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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단독】<신수용 한국 정치사(13)> 최초 전국적 학원사태 '국대안 반대 맹휴'와 안재홍 취임

-미군정청, 좌우합작뭐산되자 과도정부수림에 따른 불만일어.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치계획안(국대안)공포에 학생등 동맹휴업.
-서울지역뿐아니라 전국적인 '학원 자유보장'요구 분규로 확산.
-안재홍선생 첫 과도정부수반겸 민정장관취임...정부수립위한 준비.
-문교당국과 학생간 대립 격화...1년뒤 미 군정 수정법령공포하면서 일단락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SBN뉴스= 신수용 대기자] 해방된 뒤 좌.우익 혼란 속에도 우리 민족은 한켠에서는 자주독립국가완성을 위해 분주했다.

무엇보다 국권회복에 참 뜻을 새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구. 이승만. 송진우, 여운형등 민족지도자들은 일제 침략을 교훈삼아 부국강병과 민족정신고취, 경제부흥에 몰두했다.

때문에 정부수립과 함께 키워 나가야할 경제부흥, 통일국가 수립이 첫 번째였다.

이를 위해서 시대 변화 속에, 시대흐름에 맞춰 학교교육과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 고취와 신문명의 정착이 과제이자 기대였다.


교회 등을 통한 신식학문이 들어오고, 서양문물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자주독립국가로서 정착을 위해 각계가 바빠졌다.

이런 마당에 해방 되자마자 남한에는 미군정청이, 평양에는 소련 군정청이 들어오면서 국민들이 기대감은 반감(反感)으로 변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기대와 달리 미군정역시 서술 퍼렇던 일제처럼 모든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중장의 미군정청, 국립서울대 설치안 발표

해방 이듬해 각급학교의 여름방학이 머지 않았을 때다.

1945년 해방된 지 2개월 여만에 서울에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정청이 들어왔다.

이어 미군정청은 1946년 6월 19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치안을 발표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교육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들은 제각각 생각이 달랐을 때다.

서로의 목소리만 컸지, 되는게 하나도 없는 세상에 미군정청이 미군정청 산하 문교행정국이 이를 공표한 것이다.


내용은 현재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에다, 여러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를 통합 설치한다는 것이다. 

대상학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수원고등농업학교 등이다.

그러자 미군정청 자체에 반감을 가진 일반여론에 편승 해당 학교학생들이 미군정청의 처사에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반대 성명이나, 입장문 발표였지, 무력시위는 자제됐다.

그런 반대 움직임 속에 가을학기 개학을 일주일 앞둔 여름방학 중에 이 법안은 강행 처리되었다.

미군정청은 국립서울대학교 설치계획안(약칭 국대안)을 발표한 지 두 달 만인 8월 23일 군정령(軍政令)제102호로으로 ‘국립 서울대학교의 신설’을 강행, 의결했다. 


일부 좌경 교수와 학생이 주동하여, 대상학교의 학생회는 미군정의 결정에 불복,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산발적인 교내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진통끝에 국립서울대학교 1946년 10월 개교

서울대가 제공한 서울대 연혁은 이렇다. 고종의 칙령에 의해 1895년 4월 19일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으로 세워진 '법관양성소'에서 출발했다. 

그 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 열사를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법관양성소는 현재 로스쿨인 법학전문대학원의 전신으로, 법학교(1909)-경성전수학교(1911)-경성법학전문학교(1922)-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2007)으로 이어졌다.1895년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사범대학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1899년 고종은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였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되었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하였고, 농상공학교는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945년 11월 100명의 유지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 건물을 활용하여 국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했다.


앞서 1920년대 조선민립대학 설립이 본격화되지 일제가 독자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봉쇄하고,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며 일본인들의 자제를 가르치기위해 설립된 것이 경성제국대학이다.

한 기록은 조선에서 유일한 4년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는 1926년 무렵 150명중 조선인은 47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울대의 전신이자 일제 식민치하의 국립대다.

