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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24)> 제헌국회부터...내각제냐, 대통령제냐 놓고 갈등

-5.10선거, 우여곡절끝에 제헌국회 1948년5월31일 개원
-이승만 임시의장 사회로 이승만 초대국회의장으로 뽑혀
-헌법과 정부조직법 놓고 큰 갈등...이승만의 대통령제 못꺾어
-단원제와 대통령중심제, 헌법전문과 10장103조의 헌법만들어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들의 이야기등 영욕이 있다. 그래서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다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1948년 5월10일 남한 총선거로 민족의 분단은 현실화됐다. 

그간 김구·김규식과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이 평양에서 2주일이나 만나면서 남북협상도 가졌지만 어떤 결과물도 내지 못하면서다.   
 
선거가 결국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치르는 자는 유엔 결의로  남한만 총선거를 했다.

북한지역을 제외하고 남한지역에서만 실시된 총선거는 전체 의석 200석 중에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하고 198개구에서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제주도는 4·3사건 발발로 선거가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1년 뒤에 치러지게 되었다.

어쨋던 유엔조선임시위원단에서 각도에 파견한 감시단은 5.10 총선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않지만, 조선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전진이 될 것이며 투표과정도 대체로 원할히 진행됐다"고 성명과 보고서를  냈다.

미군정청의 하지 사령관(중장)도 "조선의 자유선거는 민주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사회분위기는 도처에서 선거반대운동이 일어나는 등 선거성공은 쉽사리 예견하기 어려웠다.

주로 남로당의 온갖 방해와 테러·방화가 자행됐다.

미군정청은 전국 1만3000여개 투표소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심지어 선거전날인 9일부터는 음주판매를 금지하는등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감시와 보안에도 대구 광주 보성 화순 등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한 통신망파괴와 수류탄 투척, 선거공무원 피살등 사태가 매우 험악했다,

무엇보다 통신망의 파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투표집계를 어렵게했다.
 
그럼에도 일단 초대 국회의원이 뽑혔다.

200명 가운데 4.3사건이 몰아친 제주도를 제외하고 198명이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후폭풍은 곧바로 나타났다. 다름 아닌 김구와 김일성간의 협상의제로 나온 남한에 대한 북한측의 송전(送電)중단 문제였다.

◇…5.10 총선 당일 밤, 북한의 송전 중단 발표

해방과 함께 그어진 38선의 장벽은 갈수록 높아갔다. 뜻하지 않게 혈육들이 남북으로 갈라졌다. 당시 38선을 넘나드는 동포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유롭게 오가지도 못했다.

38선이 생기면서 한 마을이 두쪽으로 갈렸다. 도로가 끊기고 다리위도 남북으로 나뉘었다. 이런 38선을 넘나드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 모험이었다.

사실상 남북동포는 끊어진 다리의 양쪽에서 떨고 있는 버림받은 민족이나 다름없었다.


겨레는 앞으로 닥쳐올 불행을 예견했지만, 자주독립 통일국가까지는 그저 막연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3000만 동포는 물론 세계가 관심을 가진 남한의 5.10 총선이 치른 그날 밤, 소련의 하수인인 북조선은 평양방송을 통해 때아닌 남한내 송전중단을 통고해왔다.
 
물론 그다지 놀랄만한 것이 못되었다. 이미 그런 전조가 보였고, 단지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북측 방송은 남한 단독총선이 치러지자 10일 조선인민회 김책(金策)부의장 명의로 성명을 냈다.

내용은 남한의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내용이다.

'미군사령부는 자기의 대표가 서명한 이 협정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전력대가(代價) 완납기일이되어 이미 10개월이 지난 1948년 4월1일까지 협정대가의 1.6%밖에 지불하지않았다.  그후  4월중에 납부한 것을 종합해도 전력대가의 20%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미군 사령부는 1947년 6월 1일 이후 현재까지의 전력공급에 대하여 결정까지 체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미군정 당국은  남조선 인민들의 어떠한 곤란도 이것을 타개하지 않으려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미국정당국의 전기문제와 대가문제를 조절하지 않으려고 하느니만큼 우리는 남조선 조선인 당국의 대표를 파견하여, 이 문제에 대한 협약을 우리 조선 사람끼리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남조선 전력문제에 관하여 조선인끼리 협약을 체결하기위해 오는 5월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북조선 평양시에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만일 5월14일까지 이에 불응할 시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의아니나, 남조선에 대해 전력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

김구·김규식 일행이 평양에가서 벌였던 남북협상의 의제였던 남한의 전력공급지속문제는 공수표가 된것이다. 

