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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의 뉴스창

【단독】<신수용한국정치사(10)> 대구 10.1 사태...미군정 쌀 공출 등에 민중 봉기하자 최초 계엄령

-좌익폭동으로 매도됐으나 과거사정리위원회...순수한 시민봉기
-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때 처럼 쌀공출을 부활한데 기인.
-친일 경찰 청산도 대구 10월의 시위한 요인...쌀공출에 친일경찰나서.
-대구시민들 일제보다 더 궁핍한 삶에 미군정의 친일인사 그대로 둔데도 원인.
-노평의 간판놓고 경찰이 떼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총격 2명사살이 촉발.
-박정희 진형인 박상희씨 주도설이 있으나 사실아니라는 주장이 우세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sbn뉴스=서울] 신수용 대기자=조선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의 재판이 한창일 때, 대구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뒤다. 사건은 대구에서 미군정의 실정으로 식량난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영남일대는 물론, 남한일대에 전파된 사건이다.

◇…금기시됐던 대구 10.1사태 왜 재조명되나 = 순수한 대구 시민들의 봉기에 남한 내 좌익계열이 개입하면서  소요라는 주장과 피비린내 나는 좌익폭동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중에도 대구 폭동은 해방후 혼란기를 틈타 최초로 발생한 잔인무도한 사건이자, 건국이래 최초의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사태다.
  
이 민란에 6.25 한국전쟁전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였던 박헌영(1900~1956)등이 개입한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가 주도한 소요여서 지금까지 박정희 일가의 사상을 놓고 논란이 일게되는 계기가 됐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때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밝혀왔다. 그러면서 ‘대구폭동’이라고 불렀다.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미군정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희생자들의 유족과 지역 언론, 학계의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2010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앞서 언급했듯,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는 “당시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때문에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대구10월사건’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해방직후 궁핍한 삶...미군정,일제때 쌀공출 부활.친일경찰존재에 반감= 8.15 해방으로 기대가 컸지만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경제수치등을 분석해보면 우리의 경제난은 심각했으며, 나아질 조짐도 없었다.

그중에  일제의 자본과 기술자의 철수한데다, 북측에 의존해온  석탄과 전기등의  갑작스런 단절, 해외귀환자나 월남민 등으로 인한 인구의 급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실업률이 높아지고 자살과 범죄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성이 커졌다.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한 민생은 일제 강점기보다도 더욱 궁핍한 상태에 놓였다. 해방되자 농민. 노동자 내부에서는 기존의 식민지 경제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갔다.

국내 정치권에서는 인민위원회나 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인이나 대일협력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분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은 1945년 두 달 뒤 서울에 주둔하면서  미군정이 들어서 민족의 입법.행정을 장악했다.

미군정은 일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정서와 달리 ‘패전국 일인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어  ‘미곡의 자유 시장에 관한 일반 고시 제1호’를 발표하여 식량대책위원회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미곡의 자유 판매를 선언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인구 증가로 수요가 늘어난 상태에서 일본으로의 밀수출이 늘고 투기꾼의 사재기가 벌어졌다.

오랜만에 풍작임에도 쌀값이 폭등하는 문제가 나타나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했다.눈치 챈 미군정은 1945년 12월 19일 일반고시를 발표해 미곡의 소매가격을 통제한 뒤  해가 바뀐 1월 25일에는 식량난의 해결을 위해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는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였다. 

그런데도 수집 가격이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했고, 경찰력을 동원해 가택을 수색하고 처벌하는 식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자 농민들은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에 크게 반발하는 기류가 흘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일제 36년간 식민지와 쌀공출핍박을 받았던 국민에게 또다시 쌀공출을 부활해 당시 청산대상인 친일경찰을 앞세워 이 업무를 맡겨 정서를 자극했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하며 일했던 한국인 관리 대부분을 등용했다.  일제에 경찰로 근무했던 사람도 대부분 그대로 임용됐다.

