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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기획탐방】아, 사우[四五]고개!...시인 구재기와 함께하는 '舒川 山河(서천산하)'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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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아, 사우[四五]고개! - 충남 서천군 서천읍 태월리-화금리, 지방도 611호선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고개는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비록 오늘날 ‘사오고개’, 그 험하고 구불구불했던 고개는 말끔히 포장되어 지워져 버리고 겨우겨우 넘나들던 자리에는 칡넝쿨로 뒤덮여 보이지도 않지만 그 속에 ‘보릿고개’와 같은 사연들이 깊이 잠들어버릴까 봐 지극히 염려스럽다.

과거의 아픈 삶이 역사의 거대한 회오리 같은 고개 위에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많아서 넘치거나 편리해서 즐거움만 찾게 된다면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혹이 생기게 마련이다. 


오늘도 ‘사우고개’를 넘는다.

산애재(蒜艾齋)에서 서천읍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사우고개, 아니 넘을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넘게 되는 ‘사우고개’다.

사우고개는 지방도 611호선 서문로에 위치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천읍 태월리와 화금리 사이를 가로막는 고갯길이다.

이 고개에서 계속 올라가면 금북기맥(錦北岐脈)의 한 줄기인 태봉산(해발 90.0m)에 이르게 되고, 이에 사우고개의 높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거니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높은 고개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사우고개는 넘나들기 어려운 고래로 알려져 홀로 넘기가 자못 두려운 고개였음에는 틀림없다. 1940년대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휘발유가 모자라자 일반 휘발유 공급을 중단시킨다.

그렇게 한반도에 있던 7,300여 대의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목탄차가 사용된다. 그 목탄차가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차에서 내려 뒤에서 밀고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전설 또한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옛날부터 이 고개는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어느 해 인가는 도적들이 들끓어 오가는 사람을 괴롭힌 일이 있는가 하면 어느 해 인가는 맹수들이 출몰하여 지나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지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없었다. 다만 예부터 이 고개가 험하고 그런 이야기가 뜬소문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오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긴장을 주었을 뿐이다.

이처럼 험한 고개임에도 태월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다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고개를 넘지 않으면 장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고개기 험하기로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급히 장을 보고 돌아오겠다고 집을 나간 어떤 남편이 해가 다 지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의 아내는 언제까지나 기다렸다.

그런데 또다시 그런 일이 생겼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홀로 고개를 넘나들지 않고 몇 사람씩 짝을 이루어 고개를 넘나들었다. 그러는 동안 더욱 놀라운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건장한 세 사람이 고개를 넘다가 호랑이를 만나 싸웠으나 끝내 두 사람은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한 사람만이 간신히 살아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호랑이가 어찌나 큰지 호랑이 눈 하나만 하더라도 사발만 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로부터 고개를 넘을 사람들은 손에 낫 같은 무기를 들고 다녔으며, 그것도 사오 명이 함께 넘나들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나들었을 때면 꼭 사오 명씩 짝을 지어 다녔다는데,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사오四五고개’라 부르던 것이 오늘날에는 ‘사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한상수,『충남의 전설』,어문각, 1986.8.5]에서 발췌하였음)

옛날에 이 고개를 홀로 넘어오다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를 빼앗길 뻔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한 걸 보면 옛날에는 제법 험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한때는 이리구불 저리구불 급경사를 이루어 간신히 숨 가쁘게 고개를 오르내리는 신작로가 이제는 오르던 버스조차도 훌쩍 뛰어넘는 아스팔트 2차선 포장도로가 되어 있다.

그토록 부릉거리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던 버스가 돌고 돌아 힘겹게 올라갔던 신작로에는 이제 마을과 마을을 있는 좁은 신작로에서 벗어나 어엿한 지방도 611호선 서문로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고개의 정상부에는 버스의 승강장이 마련되어 있고 민가民家까지 자못 호기스럽게 들어선 것을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무릇 고개라 함은 고개는 산등성이의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있는 낮은 부분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길을 말하거니와 재, 또는 영(嶺)이라고 한다.

