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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탐방】『김인전(金仁全)공원』을 찾다...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18편


이 세상은, 아니 이 지상에는 작은 나라이든 큰 나라이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몸을 던지고 재산을 던지고 난 뒤 몸과 마음의 일체를 이끌고 살아오신 것이다.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 제4대 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서천 출생.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 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인재를 육성할 계획하에 중국 각지의 군사강습소·병공국(兵工局)·학생단(學生團) 등에 파견하여 전문적인 훈련과 강습을 받게 하였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1만여 명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며, 100만 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역시 전쟁수행에 충당할 목표하에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여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그 뒤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 내용은『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요약되어 있는 김인전 선생의 일대기이다.

2019년 12월 12일 목요일.

<산애재>를 빠져나와 곧바로 금강으로 달린다. 그리고 <김인전 공원>에서 김인전 선생을 만난다. 출렁이는 금강물결을 굽어본다. 금강 하굿둑으로 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결은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출렁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를 기세다. 멀리 보이는 하굿둑의 웅장한 모습이 그림처럼 펼쳤으나 김인전 선생님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선생의 모습에 삶의 밝음과 어둠이 고스라이 묻어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흐린 물은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썰물 때에나 보여줄 따름이다. 물의 깊이에도 어둠과 밝음을 함께 함이 분명하다.

김인전(金仁銓, 1876.10.07.―1923.05.12.) 선생은 서천군 한산면 지촌리(芝村里)에서 한말 수원(水原)군수를 역임한 부친 김규배(金奎培)와 모친 김씨 사이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김해, 호는 경재(鏡齋, 經齋), 이명(異名)으로는 인옥(仁玉). 6세 때부터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유교 경전에 정통하고, 제자백가·불교·도교 등에도 학문적 조예가 깊었지만, 부친의 한말 개화사상을 신봉하여 기독교에 입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고, 마침내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황성기독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펼친 개화 지식인이었다.

이즈음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같은 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였다.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제하여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김인전 선생은 국권회복의 길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인식하고, 1906년 11월 가산을 출연하여 고향인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교육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현실화되자 3·1운동 민족대표로 활약하였던 이승훈(李昇薰) 선생과 길선주(吉善宙) 양전백(梁甸伯)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宋秉祚) 선생 등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인 평양신학교에 입학, 민족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방학 기간 등을 이용하여 전북 군산의 영명(永明)학교에서 임시 교원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또한 산중에 있는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강론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기간 중 군산에서는 3월 5일부터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고, 전주에서도 3월 13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 및 교사, 그리고 기독교신자들이 천도교 측과 합세하여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결국 전라도 지방 만세 시위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의 표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선생은 국내의 3·1운동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한편,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끄러미 강바닥을 바라본다. 골 깊이 패인 진흙뻘에 오후의 햇살이 하늘의 어둠을 뚫고 나와 한 줌의 빛으로 머물더니, 이윽고 떼 지어 몰려와 강바닥은 햇살로 질퍽해진다.

밀물에 가득해진 흐린 물은 바닥을 드러내는데 두려워 마냥 출렁이고 있지만 속 깊은 썰물은 보이는 것이 오히려 떳떳함이라 속까지 보여줌에 머뭇거림이 없다.

마치 나라의 안녕을 그리워하는 속마음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는 선생의 마음을 기리며 엿보듯 하다. 선생의 상(像) 밑으로는 서예가 국당 조성주의 글씨로 시인 나태주의 <김인전 선생 찬가>가 새겨져 있다.

꺼져가는 민족정기 일으켜 세우고자/ 고향 땅 화양에서 한영학교 여시고서/ 독립의 젊은 일꾼들 그 품 안에 기르시다// 전주라 서문교회 목사님 되신 후에/ 신흥학교 기전학교삼일운동 횃불 밝혀/ 비켜라 푸른 파도야 서해바다 건너시다// 상해의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겨레의 크신 스승 역사의 크신 자취/ 오늘에 어찌 잊으랴 가슴 깊이 새기겠네 –나태주의 <김인전 선생 찬가> 전문


강변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본다. 저만큼 금강하굿둑을 건너는 육중한 열차가 기염을 토하며 지나간다. 다시 몸을 돌려 김인전 선생의 모습이 세워진 공원에 든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금강 물결이 마치 흐느끼듯 들려오는 까닭은 선생께서 일생으로 몸을 바친 이 나라의 덧없는 흐름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의 해가 하염없는 발걸음으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는 탓일까.

그러나 선생은 말이 없다. 아니 말을 잃고 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이 있어도 하나같이 각자의 언어로 노래하기를 원하며, 각자의 피흐름으로 자취를 남긴다. 그것을 보고 어찌 모양과 빛깔이 다르다고 짓누를 수 있으랴. 지상의 길에 무수히 떨어져 제멋대로 구르는 돌 하나에도 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일찍이 헤르만 헤세는 돌 하나하나는 모두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이 세상은, 아니 이 지상에는 작은 나라이든 큰 나라이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몸을 던지고 재산을 던지고 난 뒤 몸과 마음의 일체를 이끌고 살아오신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민족자존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하여 조국 독립의 꿈과 의지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강화를 통한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2년 2월 열린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원 위원회 위원장으로, 그리고 내외무상임위원회·재무상임위원회·교육실업상임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여 활동하시게 된 것이다.