일본이 세운 6번째 제국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5월 1일에 2년 과정의 예과(학부진학을 위한 예비과정)만으로 출발했다.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가 생긴 것은 2년 뒤 예과 첫 졸업생들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본과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경성제국대학이 만들어졌고, 경성제국대학의 초대 총장으로는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동경제대 교수(문학부)가 취임했다. 

1924년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예과의 총장 역할을 담당했지만, 대학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갖춰진 뒤 초대총장은 핫토리 우노키치 총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어 1941년 일제 말기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들어섰다.


이후 1945년 해방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교명을 바꿨다.

그 후인 1946년 7월 13일  미군정청이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나 1947년 2월 전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경성대학측에서는 통합할 경우 타학교를 받아들이면 실력지 저하된다는 것이었다.

통합 대상인  타학교 역시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를 없앨수 없다며 강력 반대했다.

교수들은 통합 대신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 법학전문학교등으로 승격시켜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1946년 9월 통합대상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며 1차 동맹휴업(약칭 맹휴.盟休)에 들어갔다.

친일교수배제, 미국인 총장대신 한국인 총장 교체, 경찰의 학원간선배제등이 요구였다.

이런 시위는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됐다. 이때까지 맹휴에 들어간 대학은 전국 57개대학, 4만명이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멉령에 따라 1946년 10월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러나 이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나 1947년 2월 전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새출발의 의미로 학교의 공식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바꾸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한 후 피난 온 다른 모든 사립대학들과 함께 1951년 2월부터 1952년 5월까지 ‘전시연합대학’을 편성하였다.

◇… 해방 이후 초대 미군 대위 출신 서울대 총장과 직선제 총장

대한민국 1호만을 전하는 SNS글에의하면  서울대 총장들의 얘기가  있다.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9개 관립 전문학교와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해 하나의 종합대학교를 만들었다.

이른바 국립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다. 

문교부는 그해 8월 22일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고 법학박사 해리 앤스테드(Harry Bidwell Ansted· 대위를 총장으로 선임했다. 

미국인 대위가 국립서울대 최초의 총장이 된 것이다. 법령에는 이사회에서 자격 있는 한국인을 천거해 본인의 수락을 받아 총장을 임명하게 돼 있었지만 군정 기간 중에는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

때문에 미국인이 첫 서울대 총장이 됐다. 

하지만 외국인 총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앤스테드 총장은 선임 1년 2개월여 만인 1947년 10월 25일 이춘호 이학박사에게 총장 자리를 넘겨줬다.

서울대 2대 총장이 한국인으로는 첫 서울대 총장인 셈이다. 

이 전 총장은 동맹휴학과 등록거부 등을 잘 마무리지었지만, 1948년 사임했고 6·25전쟁 때 납북됐다. 

서울대 총장은 1991년 또 하나의 '제1호' 역사를 쓰게 된다. 

김종운 교수(영문과)가 최초의 직선제 총장이 된 것이다.


김 총장은 당시 교수의 90.7%가 참가한 투표에서 과반을 훌쩍 넘기며 초대 직선제 총장이 됐다. 

김 총장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대 총장은 문교부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명직이었다. 

1989년 2월 28일 열린 총장선출방식에 대한 공청회에서 '총장후보지명위원회가 선정·제시한 후보 5~10인을 대상으로 전(全)교수가 직접투표해 2인 이상의 최종후보자'를 선출하는 방식이 확정됐고, 지난 2006년 24대 총장선거부터는 학교 직원들도 1인 0.1표로 총장 선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 “국대안, 고등 교육기관 축소” 반대 시작

처음부터 반대에 나섰던 이들의 주장은  국립 서울대학교를 설치하면 해당 고등교육기관이 축소된다는 게 주된 반대이유였다.

여기에 총장 및 행정담당인사를 미국인으로 한 것은 운영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선동했다.

미군정청이 내놓은 통합의 조처가 각 학교의 고유성을 해친다는 것 등이었다.

