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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7)> 제헌헌법, 초안은 내각制...이승만의 대통령制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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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총선으로 개원한 초대국회의 정부수립위해 헌법과 정부조직법준비.
-헌법기초위원 30명 대다수 유진오,신익희 내각제선호
-이승만의 미국식 대통령제고집...김준연의 수정해 본회의상정.
-헌법전분수정과 경제문제부결,..6,7월 제헌의회 조문 다듬어.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 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기 전 2달가까이 초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승만은 사실 초대 국회에 출마할 의사가 없었다. 초대 대통령이 되면 금배지를 반납할 바에 차라리 불출마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측근들은 초대 국회에 들어가 헌법을 만들어야, 미국식이든, 독일식이든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해 국회의원이 됐다. 
 
5.10 총선으로 구성된 초대 국회가 그해 5월31일 개원하자마자 연장자인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이 된 것이다.

이승만은 초대의장으로서 무엇보다 헌법제정 작업을 서둘렀다. 

세상없어도 8월 15일까지는 정부수립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개원 이튿날인 6월 1일의 제2차 본회의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30명과 국회법 기초위원 15명을 선정하기 위한 전형위원 10명을 선출했다. 

전형위원은 도별로 호선의 방식으로 1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기초위원 30명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여 6월 2일에 열린 제3차 본회의에 보고했다.

제헌국회속기록을 보면 헌법기초위원은 다음과 같다. 
  
유성갑(柳聖甲, 고흥 을),  김옥주(金沃周, 광양),  김준연(金俊淵, 영암),  오석주(吳錫柱, 고흥 갑),  윤석구(尹錫龜, 군산),  신현돈(申鉉燉, 무주).  백관수(白寬洙, 고창 을),  오용국(吳龍國, 남제주),  최규옥(崔圭鈺, 춘천),  김명인(金命仁, 울진),  이종린(李鍾麟, 서산 갑),  이훈구(李勳求, 서천),  유홍열(柳鴻烈, 제천),  연병호(延秉昊, 괴산),  서상일(徐相日, 대구 을),  조헌영(趙憲泳, 영양),  김익기(金翼基, 안동 갑),  정도영(鄭島榮, 영천 갑), 김상덕(金尙德, 고령),  이강우(李康雨, 진주),  허 정(許 政, 부산 을),  구중회(具中會, 창녕),  박해극(朴海克, 밀양 을),  김효석(金孝錫, 합천 을),  김병회(金秉會, 진도),  홍익표(洪翼杓, 가평),  서성달(徐成達, 고양 갑),  조봉암(曺奉岩, 인천 을),  이윤영(李允榮, 종로 갑),  이청천(李靑天, 성동) 등이다.
  
이들의 소속 정당은 독촉국민회가 6~9명, 한민당이 5~7명, 그 밖의 군소정당이 2~4명, 그리고 무소속이 13~14명인 것으로  다르게 분석됐다.

이러한 숫자는 국회 내 세력판도를 얼추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들 기초위원 30명 가운데는 전형위원이 8명(윤석구, 오용국, 이윤영, 유홍열, 이종린, 서상일, 허정, 최규옥)이나 포함, 시비가 일었났지만 그대로 확정되었다. 
  
◇… 미국정부, 이승만과 갈등 빚는   하지 사령관 경질 서둘러
  
국회가 헌법기초위원회(약칭 기초위원회) 구성문제로 부산한 6월 1일에 하지 장군이 국회의원 전원에게 개별적으로 보낸 편지는 이승만의 부아를 있는 대로 돋우었다.

하지는 5·10총선거의 의의를 강조하고 나서 '여러분이 정부조직을 토의 시작하려고 집회할 때에 가급적 속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면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국회가 소집되면 곧 결의문을 통하여 국회에 북한 대표 100명의 의석을 공식으로 두어 북한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표명할 것.
  
 둘째로, 국회는 조속히 유엔한국위원단과 연락을 취할 연락위원을 임명하여 조선독립정부 수립의 편의를 도모할 사명을 가진 위원단과 연락할 것. 
  
 셋째로, 국회가 한국국민의 요구와 심리에 부적당한 형태의 정부를 비치한 그런 유의 헌법을 경솔히 채택함을 피할 것.”
  
때문에 이승만이 의장으로 진행된 6월 2일의 본회의는 개회 벽두부터 하지의 편지가 공식 편지냐 사적 편지냐의 논란으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승만은 의원들에게 충분히 발언하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하지가 지각없는 일을 해 가지고 온갖 모략선전을 하고 다니는 반대파들에게 악선전할 구실을 주고 있다"고 맹비판했다.

그러자 미 군정청은 하지의 편지는 사적인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 논란은 마무리되었다.
  
이승만과 하지 사이의 격심한 반목은 총선거가 끝나자마자 미국정부로 하여금 서둘러 하지의 경질문제를 검토하게 했다. 
  
미국정부가 하지의 경질을 얼마나 긴급하고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는가는 미합동참모부가 맥아더 장군에게 하지의 소환문제를 통보한 극비전문과 관련하여 국무부 극동국장 버터워스(William W. Butterworth)가 마셜(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과 러베트(Robert A. Lovett) 차관에게 제출한 극비 비망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1948년 ' FRUS(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극동국의 우리는 그동안 하지 장군과 이승만 박사 사이에 격심한 개인적 적개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 왔다"라며 "그 사실과 함께 이 박사는 남한에서 새 정부의 명의상의 수장이 아니면 가장 강력한 실권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정부로의 권력이양을 위한 성공적인 협상을 위태롭게 만들기 전에 하지 장군의 교체가 절실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적혀있다.

