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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마량포구의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을 찾아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47편

047. 마량포구의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을 찾아서
- 충남 서천군 서면 서인로 225번길 61 동백정교회

아펜젤러 선교사는 삶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전혀 알려지지도 아니하고, 알 수도 없었던 미지의 땅에 들어온다.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산천에서 낯선 사람들과 호흡하며, 오직 눈빛으로만 마음을 전하여 왔을 아펜젤러, 그는 분명 하늘을 우러르며 자기 자신을 쉼 없이 다스려왔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선교라는 확실한 목표 하나를 오직 믿음으로 다짐하고 닦아가며, 분명한 목표를 하나하나 개척하는 힘을 기르기도 하였을 것이다. 낯선 땅 낯선 하늘 아래 삶의 빛을 전하는 고귀한 통로를 하나하나 개척해온 아펜젤러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그가 이루어놓은 한국 최초의 근대 사학,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삶의 조명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림으로써 울창한 숲을 이루고 새로운 열매를 맺어놓고 있지 아니겠는가?


2019년 10월 10일 목요일. 오후 3시의 햇살은 마냥 곱기만 하다. 곱다. 따스하다. 마량포구 [한국최초 성경전래기념공원]을 빠져나와 마량진의 골목길에 접어들자 햇살은 끝까지 발걸음을 같이해준다.

가을의 햇살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짙은 그늘을 만드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저만큼 앞에서 좁다란 골목길을 밝혀준다. 순간 골목길이 환해진다. 그리고 벽화로 가득 채워진 여염집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벽화 속에 여염집이 묻혀있는지, 여염집이 벽화를 끌어안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벽화와 집이 하나의 큰 화폭으로 조화롭게 이루어놓고 있다.

너무 아름답다. 조금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는데 한결 부드러워진다. 더더구나 언덕 위로 점점 올라갈수록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슬쩍 건드릴 때마다 가슴속까지 깨끗하게 씻어내 주는 듯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바람 속에는 간간이 가을의 내음까지 스며들게 하여 발걸음이 가뿐하기만 하다. 온몸으로 가을을 느끼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문득 이효석의 <낙엽(落葉)을 태우면서>란 수필 한 구절을 떠올린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이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덧 언덕에 올라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가우처홀>이라는 안내를 받아 엄연한, 가장 아름다운 생활의 자세로 살아온 한 생의 품속에 안기게 된다. 아펜젤러는 낯선 이국의 땅에서 명백한 생활의 자세로, 이를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고 진실 된 삶의 원동력으로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하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곧잘 한복을 입히곤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그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그의 조선 사랑은 고통당하는 백성과 암울한 조선의 현실을 목격하기에 이르게 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게 된 어느 날, 문 앞에 가난한 노비 소녀가 혼자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는 걷던 길을 되돌린다.

그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망 후 장례비용을 주어 후히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정신이련가. 당시 서울에서는 콜레라로 인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 일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약자였음을 목격하고는 이들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가난한 소작농, 고아,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착취당하는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패한 관료와 부자들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가하곤 하였으니, 콜레라를 치료하기 위해 왕실이 한때 1만 달러를 들여 낡은 건물에서 임시 구급병원을 열었으나, 치료비로 써야 할 대부분의 돈을 탐관오리들이 가로챘다고 하면서 분개했다고 한다.

특히 약자인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 국가권력의 부도덕함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의 ‘조선사랑’은 이처럼 약자에 대한 자비와 부패한 권력에 대한 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의 계단에 오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십자가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 먼저 맞아준다. 조각가 김태덕(2012년 성낙인 집사 기증) 씨의 작품 <향기>이다. 그래서인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한층 더 은은하게 느껴진다. 전시실 중 배 모양의 아펜젤러 기념관의 주 전시실이란다.

이곳에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국초기 해외선교사, 그리고 1950년 이전 해외선교사 자료, 그리고 안쪽으로는 9,800명의 선교자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펜젤러는 누구인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02.06~ 1902.06.11)는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감리교(북감리회) 선교사이다. 한국어로는 아편설라(亞篇薛羅)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 사학인 배재학당(현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 세운 설립자이며, 구한말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자녀들인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한 뒤 아버지를 이어 배재학당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했고,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서덜튼(Souderton, PA)에서 태어났으며,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Franklin and Marshall College)를 1882년 졸업하였다.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으며, 1884년 미 감리교 선교 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으로 입국한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내리교회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고종 황제가 이름과 현판을 하사한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학교,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이다. 한국에 성서 번역부가 생기자 언더우드·게일 등과 함께 마가의 젼한복음셔언해, 보라달로마인셔 등 성서의 국역에 참여하였다.

교육 방식을 암기보다는 판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하였다.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배인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 소속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충돌해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하면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는 가묘이다. 시신은 아직 여학생과 조사 조한규와 함께 어청도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도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위키백과』에서)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배인 구마가와마루호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조사 조한규, 그리고, 정신여학교 여학생이 인천에서 목포로 가기 위해 승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배는 안타깝게도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어청도 인근 서북방 2-3해리 해역에서 같은 회사 소속인 기소가와마루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된다.