1923년 1월 상해, 독립운동의 깊은 관심 속에 국민대표회가 임시정부를 명실 상부한 독립운동의 통일적 최고 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여나가던 중 피로에 겹친 선생은 결국 5월 3일 쓰러졌고, 상해 동인(同仁)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가 5월 12일 4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장례식은 5월 14일 임시정부 주관으로 거행되었다. 선생의 유해는 상해 프랑스 조계 내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중국 정부에서 이장하여 상해 송경령 능원내에 안치되었고, 다시 1993년 8월 박은식·신규식·노백린·안태국 선생 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소)에 안장되었다. 198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새해 첫날이다. 쥐띠의 해이다. 그것도 60간지 중 37번째로 <庚.경>이 백색, <子.자> 쥐를 의미하는 ‘하얀 쥐’의 해란다.‘하얀 쥐’는 지혜롭고 쥐 중의 왕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첫날은 맑고 밝은 날이기를 바란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하늘을 본다. 흐림이다. 그러나 멈춤 없이 달린다.

지난 12.13(금). 금강하굿둑 옆에 조성된 [김인전 공원]의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1906년11월 가산을 털어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세웠던 곳을 찾아 선생의 고귀한 뜻을 새겨보기로 한다.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지새울을 향하여 멈춤 없이 달린다. 서천읍내를 거쳐 화양면 옥포리로 달리는 길은 완전 들녘이다. 어느 한 곳 막힘이 없이 그야말로 너른 들녘, 지평선으로 이어진 끝은 아스라하다.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인다. 이왕 시원한 가슴이거니와 바람 한 줄기라도 가슴으로 맞고 싶다.

그러나 바람도 없고 하늘도 여전히 흐림이다.


화양면 옥포리를 거쳐 서해고속도로 다리 밑으로 빠져나가 보아도 여전 들녘은 끝나지 않는다. 달리고 달리면서 가슴을 열어 놓는다. 문득 멈춘다. 도로가에 서 있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 입구에 든다. 와초리 노인회관 앞에서 멈춘다.

김인전 선생의 한영학교를 묻자 한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서 안내해준다. 2004년 3월, 김인전 추모비를 세울 때 남편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일금 100만 원이나 기부하여 잠시 남편과 말다툼까지 하였노라는 말도 곁들여 준다.

이리구불 저리구불 몹시 구부러진 마을길을 따른다. 길가의 밭머리에 세워진 전봇대 위로 <한영학교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반가움에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곧바로, 아 ―, 가벼운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도저히 학교 터라고 믿어지지 않은 버려진, 말 그대로 ‘빈터’이다.


굳이 뭐라고 덧붙일 말을 잃고 만다. 한동안 한숨으로 둘러보다가 대숲 사이로 간신히 꼬리를 드러낸 언덕길에 오른다.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를 만난다. 그리고 방금 가로질러온 너른 들녘을 바라본다. 지난 가을로부터 벗어나 텅 비어버린 한겨울의 빈 들이다.

바로 들녘을 가로지르면 금강 언덕이다. 분명 물결이 출렁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금강 둑길에 오르고 싶지 않다. <한영학교터>에 붙박이 하듯 몸을 매어놓고, 빈들을 바라본다. 금강 둑 위로 철새들이 떼를 지어 먼 길에 지친 몸을 부지런한 날갯짓으로 달래고 있다.

-이 글은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하였음을 밝힌다.


빈들을 바라보며
-김인전 선생의 옛 <한영학교터>에서
                                            구재기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면
보이는 것은 모두 
고정되지 아니하는 것
나누어짐도 없는 끝임에도
어찌 이리 마음을 거두지 못하는 걸까
두 눈을 떼지 못하고 
어느 들녘이나 바라지하고 있는 걸까
이제는 영원하다고 
잘못하는 생각들은 버려야 한다
지나온 발자취를 따르며 
빛으로 살아온 길 위에
푸른 풀포기 몇몇
뿌리 내리는 있음을 본다 
눈앞에는 그저 빈들만이 가득하고
빈들에서는 끊임없이 살아 오르는 
소리 없는 소리들
본래부터 마음 하나는
하나 아닌, 더불어,
더불어 살고 싶은 외침뿐일 뿐
향과 진흙을 섞어 들녘에 뿌리고 
좋은 자리를 사루어
결 고운 뿌리를 내린다면
언제 어디서나 
바른 길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빈들을 따라 
하늘을 우러르고
빈들로 하여금 마땅히 구할 것을 
좋은 기미로 
기다려볼 수 있다는 것
언제 어디든지 
철새 몇 마리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는
푸짐한 날개를 만나보기로 한다
*바라지하다: 여러모로 돌보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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