이어 "이 조치의 시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하지 장군이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하나, 그의 교체는 그것이 이 박사를 무마하기 위한 조치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가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기 전에 취해져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최근에 선출된 국회가 이 박사를 고위직에 선출할 것이므로 개원되기 두 주일쯤 전에 하지를 이동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승만은 미국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을 미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에 근무하는 장석윤(張錫潤) 등을 통하여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  1주일 내 헌법안 제출지시...유진오案 vs 권승렬案

기초위원회는 다음 날 오후에 국회의사당에서 첫 회의를 열어 위원장에 한민당의 서상일 의원, 부위원장에 독촉국민회의 이윤영 의원을 선출하고, 유진오(兪鎭午) 고려대 교수, 고병국(高秉國) 변호사, 노진설(盧鎭卨) 대법관, 권승열(權承烈) 미군정청 사법부 차장, 임문환(任文桓) 군정청 중앙경제위원, 한근조(韓根祖) 변호사, 노용호(盧龍鎬) 국회사무차장, 차윤홍(車潤弘) 국회사무국장, 윤길중(尹吉重), 김용근(金龍根) 10명을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 

이들 전문위원은 신익희의 후원 아래 비공식적으로 헌법안 기초 작업을 해 온 행정연구회 멤버들과 한민당과 가까운 인사들이 거의 반반씩 포함된 셈이었다.
  
6월 2일의 국회는 기초위원회로 하여금 6월 8일까지 헌법안을 기초하여 본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휴회했다.

국회가 구성되기 전에 이미 유진 오에 의하여 헌법 초안이 작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나 1주일 안에 신생 독립국의 헌법안을 준비한다는 것은 아무리 정치 일정이 급박하더라도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필리핀 같은 나라는 이틀 동안에 헌법을 정했다고 세계 사람들은 칭찬합니다” 하고 서두를 것을 독려했다.
  
기초위원회는 그달 4일 오후부터 중앙청 회의실에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국회 개원일의 제1차 회의에서 채택한 '국회임시준칙'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에는 기초위원 30명, 전문위원 10명과 함께 녹사(錄事: 서기) 3명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기초위원회는 당연히 회의록을 작성했을 것인데도 지금은 회의록을 작성했는지조차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게다가 기초위원회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자들도 간접취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당시 신문보도도 귀동 량이었기에 부정확했다.
  
기초위원회가 심의할 헌법안은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행정위원회 멤버들과 유진오.신익희가 한 달 동안 합동으로 작성한 이른바 ‘유진오안(案)’이었다.

그리하여‘유진오안’은 도하 신문에도 전문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유진오안’은, 헌법기초위원회 제1차 회의에 제출할 정식 초안으로 결정하기 위하여 별실에서 열린 전문위원들의 회의에서 제동이 걸렸다.

권승열이 따로 헌법 초안을 작성해 가지고 와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권승열은 ‘유진오 안’과 자기가 만들어 가지고 온 헌법 초안(이른바 ‘권승열 안’)을 놓고 제1조부터 심의해서 통일된 하나의 전문위원회안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진오의 회고(헌법기초안 회고)에 따르면 ‘권승열 안’이라는 것은 실은 남조선과도정부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안이요. 헌법기초분과위원회의 최초 초안은 유진오 자신이 작성하여 제출한 것으로서, 권승열이 내어 놓은 것은 자신의 최초 초안의 문구를 약간 변경하고 조문을 몇 조 추가하기는 했어도 헌법의 기본정신이나 권력구조나 심지어 문체와 용어까지도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그런데 권승열은 뒷날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유진오의 초안을 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
  
헌법기초위원들이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위원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내 타협이 이루어졌다. 두 가지 안을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하여 어느 안을 심의의 기초로 채택하든 뜻대로 하게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기초위원회는 두 사람으로부터 두 안의 설명을 들은 뒤 13대 11의 표결로 ‘유진오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열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심의를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특별한 토론 없이 진행되었으나 기초위원회의 헌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기로 예정된 6월 8일 아침까지는 유진오안의 제7조까지밖에 축조심의를 끝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상일 위원장이 위원회 중간보고를 통하여 헌법안 상정일을 6월 18일로 연기할 것과 그때까지는 본회의를 오전에만 열 것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6월 7일의 축조심의에서 가장 격렬한 논란이 벌어진 것은 국호(國號)문제였다. 

독촉국민회 의원들은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지지했다. 

그중에 이청천 의원은 “국회 개회식 때에 의장 식사에 ‘우리는 3·1운동에 의하여 수립된 대한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분은 박수로써 응하고 나서 이제 와서 고려니 조선이니 함은 조변석개도 분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려면 과거의 대한국이라는 국호라야 청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민당 의원들은 고려공화국을 고집했다. 그리하여 무기명표결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단원제채택, 그리고 대통령은 국회서 선출
  
헌법제정 과정에서 일반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권력구조 문제였다. 

구체적으로는 이승만이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정부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영국이나 일본과 같은 내각책임제 정부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가 가장 이상적인 민주국가의 정치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 자신이 그러한 제도에 의한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되기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국회개원 전인 5월 26일의 기자회견에서도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국회에서 작성되는 헌법에 의해서 규정될 것이나 나는 대통령이 행정책임자가 되는 3권 분립 제도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피력했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함께 신생 대한민국을 운영해 나갈 한민당의 당론은 내각책임제였다. 