즉, 경성고등공업학교 재경학생대회는 양적인 증대로 인한 질적 저하와 교수의 부족, 6명의 행정관리 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학원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

뒤를 이어 다른 관계학교 교수와 학생들도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개학일인 9월 2일에는 경성 광업전문학교(曠專) 교수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이어 같은 달 5일에는 서울지역 5개 전문대학 학생회와 이공학부 교직원 20여 명이, 7일에는 사범대학 학생회와 의학부 직원이 각각 성명을 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가더니, 11월 초부터는 서울의 다른 대학에서도 등록거부 등 동정동맹휴학(同盟休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때 시작된 국대안 설치안 반대는  점차 악화됐다.

겨울 방학에 임박한 12월 9일에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에서 미군정당국의 처사에 일제히 반대운동을 벌였다.

미군정당국은 상과·공과·문리과대학에 각각 3개월 동안 휴교조처를 취하게 하였다. 

이들은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고 3대요구조건을 학교에 제시했으나 거부되자 동맹휴학에 돌입한 것이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이들의 3대요구조건은 ‘미국인 대학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할 것’, ‘문교부 책임자는 인책 사직할 것’, ‘경찰의 학원 간섭을 배제할 것’ 등이다.

좌익에서 적극 참여하여 투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해가 바뀌었지만 해결기미가 없었다.

문교당국은 오히려 문제해결을 위한 성의를 기울이는게 아니라,위압적인 태도로 ‘등교하지 않는 학생은 제명또는 퇴학처분을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어 1947년 1월 30일 미군정청 문교당국에서 2월 3일의 개교일까지 등교하지 않는 학생은 제명하겠다고 공포하자, 반대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2월 3일에는 상과, 법과, 공과, 문리과대학 등이 동맹휴학하였고, 그 뒤를 이어 서울여자의과대학, 연희대학, 한양대학, 동국대학, 국학대학 등도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차차 중등학교와 인천, 개성, 춘천, 대구 등의 지방학교로까지 파급되었다. 

당시 동맹휴학한 학교수는 57개 학교, 인원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동맹휴학 반대와 미군정청의 대응

이와는 달리, 사건의 확산과 학교 전체의 마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익 학생들도 일어섰다.

이들은 3개 대학 전국건설학생연맹(또는 건설동지회)과 애국 여 학생회를 조직, 서울대학교의 건전한 육성을 이유로 들어 국대안 지지운동을 벌였다.

이들도 동맹휴학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건설연맹 등 동맹휴학 반대파 학생들이 발표한 동맹휴학반대 성명은 이렇다.

이른바 맹휴반대성명이다.

‘우리는 맹휴위원회에서 제출한 3대 요구조건을 옳게 여기며 특히 미국인 교육행정권 이양문제를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맹휴는 그 시기로 보나 사회의 관련성을 보나 요구관철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에 처한 이때, 민주학원이란 미명속아래 적화학원을 기도하는 정치적 모략을 내포한 맹휴는 절대 반대한다’

휴교처분 명령 운운하는  문교당국의 경거망동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 철회를 요구한다’ 

이렇게 미군정 문교당국과 학생들 사이에 긴장이 격화되어 가자 일반사회의 여론도 비등해졌다. 


국립서울대학 문리대, 법과대, 상과대등에 이어 2월 3일 공과대에서도 이에 호응했다.

당시 서울 신공덕리로 이사한 새 교사에 1300여명이 모여 어러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맹휴에 들어갔다.

당시 신문들의 보도에 의하면 이들의 요구조건은 ‘국대안 철폐’, ‘학원을 망쳐놓은 문교당국자는 인책 사임’, ‘경찰의 학원간섭중지’, ‘3개대학 휴교처분 등  탄압적 문교정책을 절대 배격’, ‘구교수단의 요구를 승인하고 전원복직시킬 것’, ‘공과제 전교사를 전원확보’, ‘김동일 학장은 인책 사임할 것’ 등이다.

공과대 교수들도 이에 동참했다.

2월3일 학생의 맹휴와 아울러 교수측에서도 시설의 감축, 교수진용의 악화 등의 원인을 내걸고 학원의 황폐화를 지적했다.

