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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서천 비인읍성(庇仁邑城)을 찾다...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山河(서천산하)' 43편


043. 비인읍성(庇仁邑城)을 찾다 -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331

일찍부터 한국의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내에는 관아가 있어서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다. 주로 서남해안 지역과 북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평지에만 성을 쌓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인근의 야산을 끼고 함께 성을 쌓는 평산성(平山城)의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또한 군사 중심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방어력은 거의 없고 관의 통치 중심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형식상의 성을 쌓은 것이 대다수여서 전란이 발생할 때 실질적인 방어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을 하여서 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한다. 이러한 읍성의 특성은 민과 관이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읍성 내외의 거주민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7월 9일 목요일 오후, 한낮의 더위는 말 그대로 불볕이다.

30℃를 오르내리는 기온은 그야말로 훅훅 찐다. 찜통더위다. 절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머리로부터 줄줄 가슴 안으로 스며든다. 찐득한 느낌은 더욱더 더위를 부채질해준다. 그러나 일단 찾아 나서기로 한 발걸음은 차마 되돌릴 수가 없다. 비인읍성을 찾는 발걸음은 그렇게 강행하여 이루지고 만다.

국도 21번 충서로에서 벗어나 비인면 소재지로 들어오자마자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람한 그늘을 거느리고 반긴다. 나무가 반가운 것이 아니라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반갑다, 느티나무 밑에는 정자 하나가 버티어 서 있고, <월명산 유래비>와 <청화역 안내비>가 그늘로 덮여 있다.

이 산은 백제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산이 태뫼식으로 축성되어 있고, 높이는 해벌 298.3m이다. 남서로는 군산 안면도, 북서로는 관적곡산성 불불당곡 산성이 보이며, 서북으로 멀리 웅천까지 보인다. 산성은 동벽은 급경사로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축성하였고, 남벽 서벽 북벽은 정산에서 15m 내려와 석축하여 회랑부를 조성하였다. 북서로도 회랑부가 남아 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성의 내부는 삭토하고 외벽은 석축을 쌓았으며, 급경사의 내부를 평평하게 하기 위해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있다. 성내 북쪽에는 25×40m 규모의 넓은 부분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어 건물지로 추정된다. 성의 남쪽 하단에는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용골대 망골대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청화역: 이곳은 조선시대 태종 12년(1414년)에 설치된 청화역(靑化驛)이라는 공공기관으로, 관청의 공문서 전달과 관리의 지방 순찰시 말[馬]을 대여해 주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특히 암행어사가 그 지역에 나타나면 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역졸(驛卒)이 포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008. 12. 20.

청화역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정자는 느티나무 그늘의 품속에 들어 한여름의 불볕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을 불러준다. 수령 약 200년, 수관폭이 16m, 가슴 높이 둘레가 3.20m인 느티나무는 옛날을 알고 싶은 발걸음을 잠시 붙들어 쉬게 한다.

과연 ‘마을나무 8-9-12-1-237’라는 나무로서의 품격을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보호수로서의 역할을 감내하고 있는 듯하다. 그늘에 깊이 들수록 한낮의 더위는 이곳을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지, 시원함이 가득 차오른다.


느티나무의 그늘에서 벗어나니 더위는 여전히 살아있다. 문득 하마비(下馬碑)가 눈에 뜨이는가 싶더니 멀리 비인향교가 보인다. 느티나무로부터 멀어지면서 다시 걸음을 멈춘다, 바로 일군(一群)의 비석들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어느 옛 고을이었던 고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거니와 비인현이었던 이곳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곳 비인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빗물현이었으며, 백제 멸망 후에 당나라가 이곳을 빈문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757년(경덕왕 16)에 비인현으로 고쳐 서림군(지금의 서천)의 영현을 삼았다가,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가림현(지금의 부여군 임천면 일대)의 속현이 된다.

그러나 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한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태종 13)에 비인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고, 지방제도를 개정함에 따라 1895년에 홍주부 비인군, 1896년에 충청남도 비인군이 된다. 1914년의 군면폐합으로 비인군이 폐지되어 내면·북면과 일방면 일부는 비인면으로, 이방면과 일방면 일부는 종천면으로 통합되고, 서면과 동면은 그대로 서천군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이러한 역사적인 변천에 따라 비인현과 관련한 사람들의 공과(功過)는 자타의 천(薦)에 의하여 비석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권력의 힘을 빌어 세워놓은 공치사(功致辭)의 결과물도 있기야 하겠지만, 정말로 백성들과 함께 가슴이 끓어오르도록 맞대면서 선정을 베풀어주던 치자들의 공덕을 적어 영원히 잊지 않고자 하는 불망비(不忘碑)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짐짓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바로 홍주목사 이승우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못 놀란다. 1895년 8월에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11월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자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讚) 등과 함께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를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이승우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많은 의병장들이 일본군에 잡혀 투옥되었던 일이 있었거니와, 그 이승우가 바로 눈앞에 불망비(不忘碑)로 세워져 눈앞에 나타난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인초등학교 앞에서 옛 비인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청석교(靑石橋)를 만나 무엇보다도 반갑기만 하다. 청석교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흘날 다리밟기를 했던 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다리를 걷는 사람들이 자기 나이만큼 왕복하여 다리를 걸으면 무병한 한 해로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길이 4.6m, 너비 1.6m, 두께 40㎝에 불과한 한 장의 판석(板石)이지만 이 지장천 위로 왕래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삶의 그림자를 내려놓으며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니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석교는 한길가의 밑으로 내려앉아 있는 듯 없는 듯 지장천 위로 걸쳐 누워있다. 어쩌면 옛 비인읍성에서의 삶을 향수처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청석교임을 알리는 표석 하나라도 세우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청석교로부터 아쉬움을 달래면서 물러 나와 비인읍성(庇仁邑城)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바로 비인면 성내리에 있는 읍성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비인읍성 또한 그런 목적으로 도읍 전체를 둘러싸고 군데군데 문을 만들어 바깥과 통하게 만든 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 3년(1421)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고려 중기에 흙으로 쌓은 성을 돌로 다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면적은 11714.8㎡, 성의 높이는 2m, 길이는 3,000m 정도이며 지금은 성의 형태만 남아있고 대부분 훼손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邑城)’이란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여있다. 읍(邑)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성으로 둘러싸인 취락을 의미하였으나, 그 가운데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된다.