그런데 이른바 헌법제정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세력 사이에 어떤 권력구조의 헌법을 만들 것이냐에 대하여 사전 협상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서로 상대방의 선의를 너무 믿었거나 상대방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나, 결국 그것은 한국헌정사의 비극의 기원이 되었다.
  
이승만은 6월 7일에 국회의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들의 첫 질문도 '지금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을 축조심의 중에 있는바 대체로 내각책임제를 찬성하는 것같이 들리는데, 견해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자기의 소신을 더욱 분명히 밝혔다.
  
  “지금 영국이나 일본에서 하고 있는 제도가 내각책임제라 할 것인데, 영국이나 일본은 군주정체로 뿌리가 깊이 박힌 나라일 뿐만 아니라 갑자기 왕 제도를 없앨 수 없는 관계로 그러한 군주국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제도와 관념은 이미 없어지고 30여 년 전에 민주제도를 수립할 것을 세계에 공포한 이상 우리는 민주정체로써 민주정치를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 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히틀러(Adolf Hitler), 무솔리니(B. A. A. Mussolini), 스탈린(Iosif V. Stalin) 같은 독재정치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은 잘하든지 못하든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해 나가야 하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내각책임제 헌법이 통과된다면 나도 이에 추종하게 될 것이다.”
  
기자들은 이어 '대통령선거는 국회에서 하게 되는지 인민투표로 할 것이냐' 고 물었다. 

이승만은 “지금 다시 인민으로부터 선거하기가 곤란한 만큼 국회에서 선출하자는 설이 유력하다”라고 답변했다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이 통과되면 자신도 추종할 것이라는 이승만의 말은 속내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런데도 만일 한민당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큰 오산이었다.
  
기초위원회는 6월 10일부터 권력구조에 관한 조문을 심의했다. 

제3장 국회장(章)심의에서 우선 국회를 단원제(單院制)로 할 것인가 양원제(兩院制)로 할 것인가의 문제로 장시간 토론이 벌어졌다. 

원안이나 참고 안이나 다 양원제로 되어 있었다.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양원제를 주장했으나 조헌영, 허정, 서성달 등 한민당 의원들과 정도영 의원은 단원제를 주장하여 표결 결과 12대 10의 근소한 표차로 단원제로 채택됐다.


회의는 계속하여 제4장 정부장의 심의에 들어가 대통령 선거방법으로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할 것인가 국회에서 선출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져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대통령 선출방법은 사실상 권력구조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일부 신문에서는 대통령중심제가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보도되기도 하고, 그럴 경우 유진오를 비롯한 전문위원들은 전원이 사임할 분위기라는 보도도 있었다.
  
이튿날 회의에서도 대통령 선거방법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계속된 끝에 표결한 결과 18대 9로 국회에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고는 이어 원안 제57조의 대통령 선서에 대한 조항만 보류하고 제56조에서 제76조까지의 심의를 서둘러 끝냄으로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내각’이라는 명칭을 ‘국무원’으로 바꾸는 등 사소한 수정을 가하여, 간단히 내각책임제정부안을 확정했다.
  
◇…내각제 우세하자 이승만 직적 설득 나서

이 무렵에 이승만이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다'란 글의 작가.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 보낸 편지는 제헌헌법의 권력구조에 관한 그의 구상이 잘 설명되어있다.
  
 “201명의 국회의원들은 특별고문을 맡은 12명의 저명한 법률가들과 함께 다음 월요일에는 헌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기 위하여 준비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헌법안을 확정하기 전에 되도록 많은 국회의원들이 먼저 헌법의 중요 골자에 대하여 일반적인 합의를 이루게 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늦어질지도 모릅니다.”
  
201명과 12명이라는 숫자는 이승만의 착오였다.

이 편지는 국회회의가 열리고 있는 시간에 이승만이 의장실에서 급히 쓴 것이었다.
  
 “현재로는 단원제를 일반원칙으로 하여, 대통령과 부통령은 그곳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단원제 제안은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상원을 설치하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대하는 법률고문들의 의견이 승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항이 삽입되면 반대파들이 단원제 국회에서 수립된 정부의 효력문제를 제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대통령은 내각 위의 초연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행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를 임명하고 책임을 지게 한다는 구상을 제외하고는 헌법의 주요 원칙에 대하여 의견의 분열이 없습니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불신임 결의가 있으면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에게는 국회해산권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은 정부의 안정을 어렵게 할 것이므로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적어도 대통령 임기 동안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국회는 그것을 변경할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다른 문제점은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입니다. 입법부가 교착상태에 빠지는 경우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많은 권한을 행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국회가 그 헌법안을 신중하게 검토해서 그것이 본회의에 제출되었을 때에는 중요골자에 의견충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의원들이, 좌익인사들을 포함하여, 우리와 일을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이 강조한 것은 헌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기 전에 되도록 많은 국회의원들 사이에 헌법안에 대한 사전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세가 내각책임제로 기울자 이승만은 직접 설득에 나섰다. 

국회의장인 그는 6월 15일에 부의장 신익희를 대동하고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장을 방문했다.

마침 유진오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열띤 연설을 하고 있었다. 

