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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맹동(孟洞)을 찾다...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44편


044. 맹동(孟洞)을 찾다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 맹동

새 정부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한 맹사성은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조와 태종의 측근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질시를 받았고, 특히 청렴강직한 성품대로 공무를 집행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세종 13년(1431년) 세종대왕은 고불과 더불어 황희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 적재적소에 등용한다. 황희는 강직한 데다 매사가 분명하고 정확하여 학자적 기질이 농후한 반면, 고불은 예술가적 심성이 짙어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어질다.

그래서 세종은 결단력이 요구되는 이조 병조와 외교문물의 제도 정비 등은 황희에게 맡기고, 유연성이 필요한 예조 공조와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 점검 등은 고불에게 맡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얼마나 멋진 정치적 조화로움인가?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황희 정승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치세를 도와 조선왕조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사람은 많지만 성이나 아호 뒤에 ‘정승’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는 이는 대체로 황 정승(厖村 黃喜,1363~1452), 상 정승(泛虛齋 尙震, 1493~1564), 오리 정승(梧里 李元翼, 1547~1634), 맹 정승(古佛 孟思誠, 1360~1438)이 등 4명이다.

왜 이들만을 굳이 ‘정승’이라 붙여 불러오는 것일까? 이들에게는 모두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경륜을 펼쳤으며 모범적인 청백리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에서도 고불 맹사성은 높은 벼슬과는 전혀 다르게 백성들과의 어울림에 차별이 없었으며, 길을 가는 데에서도 곧잘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타고 다니는 등 한평생을 유유자적하며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재상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그가 아산 신창 출신으로 알고 있지만 유년 시절 한산면 축동리 맹동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산의 ‘맹씨행단(孟氏杏壇)’은 알고 있어도 축동리에 ‘맹동(孟洞)’이란 마을이 맹사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만도 그렇다. 한산면 축동리에는 600년 전에 세워진 맹사성과 그의 부친인 맹희도(孟希道)의 효자비가 서 있다. 바로 그 효자비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2020년 7월 16일 오후 2시 넘은 시각,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여름의 햇살은 바로 어제까지 내린 굵은 빗줄기가 품고 있었던 습기까지 끌어안고 있어서 더욱 찌는 듯하다. 엄청 덥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한산면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문득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길은 모두 파헤쳐 있다.

도로 확장 및 포장공사 중이다. 온몸이 차체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린다. 동승한 일행 중의 한 사람이 ‘꼬시랍다’고 말한다.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완전한 사투리다. 그러나 사투리라는 생각은 틀린 말이다. ‘꼬시랍다’는 말은 ‘가마나 그네, 짐승 따위를 탈 때 몸으로 전달되는 느낌이 좋다’는 의미이다.

자연적이고 완전한 힐링적인 말이란 생각이 든다. 낯선 길을 달린다는 것은, 아니 자연적인 길을 달린다는 것은 느낌부터가 새롭다. 잠시 달리다 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축동저수지의 물빛이 한결 살아 오르고 있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온 누리가 맑게 씻겨진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축동리’ 마을을 알려주는 표석을 만난다.

한 눈에 알 수 있는 ‘축동리(杻東里)의 유래’를 적어놓고 있다.

본래는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에 속했다. 신라에서는 현이 그대로의 이름으로 가림군(嘉林郡)의 속현이 되어 그에 속했다. 고려에서는 한산현(翰山縣)이 되고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에 한산군이 되어 각각 그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한산군이 면(面)으로 바뀌어 서천(舒川)군 한산면이 되고, 이때 축동, 축산(杻山) 양동이 병합 축동리가 되었다. 싸리매(뫼): 축동에 병합된 축산의 토어(土語), 사당굴(골): 광대봉(廣大峰) 하에 있는 마을. 그곳에 사당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새터마멀(말): 싸리매 북에 있는 마을, 새로 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안꼴(골): 싸리매 안쪽 마을이고, 북쪽에 있는 마을은 절꿀(골), 마을에 절이 있었다. 맹동(孟洞): 초입에 은행나무가 있는 일명 맹정승마을, 고려말 조선초 맹사성(孟思誠)이 나라 바뀌는 난을 피해 와서 산 곳이다. 후산에 당시 지한주사(知韓州事) 송신기(宋臣起)가 세운(1399) 맹사성과 그 부(父) 희도(希道)의 두 효자비가 있다(박)

