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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신명이 감응하는 곳에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5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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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신명(身命)이 감응(感應)하는 곳에서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文獻書院)>을 찾아서②

일찍이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유학을 해 과거에 급제하고 그곳에서 벼슬까지 하여 널리 알려진 터에 아들 목은까지 원나라에 가서 급제를 하니 그 명성은 원나라 전국에 자자하였다. 목은은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수재로 널리 알려진 뒤 한림원 검토관 학사벼슬에 임명되어 원나라 조정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재상의 딸이 목은에게 연정을 품고 한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소녀는 이 나라 재상의 외동딸로서 방년 18세의 규수이옵니다. 이번에 목은 선생께서 장원급제하였으나 이 나라 조정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도 1위 자리를 이 나라 선비에게 내어주고 2위로 내려앉은 내막을 이 소녀는 잘 알고 있으며 의분을 참지 못하였나이다. 불행히도 천하 제1의 명예를 탈취 당했사오나 천하 제1의 미녀와 천하 제1의 부귀를 얻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녀의 부모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이오니 속히 회답을 주시옵소서.>

목은은 이미 고려에 아내가 있어 정중히 거절했다, 이 사실이 북경에 알려지자 원나라 젊은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었다.


잘 닦여진 잔디밭이 창공의 푸르름처럼 펼쳐지어 마음이 맑게 닦여지는 듯하다.

그 위에 새겨진 이정표는 서원의 이모저모를 쉽게 안내해 준다. 왼쪽으로는 목은묘소와 영당, 그리고 우물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진수당과 효정사, 그리고 교육관과 장판각이 있음을 알려준다. 즉 문헌서원의 경내는 사우, 누각, 강당, 진수당, 목은영당, 재실, 전사청, 수호사, 내상문, 외상문, 이종덕 효행비각이 있다.

먼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진수당을 찾는다. 푸르른 잔디를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진수문 앞에 이른다. 삼문(三門)으로 되어있는 진수문(進修門)이 열려 있다. 오른쪽으로 안에 든다. 너른 마당을 가운데 정면으로 지금의 강의실에 해당하는 강학공간인 진수당(進修堂)이 앞으로 보이고, 동쪽으로는 지금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제(東齋)인 존양재(存養齋)와 서쪽으로는 동, 서재(西齋)인 석천재(夕惕齋)가 위치하고 있다. 먼저 진수당 앞으로 다가선다.

진수당은 곧 4칸으로 된 강학공간(講學空間)이다. 즉 원생들이 공부하는 건물로 학업에 정진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곳이다. 진수당 앞에 마주 서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옛 건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의 옛 선비들의 모습이 그러하듯 매우 소박하고 검소한 느낌을 받아서인지 마당에서 서너 돌계단에 올라 마루에 걸터앉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복잡한 포나 장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간소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오히려 친밀감을 자아낸다. 이곳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원생들은 몸과 마음을 닦아가는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앙 마루 위에 있는 문헌서원(文獻書院)의 편액 글씨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는데, 왼편의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만력(萬曆) 39년 3월 선사(宣賜)라 적혀있다. 이때는 1611년(광해군3)년이다.

‘進修堂’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체이다. 중간 세 칸은 마루로, 오른편과 왼편에는 각각 방을 두어 교사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디에선가 원생들과 목은 선생이 나누는 담소와 글 읽는 소리가 뒤섞여 진수당 안에 가득 차 울려나오는 듯하다. 오만한 중국의 학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목은의 재치가 빛나는 일화를 소개한다. 얼마나 패기 있고 당당한 목은 선생의 모습인가.


일찍이 아버지 이곡은 원나라에 유학을 해 과거에 급제하고 그곳에서 벼슬까지 하여 널리 알려진 터에 아들 목은까지 원나라에 가서 급제를 하니 그 명성은 원나라 전국에 자자하였다. 목은은 원나라에 들어가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수재로 널리 알려진 뒤 한림원 검토관 학사벼슬에 임명되어 원나라 조정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재상의 딸이 목은에게 연정을 품고 한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소녀는 이 나라 재상의 외동딸로서 방년 18세의 규수이옵니다, 이번에 목은 선생께서 장원급제하였으나 이 나라 조정 신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도 1위 자리를 이 나라 선비에게 내어주고 2위로 내려앉은 내막을 이 소녀는 잘 알고 있으며 의분을 참지 못하였나이다. 불행히도 천하 제1의 명예를 탈취 당했사오나 천하 제1의 미녀와 천하 제1의 부귀를 얻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녀의 부모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이오니 속히 회답을 주시옵소서.>

목은은 이미 고려에 아내가 있어 정중히 거절했다, 이 사실이 북경에 알려지자 원나라 젊은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었다. 원나라 선비들이 목은을 공연히 미워하여 당시 북경 문단을 좌지우지하던 조수, 염복, 구양헌이 목은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요정으로 초청하여 일류 문사 명기들과 글 시합을 한 번 해보자 하였다.