한참 유진오를 바라보던 이승만은 신익희에게 턱으로 유진오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유진오의 발언이 끝나자 서상일 위원장이 오늘은 특히 국회의장이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오셨으므로 의장의 말씀을 듣겠다고 소개했다.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하게 된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책임제로 기초위원들은 결의한 모양이나 그것은 안 될 일이다. 대통령은 간접선거이건 직접선거이건 인민이 선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한다 하더라도 의원은 역시 국민이 선출한 것이니 인민의 신임을 받은 대표가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은 곧 인민의 직접선거로 선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에게 행정책임을 직접 지우는 것이 옳은 일이지 대통령을 왕처럼 불가침적 존재로 한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이승만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들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지지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행정책임까지 부여하면 전제정치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주장을 도외시했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는 미국에서 보듯이 원칙적으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선출은 국민의 직선제로 하고 그러나 시급한 정치일정 등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여 초대대통령만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방법을 주장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4년 뒤에 그의 위신과 지도력을 크게 손상시키는 부산정치파동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 내각제 주창자 유진오 불러 감동시켜

유진오는 이승만도 내각책임제를 지지한다고 듣고 있었으므로 이승만의 이날 연설이 ‘뜻밖’이었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도 헌법기초위원회가 권력구조를 바꿀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승만은 유진오를 의장실로 불렀다.

유진오가 이승만과 악수를 하고 대화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때에 유진오를 대하는 이승만의 제스처는 그가 얼마나 노회한 현실정치가였는가를 보여준다.
  
유진오가 의장실에 들어서자 이승만은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노블(Harold Noble)과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진오를 노블에게 소개하고 나서 유진오의 손을 끌어다 옆 안락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의자 옆 카펫 위에 그대로 앉으면서 말했다.
  
 “훌륭하오. 우리 한국사람 중에 헌법을 기초할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소.”
  
그러면서 이승만은 유진오의 손과 무릎을 쓰다듬었다. 

유진오는 이때에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을 못할 정도로” 황홀했다고 그의 '회고록'에 적어 놓았다.

이승만은 한국에는 헌법을 기초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귀국할 때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슬라이(John F. Sly) 박사에게 이다음에 자기가 부탁하거든 한국을 위해 헌법을 기초해 달라는 말을 해 놓았다는 말도 했다.

이승만의 말은 사실이다. 슬라이 박사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였는데, 이승만은 1944년 4월에 그를 만나 전후에 한국에서 실시될 총선거에 필요한 선거법과 헌법을 기초해 줄 것을 의뢰했었다.
  
이승만은 유진오에게 그 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은 6월 17일에 독촉국민회로 하여금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국회는 양원제, 정부구조는 대통령중심제로 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게 했다.
    
기초위원회는 6월 16일부터 제6장 경제장의 심의에 들어갔다. 

경제장(章)을 따로 둔 것은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본뜬 것으로서, 대체로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반영된 조항들이었다. 

경제 질서의 원칙을 규정한 원안 제88조는 '한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인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 뒷부분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 이하의 부분을 삭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다.

전문위원이 그 부분을 삭제하면 완전한 통제경제를 의미하게 되므로 자유경제의 원칙을 보장하려면 필요한 조문이라고 주장하여 원안대로 통과는 되었다.

이 구절은 이 시대의 사회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어 제92조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또는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함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라는 조문을 심의할 때에도 이 조문대로 하면 자유경제가 위축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그러자 이청천이 격앙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중앙으로 걸어 나오면서 조문을 되풀이하여 읽고는 “이 조문이 왜 나쁘냐. 무엇이 어째서 나쁘냐” 하고 열변을 토하여,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6월 17일의 회의는 운수, 교통, 통신, 금융, 전기, 수도 등 독점성 또는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대외무역은 국가의 감독 아래에 둔다는 제86조(원안 91조) 한 조문밖에 기초하지 못했다.


이 조문에 노동자이익균점권을 보장하는 규정을 신설하자는 제안이 있어서 격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노동자이익균점권이란 노동과 기술을 자본으로 간주하여 관영, 공영, 사영 일체의 기업에 속한 노동자는 임금 이외에 당해 기업체의 이윤 가운데에서 최저 30% 이상 50% 이내의 이익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이론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6월 14일에 헌법에 포함시키도록 청원한 '노동헌장'의 핵심적인 주장이었다.
  
이 조문을 첨가할 것을 제안한 것은 군산 출신의 무소속 윤석구 의원 외 몇몇 의원들이었다. 

이에 대해 서상일 기초위원장을 비롯한 조헌영, 백관수 등 한민당 의원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조문을 명문화한다면 기업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다.

그리하여 결국 이 제안은 표결에서 부결되었다.
  
헌법안을 제출하기로 한 6월 18일의 본회의의 중간보고를 통하여 서상일은 월요일 6월 21일까지 다시 연장해 줄 것은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기초위원회는 이어 제7장 재정, 제8장 지방자치, 제9장 헌법 개정 원안을 수정 없이 채택하고, 제10장 부칙에 김광준(金光俊) 의원의 동의를 반대 없이 받아들여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1945〕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문을 첨가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헌법기초위원회의 헌법기초작업은 6월 19일에 사실상 끝났다.
  
◇…“모든 것 그만두고 국민운동 하겠소”
  
이승만은 이 무렵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밤잠도 자지 않고 심각하게 승부수를 궁리했다. 

파쟁이 끊일 날 없는 상해임시정부와 하와이 동포사회를 이끌면서 집요하게 도전하는 반대파들을 제압하던 저돌적인 기질과 노회함이 몸에 밴 이승만이었다.
  
6월 20일은 일요일이었다. 이승만은 신익희, 김동원 두 부의장과 서상일 위원장을 이화장으로 불렀다.

헌법위원회의 경과를 보고받는 형식의 모임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이승만이 정부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꿀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기초위원회에서 작성한 헌법안을 본회의가 심의하기 전에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에 회부하여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가 대통령제로 할 것인가를 토의하여 결정하도록 합의했던 것 같다

전원위원회는 이틀 전인 6월 18일에 구성되어 이청천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일부 신문은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형세 여하에 따라서는 한민당이 양보할 의사가 있어 보인다고 전망했다.
  
