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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신수용 한국정치사(8)> 북한 공산당 출현...현준혁 암살과 조만식 감금·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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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소련군 정청, 김일성 추대위해 북한내 지도자들 온갖 협박.매수,회유.
-소련군의 김일성추대움직임에 반기든 현준혁을 대낮에 평양시내서 암살.
-조만식선생 회유,협박에도 반탁을 고수하자 감금후 6.25후 사살.
-조만식선생, 월남권유받아도 '난 1100만 북한동포와 함께하겠다'며 거절

제21대 국회개원에 이어 오는 2022년 3월에 제 20대 대선, 그리고 그해 6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때문에 70여년이 넘는 한국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시점이다. 지난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정세와 올해로 72년을 맞은 한국정치사는 영욕의 현장들이었다. 정치적 사건. 여야 정치비사, 대통령의 이야기등 오욕이 있는가 하면 소중한 역사의 ‘한국 정치사’를 새로 읽고 새로 쓴다.<편집자 주>


소련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공산당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이어졌다. 일당(一堂) 독재와 일인(一人) 독재를 위해 무자비하고 처절한 살육과 암장(暗葬)을 예사로 자행했다.


독재자의 신격화를 위해 반대 세력과 음성적인 불평불만세력은 물론 동지끼리, 동고동락하던 동지까지도 가혹하게 처형했다.


◇…민족진영 조만식. 현준혁 앞세운 소련 군정청


오늘의 동지도 내일은 적으로, 오늘의 장관을 내일은 간첩죄로 씌워 숙청했다. 이는 어느 나라보다 해방 후 북한에서 노골화됐다.  


8.15 해방 후 북한에서는 고당 조만식(曺晩植)선생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 이는 저명한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망라된 인민의 대표기관인 셈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소련군사령부의 명령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됐다. 대신 임시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로마넨코 사령부의 지시로 공산주의자들을 대두시키려는 조직체였다.  당시는 해방 후라서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대부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만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은 일반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공산주의자들의 권력행사는 무력과 권력의 재앙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 처지였다. 소련군이 만든 임시정치위원회의 위원장에는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국내파 공산주의자이면서 민족진영과 연합전선을 구축해온 현준혁(玄俊赫 )이 임명되었다.


당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인 함북의 김채룡(金菜龍), 함남의 오기섭(吳琪燮) 정달헌(鄭達憲), 이주하(李舟河), 이봉수(李鳳洙), 평북의 (金台俊). 김재갑(金載甲), 백용구(白容龜)등이 초기에는 현준혁과 같은 노선을 지켜왔다.


다만 일제 때 소련에서 공작원으로 이북에 잡임하였다가 수감된  박정애(朴正愛) 김용범(金容範)부부와 만주에서 들어온  장시우(張時雨),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인 이주연(李周淵). 최경덕(崔璟德), 양영순(楊永順)등은 소련사령부에 매수당하여 김일성의 수상추대의 연극에 나섰다.


1945년 8월 말. 소련군 소좌계급을 단 김일성이 소련군대와 함께 북한에 들어오자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등장을 위해 지하공작에 여념이 없었다.


◇…소련지원 업고 등장한 소련군 소좌 김일성 등장


이때 현준혁 등이 조만식선생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확고한 국내세력을 철석같이 포진 시켜놓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파 공산주의자 현준혁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민족주의자 진영에서는 현준혁의 정치노선을 배격할 이론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현준혁이 공산주의자라는 점과 공산주의자는 술책이 능하기 때문에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적 질시가 있었다.


갈수록 소련군 정치 장교들 눈에는 현준혁이 소련군정에 필요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심증이 굳어갔다.


소련군정으로서는 김일성을 억지로라도 우두머리로 내세우려는 판인데, 현준혁이 먼저 평양에다 조직 기반을 완성해 놓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기반이 공고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현준혁이 있는 한 자신들의 계획수립에 골치 아파질 것으로 봤다.


현준혁이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정치의 기성질서를 확고히 만들어 놓는 날이면, 큰 문제이자, 계획이 수포로 돌라갈 것이고 믿었다


소련군은 즉각 현준혁주위에 굳게 뭉친  여러 파벌과 조직을 균열·와해시키려는 흉계가 시작되었다.


현준혁과 동지적 관계인 김용범, 장시우, 박정애, 최주연,장종식등을 떼어서 김일성에게 연결시키기 위해서다.


김일성이 평양에 돌아오자 소련군정은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적극적인 접촉을 하는 한편 치열한 매수공작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장시우, 김용범,주영하, 이주연등을 매수해 매일 같이 소련군정청에서 밀의를 거듭하면서 현준혁의 조직와해와 김일성 추대공작을 폈다.


현준혁은 이런 줄도 모르고 소련군정청을 드나들었다.


그는 김일성과도 만나 담화도 나눴다.


현준혁은 그러나 소련군이 김일성의 공산당의 수령으로 내세우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자 불만과 분노에 불타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김용범과 장시우는 대책을 세운다. 이들은 김일성과 김책(金策)등 소련파에 매수당해 현준혁을 배신한 인물들이다.