으레 술자리가 벌어지면 시(詩)를 지어주고 화답하는 것이 그 당시 선비들의 일상이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이란 조그만 나라에서 부자간에 과거 급제한 것은 원나라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니 얼마나 글을 잘 하는지 은근히 글 시합을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구양헌이 갑자기 종이를 펴더니 ‘持盃入海曰 海大(지배입해왈 대해)’라 쓰고 싱긋 웃고는 목은에게 댓구를 채우라 했다. 이것은 분명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라는 생각에 목은은 마음이 좀 상했지만 그냥 꾹 참고, ‘坐井觀天曰 天小(좌정관천왈 천소)’라 거침없이 써버렸다.

구양헌이 쓴 글귀는 고려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술잔을 들고 바다에 들어 바다가 큰 줄 알았지?’하는 것을 댓구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이 작다’는 불쌍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구양헌이 약이 올라 ‘獸蹄鳥賊之徒交於中國(수제조적지도교어중국)’ 즉, ‘조수(鳥獸.새와 짐승)들이 이제는 중국에 교재하게 되었지’라 하였다.

이에 목은은 또 피식 웃고서는 ‘鷄鳴狗吠之聲達于四隣(계명구폐지성달우사린)’ 즉, ‘닭우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구나’ 하는 실로 통쾌한 댓구를 했다. 그 자리엔 중국 선비들뿐만 아니라 멀리 인도 등에서 온 한문을 아는 나라의 사절이 다 모여 있는 자리였다. 참석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에 분위기를 파악한 조수가 이젠 목은을 치켜세웠다.

“이 한림(이색)은 소문대로 천재이다. 이 한림과 재주를 겨누다가는 망신만 당할 뿐이다. 이 한림을 장원으로 뽑지 않은 것이 우리의 수치외다”라고 하면서 중국 선비들은 이색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술상을 다시 차려 밤새도록 즐겼다고 한다.(http://cafe.daum.net/emaeil>에서 옮김)


동재(東齋)인 존양재(存養齋)는 서원의 원생들과 손님들의 거처인 동시에, 맹자의 존양성찰(存養省察)에서 유래한 말로 원생들이 마음의 본성을 지켜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에서 존양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存養省察之功(존양성찰지공) 즉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보존하고 양생하는 공부가 더욱 정밀하여지고 있거니와 생각하는 것은 존양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또 마음을 정밀하게 닦는 것은 살펴보는 공부가 더욱 엄숙해지는 것이니, 두려운 생각은 살펴보는 공부이므로 마음을 하나로 요약하고 정밀하게 닦아서, 그 지킬 바 때를 잃지 않으면 이른바 신명(身命)이 감응(感應)하는 곳에 반드시 신명(神明)이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진수당 쪽으로 3칸은 방으로, 나머지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다른 고건축물의 화려하고 웅장한 편액과는 달리 아주 소박하고 검소한 판에 힘차고 당찬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로 학문 정진의 결의가 솟는 듯하게 돋보인다. 동재와 더불어 서원의 원생들과 손님들이 거처하는 서재로서, 주역의 건건석척(乾乾夕 惕)에서 유래한 말로, 군자가 종일 조심하고 조심하여 저녁에 두려운 듯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는 뜻이란다.


석척재(夕惕齋)는 새가 저물면 사당에 모신 유현들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석척(夕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석척재도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글씨이다. 동재와 마찬가지로 진수당 가까운 쪽으로 방 3칸과 진수문 쪽으로 마루 두 칸으로 된 건물이다. 진수당 옆으로 몇 걸음하자 이정표가 나타난다. 왼쪽으로는 효정사와 영당, 목은 묘소와 진수당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교육관과 장판각, 화장실이 안내되어 있다. 작은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간다. 굴뚝이 솟아있다.

그러니까 영모재 뒤편에 이른 것이다. 돌계단 위에 있는 건물이 바로 장판각(藏版閣)이다. 오늘날의 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책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나, 직접 책을 만드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목판에 글자 한 자 한 자 새겨 먹물을 바른 다음 종이에 찍어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여러 권의 책을 만들어 공부한다.