유기연 공과대 교수 등 8명은 한발 더나가 이런 상황 속에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칠수 없다며 사임했다.

이런 가운데 각 대학이 거의 맹휴에 들어가다 시피하여 학원에 일대 선풍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각 중학교에서도 대학과 보조를 맞춰 맹휴에 들어가면서 교육계는 위기에 봉착했다.


먼저 경기상업학교가 나섰다. 이들은 2월3일부터 훈육이 너무 독단적이라는 이유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어 2월7일에는 ‘국대안 반대’, ‘학원내 경찰간섭반대’, ‘교직원의 생활보장’, ‘학생에게 식량과 학용품 특별배급’ 등을 요구했다.

당시 유행어는 ‘형님들을 위해 맹휴에 들어간다’였다.

동맹휴업에 들어간 서울시내 중학교는 배재중 600명을 비롯 동성중 600명, 대동상업 660명, 동명여고 600명, 한성중 570명 그리고 조공주간부와 야간부 전원이다.

여기에 경복, 휘문, 경동, 경기공업학교 등이 맹휴를 결의한 상태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문교당국은 수습책마련을 위해 9개 대학 학장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또 미군정청 군정장관 러치소장을 만나 학생들의 요구조건인 총장과 이사는 한국인을 선출한다는 결정을 보게 됐다.

즉, 대학총장을 한국인을 선출하되 장차  다시 구성될 이사회의 선거에의해 이사도 전부 한국인으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절차는 새로 이사회를 조직할 경우, 군정청 각 부처장이 9명을 추전하여 입법의원의 동의를 얻은 뒤 국정장관이 임명하게되며, 이렇게 구성된 이사회가 총장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 맹휴 중 첫 안재홍 과도정부수반겸 민정장관 취임

송진우,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이 나선 좌·우진영 합작의 통일정부수립이 물건너 가자 미군정청은 통일된 정부가 아니라, 남조선만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우선 남한 정부의 수립이자 건국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미였다.

이 무렵 미군정청의 문교정책에 대항해 학원가에 맹휴가 한창일 때, 미군청정의 변화를 엿볼수 있는 인사가 발표되었다.

1947년 2월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된 해방정국 공간에서 그 달 5일  안재홍 선생을 과도정부수반겸 민정장관으로 발탁됐다.

이어 안재홍 선생이 10일 취임했다. 해방이후 한국인이 최초의 정부수반겸 민정장관에 오른 것이다.

일제에 벗어나자마자 남한에는 미군청이, 평양에는 소련 군정청이 들어서 또 다른 굴레를 짊어지고 있을 때다.

실지 남한내 미군정청에 대한 반발이 좌익은 물론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 국내 우익인사들이 우려하는 상황에서 학원가의 맹휴로 불이 붙은 상화이었다.

일제 때 내 나라, 내 조국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많은 국민들은 해방과 함께 찾아온 미군정청에 대한 불만이 싸여가고 있었다.

안재홍(安在鴻, 1891년 12월 30일 ~ 1965년 3월 1일) 선생은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 언어학자이다.  정부 수립 전 건국준비위원회 부 위원장을 지냈고 그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 시대일보 이사,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활동 주역이었으며, 조선어학회, 흥업구락부 등에서도 활동했다. 

일제 내내 사회단체와 항일 기자로 독립운동대열에 섰고, 칼럼 기고 활동 외에도 사학자로서 고적지 답사, 어문 연구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인물을 정리한 사전에는 안재홍선생은 경기도 평택출신으로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이어 대한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됐다. 

1923년 시대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 조선일보 사장 겸 주필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조만식, 송진우, 이규완 등과 함께 물산장려회을 주도한 뒤 1925년에는 신간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8개월간 복역하였다. 


1936년 다시 임정과 연락을 취하다가 적발되어 2년간 투옥당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분이다.

해방 정국에서 한성일보사 사장 등을 맡았으며, 1946년에는 우사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6년 8월 미군정청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뒤 1947년 2월 10일 남조선과도정부의 정부수반 겸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어 1948년 8월 15일까지 근무했다.

