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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풍정리 산성(豊亭里 山城)의 천제단(天祭壇)...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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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풍정리 산성(豊亭里 山城)의 천제단(天祭壇) -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 산성

이제 머지않아 이곳에서는 백제시대 옛 선인들의 호흡과 소망이 살아올라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려 한 민족의 뿌리가 되살아 오르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만이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자리한 향토, 공통된 종족과 언어와 역사적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속에서 민족 전체가 그리워하는 마음의 길을 함께 하면서 우리 민족만이 뻗어내려 온 거대한 혼령, 그 혼령이야말로 실재하듯 믿음을 같이 하여온 민족의 영원한 뿌리라 하겠다.


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오후, 날씨는 제법이다시피 쌀쌀하다.

판교면의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빠져나와 문산면 금복리를 거치면서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에 든다. 바로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 천제단(天祭壇)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판교 사거리에서 판문로를 따라 달린다. 고개 하나 넘고, 성황골에서 시작되는 도마천을 따른다.

그러나 힘없이 걸음을 멈추고 만다. 지난 9월 7일 주말, 제13호 태풍 링링의 힘에 어이없이 부러져버린 노거수(=느티나무)의 흔적조차 이미 사라지고 없다. ‘수령 450년, 나무 둘레 5.20m, 수고 18m’나 되는, 한때는 서천군 보호수(고유번호 8-9-172)였음을 말해주는 표석만이 남아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노거수가 태풍목(颱風目)에 잡히기라도 한 것일까? 태풍목이라면 태풍의 중심부에서 반경 10여 킬로미터 이내의 지역에 해당한다. 그 안에서 450년 한 세월이 여지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神)의 조화(造化)에 따른 천체의 움직임은 이토록 허무한 결과를 보여주곤 한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천체의 조화는 인간이 예의 주시할 대상이 되고 있다.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천체의 변화에 예의 주시하여 왔다. 단군신화만에서도 그렇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조화로움은 경외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늘은 언제나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으며, 그 위력으로 우리 민족은 평화와 안녕을 가져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한 고대적 사고 발상에서 단군신화가 탄생한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시조신인 단군의 출생과 건국에 대한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桓因)은 아들 환웅(桓雄)이 항상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있어 천부인(天符印) 3개(고대사회 초기에 주술의 도구이자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던 청동단검·청동거울·옥과 같은 상징물이라고 짐작된다)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풍백(風伯: 환웅 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거느리고 온 세 신 중 바람을 관장하는 신), 운사(雲師: 구름을 관장하는 신), 우사(雨師: 구름을 관장하는 신)와 함께 하늘로부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고 하니, 고대인에게 있어서 하늘은 얼마나 숭앙의 대상으로 존재하였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문산 저수지를 돌아 문산면에 이르러 큰내(도마천을 큰내라 부르기도 한다)둑 옆 도로가에 잠시 차를 멈춘다. 들판을 건너 천제단의 모습이 우러러 보인다.

올라가는 길이 환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천제단이라기보다는 옛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을 다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지금 보이는 것처럼 각종 나무가 우거져 있는 숲이 아니었다. 아주 매끄럽게 잔디밭으로 가꾸어진 높은 언덕이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모처럼 노오란 계란으로 덮인 이밥과 멸치볶음으로 최고의 도시락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신나게 뒹굴며 오르내리던 바로 저 잔디밭, 바로 그곳이 고대인들이 하늘을 극진히 모셨던 천제단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좀 긴 인용이기는 하지만 고대인들의 경천사상(敬天思想)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인간은 무한한 신비에 싸인 제 물체나 변화에 대하여 한없는 신비감을 느끼고 이에 위압되어 그것을 공경하지 않은 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이 지녔던 경천사상의 일단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니 부여(扶餘)의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한(韓)의 천신제(天神祭), 고구려의 동맹(東盟), 백제의 천제(祭天) 등에서 고대인들의 경천의식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천사상은 우리 민족에게 미쳐 이렇다 할 사상의 형성이 없었던 고유사상 지배하여 빚은 사상으로서 이후 불교사상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우리 민족생활을 지배하여 온 하나의 민족사상이었다.

여기에서 고대인들은 천공(天空)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집중케 되었으니 이미 백제에서만 보더라도 외관십부(外官十部: 司軍部. 司徒部, 司空部, 司冦部, 黜口部, 客部, 外舍部, 綢部, 日官部, 市部) 중에 일관부(日官部)를 두었었고, 신라에서는 효소왕 원년(A.D.692)에 천문국(天文國)을 입수하였으니, 경덕왕(A.D.749) 천문박사를 두기도 하여 동양에서는 최초로 첨성대를 축조하여 천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음을 보여준다.
- 박성홍,『한국민속연구』(1981.2.20. 형성설출판사) P.P.129-130)


마침내 천제단 아래 도로에 이른다. 그러나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지 일 길이 없다. 그 마을회관에 들린다. 그리고 모여 있는 할머니들로부터 오르는 길을 묻고 또 듣는다.

할머니 한 분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저기’란다. ‘저기 저 아랫집 뒤로 가면 올라가는 길이 있다’고 손짓해준다. 그러나 천제단 밑으로 와서는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을 찾지도 못한다.

다만 위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천제단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길의 흔적이라 판단되는 곳이면 밟고 오른다. 그러나 그곳은 길이 아니다. 겨울을 맞은 나무들이 무한으로 떨쳐버린 낙엽을 밟는다.