축동리 유래비는 자연부락의 작은 마을까지도 내방객들에게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어릴 적에 동네에는 싸리매에서 시집온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시어 ‘싸리매아주머니’라 불렀던 기억이 새삼 반갑게 느껴진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둘러본다. 앞으로는 축동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뒷산으로의 품 안에 들어 안온하게 느껴진다. 자못 기품 있는 마을의 모습이 풍요로운 듯 보인다. 문득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맹 씨 부자 효자비를 물으니 오토바이에서 내려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낯선 사람에게는 낯선 고장이 그리 녹녹하게 열려지지 않는다. 안내에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방금 들어본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반갑게 맞아준다.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언덕 밑에서 정자(亭子) 하나 품위 있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표석에 의하면 은행나무는 1982년 ‘8-9-6-8-216’이라는 지정번호를 받고 있는 보호수이다. 추정 수령이 무려 600년으로 높이 18m, 나무 둘레 2.5m로 현재 축동리 주민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적혀있다.

또한 표석의 뒷면에는 <본 은행나무는 고려말 조선초 맹사성(孟思誠)이 난을 피하여 이 고을에 살면서 서기 1399년에 심은 나무라 전하여 지며, 마을 이름 또한 맹정승 마을로 유래되어 진다.

이를 반증하듯 은행나무 뒤편에 맹사성과 그의 아버지 희도(希道)의 효자비가 지한주사(知韓州事) 송신기(宋臣起)에 의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은행나무 곁을 떠나 다시 효자비를 찾으러 오르려다가 그만 멈추고 만다. 풀섶으로 뒤얽혀 쉽게 오를 수가 없다.

은행나무 밑에서 굽어본 마을은 무척이나 안온하면서도 활기스럽다. 특히나 넓게 펼쳐진 축동 저수지의 물빛에 마을 안으로 밀려와 비추어 마을은 더욱 밝고 빛난다. 그 너머로 멀리 한산의 건지산이 보인다. 밑에서 우러러보는 은행나무의 밑가지들은 한결같이 지상을 향하여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다.

문득 맹사성의 일화(逸話) 하나가 떠올려진다. 

열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 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면 좋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쳤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정자에서 잠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맹사성과 그의 아버지 희도(希道)의 효자비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길가 마을 안길의 저만큼에서 한 집의 문이 열리며 주민 한 분이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한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안내해드릴 테니 날씨가 무척 더우니 좀 쉬었다 가란다. 한산소곡주(韓山素麯酒) 주조하는 곳이다. 낯선 객에게 소곡주 한 잔 가득 친절하게 권한다. 시원한 소곡주를 단숨에 마신다. 온몸이 서늘하도록 씻겨진다. 땀을 흘리고 난 후라서인지 갈증도 쉽게 해결해 준다.

잠시 후 주민은 슬리퍼를 신은 채로, 그것도 여자용 슬리퍼를 신은 채로 앞서 걸음해 준다. 안골과 맹동 사이의 대숲 고갯길로 올라선다. 그러나 곧 본격 풀숲 언덕 비탈길이다. 이미 우거질 대로 우거진 망초들이 가득한 수풀 사이를 뚫고 몇 발자국 내딛자 바로 맹 씨 부자의 효자비 비각이 보인다.

성큼 발걸음이 빨라진다. 반갑다. 이마에 흐르는 땀도 이제는 가슴속으로 파고들어버린다. 맹사성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이야기를 들어본다.


고불의 어머니는 흥양조씨다. 송도와 가까운 농촌에서 살았다. 고불의 아버지 맹희도와는 일찍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과거준비 때문에 송도 시내 서당에서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은 했어도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혼자 살아야 했다. 이때 부인 흥양조씨가 ‘뜨거운 태양을 삼키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내용이 하도 이상하여 시어머니인 능성구씨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고, 시어머니는 남편인 맹유에게 며느리의 꿈 이야기를 전하였다. 당시 이부상서 자리에 있던 맹유는 며느리의 꿈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 급히 하인을 시켜 아들의 귀가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고불이 잉태하게 되었다. 남편 맹희도는 정몽주보다 한 해 늦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해가 1360년(공민왕 9년) 바로 고불이 태어난 해이다. 결국 1360년은 과거에 급제하고 득남하고 이중으로 맹 씨 가문에 경사가 난 것이다.

