학문 정진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맨 위에 있는 묘가 목은 이색 선생의 묘이고, 아래 있는 묘가 셋째 아들 종선의 묘이다. 목은 선생의 무덤은 원형이며, 무덤 앞에는 망부석, 문인상, 마상이 각각 2개씩 양쪽에 있고, 오른쪽은 비석이 서 있다. 비는 호화스럽기는커녕 지나치게 검소한 모습이다. ‘목은선생 이색 지묘(牧隱先生 李穡 至妙)’라고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있다.

선생은 이성계의 출사 종용에도 이를 끝내 고사하고 1396년(태조 5년)에 여주 신륵사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셋째 아들인 종선이 한산으로 영구를 모셔와 기린산 아래 이곳 선영에 묻힌 것이다. 선생의 묘 앞에서 잠시 지난날을 떠올린다.

필자의 중학교 시절 이곳은 주요 소풍지로 곧잘 찾았던 곳이다. 그러나 좁은 가슴일망정 기품 있는 서원의 품격을 담아오기보다는, 목은 성생의 학문과 덕행을 본받아 흠모하기보다는 완만하게 이루어진 무덤 주위의 잔디밭에서 뒹굴고 시합을 하던 시절이 지금까지도 신나는 일로 기억된다.

부끄러운 미소가 머금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아무런 거침이 없이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주었으니, 한 번 누워 뒹굴기 시작하면 한참 동안이나 절로 굴러 내려올 수 있어서, 더없이 신나고 즐거운 시간을 누린 셈이다.


이제는 뒹굴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조심히 다스리며 천천히 내려오다가 수각(水閣)에 이른다. 아무리 큰 가뭄이 오더라도 단 한 번도 흐름을 멈추는 일이 없었단다. 뒤덮인 속진(俗塵)으로 세상이 아무리 쉽게 변한다 하더라도 이 샘물은 기린봉 깊숙이 씻어내며 흐르고 흘러 마른 땅을 적시어 오곡을 무르익게 하고, 탁한 세상의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흐름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하니, 옛 선비들은 이 문헌서원의 샘물에서 한 모금의 물로 갈증을 해소하며 세상을 맑게 닦아왔을 것이 아니겠는가.

한 바가지의 물을 퍼서 한 모금의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온몸이 절로 깨끗이 씻어지는 듯하고, 남은 물을 땅 위에 뿌려주니 마른 땅까지도 절로 촉촉이 젖어들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최초로 한산소곡주를 빚어내는 물로 쓰였다고도 한다.

홍살문 가까이에 이르면서 문헌서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로 오른다. 오르는 길 양쪽에는 원추리의 싱싱한 잎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다. 원추리도 이미 꽃철을 넘겨 등황색의 꽃을 볼 수 없었으나 그래도 싱싱한 잎이 살아 있어 목은 선생의 묘소를 에워싸고 있는 푸른 솔과 더불어 아름답게 조화로워 보인다.


원추리는 지난해 나온 잎이 마른 채로 새순이 나올 때까지 남아 있어 마치 어린 자식을 보호하는 어미와 같다 하여 ‘모예초’라고 한다. 또한 예전에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훤당’이라 하였거니와, 여기서 ‘훤’은 원추리를 뜻하며 당시 풍습에 어머니가 거처하는 집의 뜰에 원추리를 심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헌서원 입구 언덕에 올라 문헌서원을 한 눈으로 바라본다. 원추리에서 목은 이색 선생의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가정 선생의 출생지로 알려진 고촌(枯村)으로 발걸음 하기로 한다.

배롱나무를 바라보며
- 문헌서원(文獻書院)
                       구재기

숨소리를 들어보기로 한다
계절이 지나면서도
어제 종일 불던 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바람이 지난 자리 어디에선가
뜨거운 숨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의 숨소리일까
배롱나무 우듬지에서는
숱한 사연 하나 내려놓지 아니하고
시뻘건 꽃불이 잇대어 타오르다
새로운 계절을 만나고
사우祠宇를 지나던 구름 한 조각이
꽃불에 붉게 물들어버린다
누가 제 그림자에 흠칫 놀라
저리도 서둘러 거둬들이고 있는가
세상사 가진 것은
잠시 말을 빌려 타듯 살아가는 것이라지만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일여一如한 경계經界가 분명히 있고 보면
텅 비어 있는 세상
낮은 숨소리도 크게 울리게 된다
꽃피어 열매가 여물면
저절로 말라 죽는 대나무처럼
갈대처럼 결코 후회할 수가 없다
아, 돌이켜 흐름을 멈출 수 없다
서원의 샘물은 거울처럼
세상을 닦아내기 위하여
흐름에 그림을 담아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 말을 빌려 타다 :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차마설借馬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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