이후 나흘 뒤인 1948년 5월14일 12시 정각 북한에서 오는 전기는 전격적으로 중단됐다.

당시 북한의 전력상황은 한반도 전역이 일년 열두달 밤을 밝히고 남을 전력을 갖고 있었다.

수풍댐을 비롯 200만 KW 상당의 수력발전소 돌아가고 있었다.

이후 남북한 간의 대화가 있었으나, 점차 대화마저 단절되는 사태를 맞았다.

◇…19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5.10총선결과 198명의 당선자 가운데,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다.

이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가 55석, 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29석으로 강세였다.

다음으로,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연맹이 2석, 대한노동총연맹이 1석 등의 순으로 당선자가 나왔다.

무소속 당선자가 무더기로 배출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사회는 정당정치가 초보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계에다, 국민들사이에서 정당정치와 정당정치인에 대한 큰 불신, 그리고 정당정치인이면서 무소속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중에 김구의 한독당은 5.10총선에 불참하기로 하자 한독당 후보들이 대거 무소속으로 출마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승만 세력과 김성수 세력이 대다수를 차지해 사실상 보수성향의 당선자가 두드러진 것이 초대 국회였다.

초대 국회였기에 아무런 운영규정이 없었다.


그중에도 국민의 관심 속에서 최초의 국회를 누가 소집할 것이냐와 회의진행의 근거를 무엇으로 할 것이냐  등에 관심이 쏠렸다.

이를 협의하기 위한 당선자 회의가 1948년 5월 21일에 대한 독립촉성국민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에 있는 당선자 43명이 참석했다.

당선자들은 미군정 당국자들과 협의를 가진 끝에 5월 22일 해공 신익희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반 준비를 담당하게 했다.

이 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일주일 뒤인 27일 국회의원 당선자 143명이 참석하는 ‘국회의원예비회의’가 소집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날 당선자들은 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개원식 절차 등을 포함한 국회운영에 관한 규정을 준비위원회에 위임하게 되고 제헌국회 개원일자를 5월 31일로 정했다

신익희가 위원장인 준비위는 국회소집 일자를 5월 31일로 결정하고 개원식 절차를 포함하여 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의 입안을 준비위원회에 위임했다.

드디어 1948년 5월 31일 오전 10시에 제헌국회(制憲國會)가 서울시청 도로건너 중앙청 국회의사당(부민관자리)에서 개원되었다. 


국회 개원 축하행진이 온 서울시가를 누비는 가운데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198명의 당선자 전원이 참석했다.

최고령자로서 임시의장을 맡은 이승만은 회의 진행에 앞서 종로 갑구 출신의 목사 이윤영(李允榮) 의원에게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이어 제1차 본회의에서는 국회법과 국회규칙이 제정될 때까지 사용할 ‘국회준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곧바로 의장단 선거에 들어가 이승만을 1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내외 귀빈과 1제헌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애국가 봉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그리고 국회선거위원장인 노진설의 국회소집까지 경과를 소상히 설명했다.
 
이어 오후 2시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개원식은 안재홍(安在鴻) 민정장관을 비롯한 과도정부 부처장,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 등 미군정부의 고위 장성들, 각국 영사들, 국회선거위원, 각 사회단체대표 등이 참석했다.

 또 구왕궁 아악대의 반주와 함께 진행되었다. 개원행사 애국가도 아악대의 반주로 봉창되었다.

1차 본회의에서는 시의장인 이승만의 사회로 국회법과 국회규칙이 제정될 때까지 사용할 ‘국회준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국회의장단 투표를 했다.

투표결과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 초대 국회의장에, 신익희(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김동원(한민당)의원을 국회부의장으로 각각  뽑협다.


초대 국회의장인 이승만은 개원식 식사에서 이 국회에서 수립될 정부는 3·1운동으로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곧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충남 마곡사로 내려온 김구는 이 제헌국회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의 개원사는 이렇다.

'우리는 민족의 공선(公選)에 의하여 신성한 사명을 띠고, 국회의원 자격으로  이에 모여 우리의 직무와 권위를 행할 것이니,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독립 민주정부를 재건하려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의 대한민주국이 다시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고합니다'

이와 함께 198명의 초대 국회의원들은 선언문을 제창했다.

'본의원은 조국 재건과 자주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남북통일을 완성하여 국가만년의 기초를 확정하고 국리민복을 도모하며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최대 충성과 노력을 다할 것을 이에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000만 동포에 삼가 선포함'

이후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지만 제헌국회는 헌법제정 등 특수한 과업 수행을 위해 구성된 의회였기에 2년 임기로 제한되었다.