고불과 최영 장군은 한마을에 살았다. 최영 장군의 집 앞에는 배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고불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최영 장군은 아직도 햇볕이 따가운 초가을 날씨에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용이 짙은 안갯속에 배나무 꼭대기에서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려고 하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고불 맹사성이 집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거 배를 따고 있는 게 뉘 집 아들인고?”하고 점잖게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맹 희자 도자입니다”하였다. 겸연쩍어 하면서도 배나무에서 내려와 정중히 절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 장군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아버지가 맹희도라면 5년 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온 동네가 떠들썩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꿈에 배나무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아이가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 또한 예사 아이가 아니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곧 자기 집 아래쪽에 사는 이부상서 맹유(고불의 조부)의 집을 방문하여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고불은 최영 장군의 손녀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맹희도와 맹사성 부자의 효자비 앞에 이르러 잠시 생각에 잠긴다. 맹사성은 유년시절인 5~10세 때에 이곳 축동리에서 성장한다. 10세에 이르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7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어머니를 추모하다가, 3년 동안 묘막 생활을 한다.

특히 묘 옆에 잣나무를 심고 가꾸었는데 멧돼지가 짓밟아 그만 죽게 되니 그 나무를 붙잡고 슬피 울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그 멧돼지를 죽였다나? 이토록 호랑이까지 감동할 정도의 깊은 효심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 효자정려가 내려지고 효자비도 세워주게 된다.

아버지 맹희도 역시 효심이 지극하여 태조 원년(1392) 당시 한산군수와 호장이 ‘효자리(孝子里)’라 칭하고 축동리에 효자비를 세워놓았으니, 이리하여 1399년 맹사성 효자비가 부친 곁에 나란히 서 있게 된 것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새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자 맹희도는 아들에게 출사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권한다.

그에 따라 새 정부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한 맹사성은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조와 태종의 측근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질시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청렴강직한 성품대로 공무를 집행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세종 13년(1431년) 세종대왕은 맹사성과 더불어 황희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 적재적소에 등용한다. 황희는 강직한 데다 매사가 분명하고 정확하여 학자적 기질이 농후한 반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심성이 짙어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어질다.

그래서 세종은 결단력이 요구되는 이조 병조와 외교문물의 제도 정비 등은 황희에게 맡기고, 유연성이 필요한 예조 공조와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 점검 등은 맹사성에게 맡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정치적 조화로움인가?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新昌孟氏先代遺墟碑(신창맹씨 선대유허비)>와 지한주사(知韓州事) 송신기(宋臣起)에 의해 세워진 맹사성과 그의 아버지 희도(希道)의 효자비 앞에서 두 손을 공손히 모은다.

다시 내려오는 데도 몇 번이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한다.

* 이 글은 박수환(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님의 조언과 SNS의 내용에서 빌어온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맹동(孟洞)의 은행나무
                        구재기

모든 나무들이
하늘 향해 가지를 뻗어가는 동안
맹동의 은행나무는
가지 모두 하늘을 향하지 않는다
힘차게 하늘로 뻗어
청청함을 자랑으로 삼곤 하지만
지상 가까운 가지는
허리를 굽혀 땅을 알고 
낮은 풀 나무의 잔뿌리 하나까지 살펴낸다
방년(芳年)의 나이 때처럼
하늘만이 높아 보이는 것이 아니다
허리 굽힘을 깨달은 뒤
지상이 넓은 것도 바로 알고 난
저 불세출(不世出)의 은행나무
어디선가 하늘의 목소리를 닮은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소리가
하루하루를 살아온 
지상의 상처를 달래준다
햇살 또한 
적잖은 세월을 밝혀 온 만큼 
크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은은하다
걸림 없이 자라난 은행나무에도
가지 하나하나에는 상처는 있다
번지어 날아오르는 
바람 소리를 듣는 순간
잠시 일상의 아픔을 벗어날 수 있다

하늘의 목소리를 닮은
바람이 인다 
비길 데 없는 가지, 가지마다
맹동의 은행나무 그림자는 
언제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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