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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16)> 몽양 여운형 암살사건...배후놓고 의문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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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 결렬후 좌우익합장 통일조국 나선몽양.
-1947년7월 19일 혜화로타리부근서 괴한 총기피습.
-한지근이라는 월남한 청년 범행자백...배후 못밝혀.
-27년 지난 뒤인 1974년 당시 공범들이 상황밝혀.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지난 2005년 1월 25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올바른 과거 청산법 제정을 위한 국가폭력 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행사는 '계승연대 의문사건 특위'가 주관한 것으로,  해방 후 일어난 의문사, 또는 요인 테러사건에 대해 올바르게 역사가 기록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있었다.


그중에 아직도 해방 직후 좌. 우익 대립과, 친일파 청산요구 세력과 친일파 복귀론자간, 또 반미파와 친미파간에 죽고 죽이는 생사  대결 속에 발생한  의문사들이 이슈로 떠올랐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좌우를 넘나들며 통일조국을 외친 민족주의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암살사건이다.

원로였던 이기형 시인(당시 90세)이 이날 첫 번째 증언자로 나서서 당시를 이야기했다. 

이기형 시인은 "여운형을 위시한 지도자를 훼방하고 때리고 가두는 작업에 친일잔재세력들과 보수수구세력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먼저 당시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친일잔재세력들과 보수수구세력들은 해방 이후 우익이라는 우산을 쓰고 애국자로 둔갑했고 몽양이 해방뒤 정부수립을 위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 (건준)을 망가뜨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배포된 당시 증언록을 통해 "여운형을 피격한 암살자의 배후는 백색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였다"면서 "백의사와 관련된 A가 암살범 한지근(본명 이필형)에게 권총을 주고, B씨가 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이에 대한 사실이 A씨의 회고를 통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A,B씨가 사건에 관여한 기록은 없다.
 
◇…이기형 원로시인의 몽양 여운형 암살배후 증언

이 시인은 당시 증언록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몽양은 암살 당일인 47년 7월 19일 성북동에서 재미 조선사정협의회장 김용중을 만난 뒤 계동 집을 가기 위해 명륜동 방향으로 향했다.

몽양의 차가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무렵 트럭 한 대가 차를 가로막았고 흉한(兇漢) 하나가 자동차 범퍼로 뛰어오며 몽양을 향해 권총 두 발을 쏘았다. 

비서 고경흠은 몽양을 안고서 인근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지만 몽양의 맥박은 병원에 닿기도 전에 멎었다.

몽양의 경호원 박성복이 범인을 추격했지만 경찰이 제지하면서 범인의 도주를 도왔고 오히려 박씨를 검거한 뒤 성북경찰서, 운전사 홍순태를 서대문경찰서에 또 다른 경호원 이제황을 동대문경찰서에 연행했다. 

몽양의 동생 근농은 '몽양 여운형'에서 ▲형님이 총격 당한지 몇 분만에 암살사실이 모 단체의 벽보로 붙었던 점 ▲경찰이 범인의 도주를 방치한 점 ▲경찰 발표와 달리 범인 한지근의 배후 조종자가 있었던 점 ▲범인 체포 장소가 바뀐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이승만 정권이 암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27년이 지난 74년 몽양 살해사건이 단독 범행이 아니라 김홍성, 김영성 형제와 김훈, 유용호 네 사람이 공범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자수한 이들 네 명은 '경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여론에 쫓긴 경찰이 우리를 체포하려고 해 할 수 없이 경찰과 타협한 뒤 한지근 한 명만을 연행하게 했다'고 밝혔다.

A씨가 암살 전날 암살범에게 권총을 주었으며 B가  개입된 사실을 제시하며 정권 차원의 암살이 이루어졌다. 

암살범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李弼炯)으로 나이는 21세이며 고향은 평북 영변 출신으로 백색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 결사대원이었다.

백의사 고문이었던 A씨 회고에서 '여씨를(몽양) 사살하기 전날 밤 나는 한군에게 일본장교용 권총 한 자루를 주고 넘버를 내 수첩에 적어 놓았다'며 '얼마 후 나는 B씨 에게 불려갔다. 그분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밝혔다."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의 항일독립운동사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군 양평면 소원리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15살 때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그는 20세 되던 해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빌려온  2000만달러를 갚을 길이 없자 시장터에서일본에 진 빚을 갚기위해 국채보상과 국산품장려운동등을 놓고 연설했다.


