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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N뉴스

【sbn영상뉴스】애국지사 '고석주' 서천 판교면에 새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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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고석주. 다소 생소한 이름이실 텐데요.

일제강점기 초반 민족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입니다.

서천에서도 청년계몽운동에 힘쓰며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요.

고석주 선생의 생애를 안경달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기자]

1884년 지금의 논산시 가야곡면 강청리 부근에서 태어난 고석주 선생은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본격적
으로 민족 운동에 발을 디뎠습니다.

하와이 거주 당시 협성회와 국민회 같은 한인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고 자강회보, 신한민보 등 언론에도 종사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코리안 센트럴 스쿨’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강일화 / 판교교회 목사>   
“그쪽(하와이 지역)의 목회자들과 한인 단체들을 조직합니다. 대한자강회, 협성회, 그 다음에 국민회. 크게는 하와이에서 하신 것이 한인 단체를 만드시고, 언론에도 종사하시고, 교육자로서, 오실 때까지 교육자로서 그렇게 (활동)하시고.”

1916년 귀국 후 지금의 군산제일고교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9년 한강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군산 3.5 만세운동을 동료 교사들과 주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위반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1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출옥 후 고석주 선생은 6년여 간 전북 지역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1930년 이후 이곳 판교리로 넘어오면서 서천군과 연을 맺었습니다.”

판교에서도 판교교회 설립과 부흥에 앞장서고 야학과 청년회를 조직해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며 지역 계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어린 시절 고석주 선생을 만났던 이상림 할머니는 교회에 갈 때마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선생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일본 순사들에게 꼿꼿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유했던 큰 어른으로 지금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상림 / 보령시 미산면>
“내가 (교회)나가면 머리 쓰다듬고 ‘멀리서 온다’고 그냥 예뻐하셨고. 판교가 (당시에) 아주 질이 나빴어요. 건달들만 많아서... 나이 드신 장로님 그 건달들이 얼굴을 때리고 그래도 대항하시지 않고 그 사람들 다 받아주시고. 그래서 젊은이들이, 그 건달로 다니던 사람들도 (나중엔) 많이 예수를 믿고...”

1937년 판교리에서 타계한 후 선생의 무덤은 복내리 공동묘지 한 구석에 수십 년 동안 위치해 있었습니다.

3년 전부터 판교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고석주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자료를 수집하고 선생에 대한 연구를 거쳐 타계 80주년이 되던 작년에 보훈처를 통해 무덤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습니다.

올해는 선생이 작고한 7월 19일에 맞춰 공원을 조성하고 흉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구양완 / 고석주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장>
“이승만 박사하고 같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도 하고 그러셨다는 분이 판교 오셔가지고 야학도 개설하시고 판교교회도 설립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서 마을로 계속 이어졌던 것인데, 정체성이 필요하니까. 그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위원회는 추후 아직 자료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은 하와이 시절의 활동 자료들을 확보하고 군과 연계해 고석주 선생에 대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서 함께 했던 숨겨진 거인의 따뜻하면서 올곧은 마음은 8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서천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sbn 뉴스 안경달입니다.


촬영기자 / 김락중
영상편집 / 황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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