농민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관들에 대해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쌀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공출해가는 것을 겪으면서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다.

신문과 당시 기록을 보면 이 무렵 대구·경북 지역은 민심은 다른 지역보다도 더 나빴다.

 대구.경북에는 해방 이후 30만 명의 귀환동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면서 쌀 수요가 늘었다. 그런데도  모리배들의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쌀값이 일제 강점기보다 무려 10배 이상 폭등했다.

설상가상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경상북도에서만 4000명이 사망했다.

미군정은 콜레라 전염을 막는다며 차량은 물론 사람도 대구와 경북지역 경계를 넘지 못하게 차단했다. 이 바람에  대구 시민들은 농작물과 생필품의 공급이 끊겨 쌀 부족으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정도였다.

때문에 심각한 기아 상태에 놓이자 9월부터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구 지역의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노평)가 벌인 9월 총파업에 맞추어 파업에 돌입했다.

◇…대구 10.사태놓고 불리는 이름만 수십개...최초 계엄령= 대구 10.1사태는 이런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시각에 따라 수십 개의 명칭이 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대구 10월사건’으로 명명하기 전만해도  대구 10월 사건, 대구 10·1 사건,대구 10월 폭동사건,대구 10·1 폭동,영남 폭동,대구 10·1소요,46년 가을 대구 폭동,10월 폭동,추수 폭동,대구 10월 항쟁,대구 10월 인민 항쟁 등으로 불리는 이름이 많다.

여기에 사건, 사태,폭동,소요, 시위, 항쟁등이 붙었다. 한때는 대구10월 폭동으로 통일해 불리다가 은근슬쩍 ‘항쟁’으로 바꿔치기했으나 ‘대구 10월사건’로 정착되고 있다.

1946년, 가을로 접어든 그해 10월1일, 어둠이 내리던 대구역 부근에는 소란스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근로자들은 목이 터저라 구호를 외쳤다.

가두행렬 참가자들은 당시 금정통(錦町通.일제가 만든 행정구역)에 있는 노평본부(勞評本部)를 향했다.

대구경찰서는 이날 내내 대구 데모설로 초긴장한 상태였다. 경찰서는 물론 곳곳에 삼엄한 경계에 들어갔다.

주로 대구역, 공회당, 호텔일대와 노평본부가 있는 금정통 일대에 수백 명의 무장경관을 배치됐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참가자들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중앙통(中央通)과 행정거리를 거쳐 노평본부로 몰려갔다.

허가없는 시위라며 이를 필사적으로 막는 경찰과, 대구시민의 시위에 좌익계선동과 비밀지령이 가세해 거리로 나온 시위 군중사이에서 결국 폭동의 참사를 빚었다.

사건의 대강은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 노평 간판떼자 항의하는 시민 2명 사살= 일종의 대구시민의 시위지만 민란과 다름없었다.

10월 1일 오전에 총파업에 나선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벌였다.

부녀자와 어린이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 1000여 명으로 불어나 대구부청(대구시청) 앞에서 식량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에 대한 반발과 경찰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이다.

시위대는  국민의 식량 문제 해결과 임금 인상 ,친일파 청산과 행정과 치안에 민중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등을 요구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찰과 시위대가 직접 충돌한 것은 대구시내 노평본부 건물에 붙여진 투쟁위원회 간판때문이었다.

경찰이 이 간판은 무허가라면서 떼어버리려고 하자 이에 항의하면서다.

노평에서는 합법적으로 승인된 단체에서 간판을 내거는데 무슨 허가가 필요한 것이냐며 거칠게  따졌다.

경찰은 그런데도 항의를 일축하고 기어이 간판을 강제로  떼어 냈다.

노평은 분개해하며 경찰을 구타하자,경찰도 강경책으로 대응하며 시위대에 총을 쏴 2명이 숨지게 한 것이다.

이로인해 양쪽은 극도로 감정이 악화, 충돌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자 1일 오후부터 대구경찰서 부근과 대구역에서 금정통에 이르는 일대를 철야경계에 돌입했다.

