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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6.13의 의미와 진보와 보수의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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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지방선거는 유래 없는 여당의 압승과 야당의 파탄을 가져왔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당간의 겨룸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오랜 대결에서 보수 진영이 몰락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이 그만큼 진보로 돌아선 것일까? 일방적으로 쏠린 표심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보수는 자본가의 이익을, 진보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좌파와 우파가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때 국민공회에서 공화파는 왼쪽에 앉고 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급격한 혁신을 주장하면 좌파, 질서와 안정을 우선하면 우파라 한다.


우리나라의 좌파와 우파는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강하다. 해방 전후에 공산주의자를 좌익이라 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우익이라고 칭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가에 체 게바라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학습의 열풍이 불었고 점차 사회 세력화되자 이들을 좌파라 일컫기 시작했다.


이렇듯 우리의 보수와 진보에는 여러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진보는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며 안정보다 혁신을 추구한다. 보수는 기회의 균등이라는 관점에서 질서를 바탕으로 점진적 변화를 모색한다. 경제면에서 진보는 분배를 중시하여 기업에 엄격하고 무상복지에 적극적이다. 보수는 기업 활동에 의한 성장에 방점을 찍으며 선택적 복지를 선호한다. 보수는 북한에 비타협적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지향하는 반면에 진보는 북한과 공존하며 연방제에 의한 느슨한 통합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론은 이론에 불과하다. 정책면에서 안보 문제를 제외하면 진보나 보수나 거기서 거기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퇴직한 내 지인은 재벌을 욕하면서 노조에 대해서도 날을 세운다. 세금 먹는 하마라며 무상복지를 비판하면서도 복지혜택이 더 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남북의 평화 무드에 기대를 걸면서도 결국에는 김정은에게 돈만 퍼다 바치다가 뒤통수를 맞을 거라며 내기를 하자고도 한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정책은 양면성이 있고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는 20세기 초에는 진보의 논리였으나 이제는 모든 나라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남북문제도 요즘처럼 잘 진척되어 종전선언과 비핵화가 이루어진다면 보수가 정권을 잡더라도 반공을 국시로 삼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와 보수는 정치에 대한 입장보다는 개인의 성향이나 태도에 의해 더 쉽게 구별된다. 대체로 변화를 꺼리는 사람은 보수의 관점을 갖고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은 진보의 편에 선다. 가진 것이 큰 사람은 보수가 되고 가져야 할 것이 큰 사람은 진보를 택한다. 정치적 주장이란 이에 대한 반영일 뿐이다. 그러므로 6.13을 통해 우리 국민이 진보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은 섣부른 예단일 것이다.


6.13의 의미는 뚜렷해진 탈권위화 현상에서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에 잔존하는 권위주의가 각 분야에서 거듭 깨어지면서 노무현 정권에서 뿌려진 씨앗이 문재인 정권에서 꽃피고 있다. 검찰 개혁이나 미투 운동도 그런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6.13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국민의 선택이란 장치를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탈권위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탈권위가 지나쳐 경박함으로 비춰지기도 해서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계승한 문재인은 진정성있는 자세로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노무현이 투쟁적이었다면 문재인의 탈권위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세련되고 감성 넘치는 코드로 채워져 있다.


반면에 야당은 변화 자체를 거부했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가 아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일부 정치인들은 국민의 높아진 의식 수준을 절망하게 만드는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이른바 적을 만들고 공격해야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기회주의 방법론에 아직도 많은 정치인들이 물들어 있다. 그래서 반대를 앞세우며 막말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국민에 대한 대표성의 의문은 정부에도 있다. 진보 세력은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더하여 노조에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화,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3대 노동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있다. 우리 경제가 이를 견뎌낼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면 자영업자들은 사업을 접고 모두 근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묻지마 투표 바람에 도덕적으로 흠결이 심한 자까지 당선이 되었다. 이런 요소들이 선거 승리에 따른 의욕 과잉과 후계 구도와 맞물려 정책의 포퓰리즘을 불러올 수 있다. 승리한 자나 패배한 자나 진지하게 반성할 때이다.


낡은 패러다임과 눈앞의 성과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비전이 국민의 열망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뼈를 깎으며 되돌아볼 때이다. 이를 통해 야당은 반격의 기회를 찾아 보수하고 정부와 여당은 우리 사회의 분열과 불신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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