남북협상에는 소극적이었으나 남북협상 실패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인정, 대한민국 국기시정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나, 6월 25일 한국전쟁 때 조선 인민군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되었다.

아호는 민세(民世), 우헌(又軒)이고, 자는 경륙(景陸), 재홍(在鴻)이다.  

해방 후에는 중도우파의 지도급 정치가로서 기존의 지배계급 위주의 이론을 부정하고, 자신이 정립한 신민족주의론과 신민주주의론에 입각하여 우파를 중심으로 좌파까지 망라하자는 이른바 민공협동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미소간 냉전체제가 고착되어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중도파들의 민공협동론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편이었다.

이에 안재홍은 이승만과 유엔과 미국이 제안, 지지하는 남한 단정수립론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하였다는 평이 있다

안타깝게도  6.25때 납북된 안재홍 선생은 15년간  평양에서 살다가 1965년 3월 타계했다.
 
◇…안재홍 취임후 서서히 국권회복과 맹휴의 변화

당시 기록과 신문보도 내용을 보면 그가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겸 민정장관에 취임하던 날이 상세히 전해졌다.

그의 취임식에는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 헬믹 군정장관대리등이 참석한 가운데 정일형 인사행정처장의 개회사에 이어 안재홍 수반겸 장관이 김용무 대법원장을 따라 취임선서문을 낭독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안 장관의 개회사를 보자.

인은 엄숙한 마음으로 다음의 조항을 선서하나이다.

하나, 현 미군정의 방침에 순응하고 법규를 엄수하되 행정권의 완전이양과 독립조선의 성취를 저항하는 노선에서 창의와 성곤(誠悃)으로 제반 행정의 개선향상을 도모하고 관기의 숙청과 민주문제의 해결에 최선의 노력을 하나이다.

둘, 공평염결(公平廉潔)하여, 민정장관의 지위급 직무를 오손 또는 해태하는 일이 없도록 신명의 원호를 비나이다.’

이어 하지 중장과 러치소장, 입법부의장 김규식 박사의 추사에 이어 문교장관 유억겸의 만세 3창으로 행사는 끝났다.

안재홍 선생이 정부수반겸 민정장관에 취임할 즈음, 미군정청내 한국인부처장 명의로 성명서를 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미군정청내 한국인간부들의 생각이 어땠는 지를 엿볼수 있다. 

 ‘미군정실시이후 우리 한국인 각 부처장은 남조선 군정의 중대한 책임을 지고 건국대업에 협력해 왔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총괄적으로 지도할 민정장관직에  한국인 책임자가 없어 행정운영상 원활을 기하지 못한 느낌이 있던 바, 이번 행정권 이양관계로 안재홍선생이 민정장관으로 추대되어 취임함에 우리 부처장 일동은 만강의 축의를 표한다.

평소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관용적 인품및 그 수완은 모름지기 행정의 최고의 책임자로서 제 1인자라 할 것이요, 따라서 그 기대는 크다. 이제 관직에 있는 우리 일동은 안 민정장관의 취임을 기하여  그 의도와 경륜을 체득함으로 건국에 진력 노력하기로 성명한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정부수립과 건국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때문에 안재홍 정부 수반겸 민정장관의  주요 역할과 주어진 책무는  남조선 정부수립이었다.  

안재홍 수반겸 민정장관이 취임한 뒤 같은 달 15일  각 학교에 자유를 보장한다는 서한을 보내어 감정이 예민한 학생들을 다독였다.

당시의 신문 사설은 맹휴를 비판하는 논조가 많았다.

‘8.15이후 여러 분야에서 발호하는 좌익이 문제다. 미군정청에서 분산된 공립대학을 명실 공히 최고학부로서 국립 서울대학을 조합대학교로 집결시키려는 행정적 의안이 오래솓안 연구토의 되어왔다. 

