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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장항 제련소 굴뚝을 바라보며...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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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장항 제련소 굴뚝을 바라보며 - 충남 서천군 장항읍 화송길

어느 민족에게나 때때로 비 오는 날도 있고 어둡고 음산한 날은 있다. 어두운 역사 속의 나날들은 항상 비가 오고 어둡고 음산하게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긴 시간 속의 잠시일 뿐이다. 비바람이 불고 비 온 뒤에 따라오는 것은 무지개라는 희망이 있다. 음산한 역사 위의 무지개는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노신(魯迅)은 <생각컨데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도 또한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은 것이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9년 7월 5일 오후의 시각은 이미 16시를 넘고 있었다.

장항 해송림숲에 들기 위하여 내딛은 발걸음은 장항제련소 굴뚝을 바라보며 이어졌다. 동행인으로부터 장항신어선물량장의 풍광이 아름답다는 말을 귀담아 듣고 방향을 돌리고 만 것이다. 결국 장항 해송림숲의 방문은 뒤로 미루게 되었다.

장항신어선물량장으로 가는 길은 장항도선장에서 바다쪽으로 건설된 쭉 뻗은 4차선 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장암진성(長巖鎭城) 굴다리를 통과하자마자 마음은 또 변하였다. 해발 210m의 전망산 정상에 우뚝 솟아오른 장항제련소 굴뚝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그 굴뚝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전망산(前望山), 신기할 정도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런 산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산이란다. 길가에 차를 세울까 했으나 역시 동행인이 장항신어선물량장 안으로 들면 굴뚝은 눈앞으로 훨씬 가까이로 다가온다 하여 곧바로 차를 몰았다.

결국 산업도로 끝에 거대한 장항신어선물량장이 나타나고, 그 끝에서 안으로 드니 장항제련소의 웅장한 굴뚝이 두 눈 안으로 가득 차올랐다. 순간, 아, 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이토록 크고 높은 굴뚝은 전혀 본 기억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4학년 사회교과서에서 바라보았던 그 굴뚝이 기억 속에서 그대로 살아올라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우리나라 산업의 상징이었던 바로 그 장항제련소, 그 굴뚝이!


사실 초등학교 시절 천방산(千房山)으로 소풍을 가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너른 들녘과 푸르른 서해바다, 그리고 이 장항제련소 굴뚝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너른 것은 서해바다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은 장항제련소 굴뚝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항제련소와 그 굴뚝의 모습이 사진과 함께 교과서에 나와 있었으니 얼마나 내 고장 서천이 자랑스러웠던가. 반짝이는 햇살을 품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서해바다가 가슴을 넓혀주었다면, 장항제련소의 굴뚝은 어린 꿈을 하늘까지 높여주었던 상징물이 되곤 하였다. 확실히 장항제련소는 장항뿐만이 아니라 서천을 상징하는 명물 중의 명물이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움을 일시에 무너뜨린 것은 일제 식민정책의 소산이었음을 알고부터였다. 장항제련소는 1936년에 조선총독 우카키(宇坦一成)가 참석할 정도로 조선총독부의 관심 속에 국내의 금·은·동 등 비철금속 수탈을 목적으로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창설되어 원산, 흥남 제련소와 함께 일본인들의 동제련 주생산시설로 사용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연간 제련량이 1,500t 정도였다. 당시에는 국내 유일의 비철금속제련소였다.

해방 후 산업화에 따라 계속 확장돼 1974년 1만 5000t, 1976년에는 5만t 규모로 증설되어 우리나라 비철금속 제련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으며 산업화의 한 축을 이루었다. 1983년에는 귀금속공장을 온산제련소로 이전하였으며, 1984년에 주석제련공장을 준공함으로써 동·연·주석의 전문제련소가 되었다.


이후 1989년 6월 용광로공정을 폐쇄하고 반제품을 처리하여 전기동(電氣銅)을 생산하는 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89년 6월에는 럭키그룹에 인수되어 럭키금속 장항공장이 되었다. 또 1990년 5월 연제련공정을 완전히 폐쇄하여 가공산업공정으로 전환하였다.