서상일 위원장은 6월 21일 아침에 열린 본회의 보고에서 같은 날 오후에 한 번만 더 회의를 하면 기초위원회의 작업은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인물로 헌법안을 만들어 6월 23일까지는 본회의에 제출하겠다고 말 한뒤, 그간 전원위원회를 비공개로 열어 몇 가지 원칙문제를 토의할 것을 제의했다.

의석에 있던 이승만도 헌법의 기본원칙에 대하여 지도자들 사이에 사전협의가 없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서상일의 제의를 거들었다.
  
 “(기초위원들이)기초하실 적에 대지(大旨)만을 먼저 주장해 가지고서 적어도 이 국회안의 몇몇 인도자 되시는 이들과 당파 되시는 몇몇 분들은 이 대지에 대해서만은 협의가 있었고 의논이 되어 있었을 것 같으면 그 안의 소절 목에 들어서는 많은 이의가 없을 것이요. 여간 이의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는데, 시방 볼 것 같으면 이 양반들이 시간이 촉박한 그것만 알고 하루바삐 해 오라는 데 대해서는 저분들이 부지런히 속히 하기 위해서 충분한 재료를 얻지 못하고 자기들 생각하시는 대로 작정이 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비공개 전원위원회를 열어 권력구조 문제 같은 헌법의 ‘대지’에 대해서는 국회지도자들과 정파대표자들 사이에 충분한 협의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재석 175명 가운데 12표 대 130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그러한 전원위원회는 비민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표결 결과는 이승만을 더욱 격분시켰다. 이날 오후에 열린 헌법기초위원회의 마지막 회의 첫머리에 서상일 위원장은 이승만 의장이 “인사를 겸한 의사표시”를 위하여 위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어 “기초위원회가 당신의 뜻과는 달리 원안을 통과시켰다는 말을 듣고 어젯밤에는 한잠도 못 잤다더라”는 사족을 달았다.
  
이승만은 신익희와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는 지난번보다 훨씬 격한 어조로 또다시 내각책임제를 반대한다는 연설을 30분가량 했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한 것뿐만 아니었다. 연설을 마치면서 그는 “만일 이 초안이 그대로 국회에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으로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소”라고 선언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폭탄선언이었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기초위원들은 망연자실했다.

신익희가 일어나서 자기도 원래는 내각책임제에 찬성 의견이지만 이 박사의 태도가 저러니까 대통령제로 바꾸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헌법기초위원들은 대책을 협의해 보았으나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기초위원들은 대표를 뽑아 이화장으로 보내어 이승만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이승만과 가까운 허정 의원과 유진오, 윤길중 두 전문위원이 대표로 가기로 했다.

당연히 동행해야 할 서상일 위원장은 전날 이화장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동행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그래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 사람은 각각 30분가량씩 내각책임제를 채택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허정은 처음에는 대통령중심제 지지자였으나 기초위원회에서 토론을 거듭하는 동안에 내각책임제 지지로 의견이 바뀌어져 있었다. 

이승만은 부드러운 얼굴로 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유진오가 “미국식 대통령 제도를 쓰고 있는 중남미제국에서는 국회와 정부의 대립상태를 합헌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어 툭하면 쿠데타 아닙니까?”라고 말했을 때에는 이승만은 “그래, 그걸 멕시칸 레볼루션(Mexican revolution)이라고들 하지” 하고 맞장구까지 쳐 주었다.

세 사람은 이러한 이승만의 태도로 보아 자신들의 설득이 그에게 웬만큼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하고 만족하여 이화장을 물러나왔다.

스핑크스의 미소 같은 이승만의 미소의 비밀을 세 사람이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세 사람이 돌아가자 이승만은 바로 한민당 위원장 김성수(金性洙)를 불렀다.

이승만은 김성수에게 기어이 내각책임제로 한다면 자기는 미국으로 돌아가든지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승만을 설득했다는 말을 방금 듣고 온 김성수는 어리둥절했다.
  
“저는 선생님께서 내각책임제에 반대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국민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름만의 대통령은 할 생각은 없소.”  

“선생님께서 대통령 하시는 동안은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다마는 헌법을 그렇게 그때그때 고칠 수야 있겠습니까?”  

“한민당이 꼭 그렇게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요.”
  
 
이승만은 노기 띤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김준연이 연필을 들고 ‘비빔밥’ 정부형태로 고쳐
  
사태의 극적인 전환은 이날 밤 계동의 김성수 집에 한민당 간부들과 한민당 소속 기초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승만의 태도로 보아 그를 설득하기는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승만을 빼놓고 한민당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얼른 대통령중심제로 고치자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기초위원회가 마무리한 헌법안이 100여조나 되므로 거기에 갑자기 손대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본회의에 제출해 놓고 수정을 해 보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국회 형편으로는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대통령중심제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러자 헌법기초위원 김준연이 나섰다. 도쿄제대(東京帝大)와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사건으로 7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조선일보사 모스크바 특파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등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김준연은 장덕수(張德秀) 에 이어 한민당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없으니 내가 30분 내에 고쳐 놓겠소.”
  
김준연은 연필을 들고 몇 군데 죽죽 그어 놓고 “자,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하고 김성수 앞에 내어 놓았다. 

김성수는 급히 유진오를 불러오게 했다.
  