푹신하니 밟는 발밑의 감촉은 좋았으나 한 발 한 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힘이 든다. 뿐만 아니라 낙엽의 길은 조금이라도 몸이 흩어지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우거진 가시덩굴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는 순간 그만 청미래덩굴에 손등을 긁히고 만다.

간신히 오르고 나니 아, 이미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운동 삼아 천제단 길을 걷던 한 부부가 며칠 전 천제단에 오르내리는 길을 닦아놓았다고 한다. 길은 모두 갈포로 미끄럽지 않게 덮어 놓았다. 공사를 위한 자재(資材)들이 한곳에 쌓여있는 것을 보니 천제단의 둘레길을 닦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천제단을 향하여 오르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기는 것은 백제시대 목곽시설(百濟時代 木槨施設)이라는 안내판이다. ‘목곽시설은 서천 봉선리 유적 제1차 발굴조사지역(2016년)의 계곡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긴 나무판을 이용해 만든 사각형으로, 규모는 길이 500cm, 너비 470cm. 깊이 340cm 정도이다. 특히 서해안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목곽시설은 삼족기(三足器), 고배(高杯), 기대(器臺), 사슴 뼈, 멧돼지 뼈, 복숭아 씨앗, 박 씨앗, 목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의 자연환경 및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목곽시설이란 지하 구조물로 땅을 파고 방형 또는 장방형의 목곽을 조성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목관시설은 천안 위례성내의 용샘, 공주 공산성, 홍성 신금성, 대전 월평동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중요 시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모두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는 하나같이 누렇게 사그러진 풀밭일 뿐이다. 다만 여기저기 붕긋하게 돋아난 곳에 꽂혀있는 안내 깃발이 보인다.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서 탐방로 구역 2차 발굴조사 <백제시대 수혈유구(竪穴遺構)>라는 표식도 보인다. ‘수혈유구는 1~4차 발굴조사지역(2016~19년)에서 총 80여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유구가 가장 많이 확인된 지역은 2차 발굴조사지역인 북서쪽 능선의 정상부 일대로, 약 50기가 밀집해 있다. 평면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며, 단면형태는 사다리꼴형, 원통형, 플라스크형 등으로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수혈유규가 집중된 곳은 저장 구역으로 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봉며 일부 수혈유구에서는 제의적 기능이 관찰되기도 한다. 수혈유구 내부에서는 장란형(長卵形) 토기와 발형(鉢形)토기, 배(杯), 고배, 삼족기, 기대(器臺)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지표면을 굴착한 형태의 유구를 총칭한 수혈유구는 저장, 군사적, 주거, 제의적(祭儀的) 기능 등으로 검토되고 있단다. 이제는 한창 산책로를 만들고 안내글도 새로이 정리하고 있는 중이니 머지않아 잘 정리된 천제단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백제시대 제단(祭壇)의 안내를 만난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이 제단은 높이 약 93.8cm 언덕의 정상부를 둥근 형태의 3단으로 만들었다.

제단은 자연 경사면을 깎거 흙을 켜켜이 쌓아 만든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시대의 축조기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정상부 1단에는 백제시대 기둥 자리가 다수 밀집돼 있고, 2단에서는 초석건물지 2기, 점토유구 4기가 있으며, 3단에는 초석건물지 1기과 점토유구 2기 등이 있다’고 적혀있다.

초석건물이 기둥받침인 초석(楚石·주춧돌)이 있는 지상 건축물이며, 점토유구란 벽체와 바닥점토로 채우고 내부공간을 별도로 조성한 유구 통칭한 말이다.

그러나 막상 천제단에 오르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국토 평면 위치를 측량하기 위해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 관리하는 국가 주요시설물인 ‘삼각점’이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이곳에서는 백제시대 옛 선인들의 호흡과 소망이 살아올라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려 한 민족의 뿌리가 되살아 오르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만이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자리한 향토, 공통된 종족과 언어와 역사적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속에서 민족 전체가 그리워하는 마음의 길을 함께 하면서 우리 민족만이 뻗어내려 온 거대한 혼령, 그 혼령이야말로 실재하듯 믿음을 같이 하여온 민족의 영원한 뿌리라 하겠다.

천제단의 자리에 곧게 서서 에워싸고 있는 동서남북을 바라본다. 어느 한 곳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려있다. 과연 지상의 모든 뜻을 모아 하늘을 향하여 소중히 두 손을 모을 자리이다.

일찍이 하늘을 우러러 하늘의 움직임 앞에 부끄러움을 없고, 굽어보아 너른 들녘의 풍요를 만끽하고자 한 소망을 기구하게 하였던 천제단, 이러한 의식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면면히 잠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와서는 그 높은 숨소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한다.


영원한 뿌리
                구재기

지상의 몸을
아무리 높여보아도
하늘 한 자락 잡을 수 있을까
아무리 낮추어 보아도
땅 속 심장에 이를 수 있을까

천제단에 오르자
바람만이 살아 오른다
몸으로 표현하는 바람
모습만을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면
하늘의 뜬 구름도 
비로소 자리할 수 있을 터인데
둘레의 서 있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빈 몸으로 흔들리며 서 있다

구름 같은 마음에서 
허영을 덜어내면
한결 마음을 낮추어 살 수 있을까
한 생각을 돌리고 보면
거기, 삶은 언제나 죽음과의 경계 
운명이라 한들 어찌 달래볼 수 있을까

하심(河心)처럼 
사랑 하나 내려놓고 싶다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겁 없이 길러 온 영원한 뿌리 하나
아무렴, 씨앗을 뿌린다고 
다 싹이 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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