중국에서는 읍성이 이미 청동기시대에 축조되어서 국가의 기원이 읍제국가(邑制國家)에서 출발하였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언제쯤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관청 건물과 지배층이 사는 일부 지역을 토루(土壘)로 돌려쌓고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는 산성과 읍성이 따로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이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단다. 통일신라 때에는 9주(州)와 5소경(小京)이 지방의 큰 도회지였고, 여기에는 신문왕 때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이때의 읍성들이 어떠한 형태와 지형조건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修改築)을 해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읍성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변의 산성들로 보아서는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入保: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유형과는 달리, 백제 말기에는 산성의 형태가 차츰 계곡의 아랫부분까지 포함하면서 넓어지고 있어서, 읍성의 기능을 포용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비인읍성 또한 이 부류에 속하는 성이 아닐까.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土築)의 읍성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들 고려시대의 읍성들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石築)으로 고쳐지거나 호구(戶口)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며 특히,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되었다고 한다.

이때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의 높이를 높이면서 옹성(甕城: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는 것)과 치성(雉城: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해자(垓字: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판 것)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한다.

또한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들이 헐렸다 하나,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정조 때 축조된 화성(華城)이 대표적인 것이며, 이밖에 충남에는 해미읍성·비인읍성·남포읍성·홍주성(현 홍성읍)·보령읍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한다.

일찍부터 한국의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내에는 관아가 있어서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다. 주로 서남해안 지역과 북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평지에만 성을 쌓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인근의 야산을 끼고 함께 성을 쌓는 평산성(平山城)의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또한 군사 중심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방어력은 거의 없고 관의 통치 중심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형식상의 성을 쌓은 것이 대다수여서 전란이 발생할 때 실질적인 방어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을 하여서 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한다.

이러한 읍성의 특성은 민과 관이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읍성 내외의 거주민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읍성이 서천에는 비인읍성(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외에 서천읍성(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한산읍성(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4호)가 있다. 

비인읍성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 비인읍성 표석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오르기는 포기하고 만다. 비인초등학교 옆 민가 곁으로 난 길은 제멋대로 왕성하게 자라는 풀숲이 단 몇 발자국조차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결국 오르던 발걸음을 되돌아 나오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다시 찾아 나선 길은 21번 국도 비인사거리에서 오르는 길, 그러나 이곳에서는 큰개 두 마리가 철저하게 길을 막는다. ‘짖지 않는 개는 쉽게 문다’는 속설을 떠올리면서 발걸음을 되돌린다. 비인읍성에 오르기는 참말 어렵다. 땀이 치솟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밭둑으로 하여 오르는 길을 만난다.

여기에서는 흑염소 세 마리가 경계의 눈초리를 풀어내며 반겨준다. 밭 언덕길을 올라 비인읍성과 마주한다. 점점 흐려지는 비인읍성의 자취가 이곳에서 뚜렷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긴 세월에 지친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인읍성은 푸르다 못해 검은 소나무 두 그루가 굳게 지키고 있어 왠지 믿음직스럽다.

이곳을 근거로 하여 조금이나마 복원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여름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다 못해 펄펄 끓어준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전』 및 SNS에서 상당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청석교(靑石橋)를 바라보며
                               구재기

흐르는 세월이 
몸을 낮추게 하였던 것일까
그 옛날에는 
한길에 맞추어 한길과 함께 
나란히 하였을 터인데
지금보다 훨씬 더 몸을 높여
한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을 터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무엇 때문일까
한길에서 쫓겨 나와
한길 아래 지장천 
그 탁한 냄새가 풍겨 나옴에도
흐르는 물에 여전히 
제 모습을 비춰보고 있다
몸을 낮추며 
몸을 낮추듯이
한 백년을 살아가는 도리란 
하루하루 살아온 그 하루가 
쌓이고 쌓여있는 세월이란 
바로 몸 낮추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그렇다, 
누구도 꺾어 물리칠 수 없는
저 엄청난 무게의 청석(靑石),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다부지고 기운차고 옹골진 경도(硬度)
그 도리를 알고 살아가는
그 하루가 백년보다 훨씬 낫다 

청석교는 이제
몸을 낮추어 자리한 것이
서럽고 슬프지 아니하다
백 년을 넘어 살아온 이 자리
고요가 가라앉아
한길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단 하루, 하루를 백년처럼
너끈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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