자다가 불려온 유진오는 사태의 심각성은 인식하면서도 김준연이 손질한 대로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빔밥 정부’ 형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뒤 연락은 되지요?”하는 김준연의 말에 유진오는 “네, 연락은 됩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문에 이날 밤에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를 절충한 ‘비빔밥 정부’의 헌법안이 작성되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헌법안에 있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과 국회의 내각불신임권을 삭제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다시 4년으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마지막 회의는 6월 22일 오전 10시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 이승만이 윤석오(尹錫五) 비서를 시켜 서상일에게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전날 저녁에 이화장을 방문한 허정 일행에게 보인 스핑크스의 미소 같은 그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작일의 초안에 대한 몇 조건은 보충하기 위하여 의사를 제공한 것뿐이요 이대로 채용해야 된다는 주장이 아니니, 상의하셔서 최선을 행하실 것뿐이오. 제(弟)도 초안의 주의를 양실(諒悉)하는 바이니 양처위하(諒處爲何). 만제배배(晩弟拜拜).”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전날의 폭탄선언 이후에 한민당의 계동 심야회의 내용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고, 그러고는 또 시치미를 떼는 능청인가. 

이승만과 신익희는 이날의 기초위원회 회의를 의장과 부의장 자격으로 시종 방청했다. 

20여 명이 참석한 기초위원회 회의는 우선 양원제를 단원제로 고치는 번안 동의를 먼저 처리했다. 그것은 한민당의 조헌영 의원의 동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김준연, 정도영, 조헌영 등 한민당 의원들이 제기한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번안 동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번안의 주된 이유는 “의원 다수의 동향과 기초위원회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이 의장의 주장을 용인하는 의미에서” 대통령중심제로 고치자는 것이었다.
  
이 번안 동의는 오후까지 이어지는 지루한 토론 끝에 22대 1이라는 절대 다수로 싱겁게 통과되었다.53)
  
기초위원회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전문 10장 102조로 된 대한민국헌법 초안을 완성했다. 6월 3일에 구성된 이래 22일까지 20일 동안 16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결과였다.
  
기초위원회가 마련한 헌법안은 6월 23일에 본회의에 상정되어 이날부터 대체토론을 위한 제1독회가 시작되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위원장 서상일은 경과보고에 이어 헌법안의 기본원칙을 설명했다.
  
 “우리의 노선은 두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재주의 공산국가를 건설하느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느냐 하는 데 있어서 이 헌법정신은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한 기본설계도를 여기에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헌법의 정신이 여기에 있고, 또한 이 헌법의 제정은 우리들의 만년대계를 전망해서, 유진오 위원을 중심으로 여러분이 만든 원안을 기초해서 우리 40명 위원들이 모여서 헌법을, 장례를 전망해서, 만든 것입니다. 헌법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하자면,  우리들이 민주주의 민족국가를 구성해서 우리 3천만은 물론이요 자손만대로 하여금 현시국에 적응한 민족사회주의 국가를 이루자는 그 정신의 골자가 이 헌법에 총집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상일이 말한 민족사회주의의 개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제6장 경제 장에 규정된 사회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닌 조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발언에 특별히 관심을 나타내는 의원은 없었다. 경제장의 기본정신에 대하여 유진오는 제안이유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6장 경제 장에 규정된 몇 개의 조문은 대체로 자유경제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원칙을 표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견 이 경제 장을 보면 경제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원칙이 되고 자유경제는 예외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적어도 중소상공업에 관해서는 자유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대규모 기업, 독점성 공공성 있는 기업, 이런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는 동시에,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가 있는 때에는 법률로써 사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이전시킬 수 있다는 소위 기업사회화의 원칙을 이 경제 장에서 계양해 본 것입니다. …”
  
6월 24일, 25일 이틀 동안 휴회한 다음 26일에 속개된 국회는 발언 신청 의원들이 많아 제1독회가 6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거듭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의사진행이 늦어지는 것이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예정대로 8월 15일에 대외적으로 독립 선포식을 갖기 위해서는 7월 중순까지는 헌법제정을 끝내야 했다. 

신익희 부의장의 사회로 열린 6월 29일의 회의에서 의원들의 발언시간을 5분으로 제한하기로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안 심의는 지지부진했다.
  
◇…임시정부 法統을 前文에 명시하도록 다시 ‘부탁’
  
7월 1일부터 축조심의를 위한 제2독회가 시작되어,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조문심의가 시작되자, 의석에 있던 이승만은 발언권을 신청하여 등단했다. 

그는 먼저 전문(前文)과 국호문제와 관련하여 새로 수립되는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임을 다시 역설했다.
  
 “전문 이것이 긴요한 글입니다. … 여기서 우리가 헌법 벽두의 전문에 더 써 넣을 것은 ‘우리들 대한국민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재건을 하기로 함’ 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제의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하든지 맨 꼭대기에 이런 의미의 문구를 넣어서 우리의 앞길이 이렇다 하는 것을, 또 3·1혁명의 사실을 발포하여 역사상에 남기도록 하면 좋겠다 하는 것을 … 이것은 나의 요청이며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회개원식에서 자신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초위원회가 만든 헌법안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여간 못마땅하지 않았다.

국회는 이승만의 이 제안을 받아들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로 되어 있던 헌법안의 전문 서두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라고 부정확하지만 이승만의 주장이 반영된 문장으로 수정됐다.
  