을사늑약후인 1914년 중국 금릉대학을 다니다가,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지하고 김규식등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했다.

이듬해 3.1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장덕수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각국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한일 합병은 강제 결혼이다. 너희들 일본인이 폭력으로 강행한 것이며 조선인의 참 뜻은 아니다. 조선은 독립해야한다. 비단 조선인 뿐만아니라 세계 모든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 조선독립은 중대한 문제이며 시급한 것이다.우리의 독립이 없이는 동양의 평화가 없고, 동양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의 평화가 없다’ 

그후 소련에서 열린 피압박 민족대회에서는 김규식과 함께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그는 레닌과 만나 독립자금으로 수만 달러를 약속받고 상해에 돌아와 조선노병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때 몽양은 중국 혁명당소속이었고, 연안파 홍군(紅軍)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런 일로 다른 독립군들처럼 수차례나 감옥을 다녀와야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후에는 근민당(勤民黨)당수로서 맹활약했다. 한 때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했으나, 근민당을 통해 중간노선을 택하는 바람에 좌.우익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좌익에서는 기회주의자로, 반동에 가깝다며 공격했고 우파에서는 빨갱이와 내통한다는 구실로 몰아세웠다.

1947년 흉탄을 받아 비명에 가기까지, 해방 후 무려 9번이나 테러를 당할 정도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난뒤 좌우 합작문제를 추진하면서 중간노선을 표방하고 나서자 극우파와 극좌파에서는 똑같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에 급급했다.

몽양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분위기속에서도 태연자약하게 활동한 정치가도 흔치 않다.

일례로 광복 다음 다음 날인 1945년 8월17일,전날 민중들 앞에서 연설도 했고,민국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날 밤 서울제동에 있는 집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한 괴한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우익으로부터 7번, 좌익으로부터 2번이나 태러를 당했다.

뿐만아니다. 1947년 3월17일에는 몽양의 집을 폭파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해방정국에서 정치 거물을 쓰러뜨리려는 음모가 빗발쳤다.

햇수로 3년에 걸쳐 이런 테러위협속에 기적처럼 살아났다.

◇…몽양 여운형의 최후...둘러싼 의혹들

1947년 7월19일은 몽양의 최후의 날이다. 몽양은 서울종로구명륜동에 사는  친지 정무묵(鄭武默)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고 근민당 본부 사무실로 갈 참이었다.

당시 독립신문 주필이었던 고경흠(高景欽)과 함께 경호원을 대동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이때가 오후 1시 15분이었다. 몽양 여운형이 탄차가 명륜동에서 시내로 향하던 도중 혜화동로터리에서 커브를 도느라고 속도를 늦추는 순간, 전격적인 피습을 당했다.

범인은 20대 초중반, 키는 5척 6촌 정도밖에 안되며 머리는 길었고 일본 군복에 긴바지를 입었으며, 고무신을 신었다.

차량이 모퉁이를 도느라고 속력을 늦춘 순간. 총탄 3발이 날아들어  한발은 오른 쪽 어깨, 또한발은 치명적인 후두부 관통되었다.

괴한이 도주해 버렸을 때 몽영은 이미 숨이 멎었다.

때마침 혜화동 교통사고를 위해 출동했던 성동경찰서 최경위가 총소리를 듣고 범인을 추적했다.

범인은 혜화초등학교를 지나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골목으로 도주하자 20m까지 추격했다.

이때 최경위 뒤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사람이 있어 공범인 줄 알고 체포하려고 하자 ‘아니요. 나는 경호원이요’하고 말하는 사이에 범인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경호원은 박성복(朴誠復)이었다.


저격장소에는  정사복 경관들이 여러명이 나와 범인을 추격중이었다.

불의에 총격을 당한 몽양 여운형은 즉사해 서울대병원으로 이송했다.