때문에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그해 6월 19일 개원함으로써 제헌국회는 마감됐다.
 
◇…제헌의회의 권력구조 고민...대통령제냐 내각제냐

제3차 본회의는 6월 2일. 제 4차 본회의는 6월3일에 열렸다.

3, 4차본회의를 통해 헌법 및 정부조직법기초위원(위원장 서상일)등 국회의원 30명과 유진오 고려대 교수 등 자문위원 10명을 선출했다.

이들은 곧바로 헌법 및 정부조직법 작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헌법기초위원회의 고려대 교수 유진오와 신익희가 조직한 행정연구회에서 사전에 작성해 둔 초안을 토대로 3주일 만에 헌법안을 마쳤다.  

의원내각책임제를 담고 있는 이른바 유진오 안(案)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유진오 안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 사이에 권력구조에 대한 사전협상 없이 작성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헌법기초위원회가 기초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이승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진오 안이 의원내각책임제안이라면 헌법기초위원회의 권승열의 안(案)도의 내각책임제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를 놓고 자문위원간에 줄다리기 끝에 이 두개 안을 헌법기초위원회에 재출하기로 합의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격론끝에 유진오 안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본격심의에 들어갔다.

논의과정에서 원안의 3장 '국회조항'에서 양원제 문제에 대해 한국민주당측과 조봉암 의원 등이 반대해 결국 10일열린 회의에서 단원제를 채택했다.

그렇지만 헙법기초위원회에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제 4장인 정부형태'였다.

내각책임제로 할 것이냐, 아니면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이냐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유진오 안과 권승열 안은 모두 내각책임제를 명시했다. 그만큼 내각제가 대세로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정, 조봉암 등 비롯한 몇몇 의원이 내각책임제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이들이 내각책임제를 반대한 것은 한국민주당계가 정계를 좌지우지하는데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위원회가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를 놓고 집중토론에 들어갔으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럴즈음, 대통령중심제 채택시 초대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 되는 이승만은 여러차례 대통령중심제를 택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조선여론협회가 그해 6월 23일에 서울시내 다섯 곳에서 “초대 대통령은 누구를 원하오?”라는 설문으로 통행인 2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는 흥미롭다.

조사결과 ▲이승만 1024표( 40.9%) ▲김구  568표( 22.7%) ▲서재필 118표( 4.7%) ▲김규식 89표( 3.5%) ▲박헌영 62표( 2.4%) ▲김일성 33표( 1.3%) ▲허헌 30표(1.2%) ▲이청천 26표( 1.04%) ▲조봉암 18표( 0.8%) ▲신익희 12표( 0.5%) ▲기타  45표(1.8%) ▲무효 475표( 19%)순이었다.


이승만의 지지가 압도적인 반면 김일성보다 박헌영이, 신익희보다 조봉암이 지지율이 더 높게 나타났던 것은 의외라고 기록은 전한다
 
이승만의 내각제반대 대신 대통령중심제채택 요구는 집요했다.

당시 도는 소문으로 누군가가 이승만에게 내각제를 하게되면 대통령의 실권이 없어진다고 귀뜀한 뒤부터 이승만이 내각제 절대 반대를 외쳤다고한다.

이승만은 그해 6월 20일 헌법기초위원들을 모두 이화장으로 불러 대통령중심제채택을 설득했다.

그는 앞서 그달 7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미국식 삼권분립 대통령중심제를 찬성하지만, 정부수립과 내각책임제문제는 국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밝힌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결국 이승만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6월21일 본회의 상정하기로한 안건을 인쇄미비를 이유삼아 6월23일로 연기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22일 헌법기초위원회는 헌법에 일부 변형된 대통령중심제를 명시하기로 최종결정했다.

이 대목에서 유진오 교수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자문위원모두 내각제를 선호했으면서도 이승만의 고집에 어쩔 수없이 대통령중심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권력구조, 즉 정부형태를 놓고 본회의 상정 직전에 ‘비빔밥’식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이에따라 제헌헌법은 미국식 순수한 대통령책임제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식 의원내각제 요소를 절충한 변형된 대통령중심제였다. 
  
이런 논의를 거친 전문과 10장 103조로 구성된 헌법안은 그해 7월 12일 제28차 본회의에서 만장일치의 기립으로 가결됐다.

이어 14일 이승만 초대국회의장의 서명을 마친뒤 , 7월17일 최초의 우리 헌법이 공포된다.

◇…헌법 공포와 제헌헌법의 특징

이어 14일 이승만 초대국회의장의 서명을 마친뒤 , 7월17일 최초의 우리 헌법이 공포된다.