이승만은 같은 발언에서 의원들에게 신속한 의사진행에 협조해 줄 것을 거듭 요망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연설 길게 마시고 우리는 하루빨리 얼른 이것을 작정해서 우리가 예정한 헌법 통과될 날이 대단히 급한 만큼 얼른 일을 급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 나는 1분 동안이라도 빨리 우리 헌법을 통과시켜야 될 것이니까 그걸 잘 아시도록 내가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재촉에도 불구하고 축조심의는 지지부진했다. 첫날은 제7조까지밖에 나가지 못했다. 이튿날 이승만은 협박조의 말투로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말을 듣건대 이 국회 안에 몇 분이 있어서 이 헌법을 속히 통과하지 말고 이 방면 저 방면 천연해서 나가자 하는 것이 몇 분들이 조용히 약속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에게 들려옵니다. … 우리는 어떤 분자가 이 국회 안에서 이러한 운동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무슨 방법으로든지 막아서 못하도록 해야 우리가 일을 할 수 있지, 몇 분이나 몇 분자들이 장난을 이 속에 와서 해 가지고, 국회의 국사를 방해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용허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해 나가는 것을 볼 테요. … 우리는 송장들이 아닙니다. 민생이 죽을 지경에 있고 하루바삐 정부를 세우고 우리의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데 사사의 생각이나 파당을 일으켜 가지고 이런다면 나는 용허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신 차리시오. 몇 사람 몇 분자들이 쑤군쑤군해 가지고 저 방면 이 방면 헌법을 통과하는 것을 하루라도 지체하자는 태도가 보인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서부터 조치하는 방법이 있으니까 생각들 하시오.”
  
이러한 협박은 일부 국회의원들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감이 여과 없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이승만의 이러한 협박에 대하여 항의하는 국회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6월 23일부터 7월 15일까지 계속된 본회의의 헌법안 심의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점이 된 것은 근로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利益均霑權)을 보장하는 조문을 신설하는 문제였다. 기초위원회에서 제기되었다가 부결된 문제가 본회의의 축조심의의 과정에서 다시 제기된 것이었다. 그동안 국회에는 대한노총 기관 33개 단체의 「노동헌장」 채택 탄원서에 이어 이를 지지하는 대한농총(大韓農總) 외 19개 단체의 건의서, 이를 반대하는 조선상공회의소의 건의서, 조선섬유회 인천분회 외 32개 단체의 건의서 등이 들어와 있었다.
  
축조심의 3일째인 7월 3일의 회의에 민족청년단의 문시환(文時煥) 의원 외 18명, 조종승(趙鍾勝) 의원 외 12명, 강욱중(姜旭中) 의원 외 11명, 그리고 조병한(趙炳漢) 의원 외 10인이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헌법안 제17조에 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문시환, 조종승, 강욱중 의원 등의 수정안 내용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로 되어 있는 제17조 제1항을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근로자는 노자협조(勞資協助)와 생산증가를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기업의 운영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로 수정하는 내용이다.

또한 제3항으로 “기업주는 기업이익의 일부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근로자에게 균점시켜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것이었고, 조병한 의원 등의 수정안은 이익균점권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문시환 의원의 수정안 제안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합병 이후 일본사람들은 조선에 대해서 근대공업을 실행한 결과 많은 공장의 노동자가 도시로 집중해서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에까지 조선의 노동자를 보급해 가지고서 일종의 임금노예로 취급해 온 결과, 기업주가 노동자에 대한 생각이 이것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대등의 지위에 있는 노동자가 아니고, 일종의 상품화시켜 가지고, 임금노예화하는 이 관념을 가진 것은 틀림없고, 노동자는 여기에 대해서 자기의 생활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서 돈 받고 그냥 일을 했지만, 우리는 임금노예가 아니고 정당한 인권을 가진 사람이며 인권을 가질 권한이 있다는 것이 많은 노동자의 염원이었습니다. ...  해방 후에 우리의 경제상태는 노자(勞資)가 협조될 수 있는 큰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적산(敵産)이올시다. 일본사람이 우리의 지위적으로 지배계급적 역할을 하다가 그 사람들이 적산을 그냥두고 물러간 까닭에 일본의 적산을 금후 정부가 적당히 잘 처리해 나가면 노자협조를 실현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크게 양보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고 노동자는 한 걸음 나아가서 산업의 부흥, 생산 증가에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노무자를 기업운영에 참가시키자는 것입니다. 결단코 이것은 공산주의를 본받은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를 본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 실현하려고 하나 실현할 수 없어서 걱정하던 큰 조항입니다. …
  
 그 다음에 기업주가 그 기업의 이익 일부를 법률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임금 이외의 적당한 명목으로 노동자에게 균점시키자는 이것은 … 새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것은 기업주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것을 자기이익을 위해서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영리한 기업가들은 이것을 우선해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법규로써 정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는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가나 이익균점권 문제는 귀속재산 관리문제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민당의 김준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나는 염려하기를 이것이 기업가의 심리를 고취시켜서 기업을 적극적으로 진흥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만치 노동자가 취업할 기회가 적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기업 규칙을 원칙에 의지해서 노동자의 임금이 저하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중을 위한다는 그 시설이, 그 헌법이 노동자의 복리를 주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기업이익(균점에) 참가한다고 하면 그 조문만으로도 결국 기업운영에 참가하게 될 것입니다. …”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錢鎭漢) 의원은 노동자의 경영참가나 이익균점 보장은 세계적 추세인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에 있어 가지고, 노동에 복직하는 사람과 자본가 기업가가 합의체를 해 가지고, 모든 산업부흥이라는 이런 방식으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가 사회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열망하고 있는 이때에, 가령 미국은 자본주의국가이니만큼 프랑스나 다른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사회민주주의예요. 왜 그러냐 하면 사회민주주의가 아닐 것 같으면 공산주의를 막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 여기에 우리가 민주주의 노동을 전개하지 않을 것 같으면, 국내적으로는 노동대중에게 위반이 될 것이고 국제적으로는 우리가 남북을 통일할 기본을 잃고, 또 일면에 있어 가지고는 남북을 통일할 수 없는 한 개의 정권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7월 3일은 토요일이었는데, 오후 늦게까지 회의를 계속했으나 토론은 끝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국회의원들이 제출한 수정안만도 7, 8개나 되었고 수정동의를 낸 의원수는 80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논란이 된 것은 근로자의 기업이익균점권이었는데, 무엇을 근로자라고 하며 무엇을 기업이라고 하느냐의 개념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토의는 더욱 혼선을 빚었다. 