그때 수영을 잘하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 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살 수도 있었지만, 동행하였던 조한규와 방학을 맞아 귀향하던 정신여고 학생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즉시 뛰어들어 구하려다 그만 참변을 당했다고 하니, 조선을 그리도 사랑했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목숨까지도 버린 인간 참사랑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소서’하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도 겁을 내지 말게 하옵소서’하고/ 고백하게 하소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기도하게 마옵시며/ ‘고통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인내를 주옵소서’ 간구하게 하소서// ‘인생의 싸움터에 동료자를 보내소서’/ 기도하게 마옵시고/ ‘싸움에서 이길 힘을 주시옵소서’/ 두 손 모으게 하소서//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소서’ 기도하게 마옵시고/ ‘두려움을 물리쳐낼 용기를 주옵소서’/ 소망하게 하소서// 겁장이가 되고 싶지 않사오니/ 도우시옵소서//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도우신다 생각하게 마옵시고// 하루하루/ 슬픔과 괴로움/ 때로는 핍박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손목을 꼭 잡고 계심을/ 믿게 하소서 ― 타고르의 <기도> 전문

바울로가 가장 충실한 협조자인 디모테오 앞으로 보낸《신약성서》에 속하는 2개의 편지가 있다. 18세기 말부터 <디도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이른바 ‘목회서신(牧會書翰, Pastoral Epistles.)이라 불리운 3가지 편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세 편지가 모두 교회행정과 이단확산 문제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 주석가들은 여전히 바울로가 저자라고 주장하며, 결과적으로 이 편지를 사도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정보 자료로 본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주석가들은 문체가 바울로의 표현 방식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썼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는 비정통적인 가르침과 위험한 사상을 추방할 필요성을 주장하며, 감독(bishop)과 집사가 지녀야 할 자질을 반복해서 말하는 한편, 디모테오에게 충실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과 전수된 신앙과 올바른 행동, 상호 존경을 그의 교회 회중(會衆)들에게 가르치라고 권고하고 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도 이와 유사하게 디모테오에게 “성령이 당신에게 맡긴 진리를 지키시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그의 고통의 몫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어리석고 무익한 논쟁에 관여하지 마시오”라고 충고하며, “타락한 마음과 거짓 신앙을 지닌 사람을 피하라”고도 한다.

마지막에는 많은 개인의 이름을 들먹이며 어떤 이는 친한 친구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해를 입힌 사람이라고도 한다. 또한 저자는 자신이 “곧 희생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디모테오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자신을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위한 인내, 전도자의 직분,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 따위가 기록되어 있거니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중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테오 후서後書 4장 2절)는 구절과 함께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이 오버랩으로 떠오른다.

이는 비종교인인 필자로서도 이러한 삶의 자세는 올바른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삶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전혀 알려지지도 아니하고, 알 수도 없었던 미지의 땅에 들어온다.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산천에서 낯선 사람들과 호흡하며, 오직 눈빛으로만 마음을 전하여 왔을 아펜젤러, 그는 분명 하늘을 우러르며 자기 자신을 쉼 없이 다스려왔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선교라는 확실한 목표 하나를 오직 믿음으로 다짐하고 닦아가며, 분명한 목표를 하나하나 개척하는 힘을 기르기도 하였을 것이다. 낯선 땅 낯선 하늘 아래 삶의 빛을 전하는 고귀한 통로를 하나하나 개척해온 아펜젤러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그가 이루어놓은 한국 최초의 근대 사학,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을 통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삶의 조명할 수 있는 씨앗을 뿌림으로써 울창한 숲을 이루고 새로운 열매를 맺어놓고 있지 아니한가?


지하 1층 전시관에는 가우처관, 멕클레이관, 아펜젤러관, 한국감리교회 선교의 현재 및 비전을 제시해놓고, 지상 1층 전시관은 체험관 등 기록 남기기, 지상 2층 전시관은 한국감리교 선교역사 자료실이요 3층에는 전망대이다.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전망대에 오른다.

눈앞을 딱 가로막고 있는 한국중부발전 서천화력발전소 곁으로 겨우 트인 틈을 찾아내어 너른 서해바다를 바라본다. 가까이로는 오력도가 보이고, 멀리로는 어청도가 보인다.

어청도는 마량포구에서 약 48km(군산에서는 72km) 행정경계상 전북의 섬(1914년 이전에는 보령군 오천면)이나, 아펜젤러 순직 장소가 육안으로 전망할 수 있는 가까운 육지에 기념관을 세워진다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여 이곳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라 한다.

전망대에서부터 계단을 내려오는데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아펜젤러” 라는 어록이 저만큼의 거리를 두고 반짝 빛처럼 나타난다. 이 말씀 한 마디로도 그의 순교정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이 글은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의 리플릿과 SNS 『위키백과』를 참고로 하였습니다


어청도(於靑島)를 바라보며
                               구재기

찬 바다에 얼굴을 씻고
고요한 마음으로 앉아서
멀리 뭍이 우는
소리라도 듣고 있는 것일까
바다는 있고 없는 것이
모두 비어 있고
밝은 달이 어둠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처럼
어청도는 지금
밝은 햇살 아래 놓여있다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싹이 자라날수록 뿌리가 깊어진다
뿌리로 하여 싹이 자라고
싹으로 인하여
뿌리가 깊이를 더하는데
서로를 안 믿고
어디에 믿음을 기댈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싹처럼 한없이 출렁이며
뿌리처럼 깊이 침묵에 싸여
어청도는 시방
무엇을 얻든지 못 얻든지
깊은 묵도에 젖어있는 듯
물결 일어 몸을 씻어내고 있다
경책(警責)하며
예사로이 모든 일에
시비를 가름하지 않고 있다

*어청도(於靑島):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에 속한 섬이나 마량포구에서 약 48km 떨어져 있고, 군산에서는 약 72㎞ 지점에 있다. 중국 산둥반도와는 약 300㎞ 떨어져 있으며, 예로부터 태풍이 불면 대피항으로 이용되었다. 주위의 물이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하여 어청도라 했다. 최고지점은 198m로 섬 중앙에 있으며, 그밖에 검산봉(129m)·공치산 등 100m 내외의 구릉지가 있다. 기후는 서해의 다른 섬들보다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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