특히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산으로 막힌 이웃 지역을 오가는 데 고개를 어떻게 넘어가야 하느냐가 삶의 해결책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였다.

지난날에 겨우겨우 힘들여 넘나들었던 옛 고갯길이 이제는 갖가지 교통 기관이 발달하면서 교통로보다는 오히려 등산길이나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형인 우리나라에는 이 같은 고개는 많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고개는 금패령(禁牌嶺, 1,676m)으로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과 풍산군 안수면을 잇는 고개인데, 이 고개는 관북지방의 중부 해안부와 북부 내륙의 개마고원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죽령(竹嶺, 689m)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을 잇는 고개로 옛날 어느 도승(道僧)께서 이 고개를 넘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짚고 가던 대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아놓고 잠시 쉬었는데 그것이 살아남아 대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죽령(竹嶺)’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령치(鄭嶺峙, 1,172m)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있는 지리산국립공원 구역 안의 지방도 737번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이 남긴 황령암기(黃嶺庵記)에 따르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고 정령치(鄭嶺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와 중국을 잇는 캐라코람(해발 5,574m) 고개로 알려져 있다. 

고개는 산을 넘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말하고 있지만, 의미하는데 인간의 세계에서는 험한 고비를 헤쳐 갈 때에도 ‘고개를 넘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반드시 넘어야 하고, 넘지 않을 수 없는 눈물의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이다. 

보통 음력으로 3, 4월경에 쌀이 떨어지는 시기에 보릿고개를 만나게 된다. 보리가 벼를 수확한 후인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파종을 한 다음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나서야, 다음 해 5월 하순에서 6월 중순 무렵에 비로소 수확된다. 그러하거니와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3, 4월에는 양식은 떨어진다.

하곡(夏穀·보리)은 아직 여물기 전이어서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다가 굶어죽는 이들이 허다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리가 익을 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굶주림에 허덕였으니 그 고개가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보릿고개’였던 것이다.

그 고개는 지구상에서 제일 높고 험하다는 캐라코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금패령도 아닌 ‘맥령(麥嶺, 보릿고개)’이 바로 그 고개였으니, 이를 시인 황금찬은 다음과 같이 읊는다.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황금찬의 <보릿고개> 전문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고개는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수많은 사연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비록 오늘날 ‘사오고개’, 그 험하고 구불구불했던 고개는 말끔히 포장되어 지워져 버리고 겨우겨우 넘나들던 자리에는 칡넝쿨로 뒤덮여 보이지도 않지만 그 속에 ‘보릿고개’와 같은 사연들이 깊이 잠들어버릴까 봐 지극히 염려스럽다.

과거의 아픈 삶이 역사의 거대한 회오리 같은 고개 위에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많아서 넘치거나 편리해서 즐거움만 찾게 된다면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보이지 않는 혹이 생기게 마련이다. 비록 “먹을 만큼 살게 되면 가난을 잊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만한 게 못되나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서)”고 하였지만, 오늘날의 풍요가 지난날의 가난을 잊게 한다고 해서 그 가난함의 뿌리까지 잊어서는 아니 된다.

풍요로울 때에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인지 어떤지를 모르듯이 험한 고개를 애써 넘나들면서 살던 시대를 잊는다면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보릿고개’를 복병(伏兵)처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우[四五]고개를 넘으며 
                             구재기

아무리 험준한 고개라도
사오四五 명이 하나가 되어 
넘나드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하면
그리 사나운 고개라 할지라도
홀로 가벼이 넘을 수 있다

시름해 오던 고개
맑은 거울에 비추어 보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씩 분명해진다

무엇보다도  
이 고개를 넘으려면
분별하는 마음 하나로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 밥을 주는 것

맥이 풀려 
몹시 녹신해진 몸뚱아리
사오고개를 홀로 넘으면서
누구나 모두 다 아파오던
단 한 가지라도 놓아 버리면 
사는 일이란 그저 그렇게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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