이때의 상황을 유진오는 “그 토의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근로자의 이익균점을 주장하는 의원들과 여러 번 접촉하였는데, 그들은 철도, 전신, 전화 등 국영기업은 물론이요, 담배, 홍삼 등 전매사업에 이르기까지 그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그 ‘이익’에 균점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뺐다”고 술회했다.
  
◇…제헌헌법. 5.16이후 1962년까지 존속

돌파구는 의외로 이승만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7월 3일 오전회의에 참석했다가 “몸이 고단해서” 일찍 퇴장했던 이승만은 7월 5일 회의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17, 18, 19조의 조문이 원만히 된 것 같은데 아직까지 만일 부족한 것이 된다면 이 하나를 넣으면 괜찮겠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지주와 자본가와 근로자는 공동한 평균이익을 국법으로 보호한다’, 이것을 만들어 놓으면 이것은 원만히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넣지 않더라도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서로 인용해서 이 다음에 국법을 정할 적에 다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당의 모략이라든지 이것을 타파하고,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 있으니까, 국법은 언제든지 노동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우월한 권리를 주어야 되겠다는 것을 빼놓고, 우리 보통 심리적으로 이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양해해 가지고서, 이 다음 국법으로 법을 만들 적에 그것을 주장해 가지고 할 것 같으면 다 될 것이라고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둘 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한민당과 대한노총 등의 주장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승만은 또 헌법을 제정하는 데도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중요한 것은 하루바삐 헌법을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헌법이라는 것은 작정해 놓은 다음에는 백년 만년 고치지 못하고, 대들보가 쓰러져도 고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임금이 앉아서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고쳐서, 임금이 명령을 하면 그것을 국법으로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인 까닭에, 백성 다수가 그것을 제정한 국법이니까, 이 국법을 오늘 결정하였다가도 내년에 가서 달리 다수 결의해 가지고 고치자고 하면, 우리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무엇이든지 봐 가지고, 시기 변동하는 대로, 그 전에는 이렇게 했지만 오늘 시기는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것을 변동해서 다시 해야 되겠다고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헌법에다가 다 집어넣어서 비끄러매어 가지고서, 이러자고 하는 것은 타파해 가지고서, 대강만 특별히 제정해 놓고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내일모레 변동을 하려는데 여지없이 미리 작정해 놓았으면 못할 것이 아닙니까. 여유를 놓아두어야 한다 그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미국사람들은 지혜롭다고 세계에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지를 남겨놓아서 이다음 형편 되는 대로 개정하기로 하고, 대강만 명시하고서, 여유를 두고서 이것을 공포하고, 하루바삐 우리 정부를 수립합시다. 지금 8월 15일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
  

회의는 지루한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로 들어갔는데, 흥미로운 것은 무소속 오용국(吳龍國) 의원의 제의에 따라 표결방법을 이례적으로 무기명투표로 하기로 결의한 점이었다. 

조문표결을 무기명투표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거수투표로 의원 각자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 꺼려졌던 것이다. 


표결결과는 근로자의 기업경영 참가와 이익균점권을 함께 규정한 문시환 등의 수정안은 재석 180명 가운데 찬성 81표, 반대 91표, 기권 5표로 부결됐다.

이익균점권만 규정한 조병한 등의 수정안은 찬성 91표, 반대 88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다.

이익균점권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는 조문으로 정리되어 근로자의 단결권을 규정한 제18조의 제2항으로 신설되었다. 
  
이 조항에 대하여 제헌헌법의 기초자인 유진오는 “다른 나라 헌법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규정이다. 

자본주의경제는 노동자는 노임을 받고 기업가는 이윤(이익)을 받는 것을 기본구조로 삼고 있는 것인데, 본 항은 근로자가 기업이윤의 일부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였으므로, 이 규정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경제체제는 성격상의 수정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이 조문의 시행을 위한 법률은 5·16군사쿠데타에 따라 1962년에 개정된 헌법에서 이 조문이 사라질 때까지 제정되지 못하고, 제헌헌법의 한 ‘프로그램’69)에 그치고 말았다.
  
이승만은 7월 5일 오후회의부터 직접 사회봉을 잡고 위협성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일사천리로 회의를 강행했다. 그리하여 7월 12일에는 자구수정을 위한 제3독회를 열어 원안에 ‘국방군’으로 되어 있는 것은 ‘국군’으로 고치는 등의 자구수정을 한 뒤에 헌법안 심의를 모두 마쳤다. 정부조직법 심의는 7월 14일부터 시작하여 사흘 만에 끝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식은 7월 17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단 위에 놓인 두 헌법정본(국한문본과 한글본)에 붓으로 서명한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헌법공포사를 낭독했다.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3독 토의로 정식 통과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의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합니다. …”
  
그것은 우여곡절 끝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효력을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오후 3시에는 서울운동장에서 헌법공포축하시민대회가 열렸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 신수용 사건반세기, 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 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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