부인 진 여사등 가족은 비보에 울부짖고, 김규식 박사와 안재홍 민정장관등 주요인사들이 비극으로 끝난 몽양을 조문했다.

사건이 발생후 서울시내는 비상경계가 내려지고, 수사진등은 긴장했다.

수도경찰청과 사찰진이  총동원됐으나, 이틀을 그냥 넘기고 나니, 범인체포가 쉽지 않았다.

단서라고는 최경위가 목격한 20대 초.중반 남자에다, 일본군복에 흰 바지. 고무신차림이었다는 것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경찰에서는  사건발생당시 범인을 놓치게한 경호원 박성복, 이제황.홍순태 세사람을 구속, 심문했으나.아무런 소득이 없자  사흘뒤 석방했다.

◇…몽양 암살 배후놓고 공방

사건은 결국 미궁에 빠졌다. 이런 뒤 사건 발생 5일후인 24일 수도청(청장 장택상)에서는 돌연 범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수도청에 의하면 범인은 평안북도 영변출신인 한지근(韓智根)으로 19세라고 설명했다.

한지근은 평양기림학교를 마치고, 영변의 용문중학을 졸업한 뒤 달포 전에 월남, 23일 오후 2시경 고하 송진우를 암살해 복역중인 한현우 집에 있다가 체포됐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발표는 범인체포와 함께 범행당시 썼던 권총과, 혜화동 근처에 숨겨둔 일본군복, 흰바지등을 압수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한지근을 둘러싼 배후관계가 논란이었다.

당시 한지근은 한현우와 공범으로 지명수배중인 백남석이라는 인물로부터 월남직전에 평양에서 추천장을 갖고 상경했던 것이다.

한지근은 경찰 조사에서 오히려 분개하며 “ 좌우익을 막론하고 박헌영· 여운형·송진우등 국내를 혼란하게하는 인물을 다 죽여야 나가 바로 서겠기에 감행한 의겨인데 무슨 잘못이냐...‘고 진술했다.

때문에 송진우 테러 암살사건과 일맥상통한다는 점과 사건경위와 진상을 밝혀지면서 대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체포한 것인지를 놓고 궁금증만 더해 갔다,

한지근을 평양에서 상경시킨  백남석과 한현우등 일파는  소위 좌우익을 막론하고 마땅치 않은 인물은 누구든 처리해버린다는 최고 지휘자가 서울에 잠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수도청은 그를 체포하기위해 수사를 계속하며 침묵을 지키자 항간에는 수도청이 그 배후를 명백히 밝히지 않는 다는 뜬소문이 들끓었다.


그러자 사건 열흘뒤 조병옥 경무부장은 출입기자들에게 사건 전후를 밝혔다.

이는 사건이 일단락지어진 것으로 관측된다.

조경무부장의 발표 이틀뒤인 30일 오후 공범혐의자로  함경남도 홍원출신인 회사원 신동운이 수도청 형사대에 체포됐다.

신동운은 해방직후 우익 청년단장을 암살하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고,뒤에 일어난 고하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의 일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6일 서울지검 조재천 검사는 한지근과 몽양의 운전기사 홍순태를 혜화동에 불러 지난 7월 19일 사건현장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

그러면서 조 검사는 ‘북한 괴뢰의 지령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몽양 암살범인 월남한 한지근

사건 직후 수도청의 수도관구 경찰청은 범행 77시간만인 7월 23일 오후 3시 한지근을 체포했다.

나이 19살인 한지근은  송진우의 암살범인 한형우와도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사건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체포직후 경찰은 한지근의 진술에 따라 7월23일밤 서울신당동 한형우의 집안 땅속에 묻은 미제45구경권총과 실탄 10발을 찾아냈다.

또한 삼선교 근처에 묻은 옷가지도 모두 압수했다.

그간 한지근을 체포하기위해 경찰관 1만2000여명이 투입됐다.


한지근은 평안북도 영천출신으로  고향에서 학교를 마친 뒤 정치에 관심을 갖고 1947년 6월23일 월남해, 송진우 살해범인 한현우의에서 기거해왔다.

한현우의 직계부하로 전부터 관계를 가져왔다.