그런 끝에 발표된 것이 국대안이고, 여기에 대해 집요하게 방해하고 나선 좌익세력의 움직임이 격화하여 맹휴사건으로 번저갔으며, 급기야는 심각한 학원분규로 확대되어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좌익의 선동으로 변질된  국대안 반대 학생들은 당초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었음에도 불구, 계속 거부하기로 했다.

그러자, 맹휴를 반대하는 쪽 학생들이 일어섰다.

일부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건설학생회’를 조직, 진상폭로대회를 열었다.


1947년 2월13일 일이다. 이날 오후 1시 서울 시내 중앙예배당에서 열린 이 대회에 전국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맹휴사건이 한참 고비를 맞았을 때  경찰은 맹휴를 선동하는 좌익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경찰이 대학교와 각급 중.고등학교에까지 출동, 등교방해와 맹휴선동자를 색출하기에 이르렀다.

맹휴 지도부 학생들은 경찰의 그런 처사가 학원의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는 항의성명을 내자, 경찰은  치안유지를 위해 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반박하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당시 학생들사이에서 꽤 유명한 이태규 서울대문리과 대학장은 ‘학생제군들에게 고함’이란 유문을 통하여 학생들이 하루빨리 학교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글을 신문에 냈다.  

‘친애하는 학생제군, 우리의 임무는 중하고 갈 길은 또한 멀다. 일찍이 민족주의적 훈련을 받지못한 우리 겨레는  정치인이나 산업인이나 모두 조국의 재건이라는 진통가운데 극도로 혼란상태에 있으므로 정의감에 불타는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제군들을 흥분시키는 일이 비일비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제하고, 우리의 중대한 임무수행에 매진하는 데는 굳센 용기와 지성이 필요하다.

조국의 민족주의적 재건의 중임을 맡은 학생제군은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고 분개하는 정경을  심각하고도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이 저 알킬메데스적 각오와 용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조국이 제군들에게 절실히 요청하는  바 일 것이다.

제군의 정당한 요구는 신성한 학원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

이 학장등 맹휴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분쟁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미군정청 러치 군정장관이 나서 학생들의 맹휴 중단을 요구했지만, 맹휴투쟁은 지속됐다.


◇…미군정청의 수정법령공포와 학원분규 정상화

국대안 반대운동과 국대안 지지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2일에는 동맹휴학생 총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4,956명이 제적됐다.

교수들도 전체 3분의 2에 달하는 교수 380여 명이 해임되었다. 

사태가 가라앉을 기미가 없자 미군정 당국이 조치를 취했다.

그해 5월 말에 국립 대학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함했다.

미군정청 러치 군정장관이  국립서울대학교 이사회의  이사와 총장 선출에 새로운 방법을 취하자고 결정한 것이  수정법령마련이 이뤄진 것이다.

이에 유억겸 문교부장관이 곧 서울대학교 이사회를 선출함으로써 국대안 동맹휴학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국립서울대 설치안을 둘러싸고 1년가까지 벌여온  반대운동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8월 14일에 제적학생 중 3,518명에 대한 복학이 허용되어 국대안 반대분규는 1년 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해 6월 13일 모든 학교학생이 복교하면서 최초의 전국적인 학원 분규가 매듭됐다.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 즉 동맹휴업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다.

그중에  진보진영은 교육적 평가면에서 긍정적인 입장이다. 

그 하나가 국대안 반대세력들이 국대안을 통일정부 수립 이후로 유보시킬 것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국대안 반대는 남북간에 교육체제로 대치하는 것을 지양하고 통일민족국가 수립에 적합한 교육을 세우려는 통일지향적인 성격의 교육운동이었다고 꼽고있다. 

또 하나는 국대안이 미국식 고등교육제도의 이식이며, 미국인을 총장으로 임명하고 학교행정·운영의 최고결정권을 갖는 이사회도 미국인 중심으로 계획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국대안의 반대는 민족·자주 교육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과두관료 이사회의 독재성과 관료성, 교수회와 학생회의 폐지 및 기능 위축을 담고 있는 국대안 반대운동은 학원민주화운동의 시초가 됐다는 긍정적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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