문헌서원에는 목판을 무려 975매나 보존하고 있다. 흔히 문헌서원의 3가지 보물이 있으니 목은 이색 신도비와 목은 영정, 그리고 장판각에 보존된 목판 가정집, 목은문집, 음애일기 문집 목판을 말한다 하니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현재 충청남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정집》은 목은선생이 생전(1364년, 공민왕 13)에 20권으로 편찬하였으나 소실되었다고 한다. 초간본은 아들 색(穡)이 편집하고,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금산에서 1364년(공민왕 14)에 간행하였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사이에 병화로 소실되자, 1422년(세종 4)에 그의 후손인 종선(種善)이 강원도관찰사 유사눌(柳思訥)로 하여금 중간하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판본이 소실되었고 전해지는 책이 희귀하게 되자, 후손 기조(基祚)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구본(舊本)을 얻고 산질된 시편을 보결해서, 1635년(인조 13) 대구에서 세 번째로 중간하였다. 이 3간본 『가정선생문집』 20권은 3책 혹은 4책으로 분책되어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그러나 3간본은 전질이 못되고 빠진 것이 많아, 후손 태연(泰淵)이 전라도관찰사로 갔을 때에 얻은 완본(完本)을 대본으로 하여, 1662년(헌종 3) 전주에서 4책 20권으로 된 『가정집』을 간행한 것이 4간본이다. 권1에 수록된 「죽부인전(竹夫人傳)」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절개 있는 부인에 비유하여 쓴 가전체 작품으로,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등과 함께 우리나라 소설문학의 형성 및 발달과정을 살피는 데 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1939년에 예산에서 중간하였는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73년에는 4간본을 대본으로 하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목은집(牧隱集)』·『인재집(麟齋集)』을 합본하여 『고려명현집』으로 영인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 목판은 한국 문화사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헌서원 홈. http://www.munheon.org/)에서)

『가정집』에서 이곡 선생은 당시 사회의 모습을 잘 담고 있어서 자료가 부족한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계세징인(戒世懲人)한 <죽부인전(竹夫人傳)>에서 죽부인의 출생부터 신분을 서술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였는데, 이는 역사적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과 연결시켜 교훈을 주기 위한 작품이이다.

죽 씨의 조상은 상세(上世)에 큰 공을 세웠고, 자손은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며, 절개가 굳어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죽부인 역시 현숙한 여인으로서 바르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깨끗하게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죽는다. 이것이 나라에 알려져 ‘절부(節婦)’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 작품은 부인의 절개를 내세우고 굳은 절개와 그 무사(無嗣:대가 끊김)함을 그린 일종의 열녀전(烈女傳)으로 남녀관계가 문란하였던 당시 사회상을 풍자한 것이다.

특히 이곡의 <차마설(借馬說)>은 ‘말을 빌려 탄[借馬]’ 개인적 체험을 제재로 하여 소유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한문 수필로, 이 작품에서도 ‘말을 빌려 타는 일’이란 평범한 일상사를 통해 우의적으로 삶의 이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곡은 말[馬]을 주인에게 빌려 쓰듯 인생 역시 하늘에서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모두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는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에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노라’라고 적어놓는다, 즉,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잠시 빌린 것인데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소유 관념을 비판하고 소유욕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이곡 선생의 <차마설>은 적지 않게 가슴을 울려주는 바도 매우 크다.

장판각(藏版閣)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다 보니 문득 옆으로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천사청(典祀廳)으로, 제사(祭祀)를 지내기 위한 모든 제구(祭具)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란다. 잠시 후 장판각의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다가 원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차마설>이 주는 무거운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빙그레 웃으면서 맨 아래 돌계단에 이른다. 굳게 닫힌 화장실을 앞을 지나 영모재(永慕齋)와 교육관(敎育館) 앞에 이른다.


한 장의 목판(木版)
                   구재기

나의 모든 양 변(邊)을 버렸다
나고 죽는 것도
멀고 가까운 것도
악과 착한 것도 버리고
절로 옳고 그른 것도
모두 버려야 했다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먹물을 찍어 바르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새하얀 한지(韓紙) 한 장
묵향(墨香)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하는 자리
나뉘지 않으면
새로이 생기는 것은
비어있다는 것일까
허공이라는 것일까
돌계단 위에 가을 햇살이 쌓이고
그 자리에는 머문 그림자가
언뜻 투명하기만 하였다
투명하다는 것은
나의 몸과 그림자가
오직 하나가 된다는 것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나의 몸이 전체이고,
그림자가 곧 전체가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엄연한 존재 하나
목판에는 남아 있는
먹물의 흔적이 기득했다
모든 걸 버리고
양 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한 장의 목판으로
새롭게 찍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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