이튿날 2일 아침에도 특수경비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대구시내를 완전무결하게 경비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경찰이 쏜 총에 시민 2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튿날 아침부터 시위대가 거리로 나왔다.

그중에 수천 명이  대구경찰서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대구경찰서를 에워싸고 돌을 던지며 경찰에 대해 분노했다.

 경찰들도 다시 군중에 총격을 가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빼앗아 무장한 뒤 시내 곳곳의 경찰관 주재소를 점거했다.

 그리고 쌀 사재기를 저지른 부잣집이나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아 시민들에게 배분했다.

10월 2일의 시위 과정에서  18명의 시민이 경찰의 총격으로 죽었으며, 경찰관 6명도 시민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대구경찰서 공안과장과 수사주임등 6명은 현장에 즉사했다.

또한 대구시 전매국장, 도경찰국장, 경찰관 수백명이 치명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이후에는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살상극으로 변질됐다.

시위대와 경찰 간에 5시간동안 혈투전을 벌였다.  쌍방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음은 물론 완전 아수라장이 됐다.

이런 대구시민들의 시위에 박헌영 등 일부 좌익분자들이 교묘히 개입했다.  이들은 순수한시민의 정서를 반일. 반미 선동을 내용으로 교묘히 접근했다.

이에 감정이 폭발한 성난 군중들은 경찰에 대해 증오로 가득찼다.   트럭에 분승한 일부 시위대는 곤봉등을 들고 적기가나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 곳곳을 누볐다.

2일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대구경찰서 공안과장과 수사주임등 6명과 달성경찰서 경찰관 6명이 현장에 즉사했다.

또한 대구시 전매국장, 도경찰국장, 경찰관 수백명이 치명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대구시는 이 바람에  무법천지였다.

고위 공무원과 주요인사, 그리고 그 가족들은 대부분 좌익분자가 시위대를 가장해 거친 발길질로  짓밟았다. 

당시 친일인사들의 식량과 재산을 시위대가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경찰도 멈추지 않고 시위대에 적극 대응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총격과, 시위대의 아우성소리가 시내를 뒤덮혔다.

비극의 날, 2일은 이런 참혹한 사건을 만들고 저물었다. 당시 신문과 기록들은 사태를  이대로 둬선 대구가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는 가하면, 좌익계 신문들은 인민혁명이라는 상반된 보도들이 쏟아졌다.

◇…최초의 비상계엄령 과 대구병원들 치료거부= 이런 와중에 석연치 않은 일이 나왔다. 대구의 각 병원의 공동성명이다. 이들은 유혈이 낭자한 경찰과 시민들이 병원에 들이닥치자 치료를 거부하면서 내놓은 것이 ‘조건부 치료’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경찰이 발포를 즉각 중지하지 않는 한 치료와 진찰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때문에 환자들은 입원과 진료 불능상태에 빠졌다.

역시 수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에 동조하는 시위대가  드러내놓고 미군정과 일제를 비판했다. 그 무렵 여론은 경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비판적인 여론에다, 경찰에 대한 비협조, 그리고 시위군중을 동정하는 현상이 노골적이었다.

급기야 미군정을 이날 오후 대구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역시 해방 후 처음 선포된 대구지역 비상계엄령이었다.

  미군정은 시위 진압에 경찰력, 남조선국방경비대 등의 행정조직만이 아니라 민족청년단·서북청년회·백의사 등의 극우단체도 동원했다. 

이들 극우단체들은 시위 주동자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에게 재산 피해를 입히거나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미군정의 실정이 아닌 좌우의 이념갈등이 더욱 첨예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함께 오후 6시쯤 미군 후원부대가 출동한 것을 비롯 부산과 기타 인접지역의 경찰대 지원이 도착하고서야 가까스로 혼란을 다소 진정시켰다.