1995년 엘지(LG)금속 장항공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999년에 엘지(LG)산전 장항공장으로, 2005년에는 엘에스(LS)산전 장항공장으로 변경되었다가 2010년에 엘에스(LS)메탈 장항공장으로 최종 변경되었다. 제련생산공정은 1989년 폐쇄되었지만 1936년부터 50여 년간 동제련 건식제련소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환경관련법규가 제정되지 않은 1980년 이전 제련과정에서 배출된 분진 및 중금속 오염물질이 현재까지 토양을 비롯한 주변지역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해진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해발 210m로 한때 항해와 항공의 목표물로 쓰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굴뚝은 6·25 전쟁 때는 주요기간 사업체로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 인천상륙작전시에는 유엔군이 상륙장소를 숨기기 위해 군산 쪽에서 위장함포를 쏘아대는 양동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또 9·28수복 후에는 군산 비행장에 주둔한 미군들로부터 활주로가 짧아 비행기가 이륙할 때 걸릴 우려가 있다하여 한때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일제가 건립한 굴뚝을 헐어 버리고 다시 재건축을 하여 지금도 그 옆에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장항제련소 굴뚝이 위치한 지역인 산 정상에는 제련소 용광로의 온도를 높이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제강점기에서 세웠던 90미터 굴뚝의 잔해가 10여 미터가 남아 있으며, 약 10여 미터 떨어져 1979년에 세운 높이 110미터짜리 굴뚝이 남아있단다. 물론 그 앞에는 기념비가 녹이 슨 채로 우뚝 서 있다고도 한다.

장항제련소로 인하여 장항지역의 붉은 벽돌집이 많다.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광석의 찌꺼기(슬래그)로 벽돌을 만들어 판매하였기 때문에 서천 지역에는 붉은 벽돌집과 담 등이 많게 된 것이다.

장항제련소 굴뚝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고, 그 뒤에는 이렇게 슬픈 역사가 숨어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왠지 모르게 슬픔에 젖어들었다. 구약성서 잠언 13:12에 의하면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고 했다.

그러나 장항제련소 굴뚝에 따른 꿈이 사라져 버릴 만큼 세월은 이미 많이 스쳐지나가 버렸다. 지금 비록 마음에 병이 들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그토록 자랑스럽던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일제의 수탈목적으로 탄생되었다니, 역사가 주는 쓰라린 마음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쓰라린 마음이 곧 마음의 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든 아침 햇살을 높이 받들어 우러르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지상의 동쪽에서부터 조금씩 희어지기 시작하면 닭장에서는 닭이 먼저 울어댄다. 지난밤의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희미해지는 어둠 뒤 훨씬 먼 곳으로부터 닭 우는소리는 들려온다.


희망은 잠자지 않는 인간의 꿈이라 하지 않았던가. 비록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맞았다고는 하지만 그 위에 희망으로 덧씌워야 하는 것은 지금의 역사를 빈곤하게 하지 않는 아침의 지혜로운 꿈이다. 꿈을 향한 절대적 노력이 필요하다. 문득 19세기 미국의 대중적 시인 H.W.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의 <궂은 날>이라는 시를 떠올린다

날이 어둡고 음산한데/ 인생은 춥고 어둡고 음산한데/ 비는 오고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내 마음 쓰러져 가는 과거 위에/ 아직도 매달려 있건만/ 바람 피칠 때마다 청춘의 희망이 뭉텅이로 진다/ 날은 어둡고 음산한데/ 잠잠하라/ 슬픈 마음이여! 불평을 말라/  구름 뒤엔 아직도 태양이 빛나고 있거늘/ 네 운명은 모든 사람이리라―/ 사람마다 일평생은/때때로 비 오는 날도 있을 것이려니/ 어둡고 음산한 날도 있을 것이려니

어느 민족에게나 때때로 비 오는 날도 있고 어둡고 음산한 날은 있다. 어두운 역사 속의 나날들은 항상 비가 오고 어둡고 음산하게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긴 시간 속의 잠시일 뿐이다. 비바람이 불고 비 온 뒤에 따라오는 것은 무지개라는 희망이 있다.

음산한 역사 위의 무지개는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다. 중국의 노신(魯迅.1881~1936)은 <생각컨데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도 또한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은 것이다. 지상에는 원래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긴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희망이 그저 막연한 바람으로만 끝난다면 무의미한 환상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지금의 자리에 건장한 지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장항제련소의 굴뚝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새로운 길을 다시 찾아 나섰다.

※위 글의 일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천사람들> 등 SNS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장항제련소 굴뚝을 바라보며
                                        구재기

저리도 높은 곳이라면
세상 모두 다 보일 수 있겠다
저 위에서 손 뻗어 올리면
별 하나쯤은 따 내릴 수 있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크게 외쳐대던 시절을
진포의 갈대가 온몸을 흔든다 해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누군가는 저 굴뚝을 바라보며 
높은 하늘을 희망으로 그리다가
누군가는 끊임없이 뿜어 나오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며
한때의 아픔을 다시 잊으려 하지만

희망과 절망은 
언제나 같이 하는 것
푸른 꿈은 찬란한 빛으로
구름 같은 눈물을 가득 품어
슬픔을 잇대어 달래보려 하다가 

바다가 아무리 넓다 한들
너끈하게 건널 수 있는 지금
장항제련소의 굴뚝 높이에 뜬
하늘의 별들을 추억처럼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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