…소련 묵인 하에 김일성파가 제거 대상 현준혁 지정하여 살해


이들은 “현준혁을 그대로두면 공산당이 북한에서 실패할 것이다. 현준혁은 우리와 다르다. 공산당의 탈을 쓴 민족주의자다. 특히 조만식 비롯해 다른 민족주의자들을 절대지지하는 인물이다.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면서 연합전선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대중에게는 인기가 대단하다. 현준혁은 단순한 민족주의자라면 모르되, 공산주의자의 탈을 쓴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설복시킬 대상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행동하는 자이기에  설득해보왔자, 소용이 없다. 또한 유능한 이론가이기 때문에 그와 이론투쟁을 전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래서 그를 살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하수인으로서는  현준혁의 동지이면서 현준혁을 질시하며 시기하는 장시우를 꼽았다.


그는 평안남도 사법국장으로 수하에 무장적위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시우가 책임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는 소련 군정도 묵인했다. 이후 1945년 9월18일 백주에 현준혁은 평양 시청앞 노상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현준혁이 총에 맞고 즉사하자, 소련군사령부는 방역 취체의 명목으로  교외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보도를 못하게 통제했다.


며칠이 지난 뒤 조그마한 제목으로 저격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고 언론을 막았다.


소련군은 살해범에 대한 수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 최초의 암살사건, 저격사건이 일어났지만 유야무야된 것이다.


현준혁의 살해는 북한 내 숙청의 효시가 됐다.이로인해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민족진영에도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이처럼 김일성을 추대하기위한 소련군은 모든 방법과 수단을 교묘히 악용했다.



8.15 광복직후 북한 지역에서는  조만식 선생에 대해 상징적인 민족주의자로 등장했다.


그러니 국내 공산주의자들 까지도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조만식 선생을 경계하는 소련군정청과 김일성


조만식(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선생은 평남강서군 반석면 반일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부친 조경학, 모친 김경건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古堂)


열세 살에 결혼, 열다섯 살부터는 사업에 종사했다. 단신으로 술을 좋아했으나, 기독교에 귀의하여 한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다.  23세가 되어서야 평양숭실학교에 입학하였고 3년 뒤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유학의 동기는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아 조국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다. 조만식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공부를 할 때 조만식은 간디를 알게 되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간디의 사상을 자신의 독립 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그가 28살에 명치대학 법학부 입학하여 31살 때 졸업했다. 유학생일 때 한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했으며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채용, 2년 뒤에는 교장으로 재직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부터 조만식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손 꾭혔다.  이는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국산품 애용을 실천한 것이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3·1운동당시 교정직을 내려놓고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시위를 주도,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듬해 출옥하여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설립해 회장이 됐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수감 중인 남강 이승훈선생을 형무소로 찾아갔더니 다시 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해 수락했으나 총독부가 조만식 선생의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신간회와 YMCA 운동에도 참여하여 전국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나이 50이 되던  193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다가 1년 뒤 사임했다. 


일제 말기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고당의 글이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보에 실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글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평양숭실고 후배인 고명식은 두드러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매일신보 평양 지국장이었다.


서울 본사에서 평양 지국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학도병에 나가라는 글을 하나 조만식 선생에게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지국장으로서는 그런 부탁을 고당에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지국장을 계속 못살게 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런 글을 제 손으로 한 편 써서 조만식 이름으로 본사에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 뒤에 해방이 되었고 지국장은 부끄러워 자살하였다는 사실을 평양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때 그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 겨레의 지역감정이라는 악습이었다고 한다. 조만식 선생은 그래서 한평생


"고향을 묻지 마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감정 타파에 앞장섰다.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준(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을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그는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했다.



8.15와 더불어 일제의 평남지사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그해 10월에는 소련 군정 하에서 3.8도선이북 5도의 행정국장에 취임했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준과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준(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조만식 선생의 지도력과 지지기반은 탄탄했다. 


소련군은 이제 34살의 김성주를 김일성장군으로 위장하여 추대하는 것을 일반대중은 물론 북한 내 지도층이 환영할 리 만무했다.


당시 기록 등을 보면 김일성을 억지 지도자로 추대하기위해 갖가지 음모와 매수공작 등을  벌여 북한 천지를 혼란의 도가니에 휩쓸었다.



소련군정과 김일성파는 유식 유능한 국내파공산주의자인 현준혁의 암살사건을 목도한 후에 일반대중의 분노는 극심했다. 또 조만식 선생의 울분도 대단했다.


소련군정은 이런 민심을 잘 알기에 이를 수습과 소련군정의 위신을 높이려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조만식선생의 권위를 당분간 이용하는 게 이득이라고 정치적 계산을 하기에 이른다.


◇…소련군, 반탁선봉에선  조만식 선생 납치, 행방불명사건


이런 가운데 조만식선생은 소련군정이 양곡 수매사업을 강행으로 일반국민의 곤궁과 기아가 극도에 달하자, 비난하고 나섰다.