시위대의 사상자가 속출한가운데 한때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었던 경찰서가 탈환되고, 시위대는 해산당했다. 

이 소용돌이에 대구경찰서 유치장이 파괴되어 중범죄자 100여명이 도망쳤다. 시위대에 잠입한 좌익은 중요 통신시설까지 파괴, 중앙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아비규환의 지옥을 만들었다.

10월3일, 충청남도경찰국과 충청북도경찰국에서 700여명의 경찰대가 지원됐다. 미군들과 충남북 경찰관의 도움으로 진정되었다. 특히 미군정 한종건(韓鍾建)보안국장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증언이 그때 나왔다.

미군역시 ‘모건’중위들이 헬기로 현지로 급파되어 사태수습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대구는 미군과 각지 경찰의 응원대로 인해 경찰서를 되찾고 치안상태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사태가 끝난 것이 아니다.

대구 인근 달성에서 일어난 폭동 만해도 끔찍스러웠다.

좌익인사 일부가 개입된 시위대는 달성경찰서 습격해 경찰관을 구타하고 유치장에 가둔 것은 물론이다. 경찰관 집에 찾아가 별의별 몹쓸 짓을 다했다.

관공서는 이 들이 지른 불로 다 타버렸다. 잔악한 행패로 살을 깎는 아우성과 삽시간에 타오르는 불길, 시위대의 환호가 하늘을 덮었다.

달성사태로 달성군수등 요인들이 이들로부터 온갖 해코지로 숨지는 참변도 발생했다.

 중경상자도 부지기수였다. 대구 폭동을 계기로 영남일대는 무법천지를 넘어 피의 함정이 된 듯했다.

3일 오후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는 좌익이 선도하고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대구에서만 20명이 숨지고, 30명이 행방불명됐으며, 50여명이 평생 고칠수 없는 중상자가 나왔다고 했다.

◇…대구여파로 영남. 호남, 충청, 제주까지 곳곳 폭동=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시위운동은 그해 12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 4대를 앞세우고 대구 시내로 진입,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체포에 나섰다.

 미군의 무력 개입으로 대구의 시위는 3일에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에 항의하는 시위는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대구.달성 시위는 먼저 경남북지역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2일 밤에 칠곡·고령·군위·영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3일에는 성주·김천·선산·의성·예천·영일·경주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어 4일에는 영주·영덕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등  6일 무렵에는 경상북도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경남과 호남 충청도, 제주까지 민란으로 전개되어 파급되었다. 경남에서도 통영을 시작으로 진주·마산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역에서 미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충청 지역에서도 10월 초순에, 그리고 10월 하순까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일어났다. 이어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전라남도에서, 12월 중순에는 전북에서 일어나는 등 남한 전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좌익계는 미리 조직적으로 준비한  지령과 폭동으로 민중동원에 성공하자, 시종일관 경찰관서의 습격으로 확산시켰다.

요인 제거 살상과 방화, 주요 전신전화인 통신을 마비시킨 전략도 맞아 떨어졌다.

해방후 처음 대구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경주와 달성, 영일등지까지 확대된 것도 이때다.


이 시위이자 폭동화한 대구 사건은 미군부대의 지원아래 경찰을 통한 겨우 치안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사건직후 다각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이면에 숨은 주동자들을 캐낼 수 있었다.

폭동직후 미군정과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재빨리 탈출하여 38선에 넘어 월북하기위해, 서울로 집결했다.

이를 알아차린 수도경무총감 장택상(張澤相)은 10월 중순, 경찰을 동원,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장택상은 경찰관 3000명을 동원해, 성동구,용산구,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남도 사투리를 쓰는 자는 모두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서울지역을 검문 검색한 결과 대구대 의대생 한중건등 주동자 20명을 검거했다.

 대구시내 금정통 노평본부앞 광장에서 공회당앞길에 이르는 곳은 총격과 구타,체포, 구금등으로 아우성이었다.