나라의 주춧돌인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는 이날 오전 10시 국회의사당에서 가졌다.

미군정청 하지사령관과 딘 소장, 유엔한국위원회 대표단, 프랑스 총영사 등 많은 외국 주요인사들이 헌법공포식에 참석했다.


공포식은 전규홍 국회사무총장의 개회로 식이 시작되어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기까지 경위를 보고했다.

전 사무총장은 "지난 6월1일에 최초개막을 본 국회는 6월23일 헌법 초안이 상정된 이래 12차례에 걸친 회의로 7월12일에 완전통과를 봐, 오는 17일에 정식으로 공포하게 된 것"이라는 보고에 일부 국회의원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보고 후 고려교향악단의 장중한 주악과 애국가봉창, 국기에 대한 배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등 국민의례가 끝나자, 이승만 국회의장이 헌법과 정부조직법에 대해 서명날인했다.

서명된 헌법 등은 한글판과 한글과 한자 혼용으로 묵서한 두통의 헌법정본과 한통의 정부조직법 정본 등 세통이었다.

이승만 의장은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한니다. 지금부터 우리 전민족이 평등과 자유의 평화적 복리를 누릴 것을 이 헌법이 담보하는 것이니, 이헌법을 중히 여기며 모든 인민이 각각 마음으로 맹세하여 잊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이 때에 우리가 한번 더 이북 동포에게 눈물러써 고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리 아프고 쓰라린 중이라도 좀 인내해서 하루 바삐 기회를 얻어서 남북이 동일한 공작으로 이 헌법의 보보를 받으며 이헌법에 대한 직책을 우리 다같이 분담해서 자유활동에 부강전진을 같이 누리도록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고 밝혔다.

이 의장의 식사가 끝나자 오세창의 선창으로 만세3창을 끝으로 역사적인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된 것이다.
      
제헌헌법에는 빈약한 민주제도 경험과 부족한 자원에도, 외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기초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나라의 틀인 헌법과 정부조직관계법을 만든 일은 매우 뜻깊다. 


그 중에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나라의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명시해 미국식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쓰자고  주장해 관철시킨 분은 연병호 제헌의원이다.

대통령중심제를 택한 만큼 국회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도록한 것도 눈에 띤다.

국민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를 담고 있었다.

대통령의 인사권한과 관련, 국무총리 임명시에는 국회동의절차를 거치도록 했으나, 국무위원 임명시에는 대통령재량에 맡겨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대통령의 독주를 사실상 허용한 것이란 비판도 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무위원 임명시 국회동의절차를 거치도록 조항을 연구했지만, 시일이 촉박하다는 일부 위원들의 술수에 이조항이 삭제됐다고 기록되고 있다.

반면 대통령의 긴급명령또는 긴급제정처분조항(57조)에서 애초 '전시 또는 비상사태에 제하여'라는 막연한 조항을 고처,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하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제하여'라는 조항으로 변경해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방지한 것은 평가된다.


헌법안 심의과정에서 가장 격심한 논쟁점이 된 것은 근로자의 기업이익균점권 보장 조항이었다. 이익균점권 조항은 이승만의 조정으로 제헌헌법에 포함되었으나, 그 시행을 위한 법률은 1962년에 이 조항이 헌법에서 삭제될 때까지 제정되지 않았다

제헌헌법에서 근로자의 단결 및 단체교섭권까지 보장했다.

또한 국회에 국정감사권을 명시해 강력한 대통령제하에서 우려되는 입법부의 행정부 감시기능을 강화했다.

이밖에도 어수선한 농정을 감안,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및 소유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농지개혁조항을 명문화한 것도 이채롭다.

무엇보다 일제 통치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과거 청산이 미흡하다는 점을 감안, 1945년 이전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수 있도록하는 내용(반민특위법)을 부칙에 실었다.

경제분야에서도 중소상공업에 관해서는 자유경제를 원칙으로 하되 대기업이나 공공성이 있는 독점성 기업등에 대해 공영으로 하고 국방과 직결되거나 국민생활에 꼭필요한   것은 사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화할 수 있는 '기업사회화 원칙'을 원용하려한 것도 눈에 띤다.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교육을 받는 것은 국민의 권리임을 명시한 뒤,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등 교육입국의 틀을 만들었다.

▶▶참고문헌및 인용자료:남시욱 한국보수세력연구,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이기택의 한국야당사. 해방30년사(공동문화사)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한국기자협회) 역사의현장(한국편집기자회),신수용 사건반세기,변평섭의 한반승람과 충남반세기,한민족문화대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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