“일제 36년간 한국농민들이 참혹한 수탈을 당하며 초근목피로 근근이 연명해온 터에 이제 조국광복이 되었으니 제 손으로 지은 쌀을 가지고 마음대로 먹어야 할 것 아니냐. 소련군정이 매수라는 명목 하에 마음대로 수탈하여 간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조만식 선생이 반박하자, 소련군정은 아연실색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에 우려했다.


이를 계기로 소련군정은 조만식선생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무렵인 1945년 12월 26일에  미·영·소 3국의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이다. 그 내용은 앞서 소개됐던 조선반도의 5년간 신탁통치를 결의한 회의다.


이것이 발표되자 북한 공산당에서는 어찌된 일인 지 처음에는 반탁운동을 폈다가, 별안간 신탁으로 돌변했다.


조만식 선생은 그해 11월3일에 평양에서 창립된 북조선민주당의 당수로서, 5도 행정국 및 행정국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탁을 강력히 주장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신탁통치가 발표된 지 며칠 후,이듬해 1월1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인 로마넨코 소장은 조만식 선생을 초청해 역사에 남을 한마디를 던졌다.


“조선에 대한  후견제(後見制)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조선의 스탈린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미·영·소  3국외상회의의 결정을 반대하는 이상 우리는 당신의 생명을 보장하기 곤란합니다”


어이가 없는 발언이었다.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선생에 대한 소련의 엄포였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의 정치적 신념은 투철했다. 조만식 선생은 그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신탁은 할 수 없다”고 직답으로 거절했다.


이어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직도 사퇴했다.


그후 지난 1월4일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반탁입장에 따른 5도 행정국 위원회가 소집됐다.


참석자는 공산당 측에서 16명 전원이 참석했으나, 조만식 선생 측의 민족진영측은 6명에 불과했다.


회의 날짜와 참석인원 등이 소련군정에 의해 공산당에 유리하도로 용의주도하게 조작된 회의다.


회의결과,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후견제를 지지하기로 결의하는 동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조만식선생은 이같은 결정이 자신의 정치적신념과 맞지않는다면서 5도 행정국위원장자리를 사퇴할 뜻을 표했다.


그러나 조만식 선생이 반드시 이렇게 나올 것을 예측한 공산 당측 위원들은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맹렬히 공격했다.



찬탁결의는 민주주의의 다수결원칙에 따라  채택이 된 것이며, 위원장직 사퇴는 선생에 의해서 아무렇게나 사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Comintern.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자)규약 제30조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


코민테른이란 레닌의 지도하에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각국의 공산당에 그 지부를 두고 각국 혁명운동을 지도·지원했다.


조만식 선생은 공산당의 회유, 협박, 그어느 것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사퇴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조만식 , 월남하자는 제안도 거부...납치. 살해


여기서 고당 조만식 선생과 김일성의  철학과 인생관은 천지차이였다. 소련군정이 들어서면서 조만식선생의 정치생명은 풍전등화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많은 사람이 선생에게 월남하면서 함께 떠나자고 왜 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탈북을 거절했다.


조만식 선생은 그때마다 "이 사람아, 나라도 이 땅을 지키다 여기서 죽어야지 떠나서야 되겠는가.나는 1천1백만 북한동포와 함께 하겠네"라며 탈북 권유를 사양했다는 것이다.



조만식 선생은 이미 60이 넘은 노인 몸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월남할 것을 권했다.


1946년 1월 6일 아침회의 후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됐다.


이를 마치고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는 순간  문밖으로 나오다가 소련군 경비대원들에게 포위되었다. 


소련군 경비병은 상관의 지시라며, 조만식 선생의 친위대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 경비병에 의해 대기했던 차에 실려 갔다.


며칠 전  소련군정 로마넨코 소장의 경고가 그대로 실천된 것이다.


조만식 선생은 그 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가, 과거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건물 깊은 방에 방으로 옮겨졌다.



북한 공산당은 6.25 남침 실패후인 1950년 10월 경비대원과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사살되었다.천추의 씻지 못할 원한을 남긴 채 애국자요, 민족주의자인 고당 조만식 선생은 이렇게 타계했다.


 당시 기록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고당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이처럼 월남을 거부하며 이 땅을 지키겠다고  그대로 북에 남아 있다가 대동강변 모처에서 총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인도의 간디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듯이 한국의 간디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땅을 하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로 떠났다. 


오산에서 조만식 선생의 정신을 배운 민족시인 김소월이 조만식 (JMS)선생에게 제 잘못을 뉘우치는 시 한 수도 띄웠을 정도다.


"평양서 나신 인 격의 그 당신님, 제이 엠 에스/ 

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조 있던 나를 사랑하셨다/ 

오산(五山) 계시던 제이 엠 에스/ 

십년 봄 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 

근년 처음 꿈 없이 자고 일어나며, 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 

타듯 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박헌영의 제안이다.


국내에 남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온 몇 안 되는 우파 민족주의자인데다 대중들이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껄그럽게 여긴 이승만이 소극적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의 제의에 조만식을 삼팔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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