당시 전국에서 대구 폭동 등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소요사건에서 폭동혐의를 받고 경찰에 검거된 자는 무려 3782명이었다.

이가운데 322명은 군정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미군정에서는 일반군정재판의 최고형이 5년이하여서, 이 피의자들을 모두 특별군법재판에 회부하자 난동을 피웠다.

특별군법재판에서는 사형까지 언도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또 계엄이 해제되도, 계엄사령관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박정희 형 박상희의 연루의혹=경북지역 사회주의자 박상희(朴相熙)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셋째 형이다. 그는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1905년 8월 태어났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태어난지  9년후에 경북구미군 선산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의 형제는 8남2녀다. 첫째는 두 살 때 사망했고 둘째는 박동희, 셋째는 박무희였다. 그리고 넷째는 누나 박귀희였으며, 다섯째가 박상희다.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 박한희(13세 때 사망)와 박정희, 여동생 박재희가 있다.

박상희는 황태성·임종업과함께 경북 좌익3인방이다. 박상희는 스므살 되던 1925년  구미보통학교 졸업한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대 후반 들어 동아일보와 중외일보(후일 ‘조선중앙일보’)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와 선산지국장을 맡았다. 경북지역 신문기자 80여명이 항일기사를 함께 싣기위해 구성된 ‘경북보도협조망’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5녀 1남중 큰 딸인 박영옥여사는 훗날 김종필 국무총리와 결혼하면서. 김종필전 총리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조카사위가 된다.

항일독립운동을 한 박상희는 신간회와 신문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옥고를 여러차례 겪으면서도 항일운동에 주력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10월 1일 사태에 박상희가 등장하면서 그의 사상성을 놓고 논란이 되어 왔다.

그는 이 사태가 났을 때 일부에서 말하는 주동자라는 일부 의견과 달리 경북지역 남로당원들은 폭동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주장(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이 나오고 있다.

이 실장은 “박상희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라며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지부 사무국장이던 박상희는 구미에 머물면서 대구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 그해 10월3일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자, 박상희는 시위대를 설득해 갇혀 있던 경찰들을 무사히 피신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박상희는 10월6일 우익 청년들이 경찰과 함께 선산경찰서를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그러나  박상희가 다시 중재를 나섰는데도 그만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대구 10월1일 사태를 놓고 당시 미국정은 대구·경북지역 박상희등 남로당원들이 ‘폭동의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이점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여사는 지난 2010년 7월15일 구미 박상희 묘역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부친에 대해 회고했다.“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 왔다.” 

한편 시위대와 경찰의 대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는 것이 이실장의 주장이다 . 하지만 자신들의 오류를 감추고 폭동의 배후를 남로당으로 지목한 미군정은 박상희등을 대구 10월1일 사태의 주동자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박상희의 시신은 대구에 살고 있던 여동생 박재희의 남편 한정봉이 수습해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대구 10.1사태후 미군정은 달라졌나= 여러 기록과 문헌을 보면 당시 경상북도에서만 77만명, 전체 인구의 25% 정도가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남한 전체에서는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앞서  미군정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를통해 사망 20명, 중상 50명, 행방불명 3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대구등 경북에서만 13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5,000여 명이 폭동 혐의로 검거됐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부등에서 이 사건 언급을 금기시했던 터라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의 사면 약속을 믿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을 당하는 일로 이어진다.대구10월사건 이후 미군정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토지개혁 정책을 서둘러 추진했다.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의 소유농지를 신한공사로 귀속시켰다.

이어 1947년 12월 농지개혁법안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상정했으나, 우익의원들이 출석거부로 법안이 심의되지 못했다.


농지개혁도  뒤로 미루고, 신한공사로 귀속시켰던 일본인 소유지의 매각에 착수했다.미군정은 대구 10월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에 나서면서 정치 영역에서 좌파 정치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7년 3월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도 철회하였고, 이는 반공을 앞세운 극우 단독정부 세력이 정치의 중심으로 확고히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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