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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의 뉴스창】이희호 여사, 그는 누구 인가.

[sbn뉴스=서울] 신수용 대기자=10일 23시 37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소천한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민주화  동지이자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

고인의 본가는 충남 서산이지만 일제강점기인 1922년 9월 21일 서울 수송동 외가에서 6남2녀 중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이 여사의 조부모는 오랜만에 얻은 손녀딸을 각별히 예뻐해 돌림자를 넣어 ‘희호’라는 이름을 지었다. 

의사였던 아버지 덕에 이 여사에겐 배고프고 궁핍했던 기억이 없다.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그에게 늘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여사가 말하곤 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도 “그 시절 굶지 않고 아들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라고 적었다. 

감리교 미션스쿨인 이화고녀(여고)를 거쳐 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지금의 이화여대) 문과에 입학했다. 일제 횡포가 극에 달했던 당시,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이 내려지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 46년 9월 국립 종합대학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2학년 때 전과해 교육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전 문과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는 등 당시 여성으로선 보기 힘든 재원이었다.

 고인은 또 YWCA(대한여자청년단) 총무 등 1세대 여성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여사가 2살 아래인 고 김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남은 운명이었다.

한 언론은 이 여사 서울대 재학시절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다스(das)’였다고 한다. 

남녀공학에서 뿌리깊은 가부장제를 처음 마주한 그는 곧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몰두했다. 그리고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와 처우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이 여사는 '면학동지회'라는 학생단체 결성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단체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면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가 운명의 동반자인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곳이 1951년 바로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면우회 모임이다.

그는 피란지 부산에서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한 언론을 이렇게 보도했다. '그 해 대한여자청년단을 조직했고, 2년 뒤에는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한 ‘여성문제연구원’ 발족 실무를 도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여사가 처음 선거운동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박순천 캠프를 도운 그는 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누리며 외쳤다.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

서른 두 살, 이 여사는 만학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 스칼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공부한 영어는 두고두고 그의 자산이 됐다. 남편의 의정활동을 돕기 위해 영자지를 스크랩할 때도, 해외에서 온 격려편지에 답장을 쓸 때도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고 이희;호 여사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결혼 사진[사진=KBS켑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른 일곱의 엘리트 신여성 이희호는 여성운동가로서 자리매김의 기본을 갖춘 것이다' 

 당시 전란속에 지인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대면했던 이 여사는 10년 뒤 첫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을 우연히 다시 만나 1962년 운명적인 결혼을했다.
이 여사는 당시 DJ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시대 탄압에다, 계속된 출마와 낙선으로 빈털터리 정치적 낭인에 불과했으나, 가족과 주변의 만류에도 DJ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노모, 아픈 여동생을 거느린 정치 재수생이었다.  정치의 복도 없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민의원 선거에서 낙마했고, 58, 59, 60년 선거에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으나 사흘 만에 5ㆍ16 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랬으니 주변에서 그의 결혼을 말렸으나  이여사의 생각은 달랐다.

이 여사는 언론들의 인터뷰에서 DJ와의 결혼에 대해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소회한 바 있다.  그리고 실지 1987년 대선 때는 DJ를 위해 지지연설을 할정도 였다.

그는 1971년 DJ가 대통령후보가 됐을 때 NGO 활동을 멈추고 남편의 내조에 주력했다.

그해 전 박정희전 대통령이 공화당후보로 출마한 경쟁에서 DJ가 충청도 유세 때 여관도 빌려주지 않아 당시 대전의 고 남정섭 변호사의 대전 인동 집에서 1박2일 씩 머물며 충청시군을 다니며 유세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영부인 고 이희호여사 결혼식[사진=kbs켑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DJ가 진주교도소에 구금되자 이 여사는 진주와 서울에서 일주일씩 지내며 남편 곁을 지켰다. 면회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됐지만, 가족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힘든 투옥 생활을 하는 남편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겨울에도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남편이 영하의 감방에서 떨고 있는데 혼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각종 선거 때는 전국을 누비며 헌신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섰다.

이 여사는 이후 지난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47년간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를 살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미국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서 DJ의 정치 역정에 있어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였다 . 



이 여사는 청와대에 입성해 안주인이 된 뒤에는 여성과 아동 인권 신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된 데 대해 "이희호 여사의 역할이 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정상에 오른 뒤에도 이 여사의 시련은 계속됐다. '홍삼 트리오'라고 이름 붙여진 아들들의 비리 문제였다. 이 여사는 2002년 자신의 유일한 친자인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잇따라 구속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아야만 했다. 

이 여사는 당시를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시기라고 소회하곤 했다. 이 여사는 당시 "내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고,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때부터 급속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늘 공식석상에 남편과 함께 했다. 2007년 재보선과 2008년 18대 총선에서 전남 무안·신안 지역에 출마한 차남 홍업씨를 위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투혼'을 발휘하며 지원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이 여사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무한한 애정과 신뢰는 당연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동교동 자택 대문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쓰인 문패를 나란히 걸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에서 "문패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다. 이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적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다른 저서 '내가 사랑한 여성'에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바로 아내와의 헤어짐이 너무도 아쉽고 슬프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로 이 여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여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DJ가 서거할 때까지 37일간 병상을 지키면서 지극정성으로 DJ를 간병했고, 줄줄이 찾아온 문병객들을 항상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특히 투병 중인 DJ의 혈압이 떨어지자 한 땀 한 땀 손수 뜬 이른바 '눈물의 털 장갑·양말'을 남편의 손과 발에 끼워줘 주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여사는 지난 1970년대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부터 목도리와 장갑을 떠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47년간 함께 했던 DJ를 떠올리며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안겨 보내 이를 지켜본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DJ의 서거 이후 홀로 남았지만, 민주진영의 대모로서 당시 야권이 어려울 때 지원군으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진보진영이 분열할 때는 DJ의 유훈인 통합을 강조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얼어붙을 때는 "햇볕정책을 계속해야 한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여사는 생전에 2000년 6·15 남북정상 회담 때와 2011년 12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 2015년 8월 북한 어린이들에게 모자와 장갑 등 물품 전달 등 3차례의 방북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건강이 악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이 정권 교체에 성공했으나 이 여사의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면서 병원 신세를 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 여사의 몸이 야위고 활동이 줄면서 DJ의 가신그룹이던 동교동계가 흩어지는 아타까움도 봐야했다. 이 여사가 남편곁으로 가게되면서 '동교동 시대'도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