한현우는 재판을 받는 중에도 검사의 심문에 ‘여운형도 살해할 의도 였다“고 진술했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모종의 배후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추측된다.

한지근은 체포된 뒤 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직접 조사도 받는다.

장 청장은 “너는 어찌 권총을 잘쏘는 가”하고 물으니, 한지근은 “그런 일을 하는데 그만큼읕 못하겠습니까”하고 답할정도로 나이에 비해 태연자약했다.


장 청장이 “네 배후를 말하면, 검사국에 넘어갈 때 유리하게 해주마”라고 말했다.

한지근은 “총감각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국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유리 운운하다니 무슨 뜻입니까”하며 자기의 범행을 털어놨다고 한다.

사건은 그해 8월29일 한지근과 신동운을 검찰청에 넘기면서 경찰은 그간의 전모를 밝혔다.

범인 한지근은 평북용문중학교를 졸업한 뒤 가사에 종사하면서 소위 인민위원회와 북한 정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중에 1946년 동창생인 김인천주재하에 비밀결사인 건국당에 가입하고, 김일성을 살해하는 동시에 안보대 해체, 공산당조직의 교란등을 계획하고 노렸으나 경비가 심하여 목적달성이 어려워지자 남한에서 민족분열의 극악분자로 인정되는  박헌영.여운형을 암살하기로 하고 건국당 김인천으로부터 권총1자루와 탄환을 받아가지고 몽양이 번번히 통행하는 계동자택부근과 세종로, 근민당근처, 동소문로터리부근의 약도와 몽양 사진 한 장을 가지고 그해 6월26일 평양에 단신 출발, 7월1일 서울에 도착했다.

2일부터 신당동 한현우 집에서 유숙하며 앞서 밝힌 3개장소를 배회하며 여운형을 저격을 기도하던중 19일 오전 10시 쯤 동소문 로터리에서 몽양이 탄 자동차가 돈암동 방면으로 내려와 서혜화동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을 보고 저격했다.

공범 신동운은 홍천출신으로  상업학교를 졸업한뒤 해군지원병으로 뽑혀 일본 구주등지를 전전하다가 해방후 제대, 1946년 9월 귀국하여 한현우집에 거주하며 여운형. 박헌영을 매국노라고 지적하여 우리민족으로부터 당연히 제거되어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하던중  7월10일 쯤 한지근과 함께 여운형.박헌영을 매국노라고 말한 점등으로 한지근이 범행을 저지르게했다.

또한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를 독립방해자로 인정하고 그를 살해한 한현우에게 사사하였고, 지금껏 그뜻을 계승하기위해 노력중인 것이다‘

이로써 신동운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됐다.


범인 한지근은 이후 47년 10월21일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11월 4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국민들은 범인을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분노했으나, 한지근이 끝내 미성년자라 하여 남한 지역내 개성 소년원에 수감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복선이 있었느냐하는 문제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한지근은 그러나 6.25를 만나 남침하는 인민군에 살해됐다는 소문만 있을 뿐 몽양 여운형의 암살에 대한 숨은 진실규명은 미완성이다.

여운형은 해방직후 공개적으로 소련군정청과 미군군정청에 대해 말해왔다.

그는 “우리는 지금, 두사람의 손님을 모시고 있다. 북쪽에는 소련, 남쪽에는 미국이라는 손님이 와 있다. 이들에게 잘 대접해서 보내 줘야한다. 그게 우리의 현명한 길이다‘

몽양 여운형의 이같은 말은 인도 네루수상의 정치삶과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후세는 평가한다.   

◇…경찰의 축소 수사 등이 훗날 도마위

몽양 여운형이 암살된 뒤인 27년이 지난 1974년 당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일이 생겼다.

무엇보다 경찰은 한지근의 단독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린데다, 한지근이 나이를 속였다는 의혹도 나왔다.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에 몽양 암살에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혔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테러리스트로 활동하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결국 여운형 암살은 해방 직후 많은 테러 행위에 관여한 극우 테러단체들이,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에 불만을 품고 상호 연계하여 그를 제거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이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집을 근거로 활동했음에도  적발되지 않았다는 점, 여운형이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음에도 그 배후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 무엇보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수사기관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의혹 등이 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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